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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성 베네딕도 수도회 출신 순교자 연구: 시복시성 대상 인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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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8 ㅣ No.691

[특집 2009년도 심포지엄]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와 문화 활동


한국 성 베네딕도 수도회 출신 순교자 연구 - 시복 · 시성 대상 인물 분석

 

 

1. 머리말 

2. 성 베네딕도회의 시복시성 추진
3. 시복시성 대상자 인물 분석
4. 맺는말


1. 머리말

순교란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행동”,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하는 일”을 의미한다. 즉 생명의 포기를 통한 신앙의 증거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순교는 엄밀히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실제로 죽음을 당해야 하고,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에 의해 초래되어야 하며, 그 죽음을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1)

유구한 가톨릭교회의 역사 안에서 225년이란 길지 않은 연륜의 한국 천주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위대한 순교자를 내었다. 그들 중 103위가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고,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와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시성 재판이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20세기 이전, 18 · 19세기 조선왕조시대의 순교자들로서 20세기 순교자는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2007년 5월 10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20세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諡福諡聖) 추진 교령을 반포하였다. 성 베네딕도회가 관할하는 덕원 자치 수도원구 · 함흥교구 소속 수도자로서 1949년부터 1952년 사이에 순교한 36명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 교령인 것이다. 이는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125년 역사에 있어서 처음 있는 중요하고 뜻깊은 일이며, 한국 교회 차원에서도 20세기 순교자들에 대한 첫 시도다.

성 베네딕도회의 이 교령과 시도가 한국 교회의 주목과 성원을 받는 것은 이를 시발점으로 향후 20세기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과 시복시성 의지가 전 교구로 확산되리라는 점 때문이다. 성 베네딕도회의 36위 순교자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의 모든 준비와 진행과정은 한국의 교구, 수도회, 선교회에 참고하고 도움을 주는 모델이 될 것이며, 선도자로서의 모범적 역할도 수행해야 할 것이다. 본 논문 역시 이 같은 성 베네딕도회의 중요한 역할을 바라지하는 작은 연구이다.

본고에서는 우선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시복시성 추진과정을 알아본 후, 수도자들이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살펴보고, 36위 순교자의 약전(略傳)을 정리함으로써 시복시성 대상 인물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2. 성 베네딕도회의 시복시성 추진

1) 결의 과정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20세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년 1996 9월 18일 교황청이 마련한 “우리 시대의 최근년까지 신앙에 대한 배척 때문에 피를 흘린 모든 이를 미래에도 기억하자”는 〈순교자에 대한 성찰과 지침〉이 계기가 되었다.

이 성찰과 지침은 1950년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공산당 정권에 의해 많은 희생자를 냈던 한국 천주교회도 크게 환영하여 1997년 가을 주교회의에서 20세기 순교자들의 순교록 작성을 위한 조사 작업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99년 12월 10일 한국 주교회의는 215명의 새 순교자 명단을 확정하였고 그 후 추가로 8명을 더해 총 223명의 〈한국교회 20세기 순교록〉을 교황청에 제출하였다. 이 순교록에 포함된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총 37명으로 덕원 수도원, 연길 수도원, 보이론 수도원, 원산 수녀원 소속을 망라하였다.

2000년 5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 세계에서 조사된 총 12,692명의 순교자들을 20세기 신앙의 증인으로 선포하였다.

드디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이형우 아빠스는 2007년 5월 10일 공동체 미사 중 성 오딜리아 연합회 총재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가 임석한 가운데 시복시성 추진 교령을 반포하였다.2) 2007년 2월 개최된 성 오딜리아 연합회 평의회의 권고와, 2007년 봄 총회 때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격려로 6 · 25 한국 전쟁을 전후한 1949~1952년 사이에 순교하거나 생사를 알 수 없는 성 베네딕도회 소속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절차를 밟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이형우 아빠스는 교령에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와 성 쁠라치도 아빠스좌 수도원 공동체는 우리 선배들이 보여 준 신앙의 증거를 기리려는 살아 숨 쉬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본 수도원은 북한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교구 소속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949년에서 1952년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적개심으로 죽임을 당한 신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소송의 청구인이 되었음을 선포한다”고 하였다.3) 이 교령으로 왜관 수도원은 36위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청구인이 되었다. 


또한 동시에 이형우 아빠스는 시성성(諡聖省)과 교구청에 대한 청원인으로 로마 성 안셀모 대학 교수인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속 에두아르도 로페즈 텔로 가르시아(Eduardo Lopez-Tello Garcia) 신부를 임명하였다.4) 부청원인으로는 한국 측 이성근(사바) 신부, 독일 측 빌리브로드 드리버(Willibrord Driever) 신부를 지명하였다. 청원인은 청구인을 대리해 모든 법적 절차를 밟으며 시복시성 안건을 진행시킨다. 두 명의 부청원인 중 독일 측 부청원인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지역에서 자료 수집 및 조사를 진행하고, 한국 측 부청원인은 한국에서 같은 일들을 맡아 처리한다.

2) 시복시성 대상자 선정 과정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는 〈한국교회 20세기 순교록〉에 오른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 37명 중에서 1949년부터 195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으며, 덕행의 실천에 탁월했고, 또한 이 두 사실에 대한 목격자 혹은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경우를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선정 작업에는 왜관 수도원 이형우 아빠스와 참사위원들,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를 비롯한 수도원 내 관계자들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 역사 고문인 요한네스 마르 박사가 참여하였다.

그 결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확정한 시복시성 대상자는 총 36명으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비롯한 덕원 수도원 소속 성직수사 및 평수사 26명, 연길 수도원 소속 성직수사 1명, 보이론 수도원 소속 성직수사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3명 및 헌신자 1명, 함흥교구 소속 사제 4명이다.5) 이 중 한국인은 11명, 나머지 25명은 독일인이다.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와 관련하여 한 가지 유감된 것은 1949년부터 1952년 사이의 순교자로 한정함으로 인해 공산주의 종교탄압 정책으로 1945년 8월 22일 소련군에 의해 총살당해 성 베네딕도회 첫 희생자가 된 회령 본당 비트마르 파렌코프(Witmarus Farrenkopf, 朴偉明) 신부가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1950년 10월 황해도 해주 본당에서 피랍된 덕원 신학교 출신 최초의 사제인 한윤승(필립포) 신부와, 1950년 6월 24일 황해도 장련 본당에서 피랍된 신윤철 신부도 연길교구 소속 사제로서 공산당에 의해 납치 후 순교하였음이 확실한데 시복시성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3) 교령 반포 이후의 후속절차와 진행 과정6)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장 이형우 아빠스는 시성 절차법 〈주교들이 행할 예비심사에서 지킬 규칙〉에 따라 2007년 5월 10일 반포된 교령으로 ‘하느님의 종 신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6위에 대한 시복 ‘청구인’이 된다.

문제는 시성 절차법에 따라 시성안건을 예비하는 관할 주교, 즉 시복 ‘청원인’은 순교자 사망 지역의 주교라는 점이다. 이 규칙에 따르면 왜관 수도원이 선정한 36명의 시복 대상자 중 33명은 평양교구 관할에서 순교했기 때문에 시복 관할 주교는 평양교구장 서리인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2명은 함흥교구장 서리인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가, 나머지 1명은 덕원 자치 수도원구장 서리인 왜관 수도원 이형우 아빠스가 시복 청원인이 된다. 따라서 성 베네딕도회 소속 순교자 36위 청구인인 동시에 청원인인 이형우 아빠스는 시성 절차법상 평양교구와 함흥교구 관할 주교들의 문서상 동의와 ‘장애 없음’(Nihil Obstat)을 얻어야 한다.

또한 덕원 자치 수도원구는 교구청이 없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시복법정을 구성하고 예비심사를 진행시킬 능력이 없다. 따라서 다른 교구에서 예비심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시성성에 ‘예비심사 관할권 이전’을 요청해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해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우선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들이 모두 덕원 수도원을 매개로 묶여 있기 때문에 단일소송으로 통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해 덕원 자치 수도원구장인 이형우 아빠스가 다른 관할, 즉 평양교구와 함흥교구 주교의 동의와 ‘장애 없음’을 얻어야 하는데, 이미 두 교구장의 동의와 ‘장애 없음’을 얻었다,

시복법정 구성과 예비심사 진행을 위해서는 시성성에 단일 소송 통합승인 요청과, 아울러 이 사안에 호의를 가진 다른 교구에서 예비심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예비심사 관할 이전을 요청할 계획이다. 2009년 현재,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이 이 사안에 대한 예비심사를 서울대교구에서 담당하겠다고 구두로 동의하여 예비심사는 서울대교구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이러한 법적 조치가 이루어지는 동안 청원인과 부청원인들은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들의 순교사실 확인 및 성덕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고 청원서 제출을 준비한다. 청원인은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에 대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전기(傳記)나, 전기가 없으면 생애와 행적, 덕행이나 순교, 성덕과 징표에 대해 시대순으로 정리한 정확한 보고서와 그가 출판한 모든 저작물의 사본과, 위의 사실들을 증언하거니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청원서와 함께 제출한다.

시성성에서 답서가 오고 청원인이 청원서를 제출하면 예비심사 관할권을 이전받은 서울대교구장은 안건을 공포하고 예비심사를 준비시킨다. 준비가 완결되면 예비심사 착수 교령이 반포되고, 예비심사를 처리하는 시복재판 법정이 개정되며, 법률적 절차에 따라 예비심사가 시작되고 진행될 것이다.


3. 시복시성 대상자 인물 분석

1) 순교 경위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36년간의 일본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자 미국과 소련 양군이 진주하였다. 먼저 진주한 것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소련군이었다. 소련은 일본의 패망이 거의 확실해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소국경을 넘어오더니, 일본 항복 후에도 계속 진군하여 평양, 함흥 등 북한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분할 점령한 북한 지역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1946년 2월 9일 소련은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를 조직하고 공산주의 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소 군정하의 북한에서 임시정부와 같은 구실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1946년 3월 5일 북조선 토지개혁령, 1946년 8월 10일에는 중요산업국유화법령을 위시한 여러 가지 정책으로 공산주의 정치 체제를 굳게 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48년 9월 9일에는 드디어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이 수립되었다.

여순반란(麗順叛亂) 등 무력봉기로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1950년 6월 25일에 불법적 남침을 감행하였다.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는 국군은 부득불 낙동강을 저항선으로 하는 지점까지 후퇴했으나,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었다. 9월 30일에는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하였으며, 동해안으로는 청진(淸津)까지, 중부에서는 초산(楚山) 및 혜산진(惠山鎭)의 압록강까지, 서부에서는 선천(宣川)까지 도달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한때 한강 이남까지 후퇴하였다. 그러나 공산군은 막대한 손해를 입고 이북으로 다시 물러났으며, 이즈음 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고,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유엔 측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었다.7)

1945년 해방 당시 북한의 종교는 천주교를 위시하여 불교, 천도교, 개신교 등의 교세가 상당하였다. 그러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와 상반된 입장에 있는 종교계가 반공세력의 중추가 될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북한의 공산화 정책에 종교탄압정책도 포함될 수밖에 없었으며, 탄압은 이미 소련군 진주 때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첫째, 모든 주민은 6세부터 종교를 밝혀야 하고, 그 내용은 신분증명서에 명기되었다. 그 후 종교인은 차별대우를 받고,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공직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둘째, 특히 선교사는 스파이에 포함되었고, 신자들은 직장에서 엄한 감시를 받았다. 셋째, ‘사상 교양 사업’으로 특히 학교와 공장에서 유물론을 가르치며 반종교적 선전을 일삼고, 일부러 주일을 택해 회의나 강습회 등을 개최하였다.

그 후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통일전선을 내세워 1946년 11월 28일, ‘북조선 기독교도 연맹’이라는 어용 종교단체를 결성하여 기존의 종교단체에 대한 감시와 회유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으로는 종교단체 소유의 토지, 재산 등을 몰수하고, 신자들로부터 금품요구와 수수 등을 일체 금지하고 집회나 종교의식을 방해하였다.

1948년 9월,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자 ‘청산’(淸算)의 기치를 내걸고 새로운 형태의 직접적 종교 탄압을 시작하였다. 주로 성직자에 대한 구금, 투옥, 살상 및 종교계 재산의 몰수, 파괴 등을 자행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종교 자체를 말살하고 기존의 모든 종교를 북한에서 뿌리 뽑으려는 목적이었다.8) 바로 이 시기에 덕원 자치 수도원구 · 함흥교구를 맡고 있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순교한 것이다.9)

순교자들의 순교 경위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순교하기까지의 과정과 정황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이에 시기별로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체포에서 평양 인민 교화소 투옥까지, 1949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인민 교화소 감금 시기, 다음 1949년부터 1954년까지 강제 수용소 시기로 나누어 그 대체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체포에서 평양 인민 교화소 투옥까지(1949~1950)

① 덕원 수도원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은 북한 최대 수도원으로서 독일인과 한국인 수도자 1백여 명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함경도 지역 천주교 총본산이었다. 함경도 전역에 본당, 수녀원 본원 및 분원, 초등 교육기관 등을 보유하였고, 덕원 수도원 자체도 440헥타르의 대토지를 소유하고 그 안에 신학교, 인쇄소, 양조장, 정미소, 농장 등을 운영하며 자급자족하였다.10)

덕원 수도원이 받은 첫 번째 타격은 1946년 3월에 시행된 토지개혁령이었다. 이 개혁조치로 덕원 수도원은 소유 토지 대부분을 몰수당했다. 단지 5헥타르의 정원과 경작 중인 땅만이 남았는데, 이는 여느 농가의 몫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11) 이로써 덕원 수도원은 1백 명이 넘는 수도원 식구의 자립을 위한 경제적 토대를 완전히 잃고 생계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다음은 1948년 12월 1일 수도원의 경리 책임자 당가 다고베르트(Enk, Dagobert, 嚴光豪) 신부가 포도주 불법 제조 및 탈세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해 봄, 농업조합이 수도원에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 것을 시행한 것인데 그 후 수도원을 밀주와 탈세로 무고하며 구실로 삼은 것이었다.

이어 1949년 4월 28일 인쇄소 책임자 루도비꼬(Fischer, Ludwig, 裵) 수사가 불온 문서 인쇄 혐의로 체포되었다. 인쇄소에서 반(反)공산주의 삐라와 비밀조직의 명단이 인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당시 인쇄 기사였던 이호필과 한국인 청원 수사 전 미카엘, 수사 학생 레이몬드가 반공산주의 극우파 청년단체인 서북청년단원에게 인쇄를 부탁받고 장상의 허락 없이 비밀리에 인쇄를 해 준 일이 있었다.12)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비롯하여 모든 수도자들이 체포된 것은 1949년 5월 9일과 5월 11일 밤이었다. 5월 8일 밤 10시에서 11시경에 수십 명 정치보위부원을 실은 트럭이 들이닥쳐 사우어(Sauer, Bonifatius, 辛上院) 주교 아빠스, 루치오(Roth, Lucius, 洪泰華) 원장 신부, 아르눌프(Schleicher, Arnulf, 安世明) 부원장 신부, 신학교 철학교수 루페르트(Klingseis, Rupert, 吉世東) 신부 등 4명을 체포하였다. 4명의 신부는 원산 감호소에 사흘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추가로 체포된 덕원 수도원과 기타 지역에서 끌려온 베네딕도회 수도자, 수녀들과 함께 5월 13일 열차 편으로 북한 수도 평양의 평양 인민 교화소(平壤人民敎化所)로 이송, 구금되었다.

5월 8일 밤부터 남은 경찰들은 수도원과 신학교의 모든 출입구를 장악하고 모든 사람들이 수도원 안에만 머물도록 했다. 부속 건물도 경찰이 장악하고, 수도원 봉쇄구역은 개방된 채로 있게 되었다.

1949년5월 11일밤 11시, 정치보위부원들은 신학교 교장 안젤모(Romer, Anselmus, 盧炳朝) 신부를 비롯한 독일인 성직수사 8명과 평수사 22명, 김치호 · 김종수 · 김이식 · 최병권 등 한국인 신부 4명 등 총 34명을 체포하였다. 그들은 원산역으로 압송되어 사우어 주교 아빠스 등과 함께 열차편으로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 구금되었다.13)

체포당한 수도자를 제외한 덕원 수도원의 한국인 평수사 26명과 신학생 73명을 합친 99명은 5월 14일, 정치보위부원들에 의해 수도원에서 내쫒기고 수도원과 신학교는 몰수당했다. 수도원에서 추방된 신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연고지를 찾아가야만 했다.

② 덕원 외 지역 성 베네딕도 수도회 회원

원산, 고원, 고산, 영흥, 흥남, 함흥 본당에서도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었다. 원산에서는 5월 11일 밤에 원산 본당 파비안 담(Fabianus Damm, 卓世榮) 신부, 원산 수녀원 지도 신부 갈리스투스 히머(Callistus Hiemer, 任竭忠) 신부, 원산 본당 보좌 플라치두스 노이기르그(Placidus Neugirg, 兪順和) 신부, 파스칼 팡가우어(Fangauer, Paschalis) 수사와 함께, 회령과 계림 두 본당 사제인데 원산의 한국인 수녀들 피정을 베풀기 위해 원산에 와 있던 구대준 신부도 체포되었다. 동시에 고산 본당의 쿠니베르트(Ott, Kunibert, 吳) 신부와 까누트(Canutus d’Avernas, 羅國宰) 신부, 고원 본당의 요셉 쨍글라인(Joseph Zenglein, 宋萬協) 신부, 영흥 본당의 그레고리오 스테거(Steger, Gregor, 全五範) 신부가 체포되어 덕원 수도원의 모든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5월 13일 오전 8시 평양행 객차에 실렸다.

한편 함흥 본당의 엘리기우스 콜러(Eligius Kohler, 景道範) 신부는 1949년 5월 14일 밤 10시에 정치국 경찰간부 여섯 명에게 체포되었다. 경찰서에서 천주교와 선교활동, 공산당 행사에 불참한 것, 공산주의 이념에 맞게 주민들을 교육시키지 않은 사실 등을 윽박지르며 심문받은 후, 역시 체포된 흥남 본당의 게롤드(Gerold Fisher, 魚) 신부와 함께 5월 16일 저녁 야간열차로 밤새 이송되어 5월 17일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14)

이리하여 1950년 한국 전쟁 발발까지 약 1년 1개월여 동안 함흥 · 덕원교구 지역 신자들을 돌본 사제는 청진 본당의 이재철 신부와 강원도 이천의 김봉식 신부 두 명뿐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제 역시 한국 전쟁 발발 즉시 체포되어 피살당하고 말았다.

1950년 6월 24일, 한국 전쟁 발발 전날, 공산 정권은 북한에 남아 사목하던 사제들을 강제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김봉식 신부는 6월 24일 밤 원산에서, 이재철 신부는 6월 25일 새벽 2시 30분경 청진에서 각각 체포되었다. 그 후 유엔군의 진격으로 패주하던 공산당이 400여 명의 인사들을 원산 와우동 형무소 뒷산 대방공호 속에서 학살하고 시신을 방치했을 때 김봉식 신부도 함께 피살되었다. 이에 신자들이 시신을 찾아 수습하여 원산 본당 뒷산 본당묘지에 장례 지냈다. 이재철 신부는 1950년 10월 초, 청진항 등대에서 80여 명의 종교인들이 총살될 때 함께 피살되었다.

평양교구에 가 있던 이춘근 신부는 6월 25일 12시경 평양에서 체포되었는데, 역시 유엔군의 진격으로 후퇴하던 북한군에 의해 10월 5일 평양에서 총살당했다고 추정된다.

③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 원산 본원

1945년 해방 이듬해에 두 명의 일본인 수녀가 귀국하고 난 후 원산 수녀원에는 20명의 서양인 수녀와 25명의 한국인 수녀가 있었다.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원들이 수녀원에 찾아와 겔트루드(Gertrud Link, 林仁順) 원장, 프룩투오사(Gerstmayer, Fructuosa) · 에바(Schutz, Eva) · 암브로시아(Ambrosia Engler, 王順哲)를 위시한 서양인 수녀 12명을 체포하여, 5월 13일 오전 8시 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과 함께 열차로 평양 인민 교화소에 압송, 구금하였다.

임 마리아 · 박 아가다 등 한국인 수녀 18명은 서양 수녀들과 분리하여 원산 임시 교화소(元山臨時敎化所)로 끌고 갔다. 그 중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킨 박 골롬바 부원장 수녀와 간호를 맡은 최 리오바 수녀는 원산 분원에 남았다. 원산 임시 교화소의 한국인 수녀들은 5월 16일에 풀려나 일단 본원으로 귀원하였으나 곧 평복 차림으로 수녀원을 떠나 연고지로 떠날 것을 명령받았다.

④ 원산 본원 외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 회원

함흥 분원에는 분원장 베르트비나(Bertwina Caesar, 蔡仁淑) 수녀를 비롯하여 의사 디오메데스(Diomedes Meffert), 간호원 에나타(Enatha Metzger), 왈부르그(Walburg Welte), 셀바(Serva Spitzlei) 등 5명의 서양인 수녀와 이 엘리사벳 수녀와 헌신자 장 악네따 등 2명의 한국인 수녀가 있었다. 체포 당시, 헌신자 장 악네따 수녀는 한국인 수녀 피정 참가 차 원산 본원에 가 있었다.

탄압의 첫 신호탄으로 1949년 5월 12일 디오메데스 수녀가 원산 검찰청 출두 명령을 받고 원산 수녀원으로 먼저 들렸다가 5월 13일 원산 교화소에 감금되어 6월 28일까지 갇혔다. 그 후 4일간 일반인 감옥으로 송치되었다가 7월 2일 평양 인민 교화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동료 수녀들을 재회할 수 있었다.

디오메데스 수녀를 이미 원산 교화소에 투옥시킨 후, 5월 14일 밤 11시경에 들이닥친 정치보위부원들은 베르트비나 수녀를 비롯한 4명의 독일인 수녀를 체포하여 함흥 임시 교화소로 압송하고, 다음날 새벽에는 이 엘리사벳 수녀마저 압송하였다. 그들은 덕원과의 관계, 신자들과의 관계, 바티칸과의 관계에 대해 캐묻고, 수녀들이 바티칸으로 보내는 암호발신기를 사제관 지하실에 숨겨두고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씌워 5월 21일 함흥 감옥에 격리 수감했다. 약 50일 후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하여 5월 13일부터 구금되어 있던 원산의 동료 수녀들과 합류시켰다.

원산에 가 있던 헌신자 장 악네따 수녀는 원산 본원의 한국인 수녀들과 함께 체포되어 원산 교화소에 구금되었다가 일주일 후 수녀원으로 돌려보내졌으나 일반인 복장으로 각자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 후 1950년 6월 25일 함흥에서 체포되어 피살당했다.

신고산 분원에서는 1949년 5월 11일 새벽 2시경에 정치보위부원들이 수녀원을 에워싸고 수녀들을 체포하였다. 당시 분원에는 3명의 서양인 수녀와 4명의 한국인 수녀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때 수녀원에 있었던 한국인 장 멕텔디스 수녀는 원산 임시 교화소로 압송되었고, 서양인 수녀 3명은 같은 날 체포된 수도자들과 함께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 구금되었다.

이로써 1920년 원산교구를 설립한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과 1925년 한국에 진출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은 헌신적으로 북한지역에서 선교하였으나 이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다.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체포,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 투옥 감금되던 당시 상황을 원산 본당 파비안 담 신부는 아래와 같이 생생하게 증언하였다.

