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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두봉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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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5-25 ㅣ No.666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 (1)


“사제는 누구든 원하고 필요로 할 때 함께하는 이”

 

 

- 봉 주교의 구술을 기록하는 시간. 그는 교구 사명선언문 ‘기쁘고 떳떳하게’ 액자 아래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후 “오늘도 하느님 앞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진 이소담 수습기자.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분과 대화하고 싶어 합니다. 갖가지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모든 대답의 끝에는 ‘감사’만이 남습니다.

 

“저는 너무나 자유롭습니다. 모든 게 다 좋습니다.”

 

그분의 해맑은 눈빛과 함박웃음에서도 자유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자유롭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밖엔 없는 분이시기에 불안하지 않고 자유롭다”고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이기에 다 좋다”고 합니다. 매일 몇 시간씩 하느님과 마주 앉아있습니다. 묵주기도도 하고 성무일도도 바치지만, 그저 침묵을 봉헌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늘 필요한 것을 주시는데 굳이 청할 것도 없고, 찬미 또한 그분이 주시는 은총으로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분 앞에서 무엇을 더 할까요?”

 

매 순간순간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삶. 그 삶을 온전히 채우고 있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는 그 감사의 기도를 양식 삼아 그분은 오늘도 하느님 앞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레나도·杜峰·René Dupont·93) 입니다.

 

‘사제가 아닌 모습?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시는 주교님. ‘사제가 된 걸 후회한 적?’ 그런 생각 자체를 떠올려본 적도 없다는 주교님.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두 번째 이야기는 두봉 주교님께서 풀어주셨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드릴 질문이 많았습니다. 주교님께서 대뜸 ‘한국 음식 중에 무엇을 좋아하는가’ 등의 질문은 수없이 받았는데 대답할 게 없다 하십니다. 그날그날 주어진 것을 감사히 맛있게 먹기에 뭐든 다 좋다고 하십니다. 만남의 시간은 그 맛있는 점심식사로 시작됐습니다. 주교님께선 서울에서 경북 의성군 봉양면 문화마을까지 이동하는 기자들을 배려해 12시 점심시간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평소 동네 아주머니께서 점심식사는 준비해주시고 청소 등을 도와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아주머니께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셨습니다. 그런 상황을 모르고 간 기자들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주방에선, 할아버지 주교님께서 손수 밥을 짓고 국을 데워 상을 차리고 계셨습니다. ‘식탁을 예쁘게 차리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과 함께.

 

본격적으로 주교님의 구술을 받으려는데 초인종이 울립니다. 누군지 살며시 문을 열고 빠끔히 얼굴을 들이밉니다. 주교님께선 최근 한 TV 종합편성채널 유명 예능 프로그램과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하셨습니다. 방송 이후 거의 매일 손님들이 온다고 합니다. ‘미리 약속하면 부담을 드릴까봐 그냥 왔다’고 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인근 안동에서부터 서울, 부산, 제주 전국 각지에서 왔지만 ‘계셔서 만나면 기쁘고 안 계시면 어쩔 수 없고’라고 ‘쿨~하게’ 말합니다. 그냥 한번 뵙고 싶었다고, 사진 한 장 찍고 싶다고, 건강하신 지 궁금했다면서 찾아옵니다.

 

주교님께선 “이 많은 사람들이 왜 나를 찾아올까”, 기자에게 반문하십니다. 절반 이상은 비신자이고 딱히 종교적인 주제로 대화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유명 프로그램의 영향력도 클 것이라는 말에, 주교님께서 설명을 덧붙이십니다. “모두들 자기 얘기 좀 들어달라고 합니다. 근사한 해결책이나 조언을 듣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얘기가 하고 싶은 겁니다.”

 

주교님께선 피정 지도나 강의 등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아니면, 언제든 누구에게든 문을 열어주십니다. 사실 그 집의 문은 24시간 열려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다과를 권하고 어떤 것도 먼저 묻지 않으십니다. “사제는 누구든 원할 때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라고 하십니다. 후배 사제들에게도 항상 ‘누구든 원하고 필요로 할 때 사제는 절대 거절하지 말고 늘 함께하고 들어주라’고 권하십니다.

