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수도 ㅣ 봉헌생활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6-13 ㅣ No.670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상)


안으로 수도승, 밖으로 선교사

 

 

-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창설자인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 수녀원 제공.

 

 

기도와 공동체 생활로 관상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이 외국에 나가 선교활동을 할 수 있을까. 오늘날은 수도자들의 해외선교가 자연스럽게 여겨지지만, 여전히 ‘관상 수도회가 활동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안드레아스 암라인(Andreas Amrhein, 1844~1927) 신부라면 망설임 없이 “가능하다”고 답했을 것이다. 성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따르는 관상의 삶 속에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수도회,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를 창설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844년 스위스 루체른 지방에서 태어난 암라인 신부는 ‘미술 신동’이었다. 미술에 탁월한 천재성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에서 미술 공부를 해오던 그를 성소의 길로 이끈 계기는 1867년 파리 외방 전교회가 주관한 ‘순교자 기념 전시회’였다. 암라인 신부는 이 전시회를 통해 선교사가 되고자하는 강렬한 열망을 얻었고, 1868년부터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과거 베네딕도회의 선교활동에 대한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베네딕도 수도회 입회를 결심했다.

 

암라인 신부는 1870년 보이론의 관상 베네딕도 대수도원에 입회했고, 1872년 사제품을 받았다. 암라인 신부는 선교를 향한 열망으로 꾸준히 장상에게 외방 선교의 허락을 간청했지만, 관상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선교에 대한 허락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암라인 신부는 선교 성소에 관해 당대의 여러 학자들, 특히 성 아놀드 얀센 신부 등과 의논하면서 선교 영성을 구체화시키며 선교 수도회의 설립을 구상했다. 마침내 마오로 아빠스는 암라인 신부에게 “보이론을 떠나 포교성성에 순명해도 된다”고 허락했다. 이어 1884년 6월 29일 레오 13세 교황은 선교수도회 설립 서류에 서명하고 새 수도회에 강복했다. 암라인 신부는 베네딕도회의 영성과 선교 소명을 결합시켜 1884년 남자수도원 ‘포교 베네딕도회’를, 그리고 1885년 9월 24일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를 창설했다.

 

‘안으로 수도승, 밖으로 선교사.’ 암라인 신부는 이 이상을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에서 구현했다. 수도영성에 따라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원은 그 지역 전체를 위한 은총의 중심이자 복음화의 원천이 된다. 또한 수도원은 베네딕도회의 수도 생활을 실현하면서 외교인들 사이에서 직접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을 찾는 삶’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베네딕도 성인의 수도영성을 바탕에 두고 지역과 교회의 필요에 따라 교육, 문화, 복지 등 다양한 활동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암라인 신부의 영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암라인 신부는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뤄서, 만사에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해” 세운 집이라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6월 13일, 이승훈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중)


순교로 이어진 수녀들의 선교 열망

 

 

- 원산에 처음 파견된 4명의 수녀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 수녀원 제공.

 

 

“수녀들은 놀라울 정도로 그 요구들이 단순하며, 그들의 장상은 수도적 기풍을 유지하는데 엄격합니다. (중략) 수녀들은 그들이 받은 성소, 기도, 일, 노래 등을 빼어나게 잘 수행하려는 열의로 활활 타고 있습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창설자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는 선교 수도회를 위해 수녀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선교 사도직을 위해서는 수녀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이다.

 

암라인 신부는 1885년 9월 24일 선교 성소를 지닌 4명의 첫 수녀 지원자를 입회시켰다. 초기에는 남녀 수도원이 한 지역에 있었지만, 1904년 수녀들은 툿찡(Tutzing)으로 모원을 이전하면서 남녀 수도원은 명칭과 제도, 관리면에서 완전히 분리됐다. 1924년에 교황청 포교성성은 수녀회를 교황청 수녀회로 인준했다.

 

수녀회는 현재 모원이 있는 독일을 포함해 유럽, 아프리카, 북미, 남미, 동남아시아, 한국 등 15개국 12개 프리오랏(수도원 본원)과 128개 분원에서 1300여 명의 수녀들이 활동하는 세계적인 선교 수도회로 성장했다.

 

이런 수녀회의 성장 뒤에는 “순교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라는 테르툴리아누스 교부의 말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선교의 열망이 순교로 이어졌던 것이다.