“5월 11일 … 나는 10시 정각에 잠자리에 들었다. … 한 시간 정도 깨어 있었는지 모르겠다. … 순간 성당의 종이 미친 듯이 울려댔다. … 여섯 명의 사복 요원이 아래에 서 있었다. … 나는 나의 동지들을 깨웠다. 그들은 갈리스투스 신부와 플라치두스 신부, 그리고 파스칼 수사였다. … 차를 타고 지나면서 나는 아직도 불빛이 환한 수녀원의 창문과 병원차가 길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수녀들에게도 “잠시 물어볼 게”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탄 자동차는 경찰서 앞에 서지 않고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달려 기차역 뒤편의 두 선로 구간 사이에서 멈추었다. 몇 발자국 걸어가서 우리는 정차해 있는 열차 앞에 섰다. 열차의 창문은 모두 하얗게 가려져 있었다. 권총을 든 요원이 “타라!”고 말했다. 올라타고 보니 덕원의 우리 동료 수사들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반시간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20분 후에 문이 다시 열렸다. 하얀 베일을 쓴 사람들이 들어왔다. 우리 수녀들이었다. … 그날 밤, 문들이 여러 번 열리고 닫혔다. 내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은 구 가브리엘 신부였다. … 제법 시간이 흐른 후 보니파시우스 주교 - 아빠스와 루치우스 원장신부, 아르눌프 부원장 신부, 루페르트 신부가 왔다. 그들은 벌써 사흘 전에 “조사”차 경찰에 붙들려온 터였다. 다고베르트 신부의 소위 “조사”는 벌써 5개월간이나 계속된 상태였다. 이어서 고산의 쿠니베르트 신부와 가누트 신부가 들어서고, 고원의 요셉 신부가 교리교사와 함께 들어오고, 영흥의 그레고리오 신부가 한 가톨릭 신자 교사와 교리교사 마리아와 함께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 8시 정각에 우리가 탄 객차가 연결되고, 열차는 출발했다. 그 객차는 열차의 맨 끝 차량으로 창문들은 모두 가려졌다.”15)

(2) 평양 인민 교화소16) 시기(1949~1950)

1949년 5월 13일 아침 8시에 원산역을 떠난 열차는 저녁 8시에 평양에 도착하여, 그들은 포장으로 가려진 트럭에 태워져 험한 길을 달려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었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루페르트 신부는 각각 독방에 수감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엄한 등록 과정을 거친 후, 작은 방에 공동 수용되었다. 이때 평양 인민 교화소에 체포, 투옥된 외국인 신부, 수사, 수녀들은 총 67명이었다.

남자 감방은 8평방미터 크기였는데 18명씩 가두었다. 감방 안에는 나무뚜껑을 덮은 용변용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그 뚜껑 위에도 앉거나 잠을 자야 할 정도로 절대 공간이 비좁았다. 등을 대고 눕기에도 자리가 모자라 모두들 모로 누워 자야만 했다.

하루 세 끼 식사가 제공되었는데 밥과 국 240그램이었다. 수감 후반부에는 수감자들이 모두 너무 허기졌기 때문에 배식량이 400그램으로 늘었다. 밥은 수수와 콩을 섞어 찐 것이었고, 국은 감자껍질 혹은 무 조각이나 야채 잎이 몇 조각 떠 있는 소금국이었다. 마실 물은 감방마다 서너 국자씩만 공급받았다. 18명 전원이 골고루 마실 수 있도록 정확히 나누어야 했는데 늘 갈증에 시달렸다.

또한 들끓는 엄청나게 많은 이로 괴로움을 당해서 날마다 적어도 한 시간씩 이를 잡았다.

수감 중 단 두 번 바깥 복도에서 찬물로 온몸을 씻고 땀에 전 내의를 빨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설사로 시달렸다. 본래 결핵을 앓고 있던 최병권 신부는 병이 악화되어 “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 죽은 것도 아닌 비참한 상태”17)였고, 김치호 신부는 폐렴으로 숨을 쉬지 못하는 지경에 처해 있었으나 수차례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플라치두스 신부는 목에 농양이 생기고, 빌리발트 신부는 안면 단독(丹毒)에 걸렸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천식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이 안에서 성직자들은 거의 온종일 기도를 올렸고, 대화가 엄격히 금지되었으나 때때로 다 함께 속삭이는 소리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를 드렸다. 연도나 성무일도의 몇 가지 시간경도 합송했다.

투옥 후 몇 주일간은 일요일마다 성당 종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제단은 없어도 모두들 함께 미사를 올리고 성찬기도에 이르면 영적으로 희생 제물로 봉헌되기를 기도했다. 종종 한 사람이 망을 보는 가운데 일요일 강론도 있었다. 그러다가 발각이라도 되면 고함소리와 욕지거리를 들어야만 했다.

수감 성직자 중 몇 명은 한밤중에 행해지는 온갖 심문을 받았으나 어떠한 죄목도 찾아낼 수 없었기에 나머지 사람들 대부분은 심문을 받지 않았다.18)

한편 수녀들은 다른 건물 감방에 5명이 한 조가 되어 갇혔다. 수녀복을 벗으라고 강요당했으나 강력히 거부한 끝에 베일만 벗었다. 방구석에 변기통이 있었고, 바닥은 더럽고 멍석이 몇 장 깔려 있을 뿐이었다. 몇 주일이 지나며 여자 간수들은 수녀들을 동정하여 괴롭히지 않았고, 수녀들은 작은 틈새를 통해 옆방의 동료들과 통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6주 후에는 게르트루트 링크 수녀가 형무소장과의 면담을 통해 감방 안의 수녀들을 한 번씩 접견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19)

6월 21일에는 평수사들을 감방에서 빼내 6월 24일 저녁, 강계로 이송하였다. 7월 24일에는 성직수사 몇 명을 독방으로 이감하였다. 그런 후 8월 5일 저녁에 나머지 성직수사 17명, 평수사 22명, 수녀 20명 등 총 59명을 열차 편으로 옥사덕 수용소로 압송했다. 그러나 이때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비롯하여 루치우스 로트 원장,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 그레고리오 슈테거 신부와 루드비히 수사, 요셉 그라머 수사, 그레고리오 길크 수사는 ‘주범’으로 몰려 감옥에 남겨졌다. 당국의 판결에 따라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중범죄자로 7년의 징역형을, 나머지 성직수사와 평수사들은 각각 5년 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원장 신부는 정의의 측면에서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인쇄소 책임자인 루드비히 수사는 사전 보고 없이 비밀 인쇄를 했다는 죄목이었고, 재정분야의 책임자 다고베르트 신부는 불법으로 술을 빚었다는 죄였다. 영흥의 그레고리오 슈테거 신부는 종교 학교에서 유물론을 반박하는 내용의 강의를 했다는 혐의였고, 철학교수인 루페르트 신부는 공산주의에 역행하는 서적을 출간한 죄였다. 또한 의사인 요셉 수사는 간호사를 학대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운전수인 그레고리오 수사는 사진기를 불법으로 소지했다는 죄목이었다.20)

이외에 김치호 · 최병권 · 김종수 · 김이식 · 구대준 등 한국인 사제 다섯 명도 평양 인민 교화소에 그대로 남겨졌다.

결국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1950년 2월 7일,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감옥에서 선종하였다. 나머지 여섯 명의 서양인 성직자와 다섯 명 한국인 성직자들은 1950년 10월, 유엔군의 북진으로 북한군이 퇴각해야만 했을 때인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북한 공산당에 의해 다른 포로들과 함께 피살되었다.21)

(3) 강제 수용소 시기(1949~1954)

1949년 8월 5일 저녁, 성 베네딕도회 성직수사, 평수사, 수녀 총 59명이 평양 인민 교화소를 떠나 열차 편으로 압송되어 옥사덕에 수용되었다. 이 시기는 옥사덕 수용소 · 만포 수용소 · 문리 수용소 · 옥사덕 수용소 재수감이 이어지며 포로생활과 강제노동을 하던 4년 5개월간의 긴 세월이다. 즉, 옥사덕에 수용되었던 수도자들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유엔군이 북진하자 10월 23일부터 만포 수용소를 향한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1월 12일에는 만포에서 다시 관문리 수용소로 이송되고, 1951년 1월 16일에 다시 옥사덕으로 압송되어 3년을 더 지낸 후 1954년 1월에야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동안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모진 시련을 겪었으며 이때 성직수사 5명, 평수사 10명, 수녀 2명 등 총 17명이 순교하였다. 이 시기를 옥사덕 수용소, 만포 수용소, 관문리 수용소, 옥사덕 수용소 재수감, 생존자의 귀환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① 옥사덕 수용소

1949년 8월 5일, 성직수사 17명, 평수사 22명, 수녀 20명 등 총 59명의 서양인 수도자들이 이송되어 8월 6일 오후 도착한 곳은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에 위치한 험준하고 격리된 산골짜기였다. 자강도(慈江道)는 1949년에 평안북도에서 분리하여 새로 만든 행정구역이다. 수도자들은 이곳을 ‘금모래 언덕, 금모래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하여 ‘옥사덕’이라고 불렀다. 옥사덕(玉砂德)은 문자 그대로는 ‘옥같이 아름다운 모래땅’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 고유의 이름이었다.22) 옥사덕 수용소는 깊은 산속 높은 곳에 자리한 넓은 분지로 아주 좁은 골짜기 하나가 아래쪽 평지로 뻗어 있었다. 북쪽은 넓게 펼쳐진 원시림으로 차단되어 있고, 분지 주위는 높은 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 옆으로는 척박한 밭들이 숲과 풀밭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11개 가구가 여기저기 흩어져 살며 돌투성이 밭을 일구었으나 6월 27일에 일차로 수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계곡으로 이주시켰다. 분지 한가운데로는 맑은 계곡물이 흘렀다.23)

먼저 도착한 평수사들은 성직수사와 수녀들이 묵을 곳을 마련하기 위해 죽도록 일해서 기둥 몇 개에다 서까래를 얹고 널빤지를 덮은 임시 부엌과, 엮은 짚으로 만든 지붕을 얹은 점토 침실 두 개를 지었다. 그곳이 공동 숙소였다.

강제노동 : 도착 이틀 후인 8월 8일에 벌써 모든 성직수사, 평수사, 수녀들의 강제노동이 시작되었다. 건축일, 밭일 등이 주를 이루었다.

건축은 남녀 수도자를 위한 거주 공간, 부엌, 창고, 가축우리, 돌확을 갖춘 한국식 방앗간, 다리, 도로, 계단, 구덩이 화장실, 방공호, 감시인들의 사무실과 학습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찰이 가족을 데리고 오거나 결혼을 했으므로 그들을 위한 집을 짓는 것이 건축 강제 노동의 주 내용이다. 수도자들은 돌투성이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힘들게 땅을 파 점토를 짓이겨 흙집을 짓는 중노동을 끝없이 하였다.24)

밭일은 주로 경관들의 식량을 경작해 주는 일이었는데, 온통 돌로 이루어진 밭에서 단지 보습과 호미 하나로 작은 구덩이를 파고 옥수수나 기장, 콩, 보리, 감자 등을 파종했다. 파종이 끝나면 두 차례의 제초를 했는데, 10월 수확기가 되면 땅은 벌써 얼어붙었다. 무거운 낫을 들고 옥수수와 콩을 잘라서 곡식 단을 등에 지고 날랐다.

까마귀, 까치, 꿩, 노루, 멧돼지들이 농사를 망치는 것은 비일비재하였다. 수사들의 건의대로 더 좁은 땅을 집약적으로 일구었다면 수확도 더 많고 힘도 덜 들었겠으나 수도자들을 척박한 땅에 펼쳐 놓고 농사짓도록 괴롭혔다.

겨울에는 산비탈 참나무를 베어 숯을 구웠다. 눈 위에서 짚신을 신고 일했다.

수녀들은 직접 만든 물레로 인조실을 자아 경관들이 입는 조끼를 만들었고, 돈을 벌려고 밀짚모자도 만들었지만 돈도, 고기도, 기름도 구경하지 못했다. 엘리기우스 신부는 “그것은 그야말로 노예의 노동과 다를 바 없었다. 수녀들도 이 작업에서 면제될 수 없었다”25)고 회고했다.26)

이 같은 감당하기 어려운 강제 중노동은 귀환이 결정된 1953년 11월 중순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의식주 : 옷은 덕원 수도원에서 낡고 헤진 신학생 옷가지 몇 점을 경찰이 보내서 꽉 끼는 상의와 바지를 입고 지냈다. 신발은 짝이 맞지 않는 낡은 신만 주었으나 돌밭에서 일하는 데에는 그나마 있으면 다행이었다. 수녀들은 온갖 색상의 낡은 치마를 입었다.

밥은 옥수수와 기장, 콩으로 만든 형편없는 죽이었고 거기에 국과 약간의 채소가 나왔다. 수녀들이 매일 밥 짓고 국을 끓였는데 고기는 반년에 한 번밖에 안 나왔다. 비계와 기름, 달걀과 설탕, 밀가루는 있어본 적이 없다. 수도자들은 종종 들에서 괴승아, 엉겅퀴, 민들레나 용담, 여뀌나 버섯 등 나물을 캐어서 좋은 반찬거리가 되게 했다. 때로는 작은 양파나 당근을 구해오기도 했다.

숙소는 기차 객차 같았다. 위로는 서까래가 보이고 지붕 널빤지 아래로는 싸리가 드러나 있었다. 수도자들은 벽을 죽 둘러가며 널빤지로 선반을 만들어 그 위에 자질구레한 물건과 밤에 덮을 담요를 올려놓았다. 방안을 가로질러 지붕 전체를 떠받치는 굵은 통나무가 하나 낮게 가로 질러 있었다.27)

신앙생활 : 수녀들 숙소 방 하나를 경당으로 만들어 간단한 목재 제대와 낡은 한국식 관을 이용한 감실을 꾸몄다. 매일 다른 주례사제로 차례를 바꿔가며 다 함께 미사를 드렸다. 일요일에는 아직 가사를 잊지 않은 독일 성가를 합창하고 강론도 따랐다. 오후에는 수도원 시절처럼 성무일도의 저녁기도와 장엄한 축복이 뒤따랐다.
 
덕원에서 가져온 성체용 밀가루를 아껴서 성체를 구웠고, 그것이 다 없어진 후에는 경찰이 보내온 옥수수 부대자루 안에 신기하게 섞여 있던 밀알을 골라내 성체를 만들었다. 그 이후에는 매년 작은 밀밭에 씨앗을 뿌려 성체용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미사주는 머루를 따서 즙을 끓여서 썼다.

성탄절, 부활절, 성신강림절 때 축일미사도 드렸다. 동료 수사들과 수녀들의 서원 기념일과 사제 서품 기념일 행사도 가졌다.

제의는 얇고 하얀 제의 한 벌밖에 없어서 평일, 주일, 위령미사, 대축일을 막론하고 줄기차게 그것만 입어야 했다.28)

엘리기우스 신부는 수용소에서의 미사에 대해 회고하였다.

“날마다 거행되는 그 성스러운 미사는 우리의 수용소 생활에서 가장 큰 행복이었다. 미사는 우리에게 수용소 생활의 온갖 고통과 궁핍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그러한 은총을 우리에게 내려주셔서 얼마나 행복했던가. 또한 공산당 경찰들이 그 점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었던가.”29)

순교자 : 1949년 6월 27일에 옥사덕에 도착한 평수사들은 수감 생활로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있었다. 그 위에 집 짓는 공사는 힘에 부치고, 식사는 모자랐고, 뙤약볕에서의 일은 너무 힘들어 질병이 찾아들었다. 그리하여 7월 3일에는 베드로 게르네르트(Gernert, Petrus) 수사가, 8월 3일에는 정 양리 마르코(Metzger, Markus, 丁洋利) 수사가 사망했다. 수사들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자 평양 인민 교화소에 감금되어 있던 여의사 디오메데스 수녀와 간호사 프리트헬마(Friedhelma Grimm, 金德順) 수녀를 7월 18일에 데려왔으나, 환자들의 약이나 환자용 음식을 따로 받지 못해 큰 의료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9월 14일에는 오이근 에우제니오(Ostermeier, Eugenius, 吳利根) 수사, 1950년 2월 14일에는 하연근 바실리오(Hauser, Basilio, 河連根) 수사, 4월 16일에는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가, 8월 10일에는 에바 쉬츠 수녀가 영양부족과 과로로 선종해서, 1949년 7월부터 1950년 8월까지 총 여섯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② 만포 수용소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일어난 것을 전혀 모르고 있던 옥사덕의 수도자들은 7월 29일 처음 수용소 상공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목격했다. 비행기는 점점 더 많아졌고, 감시원들은 모스크바로 귀환하는 비행기라고 말했으나, 수도자들은 북한과 남한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감시원들은 수도자들이 늘 포로복을 입도록 했고, 경당에 두 명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사망한 수도자의 무덤 앞에 세운 작은 십자가도 뽑아내게 했다.

드디어 1950년 10월 23일 오후 3시에 비상물품만 소지하고 군인과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만포 수용소를 향한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사흘에 걸쳐 밤에는 행군하고 간혹 일정거리는 기차로 이동했다. 낮에는 지참한 기장을 주변 농가에서 조리해 먹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따뜻한 묵을 곳이 없어 얼어 죽을 듯 추웠다.

10월 25일에 만주 접경지대 만포에 도착하여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10월 27일 밤 또다시 한만(韓滿) 국경을 넘어 만주 땅으로 끌려갔다. 만주의 첫 번째 마을30)에서 이틀 밤낮을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역 광장 노천에 앉아 있어야 했다. 피랍 이후 참혹한 지경에 처했었지만 이 역전 광장에서의 경우는 극한지경이었다.

중공군 참전 이후 인민군이 다시 남진했기 때문에 10월 29일 밤에는 도로 만포로 걸어 돌아가 만포에서 수용소 생활을 시작하였다.

강제노동 : 남자들 작업량은 옥사덕에 비해 적었고, 그리 가혹한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녀들은 자신들을 위한 부엌일 외에 간수들 부엌일까지 떠맡아 새벽 3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다.

의식주 : 옷은 찢어진 죄수복만을 입었다.

식사는 옥수수와 콩만으로 된 것이었지만 양은 꽤 많았다. 문제는 물로 지하실 기계실의 기름기 뜬 더러운 물로 밥을 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

신앙생활 : 미사도구함을 감옥에 가지고 들어갔으므로 찢어진 죄수복 상의 밑에 몰래 영대를 걸친 채로 미사를 올렸다. 옆 감방 수녀들이 알 수 있도록 봉헌예절, 거룩하시다, 성찬기도, 영성체를 할 때마다 감방 벽을 두드려 신호를 보냈다. 성체를 담은 작은 상자는 음식과 함께 수녀들 감방에 몰래 밀어 넣어주면 수녀원장이 그 성체를 나머지 수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31)

순교자 : 1950년 11월 6일 까누토 신부가 추위와 영양실조, 탈진으로 순교하였다.

11월 12일 만포 교화소에 폭탄이 투하되어 불이 나서 수도자들은 또 다시 만포시 근교 관문리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③ 관문리 수용소

관문리 수용소는 만포시 근교 산속에 길게 뻗은 계곡 안에 자리 잡은 목재 바라크 피신처였다. 바라크들은 나무로 지어져 절반가량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지붕은 지상으로 삐져나와 얇은 널빤지로 덮였고 지붕위에 나뭇가지와 풀을 덮어 위장한 가건물이었다. 진흙땅 위에 깐 널판지 위로는 바닥이 차지 않도록 짚을 깔았다. 그럼에도 그 안은 한데나 다름없어 밤낮 꽁꽁 얼어 지냈다. 그 작은 한 공간에 1950년 11월 12일부터 1951년 1월 16일 옥사덕으로 다시 돌아가기까지 머물렀다.

의식주 : 날씨는 엄청 춥고 지독히 배가 고픈 나날이었다. 바라크 안에는 신부, 수사, 수녀들까지 한 공간에 꽉꽉 채워 넣었다. 그러나 빽빽이 신체를 맞대고 지내야 했기에 몸을 녹이고 동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사람이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발톱이 빠지고 피부가 벗겨져 벌건 살가죽만 붙어 있었다.

12월 14일에는 방공호로 옮기게 했다가 참호 속 공기가 혼탁해 많은 사람들이 심장 협착 증세를 보이자 다음날 도로 관문리의 다른 바라크로 이송되었다. 작은 온돌이 놓여 있었으나 열기는 없었고, 지붕은 이전 바라크보다 약간 더 두터웠으나 어두웠다. 성직수사, 평수사, 수녀들이 다시 한 공간 안에 빽빽이 들어차 지냈다. 50명이 사용하는 것임에도 작은 변기통 하나가 마련되어 사람들이 열을 지어 늘어서고, 많은 사람들이 설사를 참지 못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몇몇 평수사와 수녀들이 다시 주방일을 떠맡았고, 그들은 새벽 3시, 날이 밝아 비행기 눈에 띠지 않을 시각에 밥을 짓기 시작하여 밤 11시까지 일했다. 부대원들 식사에 말린 생선이 나오는 때가 잦자, 쳐낸 생선 머리로 생선국과 푹 끓인 생선 머리를 먹을 수 있었다. 그 외 평상시에는 날마다 옥수수와 기장, 콩을 먹었다. 야채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32)

신앙생활 : 관문리 수용소에서는 어떤 종교 활동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0년 12월 25일 성탄절에는 보초 경관의 허락을 받아 장작 불 몇 개를 붙이고 불가에 둘러 앉아 ‘고요한 밤, 거룩한 밤’과 다른 캐럴송을 불렀다. 아침에는 아르눌프 신부가 찢어진 죄수복 상의 속에 영대를 걸치고 미사를 드렸다. 주방에서 일하느라고 미사에 참례하지 못한 수녀들에게는 엘리기우스 신부가 몰래 성체를 부엌으로 가져다 영해 주었다. 다음 며칠 동안도 그런 식으로 몇 번 미사를 드렸다. 엘리기우스 신부는 “그지없이 곤궁하고 가난하면서도 참으로 정겹고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였다. … 오, 그것은 정말 거룩한 크리스마스였다”고 회고하였다.33)

순교자 : 1950년 11월 15일 김 그레고리오(Sorger, Gregor, 金) 신부, 12월 12일에는 허희락 힐라리오(Hoiß, Hilarius, 許喜樂) 수사, 다음날인 12월 13일에는 솔라누스 헤르만(Hermann, Solanus) 수사가 순교하였다. 수도자 중 몇 명이 경찰 감시하에 시신을 묻으려 나갔으나 땅바닥이 꽁꽁 얼어서 무덤을 파는 것이 불가능했다. 비상수단으로 시신을 눈으로 덮었다.34)

④ 옥사덕 수용소 재수감

관문리 수용소에서 기근과 추위로 비참한 생활을 하며 세 명의 동료를 잃은 수도자들은 다시 옥사덕으로 보내줄 것을 계속 간청하였다.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전선이 남쪽으로 이동하자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1951년 1월 16일 밤 두 대의 트럭에 실려 관문리를 떠나 이튿날 밤 옥사덕으로 이송되었다. 1950년 10월 23일부터 1951년 1월 17일까지 86일간 죽음의 행진을 하며 떠돌다 다시 옥사덕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하여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이때로부터 1953년 11월 19일까지 다시 만 2년 10개월 동안 옥사덕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다.

옥사덕에서의 수용생활의 양상은 변하지 않았다. 강제노역의 연속이었다. 도리어 이전보다 “노동은 더 가혹해졌고, 대우는 더 잔혹해졌으며 굶주림은 더욱더 고통스러워졌다.”35) 무엇보다 1951년 2월 3일에 새로 부임하여 1952년36) 10월 6일까지 책임자로 있었던 악질적 소장 때문이었다. 수도자들이 ‘살쾡이’(Schleich)라는 별명을 붙여 불렀던 소장은 엘리기우스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수도자들을 인간이 아니라 노예나 동물처럼 취급했다. 그전에도 이미 가혹한 일을 많이 겪었었다. 그러나 그의 부임으로 더욱 고통스럽고 때로는 비인간적인 수난의 길을 시작하게 되었다.”37) 일을 할 때면 감시 경찰이 총을 들고 뒤에 서 있도록 했고, 도처에 욕지거리와 소동만이 있을 뿐이었다.

1952년 9월 19일에 신임 수용소 소장이 오고, 10월 6일 옛 소장이 떠나면서 수용소 생활은 수월해졌다. 새로 부임한 소장은 수도자들을 억압하지 않았고 호의를 보이며 잘 대우했다. 새 소장의 지시로 경찰들도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했고, 이제는 그들 개인의 가정일에 수도자들을 부리지 않았다. 수용소 생활은 물론 여전히 가혹하고 힘들고, 매일 거친 일을 하였으나, 더 이상 순전한 노예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1953년 11월 옥사덕을 떠날 때까지의 시기는 조금 쉽게 견디어낼 수 있었다.

강제노동 : 노동의 내용은 전과 거의 같았다. 일은 보통 아침 5시에 시작되어 밤 8시, 9시에 끝났다. 할당된 밭일을 조금 일찍 끝내면 ‘살쾡이’는 추가로 더 많은 일을 강요했다.

겨울에는 눈 덮인 산 위에 짚신바람으로 올라가 감시원 가정과 자신들을 위한 난방용 땔감을 해 와서 장작으로 패야 했다. 높은 산에 있는 밭일도 마찬가지로 힘들어 거의 쓰러질 지경까지 일했다.

매우 힘든 일은 가을에 진흙을 모아 숯가마를 만들고 산 중턱에서 나무를 베어 숯을 굽는 것이었다. 수녀들도 수레꾼으로 도와 일했다. 숯은 판매용이었으나 수도자들은 수익금을 한 푼도 받아본 적이 없다.