 

두봉 주교님은 프랑스인이자 한국인입니다. 또한 봉양 두씨의 시조입니다. 1953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이듬해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왔고, 대전교구에서 사목하다 파리 외방 전교회 한국지부장도 역임했습니다. 1969년 초대 안동교구장이 되면서부터 50년도 훌쩍 넘게 안동교구민으로 살아온 시간, 신자들만을 위한 사목이 아니라 지역 주민 모두를 위한 사목을 펼쳤습니다. 후임 교구장 주교님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경기도 한 공소에서 지내다, 현 교구장 주교님의 간곡한 권유로 의성 문화마을에 집터를 잡았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이 지역에 신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저는 선교사고요.”

 

그분 집에는 ‘두봉 천주교회’라는 문패가 달려 있습니다. 이제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들어가보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5월 22일,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 (2)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느님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 두봉 주교가 자택인 ‘두봉 천주교회’ 거실에서 마을 교우들과 함께 봉헌할 미사를 준비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주님! 반갑습니다, 여러분.

 

예전부터 저를 ‘드봉’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았는데요. 유명한 화장품 이름이어서 기억하기 더 쉽거든요. 그런데 제 이름은 ‘두봉’(杜峰)입니다. 제 프랑스 성이 뒤퐁인데요, 선배 신부님께서 발음이 비슷하니 유명한 중국 시인 두보처럼 ‘두’씨로 이름을 지으면 어떻겠느냐고 권해주셨어요. 제 이름 한자를 풀이하면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란 뜻이 된답니다.

 

한국에도 두씨가 있긴 한데요, 저는 봉양 두씨의 시조입니다. 제 호적에 봉양 두씨라고 적었습니다. 저는 한국인이자 프랑스인입니다. 국적을 두 개 갖고 있어요. 2019년에 저에게 한국 국적을 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예외적이지요. 정부에서 ‘한국을 위해 특별히 공헌한 외국인’이라고 인정해서 줬다고 합니다. 프랑스 이름 뒤퐁은 ‘다리 옆에’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하느님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뜻인 것 같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 또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의성 문화마을에 있는 ‘두봉 천주교회’에서 삽니다. 제가 그렇게 문패를 달았습니다. 24시간 대문도 열어두고요. 이 지역엔 다른 성당이 없어서 제가 사는 집 거실을 성당처럼 사용하고 있거든요. 동네 교우들과 같이 미사도 봉헌하고. 너무 넓고 예쁜 집이어서 저에겐 과분합니다.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안동교구에서 지어준 것이기에 기꺼이 살고 있습니다. 매일 오전엔 집 앞 텃밭에 나가는데요. 제가 농부는 아니어서 대단한 걸 키우지는 못합니다만 꾸준히 밭을 일구고 각종 작물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두봉 천주교회’라는 문패가 걸린 집의 대문은 24시간 열려있다. 단순히 두봉 주교의 거주지를 넘어서 의성 문화마을의 공소 역할도 하는 곳이다.

 

 

저는 안동교구가 신설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는데요. 사실 정말 맡고 싶지 않은 소임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이끄심이었기에 순명해야 하니, 교구가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10년만 교구장직을 수행하겠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기간이 20년이 되었지요. 제 후임 교구장이 박석희(이냐시오) 주교님이었어요. 후임 주교님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저는 교구장직에서 물러나자마자 안동을 떠났고,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행주공소에서 꽤 오래 살았습니다. 그 당시 서울대교구장이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이셨는데요. 저와 자주 교류하고 친하게 지냈기에, 제가 추기경님께 안동에서 떠나면 머물 수 있는 작은 공소 같은 데를 좀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행주공소(당시 서울대교구, 현재 의정부교구 소속)였어요.

