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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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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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0 ㅣ No.1240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 (1) 하느님의 경제, 인간의 경제, 경제의 목적인 인간



‘하느님의 경제’의 실현으로서 ‘인간의 경제’

오늘날 경제(생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삶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결코 낯선 개념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막상 ‘경제란 무엇인가?’, ‘경제가 인간의 삶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는 대답이 막연해집니다. 이처럼 경제를 모르면서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경제는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하고 편리하게 하는 여러 수단을 생산 공급하기 위한 인간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활동”(강수돌, 『경영과 노동-사회생태적 경영을 위한 밑거름』, 도서출판 한울, 1997, 27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제는 인간을 위해서 봉사하는 한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탐욕에 물든 인간은 오히려 자신이 만든 경제(체제)를 절대자로 고백함으로써 경제에 예속된 노예적 상황 속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을 둘러싼 물질문명에 기울어진 기존의 경제 개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피조 세계에 대한 다스림과 봉사의 직무를 부여받았음을 고백하는 교회는 시장 경제 체제에서 제안하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의 경제를 제안합니다.

“도덕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제 활동은 개인의 성장에 유용한 재화와 용역의 생산에서 오는 봉사이며, 모든 사람이 연대를 실현하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인 사람들과의 친교의 소명을 실천하는 기회가 된다”(『간추린 사회 교리』, 333항).

원래 ‘경제(economy)’는 희랍어 ο?κονομ?α(오이코노미아)에서 유래합니다. ο?κονομ?α는 ο?κο?(오이코스 : 집)와 ν?μο?(노모스 : 법)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는 ‘집의 법, 또는 집의 관리’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ο?κο?는 포괄적인 의미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피조 세계 전체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ο?κονομ?α는 피조 세계를 향하여 피조 세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 즉 하느님의 구속 사업 전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ο?κονομ?α는 ‘하느님의 경제(경륜, 업적)(ο?κονομ?α το? θεο? : 오이코노미아 투 테우)’(에페 1,9; 3,2.9; 콜로 1,25; 1티모 1,4; 1코린 9,17)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경제’는 피조세계의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며, 생명을 위한 인간 경제의 토대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경제’는 죽음에 대항하는 ‘생명의 경제’입니다. ‘인간의 경제’는 ‘하느님의 경제’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어야 하기에, ‘경제’는 창조와 종말 사이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계속적인 창조 활동에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창조질서에 입각하여 새로운 인간 경제를 모색해야 합니다.


경제의 목적 :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

‘인간의 경제’가 ‘하느님의 경제’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라면 경제의 목적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져야만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모든 경제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사목 헌장」, 63항)입니다.

“생산의 근본 목적은 단순한 생산품의 증가 또는 이익이나 지배가 아니라 오로지 인간에 대한 봉사이다. 곧 인간의 물질적 필요와 지성적, 도덕적, 정신적, 종교적 생활의 요구를 다 고려하는 참으로 전인에 대한 봉사이다. 인간이란 모든 개인과 모든 인간 집단과 모든 인종과 세계 모든 지역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경제활동은 고유의 방법과 법칙에 따라 도덕 질서의 경계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되도록 이루어져야 한다”(「사목 헌장」, 64항).

그런데 경제와 관련하여 인간을 두 가지 관점에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창조 신앙에 입각하여 이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창조 질서 보존을 위한 봉사의 임무를 부여받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따를 때 경제는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세상 사이의 관계에서 서로를 살리는 제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근대 인간 이성의 발견과 과학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형성된 인간 중심적인 관점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전지전능한 권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조장합니다. 근대 이후의 경제학은 주로 두 번째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봄으로써 경제를 단순히 인간 욕구 충족의 과정으로 전락시키고, 동료 인간들과 인간을 둘러싼 세상을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착취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다른 한편 경제의 목적이 인간이라고 해서 인간의 모든 경제 활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할 때에 비로소 경제의 목적으로서 정당한 위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는 ‘지배적 경제’가 아니라 ‘봉사하는 경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소수가 아닌 모든 인간의 삶의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 지상의 모든 피조물의 삶에 대한 봉사, 미래 세대의 삶에 대한 봉사라는 세 가지 차원을 고려하여야만 합니다. [2015년 3월 22일 사순 제5주일 의정부주보 6-7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송산 주임)]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 (2) 구약성경에 나타난 경제