수녀들은 밭일, 멍석 짜기, 감시 경찰들을 위한 빨래와 수선, 조리 등을 하였다. 그 외에도 불려 가면 무슨 일이건 해야 했다.

그러나 1952년 9월 19일에 새 수용소 소장이 부임한 이래로는 일을 할 때 몰아대지 않고 내버려 두었고, 더 이상 감시 경찰이 총을 들고 뒤에 서 있지도 않았다.

의식주 : 옥사덕에 돌아갔을 때는 기장 같은 좋은 곡식은 남은 것이 없어 옥수수와 콩 520그램으로 연명했다. 전해에 파종했던 무는 언 채로 방치되어 매일 그 무를 파서 먹었다. 음식은 점점 모자라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700그램, 다른 사람들은 600그램, 환자들은 400그램, 감옥에 있는 사람은 300그램을 받았다. 굶주림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몰래 옥수수 이삭이나 감자를 훔쳐 숨어서 먹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것이 경찰에게는 수도자들이 ‘도둑이고 강도며 개’38)라는 증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자들은 가축들이 먹는 밀기울을 끓여 뻑뻑한 죽을 만들어 밤에 몰래 먹었다.

그러나 1953년 4월 수용소 재고조사 후에는 누구나 800그램씩의 식량을 공급받았다. 야채도 충분히 지급되고, 가끔 고기와 기름도 받았다. 또한 많은 숫양과 닭도 잡을 수 있었다.

포로로서 여름에는 면으로 된 가벼운 바지와 웃옷을 지급받았는데 너무 짧고 통이 좁았다. 남녀가 동일한 것이었다. 겨울에는 죄수들이 입는 것과 같은 솜옷을 받았다. 이 옷들은 단벌로 특히 겨울옷은 겨우내 빨지를 못했다. 게다가 낡은 옷을 지급받아 빨리 찢어졌다. 그래서 들판에 떨어진 곰팡이 슬은 헝겊조각도 주워서 수선하는 데 썼다.

양말과 신은 없어서 날씨가 채 따뜻해지기 전부터 겨울이 시작되기 전까지 맨발로 다녔다. 겨울에 솜버선 한 켤레씩을 받았지만 얼음과 눈 속에서 숲일을 했으므로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낡고 떨어진 옷으로 헝겊신을 만들어 신어야 했다. 장갑도 마찬가지였다. 수선은 주로 프룩트오사 수녀와 암브로시아 수녀가 맡아 했다.

이렇게 입을 것이 거의 없었기에 죽은 사람으로부터 낡은 셔츠나 바지를 물려받게 되면 기뻐했다.

그러나 1952년 9월 19일에 새 수용소 소장이 부임한 이래로는 더 좋은 옷과 속옷을 받았고, 모든 사람이 솜이불을 지급받았다. 또 모든 사람이 작업복과 일요일에 입는 옷, 이렇게 새 옷 두 벌을 받았다.

모두 강제노동에 의한 과로와 영양실조로 다리가 붓고 자주 복통에 시달렸지만 필수적인 의약품은 공급받지 못했다. 의사 디오메데스 수녀는 약초와 뿌리들을 모아 그것을 차로 끓여 어느 정도 환자에게 도움을 주었고, 복통이 있는 환자에게는 뜨거운 돌을 올려놓을 수 있을 뿐이었다. 또 하나의 커다란 고통은 기생충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입과 코에서 기생충이 나왔다. 디오메데스 수녀가 오랫동안 간청한 끝에 산토닌을 받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100, 120, 150, 180마리까지 기생충이 나왔다.

그러나 1952년 9월 19일에 새 수용소 소장이 부임한 이래로 환자들은 편안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디오메데스 의사 수녀는 여러 가지 약품을 공급받았으며, 더 이상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건강에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엘리기우스 신부는 환자들에게 잠시의 휴식을 주고, 디오메네스 의사 수녀에게 필수 의약품만 공급했어도 동료 수사와 수녀들 대부분은 생존했을 것이라고 회고하였다.39) 1952년 9월 16일 마리아 프룩트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 선종 이후 옥사덕에서 또 다른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새 소장의 이 같은 호의 때문이었던 듯하다.

신앙생활 : 만포에서 돌아온 후 ‘공습의 위험 때문’이라는 명분을 걸어 일요일 외에는 경당에서 수녀들과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없었다. 그때부터 매일 분리해서 하루 두 번의 미사를 드렸다. 그러나 살쾡이 소장은 매일 드리는 미사를 눈엣가시로 여겨 성체를 만들 밀을 경작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옥수수밭 속에 수사가 몇 대의 밀대를 남겨 밀알 작은 주발 하나 정도를 수확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압수당하였다. 그것은 미사를 드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수녀들은 절박하게 간청하였고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밀을 넘겨주었다. 극도로 절약하여 작은 성체를 만들고도 몇 고랑에 뿌릴 씨앗이 되었다. 수도자들은 미사와 감실에 대한 끊임없는 근심 속에서 생활했다.40)

사망자가 생기면 수용소보다 약 200미터 높은 곳에 마련된 공동묘지로 운구해 갔다. 처음에는 직접 운구했으나 더 이상 그럴 힘이 없어서 시신을 가마니에 넣고 수녀들이 가마니를 전나무 가지와 꽃으로 장식한 후, 소달구지에 싣고 올라가면서 수도자들은 기도하며 뒤따라가 교회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장례 때마다 ‘그리스도, 나의 왕, 당신에게만 나는 백합 같은 순수한 사랑으로 죽을 때까지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추위와 헐벗음, 굶주림과 중노동, 학대와 모욕,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질병을 참아내며 순간순간을 지내야 했던 신부, 수사, 수녀들은 고생을 다 끝내고 공동묘지에서 휴식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리어 부러워했다.41)

살쾡이 소장은 공산주의 헌법에 따라 모든 사람은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항상 말로는 강조하면서도 종교행사를 금하기 위한 온갖 시도를 꾀했다. 도둑질이 발생하면 수도자들 스스로 모든 종교 행사를 포기한다는 내용의 조서에 서명을 요구했으며, 서명을 거부하자 미사를 금지시키면 따르라고 했다. 거의 한 달여 동안 저항이 계속되자, 소장은 도둑질하다 붙잡힌 사람은 모든 종교 행사에 스스로 참여를 포기하도록 만들려 했다. 수도자들은 그것도 거절하며,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취하겠고 설사 경찰이 모른다 할지라도 책임자 신부가 콩국과 미사성제 한 회를 박탈함으로써 자체 처벌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미사를 구하게 되었다.42)

순교자 : 1951년 9월 1일에 노안락 에우제비오(Lohmeier, Eusebius, 盧安樂) 수사, 11월 9일에는 노병조 안셀모 신부가 선종했다. 해가 바뀐 1952년 3월 20일에는 부 일데폰스(Flotzinger, Ildefons) 수사가, 4월 6일에는 민종덕 고델리부스 아우어(Auer, Godelibus, 閔鐘德) 수사가, 6월 14일에는 만 40세 생일을 18일 앞두고 가장 어린 나이의 오 쿠니베르트 신부가 선종했다. 6월 28일에는 아르눌프 신부가, 9월 16일에는 마리아 프룩트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가 선종했다.

⑤ 생존자의 귀환43)

1953년 11월 15일, 옥사덕에 나타난 관리는 수도자들을 ‘북한 정부의 영광스러운 외국 손님’이라고 부르며 수도 평양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새 옷(모자와 솜옷)을 지급하고 좋은 식사를 주었다.

11월 19일 새벽, 수도자들은 장엄 감사미사를 드린 후 죽은 이들과의 작별을 위해 노래와 기도를 하며 수용소 공동묘지로 올라갔다. 다시 〈Libera me〉와 장례 때마다 불렀던 〈그리스도, 나의 왕〉을 부르고 모두가 각각의 무덤 위에 성수를 뿌렸다. 만포에서 영면하고 있는 동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자유롭게 고향에 돌아가면 부모, 형제, 모든 친지, 은인들에게 안부를 전해 주겠다고 고인들에게 약속했다.

11월 19일 오후 열차편으로 떠나 11월 20일 평양에 도착해서,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쾌적한 고급 수용소에서 생활하였다. 이곳은 김일성의 별장으로 전속의사, 간호사, 전담 이발사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1953년 성탄절은 마치 고향에서와 같이 지낼 수 있었다.

드디어 1954년 1월 8일 열차로 평양을 떠나 국경도시 신의주에 도착했고, 북한 세관의 장시간 조사 후 한밤중에 북한-중국 국경을 넘었다. 선교사로 성스러운 소임을 띄고 파견된 나라 한국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 후 단동-심양-하얼빈을 거쳐 1월 11일 소련 국경도시에서 시베리아 횡단 특급열차를 타고 모스크바, 폴란드를 지나 1월 21일 동독 오데르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차를 내렸다. 두 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할레-라이프치히-에르푸르트를 거쳐 임시수용소 아이제나흐에서 일박하였다. 그곳에 이미 와 있던 다른 귀향자들과 합류하여 1월 22일 오후 2시경 동독 국경을 넘어 서독에 입국하였다. 괴팅겐 근처 프리드란트(Friedland) 수용소에서는 서독 정부 및 가톨릭교회 측의 성대한 환영을 받고, 이튿날 새벽에는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상트 오틸리엔 총아빠스가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1월 23일 자정, 수용소를 떠나 열차편으로 남행하여, 드디어 1월 24일 ‘베네딕도 회원의 주보성인’ 성모 마리아의 축일에 42명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투칭의 수녀원 본원으로 각각 귀환할 수 있었다.

크리소스토모 총아빠스, 부르카르트(Burkard) 아빠스, 동료 수도자들은 그들의 귀환을 매우 기뻐했으나, 다른 동료 수도자들의 사망 사실을 접하고 몹시 놀라고 슬퍼했다. 그들이 바로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비롯한 19명의 사망자, 11명의 실종자, 그리고 각지에서 끝까지 신자들을 돌보다 희생된 한국인 신부 4명과 수녀 2명으로, 바로 시복시성 대상 순교자들인 것이다.

2) 36위 순교자 약전

순교자의 시복시성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자료로는 우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전기나, 전기가 없으면 생애와 행적, 덕행이나 순교, 성덕과 징표에 대해 시대순으로 정리한 정확한 보고서이다. 이에 더하여 순교자 자신이 출판한 모든 저작물의 사본과, 순교의 사실들을 증언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청원서와 함께 제출해야 한다.44)

이러한 필수 요구조건에 부응하여 본 절에서는 36위 순교자의 간략한 전기를 서술하고자 한다. 성명, 세례명, 수도자명, 생년월일, 소속 및 신분, 수도회 입회 · 서원 · 사제서품일 및 장소, 학력, 외국 선교사의 경우 한국 입국 년도를 포함하여 한국에서의 활동경력을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조하여 정리하였다. 순교와 관련해서는 납치일 및 납치 실행기관, 순교의 유형과 순교일자, 순교 장소, 묘소의 위치가 파악된 곳은 그 위치를 밝힌다. 특별히 비중을 둔 것은 순교 행적으로, 참조 가능한 모든 자료들을 토대로 상세히 서술하고, 당시 증인들의 목격담, 체험담, 증언은 원 사료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인용함으로써 순교록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주 참조 자료는 상트 오틸리엔 및 왜관 수도원의 미간행 자료 〈순교자보고서〉, 왜관수도원 〈Necrologium(사망자 명부) 1910~2007〉, 1974년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펴낸 독일인 선교사들의 육성 증언집 Schicksal in Korea(한국어 번역본 : 《북한에서의 시련》), 겔뜨루드 링크 수녀 회고록, 《하느님이 함께 하신 나의 생애》, 김창문 · 정재선(공편), 《한국 가톨릭 : 어제와 오늘》,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원산수녀원사》, 한국교회사연구소(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헬무트 몰(Moll, H.)이 편찬한 Zeugen fur Christus. Das deutsche Martyrologium des 20. Jahrhunderts(그리스도의 증인 - 20세기 독일의 순교자들) 등이다.

36위 순교자 서술 순서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의 ‘시복추진대상자 명단’에 따른다.


(1)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Sauer, Bonifatius, 辛上院, 1877~1950) 주교 아빠스

세례명 : 보니파시오(Bonifatius)
출생일 : 1877년 1월 10일
출생지 : 독일 훌다(Fulda) 교구, 오베루프하우센(Oberufhausen)

소속 및 신분: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사제(주교 아빠스)
모원 :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입회 : 1898년 2월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00년 2월 4일 상트 오틸리엔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03년 7월 26일 딜링겐(Dillingen)

학력
훌다 김나지움 중등교육과정 수료
1900년 가을 뮌스터(Munster)에서 김나지움 졸업
1900년~1908년 딜링겐에서 신학 공부

활동경력
1903년 사제 서품 직후 딜링겐의 성 오틸리엔 부속 성 보니파시오 기숙사 사감
1909년 1월 11일 한국 파견, 2월 25일 한국 입국
1910년 1월 8일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초대 원장
1913년 6월 8일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초대 아빠스로 축성(임명 날짜 : 5월 15일, 축성 장소 :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1920년 8월 25일 원산대목구장 임명
1921년 5월 1일 주교 서품
1940년 1월 12일 덕원면속구장 겸 함흥대목구장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9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0년 2월 7일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용산리(大同郡 斧山面 龍山里) 공동묘지
순교 행적 :
① 덕원면속구장 겸 함흥대목구장으로서 일제 강점기 말엽, 특히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수도생활과 사목활동에 많은 제한과 압박을 받았다.

② 광복 후에는 북한 공산정권이 종교탄압의 일환으로 시행한 ‘토지개혁령’(土地改革令)으로 1946년 수도원의 모든 토지를 몰수당하는 고난을 겪었다.

③ 1949년 5월 8일 밤, 덕원 수도원에 들이닥친 수십 명의 정치보위부원들에 의해 수도원장 로트(L. Roth, 洪泰華) 신부, 부원장 슐라이허(A. Schleicher, 安世明) 신부, 신학교 교수 클링사이즈(R. Klingseis, 吉世東) 신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원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 구금되었다.

④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사방 2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독방에 6개월간 격리, 수감되었다. 그동안 약간의 소금으로 양치질을 할 수 있었을 뿐, 그 외에는 단 한 차례의 세면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⑤ 평양 형무소 구금 수도자들이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될 때, 사우어 주교 아빠스 포함 총 8명의 독일인 수도자와 한국인 신부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에 남겨졌다. 공산당의 재판결과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중죄인으로 7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죄명은 ‘정의의 측면에서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45)

⑥ 11월부터 임종까지 3개월 동안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작은 감방에서 병수발을 하고 임종을 지킬 수 있었던 기 그레고리오(Gregor Giegerich) 수사의 증언 : “쇠약해진 주교를 위해 우유와 계란을 요청하자, “전에 이 짐승들은 잘 먹었으므로, 이제는 어려움을 겪어야한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임종 사흘 전, 주교는 “욕창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럽다. … 이제 나를 집으로 보내 달라”고 하였다. 이 집이란 고통 없는 영원의 집을 뜻하는 것이었다.”46)

⑦ 엘리기우스 신부의 증언 : “마침내 8월 5일 저녁이 되자 우리는 이송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빠스 주교님과 루치우스 로트 원장신부,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 그레고리오 슈테거 신부, 요셉 그라머 수사, 그레고리오 길크 수사는 ‘주범’으로 몰려 감옥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건 우리에게 쓰라린 이별이었다. 그 며칠간 감방을 나서는 게 그들에게 금지되었지만, 우리는 가끔 몰래 그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미사용 가방에서 성유를 꺼낼 수 있어서 가브리엘 신부는 감방 안의 아빠스님에게 병자 도유성사를 거행해주었다. 주교님은 이미 무척 허약한 상태였던 것이다. 작별할 때 그들은 비통한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그들도 곧 우리에게 오게 될 것이라고 위로했다. 우리는 감옥 문틈으로 그들에게 마지막 축복을 했다. 그것은 정말 쓰라린 이별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수감 기간 내내 형제들에 관한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의 소식을 묻고 그들을 우리에게 데려와 달라고 간청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1954년 1월, 우리가 독일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아빠스-주교님은 1950년 2월 7일에,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머지 여섯 형제들에 관해서는 오늘날까지 어떠한 말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1950년 10월, 북한군이 퇴각해야 했을 때 북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다른 포로들과 함께 총살당했다고 확신한다.”47)

⑧ 72세 고령의 사우어 주교는 심한 고문과 지병인 천식의 악화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1950년 2월 7일 옥사하였다. 임종은 오직 기 그레고리오 수사만이 지킬 수 있었다.

⑨ 당시 평양 인민 교화소와 교회 측의 연락 담당자였던 임 곤라도 수사의 증언 : “나는 가방 공장에 취직하여 버는 돈을 가지고 은밀히 옥중의 죄수들을 진료하는 의사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는 노씨48)와 이씨였다. 이들은 생명에 대한 위험이 따르는 일인데도 늘 양심적으로 수도가족의 현황을 적극성을 띠고 알려 주었었다. 신 보니파시오 주교가 선종한 지 거의 한 달 후 나는 인흥리 우리 수녀님들의 연락소로 그 본거지를 옮겨 지내면서 그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였다. 삼월 초경에 나는 교화소의 의사 이씨와 노씨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고 곡괭이와 삽을 준비하여 김 데레사 수녀와 장 안토니오 수사와 함께 신 보니파시오 주교가 묻혔다는 용산(大同郡 斧山面 龍山里)의 공동묘지를 찾았다. 그러나 낮에는 병사하였거나 총살시킨 죄수들을 묻기 위하여 수시로 드나드는 형무관과 보안서원의 눈에 띌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야간을 이용하였다. … 여기 묻힌 시신들은 모두가 8 · 15 이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세 번째 무덤을 팔 때 마침 신 보니파시오 주교가 잡혀갈 때 신었던 자주색 양말이 발견되었다. 나는 다시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거의 알 수 없었고 수염과 인자한 모습이 신 보니파시오 주교임을 확인하였다. 일행은 다른 곳에 묘 자리를 정하여 땅을 깊이 파고 주교의 시신을 옮겨 묻은 다음 후에라도 쉽게 알아내기 위하여 묘소 봉분 가운데 자갈을 많이 넣은 후 사발을 엎어 묻어 놓고 다시 흙과 떼를 입혔다. 언젠가 정세가 안정되면 딴 곳으로 고이 이장하여 모실 것을 기약하며 산에서 내려올 때는 이미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49) 


(2) 김치호(金致鎬, 베네딕도, 1914~1950) 신부

세례명 : 아우구스티노
수도자명 : 베네딕도
출생일 : 1914년 3월 31일
출생지 : 한국 경기도 파주시 법원면 갈곡리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덕원 수도원

입회 : 1938년 4월 9일 한국 성 베네딕도회 첫 한국인 성직 지망 수련자로 법정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39년 4월 10일 덕원 수도원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42년 5월 1일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덕원 수도원에서 수품

학력
1926년 서울 성 베네딕도회 숭공학교 입학, 제화공 도제 수학
1927년 12월 1일 덕원 신학교 입학
1929년 중등과정(초급반 5년, 고급반 2년) 시작
1936년 철학과정 시작
1938년 철학과정 수료
1939년 신학과정 시작

활동경력
1942년 사제 서품 후 사우어 주교 비서
1942년 6월 덕원 본당 보좌
1945년 덕원 본당 주임
음악(바이올린, 피아노, 오르간, 트럼펫)과 문예(시, 수필)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독일어 실력이 뛰어나 한국 선교지에 새로 온 독일 선교사들의 한국어 강론 준비(번역과 윤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저술활동
1938년 〈수도원에 드러와서〉; 《신우》50) 제6호 게재 논고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5일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5년 이후 가족들이 월남하며 여러 차례 동행을 종용하였으나 “수도자로서 수도원에 머물다 선종하겠으며, 사우어 주교님을 보필하겠다”고 매번 거절하였다.

②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의 모든 독일인 성직수사, 평수사, 한국인 신부 등 총 34명이 체포될 때 함께 피랍,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 구금되었다.

③ 엘리기우스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8평방미터의 좁고 습기찬 작은 감방에 18명이 수감되었고, 폐렴을 앓고 있던 김 신부는 숨을 잘 쉴 수가 없는 더 심한 고통에 시달렸다.51)

④ 유엔군의 북진으로 1950년 10월 5일 인민군이 퇴각할 때 김치호 신부를 각목으로 구타하여 살해하였다.52)

(3) 민종덕 고델리부스 아우어(Auer, Godelibus, 閔鐘德, 1887~1952) 수사

세례명 : 세례 요한(Johann Baptist)
수도자명 : 고델리부스(Godelibus)
출생일 : 1887년 10월 25일
출생지 : 독일 아이스테트(Eichstatt) 교구, 라우테르호펜(Lauterhofen)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입회 : 1907년 10월 4일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09년 10월 10일 상트 오틸리엔

학력
1906년 12월 상트 오틸리엔의 목공 도제 입문
1914년~1919년 일본의 전쟁 포로 수용소에서 건축 제도 기술 공부

활동경력
1914년 5월 3일 한국 파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의 중국조차지 청도(靑島)에 보병으로 징집. 1919년까지 일본군 포로.
종전 후 한국으로 귀환하여 평생 덕원 수도원의 건축제도사, 사진사, 오르간 반주자로 활동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2년 4월 6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에서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에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 평양에서 압송하여 옥사덕 수용소에 수감

③ 수용소에서는 주로 장작 패고 톱질하는 강제 노동에 동원

④ 1952년 4월 4일 동료들과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폭설을 만나 짚신 신은 발이 얼었으나 강제노동 계속. 그로 인한 폐렴 발병으로 4월 6일 옥사

⑤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동료들의 충고로 그는 일찍 작업장을 떠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날 그는 열과 심한 옆구리의 통증으로 앓아누워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약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 폐렴은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4월 5일부터는 심장의 힘이 현저하게 떨어져 주사에도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4월 6일, 착한 고델리부스 수사는 평화롭고 고요하게 잠들었다. 그의 조용하고 우아하며 겸손하고 욕심 없는 태도는 나에게 항상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그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질서의 모범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하느님이 그에게서 모든 것이 질서가 잡혀 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이며, 당신의 충실한 종에게 영원히 보답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53)

(4) 나국재 까누토(Canutus d’Avernas, 羅國宰, 1884~1950) 신부

세례명 : 베네딕도(Benedikt)
수도자명 : 까누토(Canutus, 독일어로 Kanut 혹은 Knut)
출생일 : 1884년 3월 11일
출생지 : 오스트리아그라쯔-세카우(Graz-Seckau) 교구, 쉬름도르프(Schirmdorf)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11년 3월 22일 입회 청원
서원일 및 장소 : 1912년 7월 28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허원일 : 1915년 8월 27일
사제서품일 : 1914년 8월 13일

학력
스텔라 마투티나(Stella Matutina) 김나지움(Gymnasium) 졸업
법과대학 수학
딜링겐 및 뮌헨(Munchen) 대학에서 철학 및 신학 공부.

활동경력
1921년 1월 16일 한국 파견
1921년~1923년 11월 원산 본당 초대 보좌신부
1923년~1934년 내평 본당 주임신부,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영신 지도신부
1935년 3월 고산 본당 옆에 해성학교 설립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0년 11월 6일
순교 장소 : 자강도 만포 인민 교화소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지도신부이던 까누토 신부는 수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② 평양 인민 교화소에 구금되었다가 옥사덕으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③ 1950년 유엔군이 9 · 28 수복 후 북진하자 10월 23일부터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10월 25일 만포 수용소에 재수감되었고, 10월 27일에 또 다시 한만(韓滿) 국경을 넘어 만주 땅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피랍 이후 참혹한 지경에 처했었지만 지안(輯安) 역전 광장에서의 경우는 극한지경이었다. 이틀 밤낮을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역 광장에 앉아 있었다. 