 

행주공소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래는 본당이었는데 6·25전쟁 후에 신자 수가 줄면서 공소가 됐다가 지금은 다시 본당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거기서도 교우들과 매일 미사를 드리고 피정 지도도 하며 아주 재미나게 친교를 나누며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박 주교님의 뒤를 이은 권혁주(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께서 고향으로 다시 오라고 간곡히 권해주셨고, 교구에서 땅을 사서 이렇게 집도 지어줬습니다. 우리 교구로 돌아올 때, 저는 경북 의성군 봉양면 쪽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었는데요.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이 지역에 성당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저는 선교사거든요.

 

신학생 시절, 저는 노동사목을 하는 사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의 이끄심은 저희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선 제가 선교사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셨던 것이죠. 제가 교구 신학생이었기에 원래는 교구에서 필요로 하는 사제 소임을 맡아 활동했을 텐데 말이죠.

 

언제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냐고요? 왜 사제가 되고 싶었냐고요? 기억을 더듬어봐도 사제가 된 특별한 이유 같은 건 떠올려본 적이 없는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느님 뜻에 따른 결과라고 할까요.

 

하느님을 깊이 믿게 된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매우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저희 남매들도 신앙 안에서 자랐습니다. 저희 집에선 7남매가 함께 컸는데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사촌동생 2명이 저희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5남매에서 7남매가 됐습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께선 매일 일하시느라 바쁘셨지만, 신앙생활은 그 누구보다 성실히 하시며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원으로서 평생 남을 돕는데 헌신하며 사셨습니다. 가난한 집안 상황에도 저는 가족 모두의 배려 덕분에 사제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만약 하느님께 칭찬을 받는다면, 가장 칭찬받을 일은 사제가 되고 사제로 살아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5월 29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 (3)


예수님께 반해 그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 대전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로 사목하던 중 세례식 후 영세자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두 번째 줄 가운데가 두봉 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저는 예수님에게 반한 사람입니다. 그분은 사랑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겐 사랑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특히 대신학교 입학을 앞둔 고등학생 시절, 종교철학 선생님께서 ‘예수님은 한마디로 사랑이시다. 예수님께선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분’이라고 하신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신부가 됐습니다. 더욱이 선교사제로 살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해주신 더욱 큰 은총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알게 됐을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던 그 해입니다. 저는 군복무 중이었는데, 어느 날 상관이 와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전쟁이 나서 프랑스도 파병(유엔군으로)을 하기로 했으니 자원할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신학생이었고 신부가 되겠다는 생각에 전쟁을 반대해왔고 자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한국(남한)을 구하기 위해 자원했고 한국 땅에서 전사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마음속에 새겨졌죠.

 

지난주에 제가 신학생 시절 노동사목을 하고 싶어 했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프랑스에는 평일엔 보통 사람들처럼 노동을 하고 주말에 사목을 나가는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신학교 학장 신부님께선 절대로 안 된다며 반대하셨습니다. 당시 사회주의 노동운동 등의 여파로 가톨릭 노동사목에 대해서도 오해를 하는 분위기가 영향을 끼쳤지요. 그런데 저는 군복무 시절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생도 만나게 됐습니다. 제대를 하고 학장 신부님을 다시 찾아가 해외선교에 관한 의견을 말씀드렸는데, 신부님께선 흔쾌히 찬성하시면서 교구장 주교님께도 말씀해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길이 열린 것이지요. 게다가 묘하게도 첫 발령지가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꿈에도 생각 못해본 일이었지만,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1953년 프랑스 오를레앙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있는 두봉 주교(맨 오른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953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10월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한국까지 가는데 두 달 반쯤 걸렸는데요. 다들 오랜 시간 배를 타면 힘들지 않았느냐고 하시는데, 저는 배를 타는 게 아주 좋았어요. 이집트, 스리랑카, 베트남, 중국, 홍콩, 일본…. 곳곳을 들러 가는 게 좋았죠. 그러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가는 배가 없는 거예요. 겨우겨우 화물선을 구해 타고 마산 등을 거쳐 인천항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2월 추운 겨울에 도착했거든요. 참 추웠는데, 보이는 집마다 부서져 있고 덮을 것도 입을 것도 별로 없었어요. 전쟁이 끝난 직후라 모두가 너무 가난했죠. 그런데 다들 마음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누구도 내 것이 부족하니 못주겠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고 쉽게 나누고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그런 모습을 저는 봤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은 ‘사람들이 참 따뜻하구나’였습니다. 외적인 모습은 ‘정말 가난하기 짝이 없는 나라’라는 것이었고요.