출애굽과 계약 공동체의 형성

이스라엘 신앙 역사의 출발점은 이집트의 노예제 정치경제 구조의 최하층에서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하느님의 역사적 구원 업적인 출애굽 사건입니다. 탈출기 1-3장은 이집트 노예제 하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겪었던 억압적 상황과 함께 이들을 해방시키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탈출기 전체는 노예제 경제 하에서 연대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착취당했던 강제 노동자들이 하느님의 역사적 개입으로 종교적 정치적으로 세력화하여 해방되어 가는 과정을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하느님의 통치가 인간이 인간을 도구화시키고 착취하는 노예제 정치경제와 화합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집트 탈출 후에 이스라엘 민족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계약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하느님과의 계약은 법전의 형태로 표현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실제 생활의 지침으로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통해 가난한 자들과 약자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신체적, 사회-경제적, 도덕적, 종교적 안전에 관하여 강자들로부터 억압과 침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받았습니다.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계약 공동체는 중앙집권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체제하에 놓여 있지 않았고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부족 동맹을 형성하였으며 자급자족적인 연대적 가족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근동 지방의 중앙집권적 정치경제적 체제와는 대조되는 자율적이고 평등한 정치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왕정 체제와 예언자들의 비판 정신

하느님의 영을 받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었던 판관들에 의한 지도 체제가 왕정 체제로 전환되면서,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왕정 체제 성립 이전에 이미 강제노동과 잉여 재산의 착취라는 중앙집권적 왕정 체제의 위험이 예견되었습니다(1사무 8,11-18 참조). 하지만 인접 국가들의 영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정 체제를 요구하였고, 이러한 요구에 따라 이스라엘에 왕정 체제가 수립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정 체제 수립 후에 출애굽의 정신을 상실하고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에는 출애굽의 사건을 계기로 하여 근본적으로 만인 평등의 사상이 자리 잡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재산과 부를 향유할 권리를 균등하게 가지게 되었지만, 왕정 체제가 수립된 후에 사회계층간의 격차가 심해지고 계층 간의 긴장 관계가 조성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기존의 종교 · 정치 · 경제 체제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출애굽과 계약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소수 특권층의 부당한 부의 축적과 집중(아모 6,1-7; 이사 5,11-13 참조),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 생활(이사 3,16-17.24 참조), 권세욕과 소유욕에 집착하여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행위(아모 8,4-7; 이사5,8; 3,14-15; 미가 2,1-2; 3,3 참조)를 규탄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가난한 자의 인권을 세워 주는 것에 있으며(예레 22,16 참조), 폭력과 살인과 도둑질은 하느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폭로하였습니다(호세 4,1-6 참조). 에제키엘 예언자는 사회적 부패에 맞서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으며, 이웃을 학대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며, 고리대금으로 부정한 부를 축재하지 않고, 정의에 입각하여 재판을 행사해야 한다고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외쳤습니다(에제 18,5-9 참조). 한편 예언자들은 형식적인 경신례를 비판하면서(아모 4,4-5 참조) 선업을 실천하고(아모 5,14-15; 5,21-24 참조) 법과 정의를 실행함으로써(미가 6,6-8 참조) 참된 경신례를 올릴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정치경제 생활은 분리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정의와 사랑에 입각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구원 역사에 지속적으로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2015년 4월 26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이민의 날) 의정부주보 6-7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송산 주임)]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 (3) 신약성경에 나타난 경제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초대 교회 공동체

출애굽을 출발점으로 한 이스라엘의 해방의 역사와 예언자의 전통 안에서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은 항상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야훼 하느님의 구원의 직접적인 담지자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러한 지위는 신약성경에서 보다 확고하게 자리 잡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에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가난한 이들, 묶인 이들과 억눌린 이들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일차적 수혜자임을 드러냈으며(루카 4,18-19 참조), 행복 선언(루카 6,20-26 참조)을 통해 메시아의 통치, 즉 하느님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핵심적인 위치를 선포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가난한 이들의 사회 경제적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를 경제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는”(루카 1,53) 경제이고,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말고”(루카 6,30)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며”(루카 6,35) 얼마 안 되는 양식으로 많은 사람이 배 부르는(참조: 루카 9,10-17) 나눔의 경제입니다. 또한 율법의 형식적인 준수보다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는 경제입니다(루카 6,1-5 참조). 이러한 경제 개념은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서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위계 구조가 명확했던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대안적 사회를 구성하게 하는 추진력을 가지게 됩니다.