④ 10월 29일 다시 만포행을 강행하여 걸어 돌아왔으나 까누토 신부는 추위와 영양실조, 탈진으로 사망하였다. 이에 관해 엘리기우스 신부는 “까누토 신부에게는 압록강을 건너는 피난길이 너무 힘에 부쳤다. 그는 우리 곁의 짚더미 위에서 실신한 채 쓰러져 11월 6일에 운명했다. 우리는 그의 주검을 매장할 수조차 없었다. 한국 포로들이 그의 시신을 들고 나갔다. 그들이 시신을 어디에 묻었는지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까누토 신부는 그렇게 그지없이 가련하게 죽어갔던 것이다”라고 증언하고 있다.54)

⑤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까누토 신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심장병과 신장병을 앓고 있었다. … 쇠약하고 병든 그에게는 피난(필자 주 : 만포-만주-만포)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산을 내려올 때 그는 벌써 쓰러졌으며, 캠퍼 주사를 맞고 오래 쉰 다음에야 비로소 계곡으로 부축해 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강 옆으로 철로와 국도가 뻗어 있었다. 몇몇 환자와 약한 사람들 - 까누토 신부도 거기에 속한다. - 을 트럭에 태워 북쪽으로 옮길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피난민과 중국 군대의 혼란 속에 밖에서 20시간가량을 기다린다는 것과 또 이동 자체가 그에게는 하나의 완전한 순교였다. … 환자들도 귀향길을 걸어서 왔다. 길가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계속해서 걸어야 했다. 귀로에 환자들에게는 트럭의 자리가 약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혹독하게 추운 밤을 들판에서 계속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은 걸어서 만포의 감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이러한 고난은 까누토 신부의 체력을 매우 떨어뜨렸다. 그는 나날이 약해져 갔다. 11월 6일 점심 시간에 그는 갑자기 목을 끄르륵거리기 시작했고, 창백한 얼굴빛은 종말을 예감케 했다. 그는 병자 도유성사를 받을 수 있었고, 그러고나서 조용히 단말마의 고통도 없이 사망했다. 우리는 그를 품위 있게 안치할 그 어떤 방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음날까지 우리는 그가 짧은 잿빛의 죄수복을 입고 머리엔 통나무를 벤 채 빈 옆방의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봐야만 했다. 우리는 외적인 상황이 그렇게 궁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 퍼져 있는 고귀한 평온함과 숭고함에 감동을 받았다. 7일에 한국인 포로들이 와서 시신을 가지고 갔다. 우리는 어디로 운반해 가는지 몰랐다. 나중에 이 포로 중 한 사람이 우리 신부에게 그가 매장되어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북한 정권은 우리가 북한을 떠나기 전에 만포에서 사망한 다른 사람들의 유골과 함께 까누토 신부의 유골을 새 무덤으로 이장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55)

(5) 장 악네따(1910~1950) 헌신자56)

세례명 : 아가타(Agatha)
수도자명 : 악네따(Agneta)
출생일 : 1910년
출생지 : 한국 황해도

소속 및 신분 :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 수녀원 헌신자
모원 : 원산 수녀원
입회 : 1927년 4월 1일 입회. 법적 혼배와 남편의 사별로 헌신자로 남음

활동경력
원산 수녀원 수부
원산 본당 선교사업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차 - 1950년 5월 11일, 원산 정치보위부
2차 - 1950년 6월 24일, 함흥
순교 유형 : 피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14일
순교 장소 : 함경남도 함흥 인민 교화소
묘소 : 함흥 본당 뒷산 공동묘지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밤, 정치보위부원들이 원산 수녀원에 들이닥쳐 수녀원을 몰수하고, 외국인 수녀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하고, 한국 수녀 19명은 원산 교화소에 감금하였다. 한국 수녀들을 “게으르고 쓸모없는 인민”으로 고발하고 결혼을 강요했다. 일주일 후, 수녀원으로 돌려보냈으나 곧 일반인 복장으로 각자 근거지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② 1950년 6월 24일 함흥에서 체포되었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을 믿고 있으며, 수녀이기 때문에 서양 사람과 내통한다’는 것이었다. 체포 후 순교까지 교화소에 투옥되었다가 공산군이 퇴각하던 10월 14일에 피살되었다.

③ 1950년 10월 16일 유엔군과 한국군의 함흥 점령 후 교화소의 시신 확인 과정에서 함흥 본당 유영복(크리스티나) 회장과 주복남(비아)이 장 악네따를 발견하였다. 당시 시신을 찾아 확인하고 안장한 사람 중 한 명인 유영복 회장의 증언 : “나는 유 안젤모(필자주 : 장 악네따의 자취집 주인)의 어머니와 방 마테오(方鍾鎬, 1923. 2. 14~ ) 회장님 그리고 몇 교우들과 함께 들것을 준비하여 함흥 교화소로 달려갔다. 유 안젤모의 어머니가 들것을 들고 시신들이 있는 곳으로 가 장 수녀님의 시신을 들여다보며 손뼉을 치면서 “우리 집 어마이올시다”라고 하며 막 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신을 만지지도 않았는데 수녀님의 입에서 붉은 피가 주르르 흘렀다. 수녀님의 이마와 턱 밑은 상처가 깊이 나 있었고, 뒷골엔 도끼로 찍은 것처럼 깊은 상처가 나 있었으며,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수녀님의 모습은 어찌나 의연하셨는지! 별세하신 지 몇 시간 정도밖에 안되어 보였다. 함흥 본당은 모두 불타고 없어졌으나 수녀원과 의원의 병실은 공산당들이 끝까지 사무를 보던 흔적이 있으며 남아 있었기 때문에 수녀님의 시신을 들것에 싣고 수녀원으로 모시고 갔다. 교우 한 사람이 “장 수녀님, 마지막으로 수녀원에 들어가셨다가 가세요”라고 하며 들어가는데 그 순간 수녀님의 입에서 또 한 번 붉은 피가 흘렀다. 이렇게 하여 수녀님의 입에서는 두 번이나 피가 흘렀다. 수녀님의 몸을 만져보니까 차기만 하고 물에 오래 들어가 있던 몸과 같고 손도 오래 물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이상한 것은 벌써 돌아가신지 삼일은 더 되었을 텐데 그다지도 새빨간 피가 흘렀던 것이다. 수녀님의 장지는 성당에서 약 200m 떨어졌으며, 성당 뒤쪽의 좌측에 모시고, 병에다가 ‘장 악네따 수녀님’이라고 써넣고 병을 꼭 막아서 거꾸로 묻었다.”57)

④ 장 악네따 수녀는 일생을 다른 수녀들과 같이 착복서원, 종신서원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은 마음의 고통을 가지고 살았다. 늘 청원자복을 착용하였으며 문자 그대로 ‘일하고 기도하는’ 수녀였다.58) 기도에 대한 열성도 뛰어나 깊은 신심의 표출이 자연스러워 신자들의 교리, 예비자 교리에도 많은 공적을 쌓았다.

(6) 최병권(崔炳權, 마티아, 1908~1949?) 신부

세례명 : 마티아(Matthias)
출생일 : 1908년 3월 3일
출생지 : 한국 함경남도 안변

소속 및 신분 : 덕원 면속구 · 함흥교구 교구사제 

1935년 6월 12일 삭발례
부제서품일 및 장소 : 1937년 12월 8일 덕원 수도원에서 사우어 주교 주례로 부제품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38년 4월 2일
첫 미사 : 1938년 4월 16일, 원산 본당

학력
1921년 11월 1일 개교한 서울 신학교 최초 신입생, 유일한 비만주(간도) 출신 입학생
1930년 6월 28일 첫 소신학교 졸업생

활동경력
1938년 사제 서품 후 덕원 수도원에서 번역 활동, 독일인 수사들에게 한국어 교육.
덕원 신학교에서 역사 강의, 주일에는 덕원 본당에서 고해성사를 도왔다.
1944년 11월~1947년 10월 평양 서포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 겸 서포 본당 신부
1947년 10월 덕원 수도원 귀환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 추정
순교 일자 : 미상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로 추정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밤, 덕원 신학교 교장 로머(A. Romer) 신부 등 모든 독일인 신부, 수사와 한국인 신부들과 함께 체포. 평양 압송, 평양 인민 교화소에 구금.

② 엘리기우스 신부의 증언 : “내 감방에는 최 마티아스 신부가 함께 있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온몸에 결핵균이 퍼진 상태였다. 2년 전에 맹장염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서 고름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여러 번 간청한 끝에 우리는 때때로 휴지 몇 조각을 얻어 쓸 수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그의 상처 위에다 가져다 댔다. 그는 거의 먹을 수가 없어서 점점 더 여위어만 갔다. 간수는 그이더러 누워 있지만 말고 다른 사람들처럼 바닥에 앉아 있으라고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댔다. 그는 여러 번 실신했다. 그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그에게 몇 차례의 임종기도를 해 주고 전대사를 주었다. 때때로 그의 상태는 호전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 죽은 것도 아닌 비참한 상태였다. 끊임없는 죽음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59)

③ 8월 무렵까지 최 신부 수감이 목격되었으나, 그 후 한국인 신부들은 날짜를 알 수 없도록 비밀리에 피살되었다. 최병권 신부도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7) 엄광호 다고베르트(Enk, Dagobert, 嚴光豪, 1907~1950) 신부

세례명 : Otto Friedrich
수도자명 : Dagobert
출생일 : 1907년 9월 15일
출생지 : 독일 뮌헨(Munchen) 대교구 뮌헨(Munchen)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27년 5월,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28년 5월 14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 : 1931년 5월 17일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33년 3월 26일 상트 오틸리엔

학력
1917년후라이부르크(Freiburg i.Br.) 베르톨드김나지움(Bertholdsgymnasium) 입학
1923년 뮌헨 베텔스바헤르 김나지움(Wittelsbacher Gymnasium) 전학
1926년 3월 김나지움 졸업

활동경력
1934년 4월 2일 한국 덕원 파견
덕원 수도원 당가 신부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8년 11월 30일
순교 유형 : 피살(총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3일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소련군 진주 이전까지 덕원 수도원에서는 미사주와 적포도주, 과일주를 자체 생산하였으나, 토지개혁령 후 포도밭을 잃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48년 여름, 정부조합 조합장이 다고베르트 신부에게 포도와 과일과 설탕을 공급하여 발효를 위해 만 리터의 포도주 저장을 부탁하였고, 정부의 세금 납부도 약속하는 계약서를 작성하였다.

② 1948년 11월 30일 경찰이 탈세와 포도주 불법제조 혐의로 다고베르트 신부와 한국인 고문관 박씨를 원산경찰서로 연행했다. 다음날 박씨는 풀려났으나 다고베르트 신부는 ‘미결 구류’를 살기 시작했다. 유죄판결을 내릴 법적 근거가 없었으므로 다고베르트 신부에 대한 심리와 선고는 없었다.60)

③ 덕원 수도원에서 체포당하지 않은 잔류자들의 증언 : “주교님과 함께 일곱 명의 수도자들이 공산당원들의 감시하에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당국의 판결에 따라 원장신부님은 중범죄자로 낙인찍혀 7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고, 나머지 신부와 수사들은 각각 5년 형이 언도되었다. … 재정분야의 책임자인 다고베르트 신부는 불법으로 술을 빚었다는 죄였다.”61)

④ 엘리기우스 신부의 증언 : “마침내(필자 주 : 1949년) 8월 5일 저녁이 되자 우리는 이송되었다. …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빠스 주교님과, 루치우스 로트 원장신부,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 그레고리오 스테거 신부, 요셉 그라머 수사, 그레고리오 길크 수사는 “주범”으로 몰려 감옥에 남아 있어야 했다. … 그것은 정말 쓰라린 이별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수감기간 내내 형제들에 관한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위는 계속해서 그들의 소식을 묻고 그들을 우리에게 데려와 달라고 간청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1954년 1월, 우리가 독일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아빠스-주교님은 1950년 2월 7일에,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머지 여섯 형제들에 관해서는 오늘날까지 어떠한 말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1950년 10월, 북한군이 퇴각해야 했을 때 북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다른 포로들과 함께 총살당했다고 확신한다.”62)

⑤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 “거의 5년간의 포로생활 동안에 미국 군종신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한을 거쳐 여기에 도착된 편지와 보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 냈다. … 우리가 감옥에 남겨두어야 했던 여덟 명의 유럽인 형제들 중에 40년 동안 한국에서 가톨릭 재건활동을 했던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는 1950년 2월 7일에, 우리 신학교의 철학교수였던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1950년 10월 3일 밤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고, 그 차는 한 시간 반 뒤에 텅 빈 채로 돌아왔다. 평양 근처에서 4,500명의 죄수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살된 것도 같은 밤이었다.”63)

(8) 파스칼 팡가우어(Fangauer, Paschalis, 1877~1950) 수사

세례명 : 요한(Johann)
수도자명 : 파스칼(Paschalis)
출생일 : 1882년 1월 8일
출생지 : 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교구, 엑글핑(Egglfing)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05년 10월 15일 입회 후 법정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07년 10월 20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일 및 장소 : 1911년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학력
1898년 정원관리사 도제 입문
1904년 6월 4일 ‘바이에른주 뮌헨 정원사 협회’(Die Bayerische Gartenbau-Gesellschaft in Munchen) 인증서 취득

활동경력
1909년 11월 7일 한국 파견, 한국 성 베네딕도 수도원 창립멤버
서울 수도원의 정원과 과수원 관장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의 중국조차지 청도(靑島)에 보병으로 징집. 1919년까지 일본군 포로.
1919년 종전 후 한국으로 귀환하여 평생 성 베네딕도 덕원 수도원의 정원과 과수원 관장
1926년 가을부터 덕원 수도원 건립에 참여. 과수원과 정원 관장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0년 4월 16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에서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 기차로 옥사덕 부근 전천으로 압송하여 옥사덕 수용소에 구금, 강제노동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그는 남 돕기를 좋아하여 곳곳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그러나 병은 결국 제 길을 가기 시작했다. 만성적인 설사-쇠약-피부 수종증-복수-심장의 정지. 파스칼 수사는 매우 훌륭한 정원사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위대한 명상가였으며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몸을 바쳤던 사람이었다. 마지막 몇 주 동안에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훌륭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이러한 휴식과 명상에 대한 시간을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번 표현했다. 그는 아주 만족했고 병자 도유성사를 받은 후에 주의 부르심에 영원히 따를 준비를 하였다. 그는 1950년 4월 16일, 사백주일(부활 제2주일)에 운명하여 그의 동료 수사들 옆에 묻혔다.”64)

(9) 배 루도비꼬(Fischer, Ludwig, 裵, 1902~1950) 수사

세례명 : 카를(Karl)
수도자명 : 루드비꼬(Ludwig)
출생일 : 1902년 10월 23일
출생지 : 독일로텐부르크(Rottenburg) 교구, 운터스텔쯔하우센(Unterstelzhausen)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23년 입회, 1923년 10월 14일 법정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24년 10월 15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일 및 장소 : 1927년 10월 15일,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학력
1919년부터 제화공 장인인 부친 아래서 도제 시작
1922년 크라일스하임(Krailsheim)의 제화공 장인 뵘(Bohm)에게서 장인(匠人) 시험 응시. 자격 취득 후 고향의 형이 운영하는 제화점에서 장인으로 활동

활동경력
1925년 9월 27일 한국 파견
1928년 덕원 수도원 예비수사 지원자 사감
1929년 덕원 수도원 인쇄소 책임자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4월 28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총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11일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빌리발도 쿠겔만(Willibald Kugelmann) 신부의 증언 : “덕원 수도원 인쇄소에서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주로 종교와 관련된 책자들이 인쇄되었다. 교리문답서와 기도서 등이 주종이었지만 덕원 지방 당국의 주문을 받아 경찰과 관청의 서식 용지를 인쇄하기도 했다. 인쇄소의 책임자는 루치우스 원장신부였으며, 영업 책임자는 루드비히 수사였다. 수련수사 한 명과 청원자 한 명, 그리고 지원자 한 사람이 루드비히 수사를 돕고 있었다. 식자공은 덕원 출신의 어느 비신자였다. 3월말, 갑자기 신자 직원 한 명과 식자공이 체포당했고, 인쇄소는 폐쇄당했다. 체포 및 폐쇄 명령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1948년 말이나 1949년 초에 인쇄소에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선전문과 비밀 조직 명단이 인쇄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 신자와 식자공, 그리고 수련수사가 그 인쇄 작업에 가담했다고 했다. 정상적인 작업시간이 끝난 후 며칠 밤에 걸쳐서 행해졌다는 그 비밀 작업에 대해 영업 담당 루드비히 수사가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우리로선 들은 바 없었다. … 열흘 뒤 수련수사와 청원자도 감옥으로 끌려갔다. … 루드비히 수사에게는 4월 중순경에 미결구류가 떨어졌다.65)

② 루드비히 수사는 1949년 4월 28일 저녁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 구금되었다.66) 그는 평양에서 처음부터 격리되어 독방에 감급되었고 다른 형제들과 접촉할 수 없었다. 후에 그는 세탁부로 일했다.

③ 잔류자들의 증언 : “주교님과 함께 일곱 명의 수도자들이 공산당원들의 감시하에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당국의 판결에 따라 원장신부님은 중범죄자로 낙인찍혀 7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고, 나머지 신부와 수사들은 각각 5년 형이 언도되었다. … 인쇄소 책임자인 루드비히 수사는 사전 보고 없이 비밀 인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67)

④ “평양에 구금되어 있던 수사들은 10월 2일(필자 주 : 1950년) 자정까지, 즉 남한 군대에 의해 평양이 점령되기 17일 전까지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이날 밤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비밀리에 이송되었다. 루드비히 수사는 10월 11일 아침에서야 등에 재봉틀을 짊어지고, 체포된 다른 죄수들과 함께 강계로 이송된 것 같다. 나는 그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체포된 대부분의 죄수들이 10월 11일 살해되었다고 보고되었기 때문이다.”68)

(10) 부 일데폰스(Flotzinger, Ildefons, 富, 1878~1952) 수사

세례명 : 안드레아스(Andreas)
수도자명 : 일데폰스(Ildefons)
출생일 : 1878년 7월 20일
출생지 : 독일 뮌헨 대교구, 타이딩(Taiding)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06년 입회, 1907년 10월 4일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09년 10월 10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일 및 장소 : 1912년 11월 24일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학력
소목장 도제 수학 후 장인 시험 통과
1904년 포르츠하임(Pforzheim)의 가톨릭장인연합회(Katholischen Gesellen-Verein) 회원

활동경력
1909년 11월 7일 한국 파견, 한국 성 베네딕도 수도원 창립멤버
1911년 숭공학교 목공부 교사
수도원 작업장 책임자
서울 수도원과 덕원 수도원, 사제관, 학교의 목공 부문 전담
1938년 카푸친 작은 형제회(Kapuziner)의 첫 수도원과 성당 건립. 이로 인해 카푸친 작은 형제회 명예회원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2년 3월 20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에서 정치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 만포 수용소로 이송했다가, 한만국경을 걸어 넘었다가 다시 만포로 돌아온 후, 관문리 수용소를 거쳐 다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일데폰스 플뢰찡어 수사는 유능한 수용소 대장장이였다.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구금생활을 비교적 잘 견뎌냈으며, 내가 수용소에 왔을 때는 활발하고 일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는 발명에 재능이 많았고, 각각의 곤란한 상황에 대응해 쓸 수 있는 ‘기계’를 만들 줄 알았다. … 이 늙은 수사는 중국 땅에서 경미한 뇌일혈로 병자 도유성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만포시기의 고난을 잘 견디어 냈다. 그러나 전천수용소로 돌아와서 사람들은 그의 기운이 쇠약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몇 달 동안 그는 여기저기서 일을 하고 낫을 갈았으며, 다른 봉사활동도 했다. 그러나 점점 사람들은 그를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병실의 자기 자리에 누워서 묵주기도를 드렸다. 정신력도 쇠퇴하는 것 같았다. 밤에는 종종 헛소리를 해서 동료들을 깨웠다. … 1952년 3월 20일 평화롭고 고요하게 사망했다.69)

(11) 베드로 게르네르트(Gernert, Petrus, 1882~1949) 수사

세례명 : 요셉 발렌틴(Josef Valentin)
수도자명 : 베드로(Petrus)
출생일 : 1882년 2월 14일
출생지 : 독일 뷔르츠부르크(Wurzburg) 교구, 클라인벤크하임(Kleinwenkheim)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뮌스터슈바르작(Munsterschwarzach)
입회 : 1907년 10월 4일 수련 시작
유기서원일 및 장소 : 1909년 7월 11일, 성 루드비히 원장좌 수도원(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의 전신)

활동경력
1911년 1월 7일 한국 파견, 수도원 농업 관련 업무 관장
1927년 덕원의 새 수도원과 1931년 수도원 대성당 건립 시 건축 책임자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49년 7월 3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에서 독일 신부, 수사, 수녀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 수감자 중 1차로 선발되어 열차 편으로 옥사덕 부근 전천으로 이송되어 옥사덕 수용소에 구금, 강제노동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나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수사들이 나에게 그는 이미 감옥에서 설사를 심하게 했고 구석에 조용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기어 계속해서 기도를 했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수사들이 그를 간간이 업고 가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던, 수용소 올라가는 어려운 길이 그를 매우 쇠약하게 했다. 그는 대부분 조용히 기도하면서 수용소 안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리고 7월 2일 밤, 그는 바로 옆에 누워 있던 사람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사망했다. 그는 수용소 위에 있는 돌투성이의 산허리에 묻힌 최초의 사람이었다.”70)

(12) 마리아 프룩트오사 게르스트마이어(Gerstmayer, Fructuosa, 1898~1952) 수녀

세례명 : 마리아
수도자명 : 프룩트오사(Fructuosa)
출생일 : 1898년 2월 4일
출생지 : 독일 로텐부르크(Rottenburg) 교구, 바인가르텐(Weingarten)

소속 및 신분 : 포교 성 베네딕도회 원산 수녀원 수녀
모원 : 투칭(Tutzing)
입회 : 1921년 3월 1일
서원일 및 장소 : 1923년 2월 2일 투칭

활동경력
1926년 9월 4일 한국 파견
입국 후부터 23년간 원산 수녀원 시약소(1929년 4월부터 ‘마리아의 도움 시약소’로 명명) 간호수녀로 활동.
빈민 구호활동과 전교를 병행하며 5천 명71)에게 대세를 베풀었다.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4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2년 9월 16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4일 체포,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되어 구금

② 1949년 8월 5일 옥사덕으로 이송, 수용, 중노동

③ 수용소 주방 보조자, 바느질 방 수선인.