 

몇 달을 서울 용산에 자리한 파리외방전교회 거처에 있다가 대전교구로 가게 됐습니다. 당시 대전엔 대흥동과 목동, 2개 본당이 있었는데요. 저는 대흥동본당 오기선 신부님을 도와 사목을 하게 됐습니다. 다행히 제가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해도 미사를 집전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었어요. 그땐 라틴어로 미사를 봉헌했기 때문이죠.

 

오 신부님은 강론을 누구보다 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한국말을 잘 배울 수 있도록 도움도 많이 주셨는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강론을 하면 신부님께서 메모까지 하면서 들어주시고, 끝나면 곧바로 어떤 표현이 틀렸는지, 발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을 꼼꼼히 짚어주고 바르게 가르쳐 주시는 거였습니다. 점차 한국말이 늘면서 저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학생들도 지도할 수 있게 됐습니다. 신나게 사목을 하다 보니 10년을 보좌신부로 있었어요. 교구장 주교님께선 저에게 다른 본당을 맡기려고도 하셨지만, 대흥동본당에서 펼쳐놓은 사목이 많다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 신부님은 정말 고집이 센 분이기도 했거든요. 저는 본당 레지오마리애를 창설하고 싶었는데 신부님께선 계속 반대하셨어요. 그리곤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당시 본당에서 예비신자 교리반을 담당하던 어르신을 다시 성당에 모시고 온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르신은 원래 개신교 목사님이셨는데, 개종하시곤 누구보다 성실히 성당에 나오셨습니다. 하지만 한 번은 오 신부님께서 본인이 가르친 예비신자가 준비가 부족하다면서 세례성사를 거절하시자, 신부님께서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생각에 냉담을 하게 된 겁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6월 5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 (4)


저는 하느님 앞에 똑같이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 1969년 7월 25일 안동 상지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된 두봉 주교서품식과 초대 안동교구장 착좌식 후 한국 주교단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대전 대흥동본당 보좌로 사목했던 시절도 정말 신나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자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활동 중 하나로 저는 레지오마리애 활동을 계기로 또 한 번 하느님의 섭리를 경험했습니다.

 

당시 본당 주임이신 오기선 신부님께선 본당 레지오마리애 창설을 계속 반대하셨는데요, 냉담 중인 예비신자 교리반 지도 어르신을 다시 성당으로 모시고 온다면 적극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셨지요. 그런데 그 어르신은 마음의 문을 꼭꼭 닫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어르신 때문에 오 신부님께서도 ‘돌대가리’라고까지 하시면서 엄청 화를 내셨고요. 저와 쁘레시디움 단원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레지오마리애를 위해 준비를 이어왔지만, 어르신을 설득하는 일만큼은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방문이 있었던 주간 주일, 제가 성당 마당에 서 있는데 어르신께서 성당으로 불쑥 들어오시더니 ‘성사를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후 주임 신부님께서 레지오마리애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신 것은 말할 나위 없었고요. 제가 어르신께 물어봤습니다. 단원들이 방문했을 때에도 안 오신다고 완강하게 말씀하시더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어르신께선 ‘뭐 은총이지. 은총으로 마음이 그냥 탁 바뀌던 걸요’라고 답하시는 겁니다. 정말 신나는 체험이었습니다.

