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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오리게네스: 그리스도교 전통이 낳은 위대한 신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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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58

[교부들의 가르침] 오리게네스


그리스도교 전통이 낳은 위대한 신비가

 

 

오리게네스는 185년 알렉산드리아의 아주 열심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철저한 신앙 교육과 세속 교육을 받은 그는 플로티누스의 스승 암모니우스 사카스 문하에서 배우며 철학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소양을 쌓았다. 202년 부친이 순교로 생을 마감한 이후 생계를 위해 문법학교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두며, 당시 알렉산드리아 주교 데메트리우스에게 발탁되어 예비신자들의 교리 교육에도 헌신하게 된다.

 

이리하여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는 그의 명성으로 말미암아 크게 부흥하게 된다. 로마와 요르다니아, 팔레스티나의 체사레아 등을 두루 다니며 가르침을 펴기도 했는데(215~220), 바로 이것이 관할 주교 데메트리우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그가 아직 평신도라는 점을 들어 문제로 삼으려 하자 체사레아의 주교가 오리게네스를 사제로 서품하였다. 이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을 때 데메트리우스는 그의 사제직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파문과 함께 유배를 명한다. 이에 오리게네스는 체사레아로 피신하여 거기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 학교와 유사한 학교를 설립하고 설교와 성서 주석의 두 소임을 수행하였다. 250년 데치우스 황제 박해 때 붙잡혀 옥살이를 하며 모진 고문을 당하였는데, 결국 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이 위대한 인물이 어릴 적부터 키워오던 순교의 꿈은 사실 이루어진 셈이라 하겠다.

 

그는 고대에서 그리스도교 안팎을 막론하고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사후에 벌어진 소위 '오리게네스주의 논쟁'의 여파로 불행히도 많은 저술이 조직적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살아남은 그의 작품들 중 일부만이 그리스어로 전해오고, 많은 분량이 루피누스 등의 라틴어 번역본으로 전해져온다. 엄청난 분량의 저술은 철학과 신학, 영적 생활 등 그가 건드리지 않은 분야가 도무지 없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는 이 특별한 교부의 사상과 저술을 신학자, 신비가, 주석가의 세 면모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선 그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지식과 엄청난 창의력을 동시에 갖춘, 참으로 희귀한 역량의 대신학자였다. 특히 네 권으로 구성된 (1권은 하느님, 2권은 세상, 3권은 인간, 4권은 성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원리론"(De principiis)은 모든 면에 있어 토마스 데 아퀴노의 "신학대전"(Summa The ologiae)의 선구가 된다. 이 작품은 젊은 시절에 씌어진 것인데, 더러 지나치게 대담한 가설들이 있어 사후에 박해를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성서에 토대를 두고 '신앙 규칙'(regula fidei)에 충실했는지, 그의 저술들을 직접 읽으며 전체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애써 본 사람은 금방 알게 된다. 사실 그의 과감한 가설들은(예컨대 영혼 선재설) 교의적 주장(dogmatikos)의 성격을 지닌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말씀을 자기 시대의 언어로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신학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신학적 실험 내지 훈련(gymnastikos)의 성격을 띤다고 보아야 한다(H. 크루젤).

 

그러나 그는 창백한 지식인으로만 머문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저술 곳곳에서 드러나는 아찔한 영적 통찰력은 이미 깊은 하느님 체험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가 즐겨 사도 바울로의 표현을 빌어 말했듯이, 오직 영적인 사람만이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그는 한 평생 세상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신비를 성서 안에서 간파하며 마치 아가(雅歌)의 신부와도 같은 열망으로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숨은 현존을 찾아 다녔다. 그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변모(transfiguratio)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여정으로서 정화(淨化)와 조명(照明)과 일치(一致)의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다고 보았는데, 이후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은 사실에 있어서 이 도식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드 뤼박의 보증을 빌지 않더라도, 그를 그리스도교 전통이 낳은 위대한 신비가 중 하나로 보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뛰어난 신학자요 영적 스승으로서의 자기 삶의 토대를 무엇보다 성서와 그 해석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이 교부의 세 번째 면모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주석가라는 데 있다. 더러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으로 비판을 면치 못하기도 하지만, 사실 오리게네스는 고대 교회에서 어느 누구보다 역사-문헌 비평적 감각으로 충만한 주석가였다. 무엇보다 먼저 본문의 회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에, 구약성서에 대한 최초의 본문비평이라고 할 수 있는 '헥사플라'같은 놀라운 작업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문의 '문자' 혹은 역사적 의미의 수준에만 머물지 않고 즉시 그 너머로 나아가 영적인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 구약 성서의 표상은 모두 그리스도와 그분의 파스카 사건에 적용시켜 이해해야 할 예언 혹은 예형임을 깨달아야 하는 반면, 신약 성서의 경우 그리스도께 대해 기록된 모든 것은 신앙인 개개인에게 적용되어야 하며 나아가 장차 다가올 세상의 예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통찰에 토대를 두고 나온 것이 유명한 '성서의 삼중(혹은 사중) 의미'(자구적, 윤리적, 영적 의미)이다.

 

오리게네스는 신학과 영성, 성서 주석, 수도 생활 등 교회 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물밑'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교부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데 아퀴노와 함께 교회가 얻은 가장 위대한 스승(폰 발타살)인 오리게네스의 사상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있는 이해는 오늘날 우리 교회 생활 면면의 성숙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하겠다.

 

[가톨릭신문, 2003년 4월 6일, 이연학 신부(고성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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