④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감옥에서 이미 그녀는 설사와 수종을 앓았고, 수용소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한 번도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호하고 자기를 잊어버리는 태도로 부엌일을 했으며, 수녀들에게 생기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1951년 심하지 않은 뇌일혈을 일으켜 병자 도유성사를 받은 후에 점차로 회복되고는 있었지만, … 바라던 상태의 호전은 없었으며 병은 다른 사람들에게서와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그녀가 완전히 “침대”에 눕게 되고 사람들이 그녀에게 죽음을 준비시켰을 때, 그녀는 다시 뇌일혈을 일으켰으며 의식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1952년 9월 15일 밤에72) 매우 평화롭게 사망했다. 장갑 수선을 통해 그녀에게서 끊임없이 도움을 받았던 신부와 수사들은 그녀에게 전구의 도움을 청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점차로 개선된 우리의 상황은 그녀의 전구 없이는 전혀 일어날 수 없었을 일이었다.”73)

⑤ 프룩투오사 수녀는 23년의 긴 세월을 원산 근교의 극빈자와 어린이를 치료하던 시약소에서 일하여 원산 주민들에게서 ‘독일의 유명한 박사 수녀, 살아 있는 성녀’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봉헌된 삶을 철저히 살았다. 또한 선교정신에도 투철하여 유아와 병자 5,000여 명에게 대세를 주며 순교로의 삶을 엮어나간 모범적인 수도자였다.74)

(13) 기 그레고리오(Giegerich Gregorius, 奇, 1913~1950) 수사

세례명 : 루드비히(Ludwig)
수도자명 : 그레고리오(Gregorius)
출생일 : 1913년 4월 29일
출생지 : 독일 헤르비폴 교구, 그로쓰발슈타트(Großwallstadt)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뮌스터슈바르작(Munsterschwarzach)
서원일 및 장소 : 1932년 10월 20일 뮌스터슈바르작
종신서원일 및 장소 : 1936년 1월 19일 뮌스터슈바르작

학력
1928년~1932년 전기 설비 학교

활동경력
1939년 1월 6일 한국 파견
수도원과 성당의 전기 설비 관장
수도원 운전기사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총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3일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사진기 불법 소지 및 수도원 운전기사로서 운전면허증 소지죄로 체포, 평양 압송, 구금. 징역 5년 형

② 평양교도소에서 병든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간병과 임종 수습

③ 1950년 10월 유엔군의 평양 입성 때 공산당에 의해 총살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 “거의 5년간의 포로생활 동안에 미국 군종신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한을 거쳐 여기에 도착된 편지와 보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 냈다. … 우리가 감옥에 남겨두어야 했던 여덟 명의 유럽인 형제들 중에 40년 동안 한국에서 가톨릭 재건활동을 했던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는 1950년 2월 7일에, 우리 신학교의 철학교수였던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1950년 10월 3일 밤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고, 그 차는 한 시간 반 뒤에 텅 빈 채로 돌아왔다. 평양 근처에서 4,500명의 죄수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살된 것도 같은 밤이었다.”75)

(14) 함요섭 요셉 그라함머(Grahamer, Ioseph, 咸要燮, 1888~1950) 수사

세례명 : 벤노(Benno)
수도자명 : 요셉(Ioseph)
출생일 : 1888년 6월 1일
출생지 : 독일 뮌헨 대교구, 아이젠호펜(Eisenhofen)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07년 1월 청원기 시작
수련 : 1908년 1월 13일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10년 1월 16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일 및 장소 : 1913년 3월 23일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학력
1902년 6월 1일부터 3년간 아이캬흐(Aichach)의 재단사 학교
1906년 10월 22일 아우토뮌스터(Altomunster)에서 의사면허 취득
서울의 국립병원 원장 추천으로 국립병원 및 대학병원에서 3년간 의사 실습

활동경력
1911년 1월 7일 한국 파견
서울 숭공학교 건립에 참여
수도원 작업실 관리
수도복 및 전례 예복 관장
1928년 5월부터 덕원 수도원에 공식인가 의원 개설하여 의료담당 의사로 활동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4월 28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총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3일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9년 4월 28일 간호사 구타 혐의로 체포, 평양압송, 구금. 징역 5년 형

② 1950년 10월 3일 유엔군의 북진으로 공산당이 후퇴하며 총살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 “거의 5년간의 포로생활 동안에 미국 군종신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한을 거쳐 여기에 도착된 편지와 보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 냈다. … 우리가 감옥에 남겨두어야 했던 여덟 명의 유럽인 형제들 중에 40년 동안 한국에서 가톨릭 재건활동을 했던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는 1950년 2월 7일에, 우리 신학교의 철학교수였던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1950년 10월 3일 밤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고, 그 차는 한 시간 반 뒤에 텅 빈 채로 돌아왔다. 평양 근처에서 4,500명의 죄수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살된 것도 같은 밤이었다.”76)

(15) 하연근 바실리오(Hauser, Basilio, 河連根, 1886~1950) 수사

세례명 : 마틴(Martin)
수도자명 : 바실리오(Basilius)
출생일 : 1886년 11월 10일
출생지 : 독일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 교구, 폴링(Polling)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10년 11월 7일 입회 청원, 1911년 10월 5일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13년 10월 12일 유기서원, 상트 오틸리엔

학력
1892년 5월~1899년 오버베르크키르헨(Oberbergkirchen)의 평일학교
1899년~1902년 5월 일요학교
제빵 도제 수학, 1901년~1910년까지 제빵사 보조

활동경력
1914년 5월 3일 한국 파견
서울 및 덕원 수도원 요리사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0년 2월 14일
순교 장소 :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체포, 평양압송,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 평양에서 옥사덕으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바실리우스 하우저 수사는 처음에, 수녀들이 부엌일을 맡기 전까지는 한 명의 형제와 함께 요리사 일을 했었다. … 그는 이제 그의 오랜 직책에서 벗어나 여전히 명랑하고 즐겁게, 새로이 건축 일을 하게 되었다. … 성탄절부터는 건강에 매우 조심을 했는데 수종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1950년 초부터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그는 협착감과 갈증으로 굉장한 고통을 당했다. 그리고 수용소의 음식은 그런 환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것이었다. …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 우리는 이뇨제도 침술기구도 없었다. - 우리의 훌륭한 수사 바실리우스는 1950년 2월 14일 영원한 고향으로 갔다.77)

(16) 솔라누스 헤르만(Hermann, Solanus, 1909~1950) 수사

세례명 : 루돌프(Rudolf)
수도자명 : 솔라누스(Solanus)
출생일 : 1909년 5월 19일
출생지 : 독일아우구스부르크(Augsburg) 교구, 일러베르크(Illerberg) 근처탈(Thal)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31년 2월 입회청원
서원일 및 장소 : 1933년 5월 13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 및 장소 : 1936년 6월 7일

학력
1923년~1926년 도장 도제(塗裝 徒弟, Maler-geselle) 수학
콜핑-장인조합(Kolping-Gesellenverein) 가입

활동경력
1936년 10월 11일 한국 파견
덕원 수도원과 원산 대목구 내 많은 건축물의 도색과 실내장식 담당 업무에 평생 봉사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0년 12월 13일
순교 장소 : 자강도 관문리 수용소
묘소 : 관문리 수용소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체포, 평양압송,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 평양을 떠나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그 와중에 만포로 피난한 것이 결정적 타격으로, 결국 관문리 수용소에서 추위와 영양실조로 옥사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는 키가 작고 약간은 땅딸막한 체구였는데, 옛날부터 심장이 약했다. 경찰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그렇게 힘센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항상 어려운 일을 배당받았다. 겨울에 어려운 숯 굽는 일과 나무 베는 작업, 건축 일에 가장 많이 참가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자 나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고 자기 고통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에게도 이러한 상태에서 강행되었던 만포로의 피난이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다. 동굴 같은 감옥에서 그는 대부분 구석에 늘어져 누워 있었으나 굶주림에 못 이겨 다시 자발적으로 부엌에서 일하고자 했다. 부엌에서는 그래도 무엇인가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때 그는 그의 약한 심장이 이겨내지 못해 매우 심한 장 카타르를 유발하게 된, 좋지 않은 것을 먹었던 것 같다. 12월 13일 새벽, 우리가 그의 끄르륵거리는 소리에 깨어나 그에게로 갔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단지 임종 전 도유를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는 심한 타격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전날 힐라리우스 수사가 매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죽음은 당시에 우리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가 옥사덕 수용소에서 매일 저녁 노동으로 기진맥진한 채 집으로 돌아와서는 잠시 동안이라도 경당을 찾았던, 그의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피곤에 지쳐 있는 모습, 그을린 얼굴, 깊은 명상에 잠긴 모습.”78)

(17) 허희락 힐라리오(Hoiß, Hilarius, 許喜樂, 1888~1950) 수사

세례명 : 베네딕도(Benedikt)
수도자명 : 힐라리오(Hilarius)
출생일 : 1888년 6월 27일
출생지 : 독일 뮌헨 대교구, 슐레도르프(Schledorf) 부근 운터라우(Unterau)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서원일 및 장소 : 1910년 8월 15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 및 장소 : 1913년 11월 1일

학력
초등학교 졸업 후 제차 도제(製車徒弟, Wagnerhandwerk Geselle) 수료

활동경력
1911년 1월 7일 한국 파견
숭공학교 기술 교사
원산교구와 연길교구의 본당 건물 건설 신축업무에 평생 봉사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지시로 한국 약용식물에 대해 연구하여 지식에 상당히 정통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0년 12월 12일
순교 장소 : 자강도 관문리 수용소
묘소 : 관문리 수용소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체포, 평양압송, 구금

② 1949년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그 와중에 만포로 피난한 것이 큰 타격으로, 결국 관문리 만포 수용소에서 추위와 영양실조로 옥사.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힐라리우스 호이스 수사는 감옥에서부터 지속적인 설사로 인해 매우 약해졌으며, 다리가 부었기 때문에 수용소에서는 처음부터 대부분 앉아서 쉬운 일만 했다. 그는 약용식물에 정통해 있었으며,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의 희망에 따라 특히 한국의 식물 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나에게 유용한 충고를 많이 해주었으며, 할 수 있는 한 자주 나에게 식물에 관해 설명을 해주었고, 내가 돌아다니면서 그런 식물을 집으로 가져오면 맞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는 아주 열심히 차를 채취했으나 어떠한 차도 그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자유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러한 세밀한 작업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거칠고 억센 큰 손으로 온갖 종류의 아름답고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의 첫 번째 감실과 미사 때 쓰는 나무 촛대는 그의 경건함뿐 아니라 그의 예술성까지 증명해 주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담배통과 ‘귀향여행’을 위한 산책용 지팡이 등을 만들었다. 만포로의 피난은 그에게도 앞의 까누토 신부 기록에서 얘기한 것과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그의 설사는 좁은 참호에서 안으로 스며들어 오는 추위로 인해 위험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해 그에게는 더욱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1950년 12월 12일 새벽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에게는 진정한 구원을 의미했다. 그의 시신도 매장을 하기 위해 한국인 포로들이 운반해 갔다. 그러나 다음날 우리에게 그의 무덤을 확인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이 위대한 명상가를 분명히 잘 받아들이셨을 것이다.”79)

(18) 김봉식(金鳳植, 마오로, 1913~1950) 신부

세례명 : 마오로(Maurus)
출생일 : 1913년 8월 24일
출생지 : 만주 훈춘(瑃春) 노로팟청(Noro-Patteung)

소속 및 신분 :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연길 수도원
입회 : 1938년 3월 23일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39년 3월 26일 연길 수도원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42년 4월 5일 연길 수도원 성당, 백 테오도르 주교 아빠스 주례로 수품

학력
덕원 신학교 예비과, 중등과, 철학과 졸업

활동경력
1942년 사제 서품 후 팔도구 본당 보좌신부
훈춘 본당 보좌신부
도문 본당 주임신부
1947년경부터 강원도 이천 본당을 주 근거지로 하고, 함경도를 왕래하며 사목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50년 6월 24일, 원산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9일
순교 장소 : 원산 와우동 형무소 뒷산 대방공호
묘소 : 원산 성당 묘역
순교 행적 :
① 1945년 이후 소련군의 연길 점령 후 연길 선교사들이 체포되자 김봉식 신부는 사우어 주교 아빠스에게 청하여 선교지역을 옮겨, 주로 원산 부근의 신부 부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사목하였다.

② 1950년 6월 24일 원산에서 체포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구금

③ 유엔군의 진격으로 패주하던 공산군이 1950년 10월 9일 김봉식 신부와 춘천교구 소속 이광재 신부를 위시한 400여 명 인사들을 와우동 형무소 뒷산의 대방공호 속에서 학살하고 시신을 방치하였다.

④ 이 살육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한준명(韓俊明) 목사의 증언에 따라 원산 신자들이 김봉식 신부 시신을 수습하여, 10월 23일 유엔군 군종신부의 집전으로 장례미사를 거행하고, 원산 본당 뒷동산 본당묘지에 안장.

⑤ 한준명 목사의 증언 : “와우동 형무소 특사감방(特舍監房)에서 나는 젊은 김봉식 신부와 함께 갇혀 있었다. 신고산에서 원산 이북까지 다른 신부들이 피검된 후, 신부 부재지역을 찾아다니며 교우들을 돌보고 있다가 피체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평시에 친분이 있던 탁(Fabian Damm) 신부, 권(Gabriel Frommer) 신부 등의 이름을 알리자 매우 나를 반가워했고, 그는 또한 동만주 훈춘에서 컸다는 얘기를 해서 나 자신 북간도에서 12년간 성장한 몸이라, 나는 이 젊은 신부와 퍽 정답게 한방에서 지냈다. 하루는 김 신부가 밥 주는 창틈으로 목을 내어 밀고 옆방의 또 한 분 신부(양양에서 온 이광재 신부)를 불러 서로 인사하며 무슨 약속을 하고, 그 후로는 서로 자주 그 창틈을 통해 라틴어로 기도하는 것을 목도할 수 있었다. … (10월 8일 밤 10시경) 우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니 탁자 위에 흰 궤짝이 놓여 있고, 그 궤짝 속에서 밧줄을 꺼내 한 사람 한 사람 뒷짐을 지워 묶는데 그 밧줄 길이는 약 2미터, 한 사람 한 사람 묶은 것을 다시 네 사람씩 명태 꿰듯이 한 뀀에 단단히 연결시킨다. 김 신부는 내 우편에서 결박을 당하면서 나와 마주섰는데, 눈을 감고 입을 놀려 기도를 드리는 것이 보였다. 간수 한 놈이 “야, 그 자의 입을 검사해봐. 입에 칼이라도 물고 있나?” “아니올시다.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 흥, 오늘 밤에 너희 하나님 맛을 톡톡히 볼걸. 하하하하…” 늘 그들은 이런 모양으로 평소에도 조롱하던 것이니 우리는 별다른 느낌 없이 심상히 넘겨버렸으나 김 신부는 딴 예감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 (산중턱을 지나) 좁은 참호를 옆 걸음을 빠져나가 폭이 7, 8척 되는 넓은 동굴을 우편(右便)으로 4인 일렬 행으로 들어갔다. … “이 시체 위에 올라가 엎드려!” 하는 호령이 들렸다. 누구 하나 반항의 소리도 없이 시체 위에 올라 엎드린다. 우리 네 사람 한 줄은 벌써 네 겹으로 쌓인 시체 위에 올라앉은 셈이 되었다. 이미 간수 놈의 단총(短銃)은 불을 뿜기 시작했다. 간수들 위치에서 보아 좌편 첫 사람부터 쏘았다. … 이 동굴에서 발굴된 시체만 해도 모두 298구(具)였다. 물론 이중에 이 신부와 김 신부의 시체도 끼어 있었음은 물론이다.”80)

(19) 김종수(金宗洙, 베르나르도, 1918~1950) 신부

세례명 : 베르나르도(Bernardus)
출생일 : 1918년 2월 12일
출생지 : 만주 연길 삼원봉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덕원 수도원
서원일 및 장소 : 1943년 9월 8일 덕원 수도원
차부제 : 1946년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48년 4월 6일 덕원 수도원81)
첫 미사 및 장소 : 1948년 5월 2일 덕원 수도원 성당

학력
1935년 초 덕원 신학교 입학

활동경력
1947년 3월∼1948년 3월 수련장 보좌
1948년 사제 서품 후 부당가로 소임 시작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3일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의 모든 독일인 신부, 수사, 한국인 신부들이 체포될 때 함께 피랍,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 구금

② 유엔군의 북진으로 1950년 10월 3일 공산군이 퇴각할 때 피살된 것으로 추정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 “거의 5년간의 포로생활 동안에 미국 군종신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한을 거쳐 여기에 도착된 편지와 보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 냈다. … 우리가 감옥에 남겨두어야 했던 여덟 명의 유럽인 형제들 중에 40년 동안 한국에서 가톨릭 재건활동을 했던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는 1950년 2월 7일에, 우리 신학교의 철학교수였던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1950년 10월 3일 밤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고, 그 차는 한 시간 반 뒤에 텅 빈 채로 돌아왔다. 평양 근처에서 4,500명의 죄수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살된 것도 같은 밤이었다.”82)

(20) 김동철(金東哲, 마르코, 1913~1950?) 신부83)

세례명 : 마르코(Marcus)
출생일 : 1913년 1월 3일
출생지 : 한국 경상남도 부산시 영주동

소속 및 신분 : 덕원 면속구 · 함흥교구 사제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42년 3월 덕원 수도원에서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수품

학력
언양 공립보통학교 졸업
일본에서 중등학교 과정 수학
일본 와세다 대학 전기공과 중퇴
덕원 신학교 졸업

활동경력
와세다 대학 재학 시 도쿄 대교구장 샴봉 대주교의 비서 겸 주교관 수위
1942년 사제 서품 직후 덕원 신학교 교수
1944년 12월~1946년 10월 평안남도 안주(安州) 본당 주임신부
1945년 4월 9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 설치
8월 15일 해방 후 안주 본당에 ‘우리말 공부 교실’ 개설
1946년 10월~1950년 6월 27일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枇峴) 본당 주임신부. 이 동안 인민위원회의 본당 부설 ‘성심학교’(聖心學校) 교사 징발에 저항하다가 감금, 석방
1948년 8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비현 분원 다시 시작

저술활동
1938년 〈形而上學의 方法論〉 ; 《신우》 제6호 게재 논고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50년 6월 27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행방불명
순교 일자 : 미상
순교 장소 : 미상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4일,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의 불법 납치를 시작으로 교구 내 성직자들이 연이어 체포되자 김동철 신부도 머지않아 자신도 수난의 때가 오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다른 신부 피랍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성체를 거두는 일을 거듭하였다. 또한 본당에 단 한 명의 신자가 남아 있어도 자신은 교회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굳은 결의를 신자들에게 표명하며 용기를 주었다.

② 1950년 6월 27일 밤 평양교구의 마지막 사제로서 체포, 연행. 이후 행방불명

(21) 김이식(金利植, 마르띠노, 1920~1950) 신부

세례명 : 예로니모(Hieronymus)
수도자명 : 마르띠노
출생일 : 1920년 7월 20일
출생지 : 한국 강원도 양양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덕원 수도원
입회 : 1944년 3월 법정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45년 3월 19일 덕원 수도원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48년 12월 26일 덕원 수도원,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수품

학력
1938년 춘천 지목구 소속 신학생으로 덕원 신학교 고등과를 마친 후 철학과 수료

활동경력
덕원 본당 보좌신부로 소임 시작, 뛰어난 체력을 바탕으로 고지에 있는 덕원 본당 공소 등 방문 활동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3일로 추정
순교 장소 : 평양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의 모든 독일인 신부, 한국인 신부들이 체포될 때 함께 피랍,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 구금
당시 김이식 신부는 사제 서품 후 얼마 되지 않아 정치보위부원의 신부 목록에 빠져 있었기에 체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도 신부”라고 스스로 체포당했다. 평소 순교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② 유엔군의 북진으로 1950년 10월 3일 공산군이 퇴각할 때 피살된 것으로 추정.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 “거의 5년간의 포로생활 동안에 미국 군종신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한을 거쳐 여기에 도착된 편지와 보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 냈다. … 우리가 감옥에 남겨두어야 했던 여덟 명의 유럽인 형제들 중에 40년 동안 한국에서 가톨릭 재건활동을 했던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는 1950년 2월 7일에, 우리 신학교의 철학교수였던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1950년 10월 3일 밤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고, 그 차는 한 시간 반 뒤에 텅 빈 채로 돌아왔다. 평양 근처에서 4,500명의 죄수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살된 것도 같은 밤이었다.”84)

(22) 길세동 루페르트(Klingseis, Rupert, 吉世東, 1890~1950) 신부

세례명 : 요셉(Josef)
수도자명 : 루페르트(Rupertus)
출생일 : 1890년 1월 5일
출생지 : 독일 뮌헨 대교구, 뮌헨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10년 가을
서원일 및 장소 : 1911년 10월 8일 상트 오틸리엔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15년 7월 16일 딜링겐 신학교에서 링크(Link) 주교 집례로 수품
첫 미사 : 1915년 7월 25일 뮌헨 마리아 도움(Mariahilf) 본당

학력
1904년부터 마인(Main) 강변의 성 루드비히(St. Ludwig) 소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도중,
1910년 가을 상트 오틸리엔 인문중고등교육과정(김나지움)으로 옮겨 최고성적으로 졸업
로마 성 베네딕도 수도원 성 안셀모(Sant’ Anselmo) 국제대학 철학부 졸업
1918년 뮌헨 대학교 신학부 수학, 보임커(Baumker) 교수 지도로 철학박사 학위 취득

활동경력
1922년~1930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철학대학 학장, 철학 강의. 5년 동안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부원장
1930년 11월 9일 한국 파견,
이후 덕원 신학교에서 철학, 라틴어, 교회사 가르치며 신학생 양성, 피정지도

저술활동
1933년 〈哲學에 對하여〉, 덕원 신학교 교지 《신우》 창간호 게재 논고
1934년 〈최면술과 암시에 대하여〉, 《신우》 제2호 게재 논고
1936년 〈人物鑑識에 對하여〉, 《신우》 제4호 게재 논고
1938년 〈現代 가톨릭 哲學〉, 《신우》 제6호 게재 논고
1939년 〈唯物論과 靈魂의 存在〉, 《신우》 제7호 게재 논고
1940년 국민 계몽 총서 제1권 《인간의 영혼은 물질인가 정신인가》(5천 부 간행)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9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0년 4월 6일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용산리(大同郡 斧山面 龍山里) 공동묘지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8일 밤, 덕원 수도원에 들이닥친 수십 명의 정치보위부원들에 의해 사우어 주교 아빠스, 수도원장 로트 신부, 부원장 슐라이허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원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 구금

② 이후 평양형무소 구금 수도자들이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나 사우어 주교 아빠스 포함 총 8명의 독일인 수도자와 한국인 신부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에 남겨졌다. 공산당의 재판결과 루페르트 신부는 5년 징역형을 선고. 죄명은 공산주의에 역행하는 서적 《인간의 영혼은 물질인가 정신인가》의 저술, 출간85)

③ 한 한국인 신학생의 관찰과 믿을 만한 사람들의 증언 : “체포된 초기에는 독일 및 방인 신부와 수사들이 독방에 감금되어 있어서 서로 어떤 연락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4월 5일에 그들은 같은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그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 루페르트 신부의 생명이다 되어가는 것을 느꼈을 때, 의사인 요셉 수사는 식어가는 육체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죽어가는 신부 바로 곁에 누웠다. 원장 신부는 그를 자신의 옷으로 덮었다. 루페르트 신부의 사망 원인은 굶주림과 동상이었다. 그는 죽으면서도 입술에 위안 받은 사람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원장 신부는 교도관에게 어떠한 경우에라도 시신을 신자들에게 넘겨줄 것을 부탁했다. 이 성스러운 철학자는 4월 6일 아침 10시에 운명했다. 성목요일이었다. 그의 무덤은 우리 손으로 좋은 상태로 보존하였다.”86)

④ 당시 평양 인민 교화소와 교회 측의 연락 담당자였던 임 곤라도 수사의 증언 : “이로부터(필자 주 : 신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의 선종) 2개월이 지난 4월 6일 덕원 신학교의 교수인 철학박사 길 루페르트 신부님이 옥사하였다. 길 신부님의 옥사 소식을 약 1개월 후에 전해들은 나와 장 안토니오 수사, 오 이멜다 수녀는 삽을 들고 심야에 길 신부님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의사 노씨87)의 증언에 의하여 묘소는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으니 노씨의 증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감방에서 길 신부가 선종하였을 때 원장 신부가 자기가 입었던 검은 바지를 벗어서 길 신부가 입고 있던 죄수복과 바꾸었다. ‘죄 없이 죽은 사람이 묻힐 때까지 죄수복을 입고 묻히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하얀 손수건을 꺼내 실려 나가는 시체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이런 숭고한 사랑의 행위를 보고 ‘저들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가 저렇듯이 사랑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감동했다’고 하였다. 의사 노씨의 증언대로 공동묘지에 도착하여 새 무덤 중에 첫 번째로 판 묘지가 요행이 검은 바지의 시신이었고, 또 흙을 헤치고 얼굴을 보니까 흰 손수건이 덮여 있었는데 손수건에는 길 루페르트 신부님의 수도원 호수인 ‘273번’이 씌어져 있었기 때문에 의심 없이 그 시신을 신 보니파시오 주교의 묘소 근처로 옮겨 묻었다. 길 신부님의 무덤에는 고무신 한 짝을 그 봉분 중간에 묻어서 표시를 해놓고 허둥지둥 인흥리 집으로 달려왔다.”88)

(23) 구대준(具大俊, 가브리엘, 1912~?) 신부

세례명 : 베드로
수도자명 : 가브리엘(Gabriel)
출생일 : 1912년 4월 27일
출생지 : 한국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소속 및 신분 : 덕원 자치 수도원구 · 함흥교구 사제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40년 3월 25일 덕원 수도원 성당,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수품

학력
만 8세에 어의동보통학교(於義洞普通學校, 현 효제초등학교) 입학
1926년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부설 신학교 입학
1927년 이후 덕원 신학교에서 학업 계속

활동경력
1940년~1942년 한국인 최초의 덕원 신학교 학감(學監)
1942년~1949년 함경남도 흥남 본당 주임신부. 당시 흥남 포로 수용소의 연합군 포로들을 찾아가 성사 집전
일제 말기의 사설학원 폐지 압력에 굴하지 않고 해성(海星)학교 계속 운영
1944년 사제관 2층에 대건의원(大建醫院) 개설하여 빈민의료 사업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회령 본당의 파렌코프(W. Farrenkopf) 신부가 소련군에게 피살되고, 1949년 1월 25일 계림 본당의 치머만(F. Zimmermann) 신부가 사망하자 두 본당의 신자들을 돌보기 위해 자원하여 주임 사제로 부임

저술활동
1936년 〈意識은 무엇인가〉, 덕원 신학교 교지 《신우》 제4호 게재 논고
1937년 〈聖 토-마스 哲學의 史的考察과 將來展望〉, 《신우》 제5호 게재 논고
1938년 〈성 바오로의 그리스도 神秘體驗〉, 《신우》 제6호 게재 논고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 혹은 옥사 추정
순교 일자 : 미상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9년에 월남을 계획하던 동생에게 “저 독일인 성직자들은 고국도 버리고 한국에 와서 이 고초를 겪는데 내야 내 땅, 내 교구, 내 본당, 내 교우들이 있는데 이를 버리고 가기는 어디를 가느냐?”고 잘라 말하였고 북한에 남았다.89)

② 1949년 5월 10일 시작하는 원산 수녀원의 연례 피정을 지도하기 위해 갔다가 5월 11일 밤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 5월 13일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 수감

③ 구 신부는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함께 격리된 작은 감방에 있었다. 1949년 8월 5일경 구 신부는 무척 쇠약한 상태에 있던 사우어 주교 아빠스에게 병자성사를 거행했다. 이 목격담이 그에 대한 마지막 증언이다. 그 이후의 행방은 알려진 것이 없다. 피살 혹은 옥사가 분명하다.