 

대전에서는 본당 사목만이 아니라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창립하고 지도하는 활동도 했었는데요. 6·25 전쟁 이후 모두가 가난한 상황에서 집을 나와 길거리를 헤매거나 땅을 파서 움집을 짓고 사는 아이들도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대전 선화동 다리 밑에도 그렇게 가출해 떠돌다가 모여 지내는 아이들 40여 명이 있었거든요.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 청년들과 그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돕고 그 부모들을 설득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활동했던 것도 참 뜻 깊었습니다. 먹을 것도 너무나 부족했던 시절이었지요. 본당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먹거리 문제 해결에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 용기가 난 것인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 당시 조치원읍에 땅을 구해 신자들과 논 개간사업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일은 말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땅을 일궈 수확의 기쁨을 맛봤던 경험은 잊기 어려울 듯합니다. 틈틈이 청년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시간도 좋은 추억이 됐고요. 또 MBC 라디오 ‘5분 명상’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요.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또 다른 통로로 저에겐 의미가 컸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인기도 많았어요. 가난하고 갖가지 어려움이 있어도 힘들다기 보다는 하느님 안에서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대전에선 교구 업무도 담당하며 하루하루 아주 재미있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1969년 7월 25일 두봉 주교가 착좌식 참가자들과 함께 안동 상지학교로 이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그렇게 만 12년을 조금 넘게 대전에서 사목하다 1967년 8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으로 선출됐어요. 지부장으로서의 소임에도 최선을 다해야 했기에 저는 대전을 떠나 전교회 지부가 옮겨간 서울로 이동했죠. 돌아보니, 결국 저는 본당 주임은 해보지 못하고 보좌로서 본당 사목 경험은 끝내야 했더라고요. 지부장으로 활동하던 기간 또한 2년이 채 되지 못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대구대교구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 복음화를 전담할 새로운 교구 설립을 모색했었는데요. 보편교회 또한 복음화를 위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당시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안동교구를 설립했습니다. 1969년이었습니다. 갑자기 주한교황대사관에서 저를 찾더니, 교황님께서 안동교구 첫 교구장으로 저를 임명하신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겁니다. 저는 ‘외국인 사제는 한국교회가 발전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제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래서 저는 새로 설립된 교구가 자리를 잡고 안정될 때까지 딱 10년만 교구장직을 맡겠다고 공언했죠. 이어 두 달쯤 후인 1969년 7월 저는 주교품을 받게 됐습니다.

 

아, 그런데 저는 주교 문장과 사목표어가 없습니다. 지금은 주교로 임명되면 당연히 정해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요, 제가 주교가 되던 시절엔 꼭 그렇지 않았어요.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예전엔 귀족들이 문장을 만들어 가졌거든요. 제가 교구장 주교일 때는 특별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사람이고 그런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과 똑같이 평범한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에 문장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목표어는요? 늘 하느님 뜻에 따라 가는 삶인데 별도의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굳이 언급을 하자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앞에서) ‘기쁘고 떳떳하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6월 12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 (5)


세상에 도움이 되는 ‘열린 교회’로 살아가고자

 

 

- 안동교구는 가난한 농촌교구였지만 ‘서로 나누고 섬기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교회’를 일구며 꾸준히 성장해왔다. 사진은 1987년 두봉 주교와 안동 동부동본당 주일학교 학생들이 환담하는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0년만 하겠다고 다짐했던 교구장직을 20년 넘게 맡게 됐죠. 새로 설립된 작은 교구의 교구장을 했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고생이 많았겠다’, ‘어려웠겠다’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뭐 그런 것도 아니거든요. 작은 교구니까 더 편한 것도 있었죠. 신경 써야 할 일이 더 적지 않습니까.(웃음)

 

안동교구 교구장을 맡고 나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구뿐 아니라 지역사회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전문대학도 만들게 됐죠. 교구장이 된 그해였는데요. 파리외방전교회 초청으로 그리스도의 교육수녀회 룩셈부르크관구에서 파견된 수녀님들은 일반 고등학교를 세워서 운영하길 원하셨는데요, 안동에는 이미 개신교회에서 운영하는 중고등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새로 생긴 전문학교 제도에 관해 수녀님들과 의논을 했고, 수녀님들은 학생들이 졸업 후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는데 도움이 되는 교과 과정을 만들어주셨죠. 상지여자실업고등전문학교로 처음 시작해 상지실업전문대학으로 개편된 지금의 가톨릭상지대학교입니다.

