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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자비의 특별희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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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1-23 ㅣ No.344

[경향 돋보기 - 자비의 특별희년] 자비의 특별희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신 칙서 「자비의 얼굴」은 이 확신에 차고 명료한 단언으로 시작한다. 흉폭한 반대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음에 이른 예수님에게서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보았다(마르 15,33-41 참조).

교황님이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신 이유는 우리 신앙인 각자가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뚜렷한 표지가 되는 것이다(3항 참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자비의 얼굴」의 안내를 따라 우리 각자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자비의 특별희년을 보낼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따로 언급하지 않는 한 참조되는 항은 「자비의 얼굴」의 내용임을 밝힌다.

‘자비의 특별희년’은 먼저 하느님의 자비가 없다면 우리의 삶이 단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요청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자비를 자주 공공연하게 고백하였다(시편 103; 136; 146; 147 참조). 예수님께서도 수난하시기 전에 이 시편들로 기도하셨다(마태 26,30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으로 하느님 자비의 정점을 보여주셨다. 특히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다가가게 하신 힘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다. 그분에게 모든 행동의 기준은 바로 자비이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세리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마태 9,1-13 참조). 심지어 그분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또 안식일의 준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자비의 실천이었다. 아니 하느님 자비의 실천이야말로 안식일을 진정으로 준수하는 것이다(마태 12,1-13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매정한 종에 대한 비유(마태 18,23-35 참조)를 이야기하신다. 아주 많은 빚을 그 주인으로부터 탕감받았음에도 그에 훨씬 못 미치는 빚을 진 동료의 청을 거절하고 감옥에 가둔 종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만일 그 종이 자신의 빚 탕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깨닫고, 그 주인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했다면 그보다 적은 동료의 요청을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은 딱한 종의 처지를 헤아려서 모든 빚을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주인이며, 모든 것을 잃고서야 집으로 돌아온 방탕한 아들을 진심으로 환대하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시다.

이 희년에 우리는 세상의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 용서와 자비가 필요한 모든 사람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빚의 탕감과 기쁨의 잔치에 참여한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성경 묵상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를 입고 살아가는지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앞에서 말한 성경 구절들을 비롯하여 「자비의 얼굴」에서 언급하는 여러 성경 이야기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그 상황에 대입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여기서 나는 세리 마태오가 되고,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병자가 되고, 외아들을 잃은 나인의 과부가 되고, 매정한 종이 되어볼 수 있다. 이 상황에 머물러 묵상하면서 지나간 내 삶의 여정을 반추하면 우리는 얼마나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에 기대어 살아왔는지 문득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참회와 고해성사

성경이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를 잘 보여주었다면, 이제 그 자비를 참으로 맛보는 계기는 고해성사이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과 화해하게 된다. 자기 죄를 깊이 성찰하고 참회하며 죄인임을 고백하는 고해성사는 희년에 필수적인 신앙행위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가 이 고해성사를 기피하는 것도 현실이다. 이에 주교회의 2014년 춘계 정기총회에서는 ‘신앙의 해’ 기간에 연구되었던 ‘주일미사와 고해성사에 관한 공동 사목 방안’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주교회의는 고해성사를 의무 수행의 관점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복된 은총의 계기임을 명시하고, 고해성사의 활성화를 위한 여러 사목적 제안을 하였다.

교황님의 말씀처럼 분명히 고해성사는 주님께 돌아가는 길,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는 길, 삶의 의미를 되찾는 길이다.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한 자비를 직접 깨닫게 될 것이며, 참된 내적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17항 참조).

특별히 이번 희년의 ‘주님을 위한 24시간’은 사순 제4주일에 앞선 금요일에서 토요일(2016년 3월 4-5일)에 이루어질 예정이다. 본당은 24시간 동안 성당 문을 열어놓고 성체조배와 고해성사를 볼 수 있게 할 것이며, 신자들은 기도와 단식, 자선에 대한 묵상과 실천을 통하여 주님을 위한 희생과 봉헌을 한다.

또한 이번 희년에 교황님은 ‘자비의 선교사’를 지역교회에 파견하시어 사도좌에 유보된 죄에 대한 사죄 권한도 부여하셨다. 따라서 신자들은 자비의 특별희년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위해 활짝 열린 교회로 돌아와 참회하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결심하여야 한다.