(24) 이재철(李載喆, 베드로, 1913~1950) 신부

세례명 : 베드로
출생일 : 1913년 6월 27일
출생지 : 한국 서울

소속 및 신분 : 덕원 면속구 · 함흥교구 사제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40년 3월 25일 덕원 수도원 성당, 사우어 주교 아빠스 주례로 수품

학력
덕원 신학교 졸업

활동경력
1945년 9월 함경북도 청진 본당 주임 바인거(Bainger, M. 方仁建) 신부가 병사하자 제2대 주임신부로 부임. 강론을 잘 해서 키케로(Cicero)라는 별칭을 얻었다.
1949년 5월, 함흥교구와 덕원 면속구소속 사제 대부분이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자 홀로 1년 여간 청진, 회령, 웅기, 나남, 성진 등지 함경도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12km를 벗어나지 못하는 북한 당국의 금족령에도 불구하고 순회성사를 집전하다가 후암동 내무서에 한 주일 동안 구류당한 적도 있다.

저술활동
1936년 〈氣質에 對한 心理學的 考察〉, 덕원 신학교 교지 《신우》 제4호 게재 논고
1938년 〈내가 본 世界的 二大人生觀〉, 《신우》 제6호 게재 논고
1939년 〈내가 본 世界的 二大人生觀(承前)〉, 《신우》 제7호 게재 논고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50년 6월 25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 추정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초
순교 장소 : 청진항 등대로 추정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당시 신학생 정환국(알로이시오) 신부(부산교구, 1956년 3월 19일 서품)의 증언 : 이재철 신부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2시 30분경 청진 본당에서 체포되었다.90)

② 1950년 당시 청진 본당 여전교회장 김 마리아의 증언 : “신 주교님과 많은 수도자들이 행방불명된 후 이재철 신부님은 청진, 회령, 웅기, 나진, 성진 등 성교회를 돌보아야만 했습니다. 신부님과 저희들은 금족령이 내렸기 때문에 성사를 주려고 30리를 외출하면 반드시 내무서원이 한 명씩 따라다니며 감시를 하는데도, 한 달에 한 번은 필사적으로 순회를 하여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습니다. … 9월도 지나 10월 12일 어떤 노동당원으로 있던 교우로부터 종교단체의 모든 인사들(신부와 목사)은 등대에서 총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후 약 1주일 쯤 되어 등대 근처 굴에서 80명이나 되는 많은 종교인을 총살시킨 가운데서 요행히 살아 돌아온 두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먼 길을 더듬어 그 사람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신부님의 소식을 물어보니 같은 날 종교단체의 인사들도 모두 형무소에서 추럭에 실려 해변으로 끌려나왔다 합니다. 그날 밤 10시쯤 두 사람씩 묶은 채 80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했다는 것입니다.”91)

(25) 이춘근(李春根, 라우렌시오, 1915~1950) 신부

세례명 : 스테파노(Stefanus)
수도자명 : 라우렌시오(Laurentius)
출생일 : 1915년 3월 8일
출생지 : 한국 경기도 양주군 남면 신암리 272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덕원 수도원
입회 : 1941년 덕원 수도원 입회
서원일 및 장소 : 1942년 7월 26일
종신서원 및 장소 : 1945년 8월 15일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39년 6월 24일 서울 명동 성당에서 라리보(Larribeau) 주교 주례로 수품

학력
1926년 서울 소신학교 입학

활동경력
1939년 황해도 사리원 본당 보좌신부
1940년 7월~1943년 경기도 장호원 본당신부
1945년 종신서원 후 덕원 신학교 감목 겸 교사
1948년 10월 평안남도 서포 성당 주임신부 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지도신부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50년 6월 25일 12시경,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총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5일
순교 장소 : 평양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50년 5월 14일 평양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공산정권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수녀원 건물 일체가 몰수되자 서포 본당 소속 순안 공소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성 베네딕도회 수사인 동생 이 브루노 수사가 서포 수녀원에서 만나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이춘근 신부는 “내가 이 교우들을 버리고 어찌 떠나겠는가? 너나 떠나라. 나는 치명하겠다. 천당 가서 보자”고 말하였다.

② 이춘근 신부는 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덕원 수도원 사제들과 평양교구의 홍용호 주교를 비롯한 신부들이 평양 인민 교화소에 수감되어 있는 것을 알고 교화소 의무관 노재경(盧載敬)을 포섭하여 감옥의 성직자 동태를 살피고, 극비리에 이들에게 필요한 약품을 전달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이 일을 덕원 수도원 해산 후 평양에 와 있던 이시도르 수사에게 맡겼으나 그의 신변이 위험해지자 덕원에 있던 임 곤라도 수사가 대신 맡도록 하여, 후에 사우어 주교, 루페르트 신부 등의 무덤을 이장하고 표시할 수 있게 하였다.92)

③ 1950년 6월 25일 12시경에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
성 베네딕도회 임 곤라도 수사의 1978년 5월의 증언 : “6월 25일은 마침 주일이었으므로 임 곤라도 수사는 미사참례와 아울러 이 신부에게 보고할 일도 있어서 순안 공소로 갔다. 공소에 도착하자 어쩐지 주변 분위기가 살벌한 느낌이 들어 신자 한 사람을 붙잡고 까닭을 물으니 정치보위부원들이 이 신부를 연행해 가려고 와있다는 것이었다. … 한참 뒤 이 신부는 임 수사를 불러 “난 이제 마지막인 것 같소. 이젠 지금까지 해오던 일(인민 교화소에 수감된 성직자들의 소식을 살피고 돌보는 일)도 더 이상 못하게 되었소. 그리 알도록” 하고 말하였다. … 이 신부가 독촉하여 임 수사는 그의 권유대로 순안 공소를 떠났는데, 평양 기림리에 와서 이날 오후 3시경에 끝내 이 신부가 연행되어 간 소식을 듣게 되었다.”93)

④ 1950년 10월 5일 유엔군의 진격으로 후퇴하던 북한군에 의해 평양에서 총살당했다고 추정된다.

⑤ 1950년 11월 27일 명 디다고(Myeong Didacus) 수사는 당시 평양 인민 교화소와 교회의 연락 업무를 맡고 있던 평수사 임 곤라도(Lim Conradus) 수사와 평양에서 4일을 함께 지냈는데, 임 곤라도 수사는 1950년 10월 5일에 신부들이 처형되었다는 말을 들었고 이때 이춘근 신부도 함께 피살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왜관 수도원의 황 다미아노 신부(Hwang Damianus)도 동의하고 있다.94)

(26) 노안락 에우제비오(Lohmeier, Eusebius, 盧安樂, 1897~1951) 수사

세례명 : 마시밀리안(Maximilian)
수도자명 : 에우제비오(Eusebius)
출생일 : 1897년 2월 12일
출생지 : 독일 아우구스부르크 교구, 메링(Mering)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14년 입회, 1916년~1918년까지 군 복무로, 1919년 3월 21일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20년 4월 5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일 및 장소 : 1923년 4월 5일

학력
상트 오틸리엔의 목공부 생도로 수학

활동경력
1924년 3월 20일 필리핀 디날루피안(Dinalupihan)의 상 베니토(S. Benito)로 파견
1924년 9월 3일 한국 입국, 서울 백동 베네딕도 수도원에 도착
건축가로서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 건립, 목공, 철공, 철근 콘크리트 일 등 담당
1938년 9월 23일의 덕원 신학교 화재 후 신축공사 공사 감독 담당
평양 관후리 주교좌 대성당 설계, 공사 지휘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1년 9월 1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에 덕원 수도원에서 체포,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 노역을 위한 선발대로 옥사덕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동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에우제비우스 로마이어 수사는 거인 같은 체구의 목수였고, 수용소에서의 굶주림으로 약해지기 전에는 얼마나 무거운 나무 밑둥을 옮길 수 있는지 종종 자랑하곤 했다. 수용소 생활 첫해에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해충과 불결함으로 인한 화농성 피부농종을 심하게 앓았다. 만포 시절에 그는 심하게 동상에 걸려서 거의 모든 발가락의 피부가 벗겨지고 두 개의 발가락에서는 관절 마디가 드러났다. 만포에서 돌아온 이후에 그는 양 우리와 마구간 짓는 일을 했는데, 이때는 비교적 건강이 좋았으며 비교적 환경에 적응을 잘 하는 것처럼 보였다(굶주림에 관해서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그는 혹심한 더위와 가장 어려운 잡초 뽑는 기간에 농사일을 하게 되었으며, 이 일이 그를 매우 지치게 했다. 그는 자주 현기증과 등의 통증을 호소했으나 자기 병의 증세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었다. 그는 가장 적게 설사를 앓았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8월 중순 그는 콜레라와 비슷하게 진행된 급성 장 카타르에 걸리게 되었다. 적당한 식이요법과 강장제가 있었다면 그를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미 아주 수척해진 육체는 급성적인 발병을 더 이상 감당해 내지 못한다. 나 자신도 그 시기에는 들에서 일을 해야 했는데, 내가 9월 1일 11시경에 갑자기 수용소로 불려왔을 때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채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는 집에서 약간 떨어진 화장실로 가는 도중에 쓰러졌으며, 그의 동료들이 그를 중환자용 방으로 데려다놓았던 것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를 좋아했다. 그의 평온하고 어떤 일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태도는 수용소 생활의 시달림 속에서 종종 우리를 유쾌하게 했다.”95)

(27) 정양리 마르코(Metzger, Markus, 丁洋利, 1878~1949) 수사

세례명 : 시몬(Simon)
수도자명 : 마르코(Markus)
출생일 : 1879년 1월 26일
출생지 : 독일 아우구스부르크 교구, 모나트샤우젠(Monatshausen)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897년
서원일 및 장소 : 1900년 10월 14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 : 1923년 4월 5일

활동경력
1903년∼1905년 동 아프리카 파견. 그러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여 귀환
1911년 1월 7일 한국 입국
1931년 덕원 수도원 건물 관리 책임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49년 8월 3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에 덕원 수도원에서 체포,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에 노역을 위한 선발대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마르쿠스 메쯔거 수사는 내가 수용소에 왔을 때 이미 심하게 부어 있었다. … 나날이 그의 부기는 심해졌고 힘은 떨어졌다. … 음식도 맛이 없었고, 갈증은 그를 끔찍이도 괴롭혔다. 가지고 있던 유일한 약품인 캠퍼 주사도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7월말에 그에게 심한 탈수현상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힘을 요구했다. 그는 겸손하고 고매한 그의 성품대로 다른 사람을 성가시게 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누군가 그를 부축하고자 하면 단호하게 거절하고 마지막까지 몸을 끌고 집 뒤 화장실로 갔다. 8월 2일에 그 낡은 헛간이 “옮겨져야 했다.” 그래서 그는 아침 10시부터 오두막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날은 그에게는 완전한 순교의 날이었다. 저녁에 내가 잠자리에 들 무렵 그는 비교적 생기가 돌고 꽤 유쾌한 모습이었다. 자정이 지나서 그는 밖으로 나가야 했고, 늘 그런 것처럼 혼자서 해보았다. 헐떡이며 고통스러워 신음을 하면서 그는 돌아오다 집 앞에서 쓰러졌다. 그걸 알고 옆방에 있던 내가 깨어나 그에게 급히 달려갔을 때 그는 이미 “두 팔과 두 다리로” 그의 자리로 기어갔다. 맥박은 아주 약하면서 빨랐다. 캠퍼 주사도 효과가 없었다. 10분 후에 그는 내 팔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신부들이 곧 올 것이라는 소식에 그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는 성스러운 노자성체를 그렇게도 열망했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충실한 종을 먼저 당신에게로 소환하셨다. 8월 6일, 체포된 동료들이 마지막으로 이송되어 왔을 때 그는 이미 묻혀 있었다.”96)

(28) 오이근 에우제니오(Ostermeier, Eugenius, 吳利根, 1885~1949) 수사

세례명 : 미카엘(Michael)
수도자명 : 에우제니오(Eugenius)
출생일 : 1885년 9월 17일
출생지 : 독일 뮌헨 대교구, 뮌헨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평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04년 말
서원일 및 장소 : 1907년 2월 3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일 : 1910년 2월 3일

학력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정원사 교육 받음

활동경력
1912년 9월 1일 한국 입국
서울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대 포도원 성공적으로 조성, 관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중국의 독일 조차지 청도로 징집되어 간호병으로 근무
귀환 후 덕원 수도원에서 전국의 미사주를 충당할 만한 포도원 조성과 포도주 제조에 성공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49년 9월 14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에 덕원 수도원에서 체포,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에 노역을 위한 선발대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오이겐 오스터마이어 수사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부터 병약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계속되는 노동을 더 이상 계속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 공동체의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수용소 주위에 맑게 졸졸 흐르는 실개천에서 금을 채취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국의 많은 지역에는 금을 함유하고 있는 모래가 있었다.) 그는 64세나 되었기 때문에 경찰은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기구를 만들려고 하는 동안에 그의 장 질환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오랫동안 그 상태는 이질처럼 보였다. 병리학적인 조사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모습이 눈에 띠게 초췌해졌을 때 나는 위암과 같은 소화기 종양이라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고, 말년의 연구가 나의 그런 생각을 굳어지게 했다. 오이겐 수사는 순수하고 경건했으며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제물로 바쳤다. 9월 12일, 임종의 방 앞에서 수녀들이 “성모 성가”를 불렀을 때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1949년 9월 14일에 사망했다. 그는 탁 트인 들판 위 가을의 푸른 나뭇가지 밑에 안치되어 산에 있는 그의 죽은 형제들 곁에 묻혔다.”97)

(29) 오 쿠니베르트(Ott, Kunibert, 吳, 1912~1952) 신부

세례명 : 블라시우스(Blasius)
수도자명 : 쿠니베르트
출생일 : 1912년 7월 2일
출생지 : 독일 아우구스부르크 교구, 에델슈테텐(Edelstetten)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서원일 및 장소 : 1934년 5월 14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일 : 1937년 5월 17일
서품일 및 장소 : 1939년 4월 30일 덕원 수도원 성당

학력
1923년 상트 오틸리엔 세미나 입학
1933년 딜링겐에서 김나지움 졸업
전시에 군대징발 위험 때문에 1937년 덕원 신학교 철학부에서 상트 오틸리엔과 뮌헨에 이은 학업 계속, 수료

활동경력
1937년 8월 29일 한국 파견
1939년 신고산 본당 주임신부 및 수도원 당가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2년 6월 14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에 덕원 수도원에서 체포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에 노역을 위한 선발대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쿠니베르트 오트 신부는 폐가 약간 약했는데도 처음에는 수용소에서 건강을 잘 유지했다. 우리 모두는 그를 쾌활하고 항상 웃는 마차꾼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만포의 고난이 그를 지치게 만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는 항상 병약한 삶들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때때로 심하게 부어올랐고 심한 심장협착으로 고통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그는 영웅적으로 적을 사랑했고, 화해를 이루려 노력했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는 엘리기우스 신부가 1951년에 그의 자리를 내놓은 이후에 그를 총책임자로 선출했다. 사람들은 또 이 직책을 통해 그를 더 쉽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쿠니베르트 신부를 나름대로 존중했던 소장조차도 이러한 희망을 표명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쿠니베르트 신부를 자기의 건강에 유의하도록 설득시킬 수 없었으며(얼마나 자주 그는 숨을 헐떡이며 들일꾼들에게 산으로 무거운 음식을 가져다주었던가),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기꺼운 각오와 온순함으로 인해 경찰에게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평온하고 즐거워했으며, 그의 밝고 순진한 웃음이 종종 수용소 전역에 울려 퍼졌다. 그가 가고 나서 우리는 얼마나 쓸쓸해했던가. 나는 그의 병을 심한 심장-각기라고 생각했다. 심한 발작을 두 번 한 이후에 그는 도유성사를 받았는데, 그것이 죽기 약 일주일 전이었다. … 6월 13일 금요일에 그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화장실에 갔으며, 두 시간 후에 피를 토했고, 격렬한 상복부의 통증으로 쓰러졌다. 내가 갔을 때 그는 말했다. “이번에는 이루어질 거예요.” 그의 말은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을 의미했다. … 6월 14일 아침 5시 반, 미사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고통을 끝냈다. 그의 죽음은 우리 공동체에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을 남겨 놓았다.”98)

(30) 박빈숙(朴彬淑, 루시아, 1919~1950) 수녀99)

세례명 : 안젤라(Angela)
수도자명 : 루시아(Lucia)
출생일 : 1919년 10월 14일
출생지 : 한국, 평안남도 순안

소속 및 신분 :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모원 : 원산 수녀원
입회 : 1938년
서원일 및 장소 : 1943년 6월 22일 원산 수녀원

활동경력
수련자로 있는 동안 음악교사 자격증 취득
1949년 공산당에 의해 고향으로 강제 귀향 당한 후 공산당 회의실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일주일에 세 번씩 교리와 성가를 가르쳤다.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50년 9월 24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 추정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11일
순교 장소 : 평안남도 순안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밤, 정치보위부원들이 원산 수녀원에 들이닥쳐 수녀원 몰수, 외국인 수녀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 한국 수녀 19명은 원산 교화소에 감금. 한국 수녀들을 “게으르고 쓸모없는 인민”으로 고발하고 결혼을 강요하였으며. 일주일 후 수녀원으로 돌려보냈으나 곧 일반인 복장으로 각자 근거지로 돌아가도록 명령하였다. 박 루시아 수녀는 고모 박 골롬바 수녀, 작은 고모 박 올리바 수녀와 함께 고향 순안으로 귀향하였다.

② 수녀원 부원장 박 골롬바 수녀가 1950년 2월 수녀들을 남하시킬 때 다음 차례로 박 루시아와 올리바 수녀를 선정하였으나 박 루시아 수녀는 혹시 체포되었을 때, 난청의 올리바 수녀와 자신의 말이 엇갈려 공동체의 다른 수녀들이 월남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사양함으로써 제외되었다.

③ 1950년 9월 24일 박 루시아 수녀는 정치보위부 간부로 활약하던 육촌에 의해 고발되어 체포당해 순안 교화소에 투옥되었다. 유엔군과 국군의 북진으로 퇴각하던 인민군에 의해 10월 11일에 총살당했다. 목격자 증언에 의하면 10월 11일에 순안 산모퉁이로 많은 납치인사들이 끌려갔는데, 거기 박 루시아 수녀도 있었다. 산모퉁이를 돌자 많은 총성이 울리며 그때 살해당했다고 하였다.100) 그 지점은 순안 구읍에서 북방 약 5리쯤 되는 거리인 석암(石岩) 저수지로, 시신은 저수지에 던져져서 발견하지 못했다.101)

(31) 노병조 안셀모(Romer, Anselmus, 盧炳朝, 1885~1951) 신부

세례명 : 요셉(Josef)
수도자명 : 안셀모(Anselmus)
출생일 : 1885년 12월 7일
출생지 : 독일 로텐부르크 교구, 인게르킹겐(Ingerkingen)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06년 9월 29일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07년 10월 20일 상트 오틸리엔
종신서원일 및 장소 : 1911년 1월 1일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11년 5월 3일 아우구스부르크 주교관 성당에서 막시밀리안 폰 링크(Maximilian von Lingg) 주교 집례로 수품

학력
1906년 딜링겐(Dillingen)의 상트 오틸리엔 김나지움 졸업
딜링겐 가톨릭 대신학교 철학부 졸업
로마 성 안셀모(Sant’ Anselmo) 대학 신학부 졸업

활동경력
1911년 10월 30일 한국 파견
1921년 성 베네딕도회 서울 수도원 원장 겸 원산 대목구 부감목
1927년부터 1949년 5월 9일 체포 시까지 덕원 신학교 교장

저술활동
1930년 이전 독일어와 한국어 문법서 《조선어 교본》(등사판, 100부 간행)
1933년 〈神生과 大思想〉, 덕원 신학교 교지 《신우》 창간호 게재 논고
1939년 〈敎會 밖에는 救靈이 없다〉, 덕원 신학교 교지 《신우》 제7호 게재 논고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1년 11월 9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에 덕원 수도원에서 체포,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 구금

② 1949년 6월 24일에 노역을 위한 선발대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③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안셀모 로머 신부도 처음부터 나의 단골 환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선천적으로 허약하고, 덕원 신학교 교장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으로 부담을 갖고 있던 그는 3개월의 감옥생활로 매우 쇠약해졌다. 그도 나중에는 점차로 수종이 뒤따르는 설사를 앓아서 쉬운 일을 하는 일꾼에 편입되어야 했다. 이것은 그를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우울하게 했다. … 만포 시기는 그의 건강을 매우 나쁘게 했으며 심장도 매우 약해졌다. 심한 동상도 그를 괴롭혔다. 나에게는, 그토록 고결하고 나이도 많으신 분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던, 잊혀지지 않는 충격적인 인상이 남아 있다. … 1951년 가을, 그의 상태는 점점 예사스럽지 않게 되었고, 그 자신이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즉, 짐작되는 자기 죽음의 날짜를. 그는 우리에게 멋진 강론과 강화를 많이 해주었으며,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는 제대 앞에 앉아 성스러운 묵주에 관한 마지막 강론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죽음을 준비했다. … 11월 9일 밤 1시경에 그는 나를 불렀고 곧 평온하게 사망했다. 안셀모 신부는 수용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어떤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없다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제 정말로 덕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102)

④ 엘리기우스 신부의 증언 : “…11월 9일에는 안셀모 신부가 행복한 죽음으로 그의 오랜 고통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었다. 처음에 우리는 경외심에서 사망자들을 수용소보다 약 200미터 높은 곳에 마련된 공동묘지로 운반해 갔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그럴 힘도 없었다. 우리는 시신을 가마니에 넣었고, 수녀들은 가마니를 전나무 가지와 꽃으로 장식했다. 그런 다음 가마니를 달구지에 싣고, 소가 그것을 끌고 올라가면,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뒤따라 가 그 위에서 교회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를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 나의 왕, 당신에게만 나는 백합같이 순수한 사랑으로 죽을 때까지 충실할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다음 차례는 누가 될 것인지 스스로 자문해 보곤 했다.”103)

(32) 홍태화 루치오(Roth, Lucius, 洪泰華, 1890~1950) 신부

세례명 : 콘라드(Konrad)
수도자명 : 루치오(Lucius)
출생일 : 1890년 2월 19일
출생지 : 독일 뷔르츠부르크 교구, 바이흐퉁겐(Weichtungen)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09년 9월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10년 10월 16일
종신서원일 및 장소 : 1913년 10월 16일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14년 7월 5일

학력
상트 오틸리엔 김나지움 졸업
로마 성 안셀모(Sant’ Anselmo) 대학 신학부 졸업
1914년 로마에서 신학박사 학위과정 시작.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귀국하여 뮌헨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 취득

활동경력
1914년 사제 서품 후, 뮌헨 교황 대사관에서 근무
1924년 8월 17일 한국 파견
1925년 6월~1927년 7월104) 육도포(六道泡)105) 본당신부
1927년 7월 15일~1930년 8월 19일 원산 본당 본당신부106)
1930년 덕원 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겸 부감목

저술활동
1932년 한국인 수사와 수녀를 위한 《미사 통상문》 번역(등사본 발간)
1933년 신자들을 위한 쇼트(Schott)의 《미사경문》 한글 번역, 발간
1934년 《주일미사경본》과 《성인 미사경본》(등사본, 각 1,200부 간행)
1935년 《봉재 때 미사경본》(1,200부 간행), 《德源聖ベネデイクト修道院案內》
1936년 《수도자 고해 안내》(600부 간행), 《조선어 문법》(1.000부 간행), 《彌撒經本》
1938년 《彌撒 經本 : 봉재 때 미사》, 《수사 통경 기구》(한국 신자용 한글판 번역, 600부 간행), 《수사 통경 기구》(獨韓판, 독일인 평수사용 번역, 70부 간행)
기타 〈가톨릭 청년〉에 호교론과 공산주의 비판 논문 다수 발표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9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총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3일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8일 밤, 덕원 수도원에 들이닥친 정치보위부원 수십 명에 의해 사우어 주교 아빠스를 필두로 부원장 슐라이허 신부, 신학교 교수 클링사이즈 신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로트 신부는 젊은 평수사 한 명을 불러 이미 정리, 분류한 문서를 그대로 둘 것, 불태울 것, 땅에 묻을 것을 지시하였다. 원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 구금되었다.