 

안동 문화회관을 설립한 것도 지역민들을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안동에는 시민들이 모이고 문화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큰 강당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화회관을 만들어서 주일에는 신자들을 위해 쓰고 평일에는 지역주민뿐 아니라 타종교인들도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운영했어요. 문화회관에선 음악회 등을 비롯해 특별히 영화상영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사실 그 문화회관을 짓는데 가장 반대했던 이들이 신부님들이었는데요. 결과적으로는, 힘겨웠지만 그렇게 씨앗을 뿌렸던 것은 매우 잘 한 것 같습니다. 이어서 학생회관도 만들었는데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또 생계를 위해 낮엔 일을 하는 아이들을 위한 야간학교 등을 여는 공간이었습니다. 저희 교구 관할에 가장 많이 사시는 분들이 바로 농민들이기에, 그들의 교육과 활동 등의 중심이 되는 농민회관도 만들었고요. 다미안의원은 한때 숫자가 꽤 많았지만 사회에서 소외되고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세운 병원이었습니다.

 

두봉 주교가 안동교구장 시절 설립한 안동문화회관 전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다른 지역도 아니고 유교, 유학의 뿌리가 여전히 강한 안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가톨릭교회가 성장한 것에 대해서도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데요. 안동 지역민들은 가톨릭신자가 아닌 이들도 대부분 교회에 대해 다들 좋게 생각해주십니다. 그래도 안동은 한국 유교문화의 본고장 아닙니까? 그런데 저희 교구는 유교 관계자들과도 잘 지냈어요.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었을까 지금 돌이켜봐도, 주님의 선하심과 배려로 마련해주신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군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다. 유한상(베드로) 전 안동문화원장님, 지난해에 돌아가셨는데요. 그분은 다들 ‘영남의 어른’, ‘안동의 문화 예술 민속의 전설’이라고들 불렀습니다. 명맥이 끊겼던 하회탈별신굿을 복원해 전승하시고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만드신 분이죠.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안동교구 설정과 발전에 헌신하셨을 뿐 아니라 안동문화회관 초대관장을 맡아 그 초석도 단단히 놓아주셨습니다. 가톨릭상지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외국인 수녀님들과 함께 터를 보러 다닐 때에도 원장님께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발로 뛰어다녀 주셨습니다. 가톨릭상지대학교 이사로도 수십 년간 재직하면서 헌신해주셨고요. 그분은 하느님을 알게 되면서 유교의 전통과 가치를 더욱 잘 지킬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교는 하느님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양심대로 바르게 사는, 참 인간답게 살자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도 통하는 가치이지요.

 

저희 교구는 사목의 여러 분야 중에서는 농민사목에 가장 노력했습니다. 대부분의 교구민들이 농민이었고, 농촌 지역 교구이고요. 그런데 1979년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태가 터졌습니다. 그 일로 저는 한국에서 추방당할 뻔 했습니다. 1978년 영양군이 농가소득에 좋다면서 감자재배를 권장했는데요, 불량종자를 배급한 겁니다. 농민들이 피해보상을 요구했지만 당국은 듣지 않다가 가톨릭농민회가 적극 나서고 교구 사제들이 피해 현장에 직접 가서 조사를 돕고 투쟁을 전개하면서 보상을 받았는데요. 그 활동에 앞장섰던 안동가톨릭농민회 오원춘 분회장이 납치, 폭행을 당한 겁니다. 저희 교구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실을 파헤쳤으며 그 실태를 알리는 문건도 배포하고 전국적인 기도회를 펼쳤습니다. 첫 기도회는 김수환 추기경님도 참례한 가운데 안동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열었고요. 농민운동 탄압 중지, 긴급조치·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하는 시위로 교구 신부님들이 여러 명 구속됐죠. 그리고 당시 유신정권은 항의를 이어간 저에게 추방 명령을 내린 겁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6월 19일, 정리 주정아 기자]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6 · 끝)


하느님 앞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

 

 

-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가 2003년 7월 1일 안동 가톨릭상지대 대강당에서 열린 사제수품 50주년 금경축 감사미사 중 신자들의 축하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교구장 주교는 교황님의 임명을 받아서 됩니다. 또한 한국은 바티칸과도 외교 관계를 맺고 있거든요. 그런데 당시 유신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정권이 일방적으로 추방명령을 내렸고, 이에 주한 교황대사님께선 당장 외무부 장관을 찾아가서 ‘어떻게 교황님이 임명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추방시키려 하느냐’고 항의하셨습니다.

