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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교회 안 상징 읽기: 문장으로 알아보는 성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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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7-02 ㅣ No.1993

[교회 안 상징 읽기] 문장으로 알아보는 성인 이야기

 

 

- 성 디오니시오(좌)와 제오르지오(우), 성 베드로 사도의 문장(위)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문장(아래).

 

 

유럽의 오래되고 큰 성당들을 보면 그 외벽이며 안으로 들어가는 들머리 공간, 그리고 창문들까지도 많은 조각상들과 그림들로 꾸며져 있다. 그 작품들의 소재는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구세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고, 또 꽤 많은 성인성녀들이다. 그렇다면 그 조각상들이며 그림을 보는 여느 사람들은 그 많은 성인과 성녀들 중에서 어떻게 각각의 성인을 분간하고 특정해서 알아볼 수 있을까.

 

사실, 중세기의 예술가들은 성인을 형상으로 조각하거나 그림으로 그릴 때 사람들이 그 작품을 바라보면서 어떤 성인을 표현한 것인지를 쉽사리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다. 예술가들은 나름의 간절한 예술적 열정을 바탕으로 각고의 노력 끝에 특정 성인화(聖人畵)나 성인상(聖人像)을 만들어냈을 테지만, 정작 그것들을 보는 사람들은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성인에게는 저마다 특징적인 일화나 면모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 특징적인 일화와 면모가 겹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성 제오르지오와 성 테오도로는 기사(騎士) 또는 군인 출신의 성인이고, 성녀 바르바라와 성녀 아녜스는 동정 성녀다. 그러니 이렇듯 비슷한 면을 지닌 성인성녀들을 어떻게 하면 혼동하지 않고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할 것인가.

 

- 성녀 아폴로니아, 성녀 바르바라, 성 요한 사도의 문장.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에 설치된 작품들을 제작한 예술가들은 이 문제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다. 그것은 특정 성인의 생애나 죽음과 관련해 널리 알려진 일화에서 연상되는 소품을 그 성인의 발아래에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자면 성 디오니시오 상의 받침대에는 사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성 제오르지오 상의 받침대에는 수레바퀴를 새겨 넣었다. 일찍부터 사자와 수레바퀴가 각각 성인의 죽음 또는 순교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인에 대해서 표현할 때는 힘들고 어려운 박해를 극복하고 이겨낸 승리자로 묘사하되, 성인 한 분 한 분이 박해자를 딛고 선 모습으로, 또는 그 박해자가 성인을 고문하고 처형할 때 사용한 형구나 무기를 딛고 선 모습으로 묘사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작품에 사람들의 눈길과 관심이 더욱 집중되기를 바라던 예술가들은 차츰 성인이 자신의 순교와 관련된 특정한 고문 도구나 처형 도구를 손으로 받쳐 든 형태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먼저 사도들이 그런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유럽의 대성당들에 설치되어 있는 사도 상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 베드로 사도의 손에는 아래위가 반전된 형태의 십자가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손에는 가죽을 벗기는 칼이, 성 마태오 사도의 손에는 창이 들려 있다. 사도들의 손 위에 들려 있는 것을 보고 그 주인공이 누구이며, 그 사도가 어떤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성녀 루치아, 성녀 체칠리아,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성인의 생애나 죽음과 관련된 소품을 성인의 발아래 배치

 

차츰 사도가 아닌 성인들의 경우에도 이러한 표현 방식이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집게로 이를 뽑히는 고문을 당한 성녀 아폴로니아는 손에 집게를 든 형태로, 아버지에 의해 탑에 감금된 성녀 바르바라는 손에 창문 3개가 나 있는 탑을 든 형태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다(여기서 탑의 창문 3개는 한편으로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이를테면, 박해자들이 고문하고 처형하기 위한 잔인한 도구들이 성인들에게는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도구(열쇠)가 된 것이고, 이를 받쳐 든 성인의 손에서는 그 성인이 거둔 영광스러운 승리의 표징이 된 것이다.

 

14세기부터는 성인화나 성인상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성인이 이런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이제는 굳이 고문과 처형을 위한 도구가 아니더라도 특정 성인의 고유한 면모를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소품이 도입되었다. 더러는 성인의 생애와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 일화의 소재가 그 성인을 상징하는 특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가령, 뱀이 도사리고 앉아 있는 잔(성작)은 성 요한 사도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인지되었다. 이는 성인이 적대자들의 간계에 빠져서 독이 든 잔을 받아 마셨는데,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마셨기에 아무런 피해도 당하지 않고 무사했다는 일화에서 비롯한다.

 

이런 식으로 세리 출신인 성 마태오는 돈주머니를 손에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약혼을 파기하고 자신의 두 눈알을 스스로 파냈다고 전해지는 성녀 루치아는 두 눈알이 담긴 접시를 손에 든 모습으로, 음악의 수호성인인 성녀 체칠리아는 하프를 손에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업적으로 길이 칭송되는 성 예로니모는 성경책을 손에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어깨 위에 앉아 있는 비둘기로 다른 교황들과 쉽사리 구별된다. 이는 비둘기(성령)가 성인을 찾아와서 무엇인가를 불러 주며 받아 적게 했고, 성인은 이를 받아 적어서 빼어난 저술을 남겼다는 이야기에서 비롯한다.

 

- 성녀 제노베파, 성녀 아녜스.

 

 

특정 성인을 나타내던 상징이 문장(紋章)으로 발전

 

물론 성인들 중에는 다른 성인과 결코 혼동될 리가 없을 정도로 독특한 이력을 가진 분도 있다.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가 그러하다. 몸을 팔며 지내던 성녀는 어느 날 느닷없이 요한 세례자가 지내던 광야, 곧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곳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는 즉시 광야로 들어갔다. 고작 빵 세 덩이만을 갖고 광야로 들어간 성녀는 그곳에서 요한 세례자처럼 야생의 열매를 먹으며 지냈다. 그렇게 속죄의 삶을 산 기간이 무려 47년이었는데, 그 긴 세월 동안 성녀가 굶주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독특한 이력으로 해서 성녀는 다른 참회자와 헷갈릴 일이 없다.

 

또한 성녀 제노베파는 흔히 촛불(또는 등불)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 독특한 상징성은 복음서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들의 등불 이야기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성녀를 그린 그림 중에는 성녀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사탄이 입김을 불어 성녀가 손에 든 촛불을 끄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천사가 다시 불을 붙이려 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있다. 한편, 플랑드르(오늘날의 벨기에 서부, 네덜란드 남서부, 프랑스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에 있던 중세의 국가)에서는 이 비유가 성녀 구둘라에게 적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성인의 경우에는 그 성인의 생애에 얽힌 일화나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속성이나 사물에 의해 상징되기도 했다. 성 마르티노는 때로 야생 거위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표상되는데 성인의 생애에 이 상징성을 뒷받침할 사실이나 일화는 전혀 없다. 굳이 연관성을 말하자면, 성인의 축일(11월11일)이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 곧 철새들의 이동이 시작되는 시기와 맞물린다는 점 정도다. 그리고 성녀 아녜스는 그 이름이 ‘어린양’을 뜻하는 라틴어 아뉴스(Agnus)와 철자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어린양을 안은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저런 연고로 해서 각 성인과 그 성인의 생애를 함축적으로 말해 주는 상징 또는 표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성인의 전 생애는 하나의 고유한 상징 안에서 집약되었고, 이러한 상징성은 교회의 성인 상들이며 성인화들에 고스란히 표현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성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특정 성인을 나타내 주는 상징 또는 표징에 차츰 친숙해져 갔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징성은 차츰 성인의 문장(紋章)이라는 형태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7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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