② 이후 평양 형무소 구속 수도자들이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될 때 사우어 주교 아빠스 포함 총 8명의 독일인 수도자와 한국인 신부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에 남겨졌다. 공산당의 재판결과 사우어 주교 아빠스는 중죄인으로 7년 징역형. 나머지 일곱 명은 5년형을 선고받았다. 로트 신부의 죄명은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함께 ‘정의의 측면에서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107)
포교 성 베네딕도회 겔뜨루드 링크 총장 수녀의 증언 : “누군지 잘 기억되지 않으나 내게 다음의 내용을 얘기해 주기도 했다. 원장신부님은 재판 끝에 고발과 판결이 진실되고 정의롭다는 것을 시인한다는 서명을 종용당했으나 끝내 서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고발은 거짓인데도 불구하고 억울한 판결을 받았노라”고 항의하셨다고 한다. 원장 신부님을 재판석에서 밖으로 끌어낼 때 그분은 문에서 다시 한 번 돌아서서 판사를 향해 “우리는 다른 심판관 앞에서 또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108)

③ 믿을 만한 사람들의 증언 : “체포된 초기에는 독일 및 방인 신부와 수사들이 독방에 감금되어 있어서 서로 어떤 연락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4월 5일에 그들은 같은 감방에 갇히게 되었고, 그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형제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매우 약해졌을지라도 항상 쾌활한 기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감시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한다. 특히 원장 신부가 형제들을 대하는 인내와 아랫사람들이 원장신부에게 보여 준 존경으로 교도관 한 명이 개종했으며, 그는 전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아직도 그는 원장신부를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109)

④ 임 곤라도 수사의 증언 : “노씨(필자 주 : 평양 인민 교화소 담당 의사 노재경)의 증언에 의하여 묘소는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으니 노씨의 증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감방에서 길 신부가 선종하였을 때 원장 신부가 자기가 입었던 검은 바지를 벗어서 길 신부가 입고 있던 죄수복과 바꾸었다. ‘죄 없이 죽은 사람이 묻힐 때까지 죄수복을 입고 묻히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하얀 손수건을 꺼내 실려 나가는 시체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이런 숭고한 사랑의 행위를 보고 ‘저들은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가 저렇듯이 사랑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감동했다’고 하였다. … 그 당시 교화소의 의사로 다니던 노씨는 이후 월남하여 당시 길 루페르트 신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목격한 수도자들이 보여준 숭고한 사랑에 감동하여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고 착실한 신자가 되었다.”110)

⑤ 엘리기우스 신부의 증언 : “(평양 인민 교화소에서) 많은 이들이 설사를 앓고 배겨낼 수 없었다. 그 거친 식사라니! 모두들 배고픔과 견딜 수 없는 갈증으로 괴로움을 겪었다. 때때로 높은 간수가 나타나서는 문틈을 통해 수감자 전원이 살아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우리에게는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았다. 루치우스 원장 신부는 야간 심문 때 한 번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돼지처럼 갇혀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고선, 전체 선교활동의 총책임자로서 자신을 총살시키고 다른 무고한 사람들은 석방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11)

⑥ 엘리기우스 신부의 증언 : 마침내 8월 5일 저녁이 되자 우리는 이송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빠스 주교님과 루치우스 로트 원장신부,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 그레고리오 슈테거 신부, 요셉 그라머 수사, 그레고리오 길크 수사는 “주범”으로 몰려 감옥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건 우리에게 쓰라린 이별이었다. … 그때부터 우리는 수감 기간 내내 형제들에 관한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의 소식을 묻고 그들을 우리에게 데려와 달라고 간청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1954년 1월, 우리가 독일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아빠스-주교님은 1950년 2월 7일에,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머지 여섯 형제들에 관해서는 오늘날까지 어떠한 말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1950년 10월, 북한군이 퇴각해야 했을 때 북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다른 포로들과 함께 총살당했다고 확신한다.”112)

7)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 “거의 5년간의 포로생활 동안에 미국 군종신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한을 거쳐 여기에 도착된 편지와 보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 냈다. … 우리가 감옥에 남겨두어야 했던 여덟 명의 유럽인 형제들 중에 40년 동안 한국에서 가톨릭 재건활동을 했던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는 1950년 2월 7일에, 우리 신학교의 철학교수였던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1950년 10월 3일 밤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고, 그 차는 한 시간 반 뒤에 텅 빈 채로 돌아왔다. 평양 근처에서 4,500명의 죄수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살된 것도 같은 밤이었다.”113)
 
33) 안세명 아르눌프(Schleicher, Arnulf, 안세명, 1906~1952) 신부

세례명 : 요셉(Josef)
수도자명 : 아르눌프(Arnulf)
출생일 : 1906년 9월 21일
출생지 : 독일 로텐부르크 교구, 프라움로흐(Pflaumloch)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상트 오틸리엔
입회 : 1925년 5월 10일 수련 시작
서원일 및 장소 : 1926년 5월 15일 상트 오틸리엔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30년 7월 13일 딜링겐 신학교 성당. 카를레트(Karl Reth) 주교 주례로 수품

학력
에힝겐(Ehingen) 신학교 인문고등학교 과정 수료
상트 오틸리엔 철학부 수료
로마 성 안셀모(Sant’ Anselmo) 대학 신학부 졸업
1931년 박사 학위 취득

활동경력
1932년 4월 10일 한국 파견, 7월 18일 덕원 수도원 도착
1932년 12월~1933년 5월 건강 악화된 다베르나스 신부 대신 내평 본당 임시 보좌신부
1933년 8월부터 1년간 일본에 간 파비안 담 신부를 대신하여 원산 본당 임시 주임신부
1934년 7월부터 덕원 신학교 교수. 교리신학, 성서 입문, 성서, 성서 주석학 등 강의
1944년 12월부터 덕원 수도원 부원장

저술활동
1936년 〈가톨릭 敎會의 聖書觀〉, 덕원 신학교 교지 《신우》 제4호 게재 논고
1938년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1만 부 간행)
1941년 《서간경과 묵시록》 번역(총 750쪽, 5천 부 간행)
1945년 이전에 일본어 저술 《강론 요강》(Homiletisches Handbuch) 2권 간행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9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2년 6월 28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9일 사우어 주교 아빠스, 로트 신부, 클링사이즈 신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원산감옥에 갇혔다가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

② 1949년 8월 5일 평양에서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③ 평양을 떠날 때, 아르눌프 신부는 사우어 주교 아빠스로부터 수용소 내의 전수도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8월 7일 일요일에 옥사덕 수용소 오두막에서 석 달 만에 처음으로 미사를 드렸다. 그때의 광경을 엘리기우스 신부는 “아직 감옥에 계신 아빠스-주교님이 우리의 책임자로 지명한 아르눌프 부원장 신부는 우리가 어제 올라온 타보르 산에 관해 감동적인 강론을 해주셨다. 이 산은 고통과 궁핍과 유배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주님이 변모하신 산이 되었음이 분명했다”라고 증언하였다.114)

④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아르눌프 슐라이허 신부는 그의 영감 있는 강의와 강습회, 피정 그리고 그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면 어떤 경우에라도 돕고자 하는 위대한 열정으로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 … 직선적인 심성으로 인해 그에게는 우리 수도원이 당해야 했던 엄청난 부정에 대한 내적인 반감을 숨기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것이 당국의 미움을 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감시인들의 계속적인 비판과 악의에 찬 계략의 대상이 되었다. 굶주림과 과로보다는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그는 더 고통을 당했다. 1951년과 1952년 사이의 겨울까지만 해도 그는 숯 굽는 사람이나 나무 베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으나, 파종기가 시작되면서 병세가 결정적으로 악화됐다. 신장과 심장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않았고 화농성 기관지염이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으며, 몸의 종창이 심각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휴식을 취하고 건강에 주의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전혀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앉아서 일을 해야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도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적으로는 항상 선교 방법의 개선과 새로운 본당 설립의 가능성, 그리고 그가 그렇게 좋아했던 덕원 수도원과 이 수도원과 연관된 신학교의 재건을 위해 일했다. 끈질긴 노력으로 그렇게 어려운 동아시아 언어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습득했던 그가 죽어야 한다고? - 하느님께서 한국의 새로운 선교를 위한 초석으로 그로부터 이러한 것을 원한다는 것에 그가 복종하기까지 그에게는 처절한 싸움이 있었다. 그가 6월 28일 밤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아침 9시경에 구원을 받을 때까지, 매우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깊은 신앙에 잠긴 날들이 그의 죽음에 앞서 있었다.”115)

⑤ 엘리기우스 신부의 증언 : “6월 28일에 우리는 아르눌프 신부를 수용소 공동묘지에 매장해야 했다. 그가 죽기 전 경찰은 얼마나 그를 학대하고 괴롭혔던가. 그는 발이 심하게 부어올랐기 때문에 거의 서 있을 수도 걸을 수도 없었다. 그가 정말로 들로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집에서 거름더미 위에 앉아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며칠 동안 거름더미를 두드려야 했다. 그의 죽음을 신고하니 경찰의 하나인 한네스(악질이라는 뜻의 우리가 붙인 별명)가 소리쳤다 : “그렇게 애석한 일도 아니야. 일도 더 이상 못했을 텐데.”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의 죽음이 엄청난 손실이었다. 그는 수용소에서 자주 우리에게 거룩한 우리 수도회의 규칙과 성 바울로의 선교에 대한 열정, 또 이방인의 사도로서 겪은 포로생활에 관해서 영성강화를 해주었다.”116)

(34) 에바 쉬츠(Schutz, Eva, 1899~1950) 수녀

세례명 : 으제니(Eugenie)
수도자명 : 에바(Eva)
출생일 : 1899년 4월 10일
출생지 : 독일 뮌헨 대교구, 베른리드(Bernried)

소속 및 신분 :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모원 : 투칭 수녀원
서원일 및 장소 : 1926년 8월 30일 투칭 수녀원

활동경력
1926년 9월 4일 한국 파견
원산 수녀원 부원장
원산 수녀원 수련원장
신고산 수녀원 분원장
함흥 수녀원 분원장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0년 8월 10일
순교 장소 : 자강도 전천군 별하면 쌍방리 옥사덕 수용소
묘소 : 옥사덕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체포되던 날, 에바 수녀의 행적에 대한 링크 수녀의 증언 : “에바 수녀님은 재단 작업의 책임자였다. 체포될 때 그는 소련군 장교들이 주문하여 완성된 옷들과 미완성된 숙녀복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삼엄한 감시하에 마무리 작업을 하러 재봉실로 가서 이름과 주소를 달아놓고 오겠노라고 허락을 청했다. 북한 정치보위부원들은 소련 군대와의 유대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를 수녀들에게 허락했다. … 그들은 재단사 수녀님들의 솜씨를 감탄하면서 특히 이처럼 자신들이 위험에 처해 있는 순간에도 남의 물건에 대한 정직성과 책임감에 대해 극구 칭찬하면서 이해할 수 없어 했다. 그들은 수녀님들이 부탁한 대로 정확한 주소로 전달하겠노라고 약속했다.117)

②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에바 쉬츠 수녀는 원산 수녀원에서뿐만 아니라 본당에서도 활동했고, 세례를 준비하고 있던 한국 여자들과의 교제에 특별한 애착과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체포되기 전에도 이미 병약하고 심장이 약했다. 3개월간의 감옥생활이 그녀의 건강을 매우 해쳤고, 또 찌는 듯한 8월의 더위에 수용소로 올라오는 힘든 노정이 또 다른 영향을 끼쳤다. 그녀가 길에서 졸도를 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살아서 올라올 수 있도록 돌보기 위해 수용소에서 불려 내려갔다. 캠퍼 주사를 맞고 나서 그녀는 소 등에 앉아 무사하게 올라올 수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회복해서 궁색한 바느질에 전념했다. 계속되는 몸의 부기와 위장 장애 그리고 장 질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49년 성탄절까지는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런 후에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병상생활이 시작되었다. (병상이라고…? 침대도 없고, 매트리스도 없고, 베게도 없고, 환자복도 없는데 - 누가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모든 환자들에게 있어서 같은 불행이었다.) 그녀는 때로는 개천에서의 크나이프식 수욕 요법에, 때로는 이 약초 저 약초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도움이 되지 못했고, 병을 막을 수도 없었다. 심한 부기에 이어 갑작스러운 탈수 현상이 교대로 일어났다. 마지막 주에 그녀는 심하게 부은 다리 한 쪽을 짚대에 찔렸다. 진물이 밤낮으로 끊임없이 흘렀으며, 예상했던 것처럼 감염이 되었다. 우리한테 있는 어떤 약품으로도 열을 몰아낼 수가 없었다. 8월 10일, 그녀는 성 라우렌시오처럼 쇠침대에 누워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바쳤다. 그녀는 베일과 신부의 화관을 쓰고 많은 흰 꽃들 사이에 묻혀 안치되었다.118)

(35) 김 그레고리오(Sorger, Gregor, 金, 1906~1950) 신부

세례명 : 루드비히 카를 프리드리히(Ludwig Karl Friedrich)
수도자명 : 그레고리오(Gregorius)
출생일 : 1906년 11월 19일
출생지 : 독일 로텐부르크 교구, 스파이칭겐(Spaichingen)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보이론(Beuron) 대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보이론
입회 : 1928년
서원일 및 장소 : 1929년 6월 29일 보이론 대수도원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34년 8월 5일 보이론 대수도원

학력
에힝겐(Ehingen), 울름(Ulm), 로트바이(Rottwei) 김나지움에서 수학
튀빙겐(Tubingen) 법과대학에서 다섯 학기 수학
마리아 라흐(Maria Laach)의 베네딕도회 수도원 철학부 수료
보이론 수도원 신학부 수료

활동경력
1937년 보이론 대수도원의 일본 토노가오카(Tonogaoka) 수도원에 파견
1940년 한국 입국. 덕원 신학교에서 음악, 영어, 독일어 교사. 사우어 주교 비서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5월 11일,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옥사
순교 일자 : 1950년 11월 15일
순교 장소 : 자강도 관문리 수용소
묘소 : 관문리 수용소
순교 행적 :
①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에서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 8평방미터의 방에 18명이 수용되어 구금

② 1949년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이송, 구금, 강제노동

③ 1950년 유엔군이 9 · 28 수복 후 북진하자 10월 23일부터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10월 25일 만포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0월 27일에 또 다시 한만(韓滿) 국경을 넘어 만주 땅으로 끌려갔다. 피랍 이후 참혹한 지경에 처했었지만 지안(輯安) 역전 광장에서의 경우는 극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틀 밤낮을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역 광장에 앉아 있었다. 10월 29일에는 다시 만포 행을 강행하여 걸어 돌아왔다. 이때 모든 자들이 추위와 영양실조로 탈진하였다. 


④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 “그레고리오 조르거 신부는 1940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와 그때부터 우리 수도원에서 활동했다. 그의 건강은 감옥에서 매우 나빠졌다. 그는 계속적인 설사로 무척 야위어서 수용소로 왔으며, 한 번도 제대로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천성이 명상적이고 조용하며 어린이같이 경건한 그는, 대체로 과로와 기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실용적인 일에는 별로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노동을 하라고 몰아대는 경찰들로부터 개인적인 학대를 많이 받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에게 영적으로도 많은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수용소 동료들은 모두 그가 들과 목장으로 가는 먼 길에서 항상 손에 묵주를 들고 있었던 것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무수하게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가 걸어서 가야 했던 만포로의 험난했던 피난은 그를 매우 허약하게 했다. 그곳 감옥에서 공습경보가 울릴 때 마당에 있는 통로까지 가는 것도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 집에 대한 소이탄 공격에 따른 공포스런 충격과, 그에 이어 가까운 계곡에 임시로 건설한 포로들의 거주지로 가는 십자가의 길이 그의 마지막 남은 기운을 고갈시켰다. 우리가 수감된 참호는 탁 트인 대지 위에 조야하게 지붕이 덮인 매우 추운 방이었다. 당시에 먹을 것이라고는 가끔 삶은 옥수수 이외에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레고리오 신부는 이 시기의 고난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운명했다. 글자 그대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 얼어 죽은 것이었다. 그때가 1950년 11월 15일이었다. 그의 시신이 조용히 누워 있을 수 있는 옆방조차도 없었다. 그는 실제로 우리 참호 안의 통로에 눕혀져 있었고, 모든 사람이 그의 시신에 몸이 닿는 상태로 지나다녀야 했다. 그는 평소에 겸손했던 대로 자신이 자리를 막았다는 데 대해 몹시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게 그는 그곳에 누워 있었지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그것은 들볶이며 고통당하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미소였다. 그것에 너무 개의치 마라. 가장 아름다운 것이 곧 온다! 그도 한국인 포로들에 의해 매장되었다.”119)

⑤ 이 외에도 디오메데스 수녀는 귀환 후 1954년 2월 28일 투칭에서 그레고리오 신부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죽은 후에도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직 ‘순교자 형님’에 대해 당신에게 축하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120)

(36) 전오범 그레고리오(Steger, Gregor, 全五範, 1900~1950) 신부

세례명 : 카를(Karl)
수도자명 : 그레고리오(Gregorius)
출생일 : 1900년 12월 30일
출생지 : 독일 레겐스부르크 교구, 트뢰베스(Trobes)

소속 및 신분 :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모원 : 슈바에클베르크(Schweiklberg)
서원일 및 장소 : 1922년 7월 11일 슈바이클베르크
종신서원일 및 장소 : 1925년 7월 12일
사제서품일 및 장소 : 1926년 7월 11일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 성당. 지기스문트 펠릭스 폰 오우(Sigismund Felix von Ow) 주교 주례로 수품

학력
1912년 레겐스부르크에서 김나지움을 다니기 시작하여 슈바이클베르크를 거쳐 파사우(Passau)에서 졸업. 김나지움 학업 도중 군 입대. 대학 졸업 후 수도원 입회 청원

활동경력
1926년 사제 서품 직후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 학교 교사
1930년 4월 21일 한국 파견
1931년 영흥 본당 보좌 신부
1935년 영흥 본당 주임 신부
1936년 9월 13일 영흥 본당에 “가톨릭 소년회” 창립

저술활동
1942년 《교리강의》(敎理講義) 3권 중 권1 출간. 이어 권2 출간, 권3은 일제와 공산정권을 거치며 미간행

순교
체포일 및 실행기관 : 1949년 4월, 정치보위부
순교 유형 : 피살(총살)
순교 일자 : 1950년 10월 3일
순교 장소 : 평양 인민 교화소
묘소 : 미상
순교 행적 :
① 1949년 4월 영흥에서 체포되어 원산으로 압송 후, 평양 인민 교화소로 이송, 구금

② 당국의 판결로 5년형 언도. 죄명은 종교 학교에서 유물론을 반박하는 내용의 강의를 했다는 혐의

③ 엘리기우스 신부의 증언 : “마침내 8월 5일 저녁이 되자 우리는 이송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빠스 주교님과 루치우스 로트 원장신부,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 그레고리오 슈테거 신부, 요셉 그라머 수사, 그레고리오 길크 수사는 “주범”으로 몰려 감옥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건 우리에게 쓰라린 이별이었다. … 그때부터 우리는 수감 기간 내내 형제들에 관한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들의 소식을 묻고 그들을 우리에게 데려와 달라고 간청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1954년 1월, 우리가 독일로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아빠스-주교님은 1950년 2월 7일에,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머지 여섯 형제들에 관해서는 오늘날까지 어떠한 말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1950년 10월, 북한군이 퇴각해야 했을 때 북한 공산당원들에 의해 다른 포로들과 함께 총살당했다고 확신한다.”121)

④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 “거의 5년간의 포로생활 동안에 미국 군종신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한을 거쳐 여기에 도착된 편지와 보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 냈다. … 우리가 감옥에 남겨두어야 했던 여덟 명의 유럽인 형제들 중에 40년 동안 한국에서 가톨릭 재건활동을 했던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는 1950년 2월 7일에, 우리 신학교의 철학교수였던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는 1950년 4월 6일에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은 1950년 10월 3일 밤에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고, 그 차는 한 시간 반 뒤에 텅 빈 채로 돌아왔다. 평양 근처에서 4,500명의 죄수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살된 것도 같은 밤이었다.”122)

3) 시복시성 대상자 분석

이 절에서는 위에서 서술한 36위 순교자의 약전을 근거로 시복시성 대상자를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소속 · 신분을 수도원별로 분류하여 모원과 신분을 일람하고, 다음으로 순교지별로 분석할 것이다. 순교지 별로는 순교자와 순교일, 순교유형, 묘소를 일람하고, 끝에는 옥사덕 수용소 생환자들이 그린 옥사덕 수용소 순교자 묘지 스케치도 베껴 올린다.

(1) 소속 및 신분

성 베네딕도 수도회 시복시성 추진 대상 순교자는 덕원 수도원 소속 성직수사 및 평수사 26명,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소속 성직수사 1명, 보이론 대수도원 소속 성직수사 1명, 덕원 면속구 · 함흥교구 소속 사제 4명, 포교 성 베네딕도 원산 수녀원 소속 수녀 및 헌신자 4명 등 총 36명이다. 이들 중 한국인 11명, 나머지 25명은 독일인이다.

덕원 면속구 · 함흥교구 소속 사제 4명을 제외한 32명의 모원(母院)은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19명,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2명, 보이론 대수도원 1명,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 1명, 덕원 수도원 4명, 연길 수도원 1명, 투칭 수녀원 2명, 원산 수녀원 2명이다.

신분상으로는 주교 아빠스 1명, 성직수사 14명, 평수사 13명, 수녀 3명, 헌신자 1명, 교구사제 4명이다.

소속을 일람하면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모원 및 직분).

▼ 덕원 수도원 소속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상트 오틸리엔, 성직수사 - 주교 아빠스)
김치호 베네딕도(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민종덕 고델리부스 아우어(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나국재 까누토(상트 오틸리엔, 성직수사)
엄광호 다고베르트(상트 오틸리엔, 성직수사)
파스칼 팡가우어(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배 루도비꼬(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부 일데폰스(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베드로 게르네르트(뮌스터슈바르작, 평수사)
기 그레고리오(뮌스터슈바르작, 평수사)
함요섭 요셉 그라함머(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하연근 바실리오(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솔라누스 헤르만(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허희락 힐라리오(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김종수 베르나르도(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김이식 마르띠노(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길세동 루페르트(상트 오틸리엔, 성직수사)
이춘근 라우렌시오(덕원 수도원, 성직수사)
노안락 에우제비오(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정양리 마르코(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오이근 에우제니오(상트 오틸리엔, 평수사)
오 쿠니베르트(상트 오틸리엔, 성직수사)
노병조 안셀모(상트 오틸리엔, 성직수사)
홍태화 루치오(상트 오틸리엔, 성직수사)
안세명 아르눌프(상트 오틸리엔, 성직수사)
전오범 그레고리오(슈바이클베르크, 성직수사)

▼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김봉식 마오로(연길 수도원, 성직수사)

▼ 보이론 대수도원
김 그레고리오(보이론, 성직수사)

▼ 덕원 자치 수도원구 · 함흥교구 소속
최병권 마티아(교구사제)
김동철 마르코(교구사제)
구대준 가브리엘(교구사제)
이재철 베드로(교구사제)

▼ 포교 성 베네딕도 원산 수녀원 소속
장 악네따(원산 수녀원, 헌신자)
마리아 프룩트오사 게르스트마이어(투칭 수녀원, 수녀)
박빈숙 루시아(원산 수녀원, 수녀)
에바 쉬츠(투칭 수녀원, 수녀)

(2) 순교지

36명 순교자의 순교지는 평양 인민 교화소(13명), 자강도 옥사덕 수용소(13명), 자강도 만포 인민 교화소(1명), 자강도 관문리 수용소(3명),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1명), 함경북도 청진(1명), 함흥 인민 교화소(1명), 함경남도 원산(1명),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2명) 등이다.