 

그해 봄에 안동교구장이 된 지 10년이 되기에, 앞서 저는 교황님께 이제 한국인 주교가 교구장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고 요청 편지를 교황청에 보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이 납치당하고 고문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제가 교구장직 사표를 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방명령 소식을 들으시고 당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저를 부르시고 이어서 김수환 추기경님과 주교회의 의장을 맡고 있던 윤공희 대주교님도 로마로 오게 하셨어요. 교황님 집무실에서 교황님과 김 추기경님, 윤 대주교님, 그리고 제가 같이 대화를 했죠. 우리나라가 독재 정권 하에 있는 현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제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다는 뜻, 불의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교황님께서는 잘 이해해주시고 오히려 잘 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두봉 주교가 사표를 내면 안 된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라, 한국 정부가 정말 일방적으로 두봉 주교를 추방하면 나는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겠다’며 공개적으로 지지를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일어났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긴급조치를 해제해서 잡혀갔던 오원춘씨와 신부님 등 관련자들이 다 풀려나게 됐답니다.

 

그런 시간들을 뒤로 하고, 신임 교구장으로 박석희(이냐시오) 주교님께서 임명되시고, 저는 행주공소에서 꽤 오래 지내다 다시 의성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감사의 기도 말고는 할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가장 편안한 시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미사를 드립니다. 또 성무일도를 바치고 한 시간 이상 개인묵상에 들어가죠. 그저 침묵하는 시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알아서 다 주시는 분께 무엇인가를 더 달라고 할 것도 없고요. 찬양 또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걸로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느님 앞에서 침묵을 지키는 게 떳떳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녁에는 묵주기도도 봉헌하고…. 기도가 더 길어질 때도 있고, 손님이 오시거나 강연 혹은 피정지도 등이 있으면 더 짧아지기도 하죠.

 

저에게 버릇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어떤 사람이든 그 안에서 좋은 것만 보려고 노력한다는 건데요. 안 좋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다고 기도하고요. 예를 들어 감기에 걸린 것은 안 걸린 것보다 안 좋은 일이지만, 좀 아파보고 그러면 다른 아픈 사람들의 입장과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고통을 주실 때 아프지만, 그 고통이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시는 게 아닐까요? 아담의 죄가 없었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그 죄를 지었기에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고 느낄 수 있었지요.

 

좋은 것이나 잘 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원치 않은 일을 두고도 감사기도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일에 대해서든 안 좋은 일에 대해서든 우선 고맙습니다 하고 기도를 바치면 굉장히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끌어주시는 대로 받아들이다보면 좋은 방향으로 이뤄집니다. 하느님 뜻을 받들려면 지금 받들어야죠.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 그런 게 아닐까요.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고해성사를 보는데요, 특별한 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많은 경우 성령의 말씀을 그냥 스쳐 보내지 않았는지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기분대로만 행동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혹에 넘어갈 위험이 있습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대로 산다면 정말 자유롭습니다. 축복이죠.

 

사제는 ‘오늘을 사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말고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고요. 저는 지나간 것에 대해서도 앞날에 대해서도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바로 지금이거든요. 과거를 돌아보고 자꾸 후회해도 미래를 생각하며 자꾸 불안해한다 해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 내어맡기고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을 열심히 살아야죠. 고맙다고 하면서요. 하느님 앞에서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고 그것으로 너무나 만족합니다.

 

교구장으로 있을 때 우리 신부님들께 자주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자들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면 언제든 열린 마음으로 들어라. 신자들의 만남과 대화를 거절하지 말라’고요. 여러분, 오늘도 ‘두봉 천주교회’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6월 26일, 정리 주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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