대사를 받으려면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였지만 동시에 아직 우리 안에서 뿌리 깊은 죄의 영향력을 느낀다. 우리 죄의 결과는 우리의 전 존재에 상처를 남겨 용서받은 자로서 그에 맞갖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이미 용서받은 죄인에게 다가가시어 죄의 결과로 남은 모든 것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신다. 그래서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고 자비롭게 행동하며 사랑을 키울 수 있게 해준다(22항 참조). 이것이 바로 대사(大赦)이다.

이 자비의 희년에 수여되는 전대사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은 앞으로 교황청 내사원에서 발표할 예정이지만 교황님이 지난 9월에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 의장인 피시켈라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그 대강을 미리 볼 수 있다.

곧 신자들이 대사를 받으려면 먼저 진심으로 회개하고자 하는 깊은 열망의 표시로 모든 주교좌성당이나 교구장 주교가 지정한 성당들, 또는 로마 교황 대성전 네 곳에 있는 성문(聖門), 자비의 문이 열려 있는 순례지와 전통적으로 대사를 얻도록 지정된 희년 성당을 순례해야 한다. 여기서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여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해야 한다. 아울러 반드시 신앙고백을 하여야 하며, 또한 교황님의 지향과 같이하며 교회와 온 세상의 선익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지정 성당의 성문을 향한 순례

교황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삶 자체가 순례이며 인간은 나그네 곧 간절히 바라는 목적지를 향한 순례자이다. 특별히 이번 희년의 순례의 목적지는 자비하신 주님께 용서를 받고 우리도 용서의 도구가 되어 남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다(14항 참조).

교회는 지난 12월 8일 자비의 해를 시작하면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문을 열었고, 12월 13일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각 지역교회의 지정 성당 문이 열렸다. 우리는 이 성문을 향하여 순례하고, 이 문을 통과함으로써 위로와 용서, 희망을 불어넣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고, 회개의 길을 찾음으로써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될 것이다.


자비의 희년에 실천해야 할 하느님 자비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9항 참조). 자신 안에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달은 사람은 이제 자신 안에만 머물 수 없다. 교황님은 신앙인들에게 눈을 떠 이 세상의 비참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존엄을 박탈당한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외면하지 말고 똑똑히 보라고 호소하신다. 그들을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는 무관심, 하느님도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하신다. 이 자비의 희년은 바로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선포하신 희년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현대의 새로운 노예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할 책무를 지니고 있다(16항 참조). 교황님의 이번 칙서에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알려진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발터 카스퍼 추기경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자비는 궁극적으로 고통 받는 이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자비」, 가톨릭출판사, 274면 참조).

교황님은 자비의 희년에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자비의 육체적 영적 활동에 대해 언급하시고 있다. 자비의 육체적 활동은 배고픈 이들, 목마른 이들, 헐벗은 이들, 나그네들, 병든 이들, 감옥에 있는 이들, 죽은 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것은 심판의 기준이 될 정도로 중요하다(마태 25,31-45 참조).

한편, 자비의 영적 활동은 의심하는 이들에게 조언하고, 모르는 이들에게 가르치며, 죄인들을 꾸짖고, 상처 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우리를 모욕한 자들을 용서해 주고,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을 인내로이 견디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다(16항 참조; 「가톨릭교회 교리서」, 2447항 참조).

자비의 희년이 선포된 지금도 세계적으로는 파리의 잔혹한 테러 등 폭력이 되풀이되고 있다. 국내적으로도 한국사회는 이념과 지역, 성과 연령, 계층 간에 극단적 대립과 배제가 반복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탄식처럼 오늘날 세계와 그 문화는 자비와 용서에 대한 경험이 점점 드물어지고, 그 말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10항 참조).

이런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는 교황님의 기원처럼 본당과 지역사회, 직장 등 우리가 있는 곳 어디서나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실천, 우리의 살과 피를 통해 드러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들어가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을 찾아나서게 하여야 한다(12항 참조).

사랑의 문화, 자비의 문화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우리 각자가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도록 주님께서 파견하신 바로 그 사람이다!

* 엄재중 요셉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1월호, 엄재중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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