인민 교화소나 수용소에서 옥사한 수도자가 19명, 피살자는 17명인 것이다.

옥사는 교화소나 수용소의 열악한 조건으로 인한 질병 감염 혹은 지병 악화, 매일 16 내지 17시간의 과도한 강제노동, 굶주림으로 인한 영양실조, 추위와 헐벗음으로 인한 동상, 그 위에 정신적 신체적 고문과 학대가 그 원인이 되었다.

피살의 경우, 그 방법은 대개 총살이었다. 1950년 9 · 28 수복 후 유엔군과 국군의 북진으로 전황이 다급해지자, 공산정권은 후퇴하면서 10월 3일 이후 짧은 기간 안에 일반 정치범 및 잡범들을 시 외곽 공동묘지나 인가 없는 산자락 같은 곳에서 집단 학살하였는데 수도자들도 그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따라서 인민 교화소나 수용소 등지에서 옥사한 순교자의 묘소는 파악이 가능한 데 반해, 피살자 매장지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이재철 베드로 신부의 경우, 당시 청진 본당 여 전교회장 김 마리아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10월 초 청진항 등대에서 종교인 80여 명을 총살할 때 이 신부도 피살되었는데 시신은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매장지를 알 수 있는 경우는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평양 인민 교화소 옆 공동묘지,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의 사우어 주교 아빠스 묘지 옆, 장 악네따 헌신자의 함흥 본당 뒷산 공동묘지, 김봉식 마오로 신부의 원산 성당 묘역, 옥사덕 수용소 순교자 묘역이다. 그러나 임시 매장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만 59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지역들 역시 크게 변천하여 확인은 어려울 것이다. 또한 1954년 귀환 생존자에 의해 묘역의 위치와 상세한 배치를 알 수 있는 옥사덕 수용소 순교자 묘지의 경우에도 과연 북한 당국이 지금까지 묘역을 보전해 두었을지 의문이다.

순교지별로 순교자, 순교일, 순교 유형, 묘소를 일람하면 다음과 같다.

▼ 평양 인민 교화소
사우어 주교 아빠스 - 1950년 2월 7일, 옥사, 묘소 : 평양 인민 교화소 공동묘지
루페르트 클링사이즈 신부 - 1950년 4월 6일, 옥사, 묘소 : 평양 인민 교화소 공동묘지
엄광호 다고베르트 수사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홍태화 루치오 신부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기 그레고리오 수사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함요섭 요셉 수사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배 루도비코 수사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전오범 그레고리오 신부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최병권 마티아 신부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김종수 베르나르도 신부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김이식 마르띠노 신부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구대준 가브리엘 신부 - 1950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 사이에 피살 묘소 : 미상

▼ 옥사덕 수용소
베드로 게르네르트 수사 - 1949년 7월 3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정양리 마르코 수사 - 1949년 8월 3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오이근 에우제니오 수사 - 1949년 9월 14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하연근 바실리오 수사 - 1950년 2월 14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 - 1950년 4월 16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에바 쉬츠 수녀 - 1950년 8월 10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노안락 에우제비오 수사 - 1951년 9월 1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노병조 안셀모 신부 - 1951년 11월 9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부 일데폰스 수사 - 1952년 3월 20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민종덕 고델리부스 아우어 수사 - 1952년 4월 6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오 쿠니베르트 신부 - 1952년 6월 14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안세명 아르눌프 신부 - 1952년 6월 28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마리아 프룩트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 - 1952년 9월 16일 옥사, 묘소 : 옥사덕 수용소

▼ 만포 인민 교화소
나국재 까누토 신부 - 1950년 11월 6일 옥사, 묘소 : 미상

▼ 관문리 수용소
김 그레고리오 신부 - 1950년 11월 15일 옥사, 묘소 : 관문리 수용소
허희락 힐라리오 수사 - 1950년 12월 12일 옥사, 묘소 : 관문리 수용소
솔라누스 헤르만 수사 - 1950년 12월 13일 옥사, 묘소 : 관문리 수용소

▼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
김동철 마르코 신부 - 1950년 6월 27일 비형 본당에서 체포 행방불명, 묘소 : 미상

▼ 함경북도 청진시
이재철 베드로 신부 - 1950년 10월 초, 청진항 등대에서 피살 추정, 묘소 : 미상

▼ 함흥 인민 교화소
장 악네따 헌신자 - 1950년 10월 14일 피살, 묘소 : 함흥본당 뒷산 공동묘지

▼ 함경남도 원산시
김봉식 마오로 신부 - 1950년 10월 9일 원산 와우동 형무소 뒷산 대방공호에서 피살, 묘소 : 원산 성당 묘역

▼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현재 평양특별시 순안구역)
이춘근 라우렌시오 신부 - 1950년 10월 5일 피살, 묘소 : 미상
박빈숙 루치아 수녀 - 1950년 10월 5일, 11일 혹은 12일 피살, 묘소 : 미상

〈그림 1〉 옥사덕 수용소 순교자 묘지
(1954년 옥사덕 수용소 생환자의 스케치)123)
 

1. 베드로 게르네르트 수사
2. 정양리 마르코 수사
3. 오이근 에우제니오 수사
4. 하연근 바실리오 수사
5. 파스칼 팡가우어 수사
6. 에바 쉬츠 수녀
7. 노안락 에우제비오 수사
8. 노병조 안셀모
9. 부 일데폰스 수사
10. 민종덕 고델리부스 아우어 수사
11. 오 쿠니베르트 신부
12. 안세명 아르눌프 신부
13. 마리아 프룩트오사 게르스트마이어 수녀


4. 맺음말

본고에서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 출신 시복시성 대상 36위 순교자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에 대한 시복시성 청원은 20세기 순교자들에 대한 한국 교회 차원의 첫 청원이며,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125년 역사에 있어서도 처음 있는 대단히 중요하고 뜻깊은 일이다.

순교란 모든 압박과 박해를 물리치고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따라서 순교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후손들이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하는 뿌리인 것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장 이형우 아빠스도 2007년 5월 10일 36위 순교자의 시복시성 추진 교령을 선포하며 “그분들을 우리 믿음의 모범으로 삼기 위해서”이며 시복시성 절차를 시작하고 후에 시복시성이 된다고 해도 우리가 순교자들에게 무엇을 더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깨우쳤다. 즉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순교자의 순교영성을 배우기 위해 이 시복시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뜻을 더 간곡히 전해 주는 증언은 이들 순교자 대부분의 마지막 순교현장을 지켰던 디오메데스 수녀의 기록이다. “동료 수사와 수녀들의 고통과 죽음은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모두들 이미 하느님을 직접 뵙는 곳에 도달하여 있다고 굳게 믿는다. 수용소에 있던 우리는 그들에게 기도를 드렸고, 많은 위기에 그들이 기도를 들어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124) 바로 여기에 우리들이 총체적 힘과 노력을 기울여 시복시성을 달성해야 하는 필요성과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시복시성 추진에는 많은 어려움도 예상된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순교 증거자료의 수집이다. 이들의 순교는 지금부터 60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오랜 세월 남북이 갈라져 차단되어 있고, 지금도 순교 현장에 접근이 불가능하다. 또한 당시 상황을 직접 함께 체험했거나 목격한 증인들도 지금은 거의 사망해서 증언록 작성이나 남아 있는 기록물에 대한 인증이 쉽지 않다.125) 그러나 그나마 생환 수도자들의 증언록 Schicksal in Korea, Deutsche Missionare Berichten이 1974년 독일에서 출간되고 분도출판사에서 《북한에서의 시련 - 죽음의 수용소에서 돌아온 독일인 선교사들의 육성증언》으로 번역 출판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증언록에서는 체포되자마자 곧바로 공동체에 의해 연대기 작성자로 추천되어 사경을 넘나드는 그 어려움 중에도 구금 전 기간 동안 매일의 모든 사건을 메모126)하였던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와, 옥사덕 수용소의 여의사로서 옥사덕에서 선종한 17명 순교자들의 마지막 순교현장 기록을 남긴 디오메데스 메페르트 수녀의 증언이 가장 신빙성 있는 전거(典據)가 될 수 있다. 또한 2007년 번역 출간된 투칭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겔뜨루드 링크 총장 수녀의 자서전 《하느님이 함께 하신 나의 생애》 역시 원산 수녀원 원장으로서 순교자들과 모든 과정을 함께 겪은 목격자 증언 자료로 큰 가치를 지닌다. 이 증언록들을 기본으로 삼고 다른 기록들을 비교 검증한다면 신뢰할 만한 증거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기록 자료들 중에는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들의 모든 저작물도 포함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순교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간행된 성 베네딕도회 선교회보〈Missionsblatter〉, 덕원 신학교 교지 《신우》(神友)는 물론, 《경향잡지》, 《가톨릭청년》 등등에 그들이 기고한 글이 있다면 모두 찾아내야 할 것이다.

또한 순교자들의 행적, 덕행 등을 찾기 위해서 성 베네딕도회 연대기인 〈Chronik der Kongregation von St. Ottilien, Chronik der Abtei St. Benedikt Seoul〉에서도 관련 기록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순교자들에 대한 많은 연구업적이 나와야 할 것이다.

다음 예상되는 어려움은 언어의 문제다. 시복시성 대상자 36명 중 독일인이 25명으로 조사 작업에서 독일어 자료를 주로 다루어야 하는 반면, 시복 청구인 측에서는 한국어로 문건의 원안을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문건은 다시 시성성에서 널리 쓰이는 이탈리아어로 번역해야 하는 중역(重譯)의 언어 부담이 있다.127) 시복시성을 위한 자료의 번역에는 무엇보다 전문성과 정확성과, 아울러 당시 상황을 원형대로 묘사, 전달할 수 있는 세심한 복원의 능력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 번역자들은 성 베네딕도 수도회와 그 순교자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존경과 애정을 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서는 순교자 현양이나 시복시성 추진을 위해 일반적으로 시행되는 성지의 개발, 보존이나 순례 등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의지와 힘을 결집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순교자에 대한 기도 운동과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 운동인 듯하다. 그래서 시복시성 청원 공식기도문의 제정과 보급이 요긴하고 시급하다고 하겠다.

또한 시각 예술이 순교자 신심의 고양에 미치는 효력과 영향력은 대단히 크기 때문에 36위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 베네딕도회다운 소박한, 그러나 아름다운 순교자 현양탑의 헌정도 숙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덕원에 다시 성 베네딕도 수도원을 복원하거나, 옥사덕 수용소를 순교성지로 받들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 현양탑을 옮겨가 봉헌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우리의 징표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한국 성 베네딕도 수도회 출신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은 성 베네딕도 수도회 한국 100년의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의미 있는 성과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독일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 뮌스터슈바르작(Munsterschwarzach) 및 왜관 베네딕도회 소장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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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관 수도원 〈Necrologium(사망자 명부) 1910~2007〉
(3) 연대기 〈Chronik der Kongregation von St. Ottilien, Chronik der Abtei St. Benedikt Seoul〉
(4) 선교회보 〈Missionsblatter〉 “Die Martyrer von Tokwon, Selig seid ihr”, 총권102호, 2007년 제3호
(5) 선교잡지 〈Ruf in die Zeit〉
(6) 선교연력 〈Jahrbuch-Missionskale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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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간행물
《경향잡지》
성 베네딕도회 덕원 신학교(편), 《신우》(神友) 전 7권
원산 신우회(편), 〈북한 선교회보〉

기타
투칭 성 베네딕도 수녀원 홈페이지 순교자 항목
(http://www.osb-tutzing.it/de/html/martyrerinn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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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교회사연구소(편),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696~697쪽.
2) 성 베네딕도회 문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시복 추진 현황〉참조.
3)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문서번호: 왜수 2007-12 〈교령〉.
4)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문서번호: 왜수 2007-13 〈시성성과 교구청에 대한 청원인 임명〉

5)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는 수도자들의 직분을 표현할 때 신부인 수도자를 ‘성직수사’로, 신부가 아닌 수도자를 ‘평수사’로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호칭으로 ‘신부’는 직분으로 ‘성직 수사’, 호칭으로 ‘수사’는 직분으로 ‘평수사’로 표기한다. 본고에서는 왜관 수도원의 관례에 따른다.

6) 성 베네딕도회 문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시복 추진 현황〉 참조.
7)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1969, 393~401쪽 참조.
8)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379~382쪽 참조.

9) 북한에서 종교 말살을 주도한 기관은 정치보위부로서, 이는 북한조선 노동당에 소속되어 막강한 권력을 가진 비밀 경찰조직이다. 당시 성 베네딕도회 탄압의 총지휘자는 함경남도 정치보위부장 김석형(1914~2006)이었다. 그는 그 후 1960년 정치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1년 만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비전향장기수로 실형을 살다가 199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2000년 북으로 돌려보내졌다. 그의 삶을 구술 · 채록한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이향규 지음, 김석형 구술, 도서출판 선인, 2001)에서 자신이 베네딕도회를 덕원, 함흥, 흥남, 북청 할 것 없이 일시에 덮쳐 수색했다고 하였다.

10) 함경남도 덕원군 북성면 어운리(德源郡 北城面 於雲里)에 위치한 덕원 수도원은 1922년부터 1927년에 걸쳐 토지를 매입, 소유하였다. 덕원은 원산 북쪽 1시간여 거리에 위치한 농촌지대로 임야 약 100헥타르, 밭 15헥타르, 논 7헥타르를 수도원 부지로 매입한 후, 수도원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신학교 부지로 논 4헥타르, 밭 3헥타르를 추가 매입하여 총 440헥타르를 보유하였다(졸고, 〈외국 선교회의 한국선교 - 독일 베네딕도회의 원산교구 시대(1920~1949)〉, 근 · 현대 한국가톨릭연구단, 《한국 근 ·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 중권, 가톨릭출판사, 2005 참조).

11) 빌리발드 쿠겔만(Willbaldus Kugelmann, 孔樂道) 신부의 증언, 돈도르퍼(편), 박영구(역), 《북한에서의 시련 - 죽음의 수용소에서 돌아온 독일인 선교사들의 육성증언》, 분도출판사, 1997, 65쪽(이하 《북한에서의 시련》이라 약칭함).

12) 한국교회사연구소(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381~382쪽.
13) 빌리발드 쿠겔만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72~73쪽.
14)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87~88쪽.
15)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74~77쪽.

16) 교화소란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된 죄수를 수감하는 곳으로, 우리의 교도소에 해당한다. 교화소라는 용어는 ‘육체노동과 사상교양을 통해 죄수를 참된 인간으로 만드는 곳’이라는 뜻에서 만든 말이다. 주로 징역 4년 이상의 일반범을 수용한다. 관할부서는 사회안전성이나, 정치범은 국가보위부가 담당한다. 종교인은 정치사상범으로 분류되어 국가보위부가 관장한 듯하다.

17)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01쪽.
18)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95~103쪽.

19) 게르트루트 수녀의 증언, 링크, 겔뜨루드, 정하순(역), 《하느님이 함께 하신 나의 생애》, 대구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2007, 329~340쪽 참조.

20) 덕원 수도원 잔류자들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14쪽.
21) 상트 오틸리엔 및 왜관 수도원의 미간행 자료 〈순교자보고서〉; 《북한에서의 시련》, 106~107쪽.
22) 고진석, 〈옥사독 있다! 없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芬道》 2, 2008, 여름호.
23) 《북한에서의 시련》, 118~119쪽.
24) 《북한에서의 시련》, 271~274쪽.
25)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35쪽에서 인용.
26)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27~135쪽 참조.
27)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20~124쪽.
28)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24~125쪽.
29)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25쪽에서 인용.

30) 지안(輯安)인 듯하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분도출판사, 1988, 321쪽 참조.

31)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39~150쪽 참조.
32)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39~150쪽 참조.
33)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49~150쪽에서 인용.
34)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46쪽.
35)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59쪽에서 인용.

36) 엘리기우스 신부는 Dondorfer, W.(ed.) Schicksal in Korea, Deutsche Missionare Berichten, EOS Verlag St. Ottilien, 1974, p. 67에서 1953년까지라고 하였으나 착각이다. 링크 수녀는 1952년 9월 19일에 새로운 소장이 오고 전 소장이 10월 6일에 떠났다고 하였다(같은 책, p. 99). 또한 요셉 쨍글라인 신부도 1952년 9월이라고 확인하였다. Joseph Zenglein, “The Aufhebung der Abtei Tokwon und die Gefangenschaft ihrer Monche von Mai 1949 bis Januar 1954” in: Kaspar, A., Berger, P., Hwan Gab 60 Jahre, Munsterschwarzach, 1973, p. 136.

37)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54쪽에서 인용.
38)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96쪽.
39)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61쪽.
40)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00~202쪽 참조.
41)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58쪽 참조.
42)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03~204쪽 참조.

43)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25~238쪽 ; 게르트루트 수녀의 증언, 링크, 겔뜨루드, 정하순(역), 앞의 책, 543~601쪽 ; 베르트비나 채사르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41~248쪽 참조.

44) 성 베네딕도회 문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시복 추진 현황〉 4쪽 참조.
45) 덕원 수도원 잔류자들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14쪽.
46) 상트 오틸리엔의 미간행 자료 〈순교자보고서〉
47)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06~107쪽에서 인용.

48) 노재경 씨다. 이형우, 〈공산치하에서의 수난, 1946~1954〉, 왜관 수도원(편), 《옛 등걸에 새 순이》, 분도출판사, 1984, 183쪽. 임 곤라도 수사의 증언(주 49 참조) 때에는 본인들이 실명을 밝히지 못하게 해서 증언이 실린 《원산수녀원사》에는 익명처리하였다. 그러나 노씨의 이름은 이형우의 논문에 ‘재영’이라고 한 반면 평양교구 순교자 사료수집위원회(편), 《북녘 땅의 순교자들》, 가톨릭출판사, 1999, 176쪽에는 ‘재경’으로 표기되었다. 뒤의 책에 정확한 한문 노재경(盧載敬)이 명기되었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재경을 채택한다. 노씨에 관해서는 32) 루치오 신부 항목에서 다시 상세히 언급하겠다.

49) 임 곤라도 수사의 증언(1984년 7월, 대구 파티마병원 8층 812호 병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앞의 책, 387~388쪽에서 인용.

50) 《神友》는 덕원 신학교 교지로 1933년 창간하여 1939년 제7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神友》에 관해서는 졸고, 〈《神友》 연구〉, 《교회사 연구》 26,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117~157쪽 참조.

51)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01쪽.
52) 상트 오틸리엔 및 왜관 수도원의 미간행 자료 〈순교자보고서〉, 2. 김치호 신부 항목.
53)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77쪽.
54)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43쪽.
55)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68~170쪽.

56) 장 악네따에 관해서는 투칭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 홈페이지 순교자 자료 항목(http://www.osb-tutzing.it/de/html/martyrerinnen.html) 참조.

57) 유영복(劉永福, 크리스티나, 1911. 11. 19~?) 전교회장의 증언(1985년 2월 5일 오 이멜다 수녀의 녹음 청취),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앞의 책, 431~432쪽에서 인용.

58) 유영복(크리스티나) · 박종호(베드로)의 증언(1985년 2월 5일 서울 삼양동 파티마 병원. 오 이멜다 수녀 녹음 청취).

59)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00~101쪽.
60) 빌리발드 쿠겔만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67~69쪽.
61) 잔류자들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14쪽.
62)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06~107쪽.
63)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57쪽.
64)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66~167쪽.
65) 빌리발드 쿠겔만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69~70쪽.
66) Kaspar, A., Berger(ed.), op. cit., p. 144.
67) 잔류자들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14쪽.

68) 한국인 신학생과 목격자들의 증언: Dondorfer, W.(ed.) op. cit, p. 119 ; Kaspar, A., Berger(ed.), op. cit., p. 130.

69)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75~176쪽.
70)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63~164쪽.
71) 위의 책, 180쪽, 링크, 앞의 책, 482쪽에는 3천 명으로 기록.

72) 링크, 앞의 책, 483쪽에서는 9월 15일 자정에서 16일로 넘어가는 시각에 선종하였다고 하였다. 수녀원은 공식적으로 사망일을 9월 16일로 정하였다.

73)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80~181쪽.
74)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앞의 책, 498~499쪽.
75)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57쪽.
76)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57쪽.
77)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66쪽.
78)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72~173쪽.
79)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71~172쪽.
80) 김창문(편), 앞의 책, 288~293쪽에서 인용.
81) 1951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편람 ; 한국교회사연구소(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1995, 385쪽 참조.
82)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57쪽.

83) 김동철 신부의 신상에 관한 자료는 평양교구순교자 사료수집위원회(편), 《북녘 땅의 순교자들》, 가톨릭출판사, 1999에 의거한다. 김동철 신부의 형인 김동언 신부의 증언 및 서간, 덕원 신학교 후배 윤공희 대주교의 증언, 당시 성모 수녀회 안주 분원에 있던 강오숙 수녀, 성모수녀회 비현 본당 이승진 수녀 등의 증언에 의해 구성된 논고이기 때문이다.

84)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57쪽.
85) 잔류자들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14쪽.
86) 《북한에서의 시련》, 261~262쪽.
87) 노재경, 주 48) 참조

88) 임 곤라도 평수사의 증언(1984년 7월, 대구 파티마병원 8층 812호 병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분도출판사, 1988, 388쪽에서 인용.

89)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편), 구 가브리엘 대준 신부, 분도 1984 참조.
90) 김창문(편), 앞의 책, 293~294쪽.
91) 위의 책, 293~294쪽에서 인용.
92) 평양교구 순교자 사료수집위원회(편), 《북녘 땅의 순교자들》, 가톨릭출판사, 1999, 176~177쪽 참조.
93) 1978년 5월 임 곤라도 수사의 증언(증언 청취자: 김득권 신부), 위의 책, 178~179쪽에서 재인용.
94) 상트 오틸리엔 및 왜관 수도원의 미간행 자료 〈순교자보고서〉 이춘근 신부 항목.
95)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73~174쪽.
96)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64~165쪽.
97)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65~166쪽.
98)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77~178쪽.

99) Mary John Manazan OSB, In the service of love: Lives of some missionary Benedictine Sisters of Tutzing, Rome 1985 ; 투칭 성 베네딕도 수녀원 홈페이지의 순교자 자료 항목(http://www.osb-tutzing.it/de/html/martyrerinnen.html) ;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433~434쪽 참조.

100)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434쪽. 순교일은 10월 10일 혹은 10월 11일이 명확하지 않으나 많은 목격자의 증언이 11일이어서 수녀원에서는 10월 11일로 기억한다.

101) 박 골롬바 수녀의 증언, 김창문, 앞의 책, 293쪽.
102)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74~175쪽.
103)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59~160쪽.
104) Chronik der Kongregation von St. Ottilien(원산교구 연대기), 1926, Nr. 3 참조.

105) 1923년 만주 간도성 훈춘현 육도포촌(滿洲 間道省 琿春縣 六道泡村)에 창설되었다가 1932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 본당.

106) Chronik der Kongregation von St. Ottilien(원산교구 연대기), 1927, Nr. 5 참조.
107) 잔류자들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14쪽.
108) 링크, 겔뜨루드, 앞의 책, 341~342쪽.
109) 잔류자들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14쪽.

110) 임 곤라도 수사의 증언(1984년 7월, 대구 파티마병원 8층 812호 병실), 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앞의 책, 388쪽에서 인용.

111)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02~103쪽.
112)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06~107쪽.
113)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57쪽.
114)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19쪽.
115)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79~180쪽.
116)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60쪽.
117) 링크, 앞의 책, 311쪽.
118) 링크, 앞의 책, 356~359쪽 ;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67~168쪽.
119)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70~171쪽.
120) 상트 오틸리엔의 미간행 자료 〈순교자보고서〉, Sorger, Gregor 항목.
121) 엘리기우스 콜러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106~107쪽
122) 파비안 담 신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257쪽.
123)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미간행 자료 〈순교자보고서〉에서 채택.
124) 디오메데스 수녀의 증언, 《북한에서의 시련》, 80쪽.
125) 성 베네딕도회 문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시복 추진 현황〉, 3쪽.

126) 엘리기우스 신부는 수용소 생활 마지막 무렵에 260쪽에 달하는 비망록 원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서면으로 된 모든 것의 반출을 엄금하여 귀환 출국 직전 메모를 불태웠다. 그는 “2분 만에 4년 반 동안의 작업이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고 애석해했다. 따라서 육성증언 보고서는 회고해서 쓴 것이다(《북한에서의 시련》, 232~233쪽).

127) 성 베네딕도회 문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시복 추진 현황〉, 3쪽.

[교회사 연구 제33집, 200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장정란(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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