 

순교는 수녀회 초창기부터 있었다. 동아프리카로 파견된 수녀들이 순교한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유럽의 젊은이들이 영감을 받고 수녀회에 입회했다. 남녀 수도회가 한 곳에서 지내던 쌍트 오틸리엔의 연혁에 따르면 1887년부터 1895년까지 69명의 남녀 선교사를 아프리카로 파견했는데 1895년 말에 남은 선교사는 17명뿐이었다고 한다. 그 기간 중 선교사의 4분의 3이 선교를 위해 투신하다 피살되거나 현지의 열병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수녀회의 여러 수녀들이 순교했다. 수녀회가 우리나라에 처음 자리 잡은 것은 192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였다. 독일 툿찡 모원에서 파견된 4명의 수녀들로 시작한 원산 프리오랏은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박해를 당했다. 수녀회는 강제 해산당했고, 수도자들은 수용소에 끌려가 중노동과 추위, 병과 굶주림으로 죽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이때 순교한 하느님의 종 에바 오이게니 슈츠 수녀·장 아녜다 헌신자(평신도 봉헌회원)·박진숙 루치아 수녀·푸룩토우사 수녀가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동료 37위’로 시복 심사 중이다.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수녀들은 해방 후 독일 정부의 요청으로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 중 많은 수녀들은 다시 한국 땅으로 돌아가길 열망했고 한국에 남아있던 수녀들과 함께 1956년 대구에 다시 프리오랏을 세웠다. 그리고 수도공동체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1987년 서울에 새롭게 프리오랏을 세우게 됐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6월 20일, 이승훈 기자]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하)


‘기도하고 일하며’ 필요한 모든 분야에서 헌신

 

 

-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수녀원 성남분원의 수녀와 봉사자들이 독거노인들을 위해 도시락반찬을 만들고 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서울 수녀원 제공.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는 성 베네딕토의 가르침에 따른 수도의 삶을 통해 참으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가운데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기여한다. 이런 수녀회의 영성은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말로 구체화된다. 바로 기도와 공동생활, 그리고 일(선교활동)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수녀회는 베네딕도회 영성의 중심인 공동기도와 공동생활을 중시한다. 분원에서도 최소한 4명 이상의 수녀들이 함께 거주하며 공동으로 기도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예외도 있다. 특히 전례에 따른 기도에 충실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관상하는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도 중시하고 있다.

 

수녀회의 일, 곧 선교활동은 정해진 형태를 두지 않고 있다. 수녀회는 이 시대의 이 지역의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서 베네딕도회의 기도생활과 공동생활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도직에 종사한다.

 

수녀회는 1925년 한국 진출 당시부터 본당선교와 의료, 교육 분야에서 적극적인 사도직 활동을 펼쳐왔다. 원산 프리오랏(수녀원)은 신고산, 회령, 청진, 함흥, 흥남 등지에 분원을 설립하고 ‘성심의원’, ‘마리아 도움 시약소’, ‘해성학교·유치원’, ‘호수천신학교’ 등 다양한 의료·교육 기관을 운영했고, 청각장애인을 위한 교육도 했다.

 

원산 프리오랏은 1949년 북한 정부가 폐쇄시켰지만, 그 사도직은 대구와 서울 프리오랏에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56년 원산 프리오랏에서 활동하던 수녀들이 대구로 다시 모여 대구 프리오랏을 세웠다. 대구 프리오랏의 수녀들은 원산에서 해온 활동에 이어 본당 선교와 함께 ‘대구·창원 파티마병원’, ‘김천 성의여중·고’, ‘함창 상지여중·고’ 등 의료·교육기관을 운영하며 선교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대구 프리오랏에서 수년간 준비하여 1987년 분가하여 서울 프리오랏이 설립되면서 수녀회의 사도직 영역은 더욱 다양화됐다. 서울 프리오랏은 제1차 총회에서 작성한 규범에서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강조했다. 이를 위해 가능한 한 큰 사업체를 지양하고 본당사목을 비롯한 다양한 사도직을 통해 병자와 노인, 억압받는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교구 내에는 서울 프리오랏 소속 분원들이 성남, 원곡, 기천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1975년부터 자리 잡은 성남 분원은 서울시내 판자촌 정리 사업으로 밀려난 철거민, 가난한 노동자들을 돕는 활동을 해왔고 현재도 상대원본당을 중심으로 사도직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건강한 자아형성을 위한 모래놀이 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독거노인들을 위해 도시락반찬을 만들어 배달하며 시대에 발맞춰 힘없는 이들의 지렛대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993년 설립된 원곡 분원은 청각언어장애 어르신을 위한 공동체인 ‘성요셉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2004년 기천리에 마련한 교육센터는 어린이들이 숲을 체험하며 자연을 배우고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시작했으나, 코로나19 이후 말씀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피정으로 신앙생활에 활력을 주고 있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21년 6월 27일, 이승훈 기자]



2,28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