루카 복음이 전하는 이러한 나눔의 경제는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실천되었습니다(사도 2,43-47; 4,32-37 참조). 모든 것을 나누는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 안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한 하느님 인식,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생동적인 사귐, 매일의 공동 식사. 예수님에 대한 회상과 만족스러운 봉사,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인 사유재산의 포기가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 공동체는 삶을 위한 경제생활을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행복’의 경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고, 인간이 실생활에서 이 행복을 추구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경제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이 생각하는 행복의 척도가 다양하기 때문에, 행복 추구를 위한 구체적인 경제적 행위도 다양한 형태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참된 행복의 척도는 예수님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가르침(루카 6,20-25 참조)입니다. 이 가르침에서 ‘참된 행복’의 경제를 도출할 수 있는데, 이는 물질문명에 젖어 있는 낡은 틀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거듭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절대시된 인간의 능력을 기초로 한 생산력의 발전으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일구어 낸 현대 산업 사회는 무한정한 물질적 축적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인간에게 심어 주었고, 인간은 이러한 물질적 축적으로 보다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림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고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무한정한 물질적 축적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적 축적이 인간 행복의 조건이라는 그릇된 관념은 인간을 ‘소유’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인간관계를 물적 관계로 전환시키며, 생태 환경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낳음으로써, 인류를 포함한 세계 공동체를 점점 파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주와 마주 선 작은 존재이며 창조주의 위임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행복’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 인간은 창조 때의 본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회개한 인간은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가난을 재생산하는 불의한 구조와 맞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가난한 삶을 추구함으로써 ‘참된 행복’의 경제를 구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로서의 가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드러내는 표지로서의 가난은 인간관계와 사회경제적 구조 안에 널리 퍼져있는 인간적 욕망과 탐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빈익빈 부익부를 강제하는 사회경제적 이념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고발하기 위해 이러한 가난을 직접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2015년 5월 3일 부활 제5주일(생명 주일) 의정부주보 6-7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송산 주임)]

 


인간의 삶을 위한 경제 (4) 하느님과 맘몬 사이의 결단으로서 경제



하느님 나라 - 하느님의 다스림

인간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의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평화와 자유, 정의와 생명에 대한 인류의 갈망과 추구라는 지평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역사 안에서 인류가 끊임없이 추구하였던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기적 탐욕과 욕망으로 인해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기에, 하느님께서 다스림으로써 하느님만이 줄 수 있는 것, 결국 하느님 자신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악의 권세로부터의 해방, 갈기갈기 찢겨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상 만물 상호 관계의 화해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인간 역사 안에서 인정되고 관철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되어질 수 없고 오직 하느님의 선물로서만 가능하며, 인간은 하느님이 자신의 참된 주인이라는 고백과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결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한편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사명이었을 뿐만 아니라(마태 4,23; 루카 8,1 참조),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 예수님께서 전한 복음을 결연히 받아들인 제자들의 사명이기도 하였습니다(마태 10,7; 루카 10,9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청중들에게 삶에 필요한 재화를 추구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도록(마태 6,25-34 참조) 촉구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님의 파견으로 시작된 하느님 나라에 살도록 초대받았으며 신앙의 결단을 통해서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맘몬(재물)

맘몬(맘모나 : μαμωνα)은 명사형으로 사용될 때는 ‘돈’, ‘부’, ‘세속적 재물’, ‘뇌물’, 동사형으로 사용될 때는 ‘돈을 벌다’, ‘부정 축재하다’, ‘타인의 소유를 착취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맘몬은 ‘재산’, ‘세속적 물질’을 뜻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거부하는 물질 만능주의’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맘몬은 ‘돈, 재물’ 그 이상으로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다스림)과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경제적, 법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요소들의 총 집합을 말하는 것으로, 불의와 폭력을 생산하는 파괴적 체제를 의미하는 ‘우상’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맘몬(재물)은 그 자체로서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맘몬은 인간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맘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이러한 한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약은(불의한) 청지기(루카 16,1-8 참조)의 비유와 더불어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4-25)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맘몬 역시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맡겨진 인간 생활의 수단이라는 것, 그러나 인간은 오히려 맘몬의 노예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맘몬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 의무를 망각하고 맘몬을 축재의 도구로 삼을 때, 맘몬은 평등성을 기초로 한 인간 상호 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하느님과 인간을 단절시키고, 인간을 지배하는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경제적 권력은 무한정하고 무제약적인 권력만을 추구하는 절대적인 실체가 되어 버렸는데,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맘몬 개념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맘몬이 아니라 하느님을 선택하는 경제

인간은 하느님과 맘몬 사이에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경제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예수님은 맘몬 자체를 부정하거나 폐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재물 자체가 축적의 대상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지지 않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집중된 재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마태 19,21; 루카 12,33; 16,9; 19,8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하느님과 맘몬 사이에서의 선택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경제 윤리는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시편 146,7) 하느님 중심주의에 입각하여 인간이 만든 경제 체제를 절대화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신앙 고백으로서 경제를 바라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완성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역사하십니다. 인간의 삶 역시 하느님 현존의 역사 안에서 이해될 때,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물질세계의 무상성을 극복하고 삶의 의미와 희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의 의미는 재물의 소유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2015년 5월 10일 부활 제6주일 의정부주보 6-7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송산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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