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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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건축 이야기20: 주님 무덤 성당, 최초의 중심형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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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23 ㅣ No.960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20) 주님 무덤 성당, 최초의 중심형 성당


예수님 빈 무덤 위에 세운 독립된 그리스도교 중심형 성당

 

 

예루살렘 주님 무덤 성당 외관. 출처=Wikimedia Commons

 

 

넓은 성당과 순교자 묘소 기능 함께 갖춰

 

3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묻히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자리에 ‘아나스타시스(Anastasis, 그리스어로 부활이라는 뜻)’이라는 원형 건물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아나스타시스 로툰다(Anastasis Rotunda, 335년)이다. 둥근 주보랑이 둘러싸인 지름 40m 평면 위에 지름 33m의 돔이 얹힌 로툰다는 최초의 독립된 그리스도교 중심형 순교자 묘소였다. 후에 이 로툰다에 아트리움과 바실리카에 붙여 예배자들을 충분히 수용하기에 넓은 성당과 순교자의 묘소라는 두 기능을 함께 갖추었는데, 그 전체를 주님 무덤 성당(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이라고 부른다.

 

주님 무덤 성당의 터는 1세기 초 예루살렘 성벽 바깥 쓰지 않는 채석장의 바위를 깎은 유다인 무덤이 있던 곳이었다. 70년 예루살렘은 성전이 파괴되었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도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는 빈 무덤에서 약 100년 동안 전례를 거행하고 있었다. 13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완전히 새로운 이교도의 신도시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를 만들고자 했는데,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은 이 도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의도적으로 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장소에 로마의 비너스-아프로디테 또는 주피터를 위한 신전을 세웠다. 먼저 두꺼운 옹벽을 세우고 엄청난 양의 흙과 돌로 채워서 예수님의 무덤 바로 위를 평탄한 마당으로 만들어 버렸다. 교부 예로니모도 십자가가 서 있던 바위 위에 비너스의 대리석 조각상을 세웠다고 전해 주었다.

 

이로부터 약 180년 지난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황제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다가 골고타와 무덤이 있었던 위치에 대해 듣게 되었다. 결국 성녀는 325년 골고타 부근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했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대황제는 이듬해인 326년에 로마 제국의 신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성당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신전을 부수고 흙을 제거하자 동굴이 나타났다. 성녀 헬레나와 성 마카리우스는 이곳이 예수님 시신을 안치했던 동굴임을 확인했다. 예수님 무덤 위에 작은 건물 애디큘(aedicule)을 지었고, 골고타는 기둥으로 둘러싸고 지붕을 올린 아트리움에 둘러싸인 옥외 경당으로 만들었다. 그 후 골고타를 연결한 대규모의 바실리카를 지어 성당이 봉헌될 때도 무덤과 절벽은 분리되지 않았으나 348년경에야 완전히 분리했다. 정교회는 무덤 대신 부활을 강조하여 ‘주님 무덤 성당’을 ‘예수 부활 성당’ 또는 ‘아나스타시스 성당’이라고 부른다.

 

마침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전체 길이 150m, 폭 75m의 대성당을 335년에 봉헌했다. 원래 주님 무덤 성당은 4개의 주요 요소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었다. 전면도로와 이어지는 아트리움, 바실리카, 골고타로 확인된 성당 안 남동쪽 구석의 바위, 그리고 무덤이 그것이다. 큰길에서 계단에 오르면 세 개의 문이 있고 이것을 지나면 바깥 아트리움이 나타났다. 그리고 60m의 긴 순교자 바실리카(martyrium basilica)가 이어졌다. 정면에는 세 개의 문이 있고 중랑과 좌우 측랑이 2개씩 모두 5개의 ‘랑(廊)’이 있었다. 반원 제단은 서쪽에 있는 무덤을 향하고 있고, 그 안에는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12개의 기둥이 있었다. 바실리카는 신학적, 전례적으로 무덤이 아니라 골고타의 십자가에 이어져 있었다.

 

아나스타시스 로툰다. 출처=Lior Mizrahi

 

 

“건물 전체가 마치 광선처럼 빛났다”

 

건축적으로 주님 무덤 성당이 영광을 가장 크게 드러내 보인 것은 4세기 비잔틴 제국의 풍부한 자원을 다해 지어졌을 때였다. 326년에 시작되어 적어도 부분적으로 335년에 봉헌된 콘스탄티누스의 성당은 약 4300평이나 되는 광대한 건물이었다. 이를 목격한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금과 은 등의 보석 등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수많은 재료로 만든 봉헌물로 가득 차 있었고, 내부는 온통 순금으로 덮여 있어서 건물 전체가 마치 광선처럼 빛났다고 전했다. 그러나 1009년에 대대적으로 파괴되었고, 잘못 개조되어 오늘날에는 그 장엄한 건물을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대성전의 서쪽에는 다시 안쪽 아트리움이 이어졌고, 골고타의 바위는 바실리카의 서쪽 벽 뒤에 바로 인접하여 5m 높이로 솟아 있었다. 비잔틴 시대에 안쪽 아트리움의 바닥은 잘 다듬은 돌로 덮여 있었고, 세 면이 열주랑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를 트리 포르티코(Tri-Portico)라 불렀다. 또 그들은 이 아트리움을 ‘거룩한 정원(Holy Garden)’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다”(요한 19,41)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에우세비우스는 ‘거룩한 정원’을 “하늘의 맑은 공기로 열린 광대한 바닥 공간”이라고 묘사했다. 한편 바실리카의 북쪽에는 긴 통로를 따로 두어 ‘거룩한 정원’을 지나 아나스타시스 로툰다에 직접 이를 수 있었다.

 

‘거룩한 정원’의 서쪽은 열주랑과 8개의 문이 있는 벽이 원을 이루며 예수님의 무덤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위를 중심이 열려 있는 원뿔형 돔을 얹도록 변경되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영묘(靈廟) 건축을 따른 것이다. 평면은 오늘날의 로툰다와 같았다. 예수님의 무덤에는 90도마다 쌍을 이룬 정사각형 기둥이 서고, 그 사이를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든 세 개의 기둥이 번갈아 가며 돔을 지지하고 있었다.

 

- 348년 무렵의 평면. 출처=Kenneth John Conant

 

 

두 차례 파괴됐다가 십자군에 의해 재건

 

주님 무덤 성당은 614년에 페르시아군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바로 뒤이어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모데스투스가 큰 수정 없이 재건축하였으나 다시 1009년 무슬림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1042년에 콘스탄티누스 9세가 성당의 재건축을 위해 기금을 제공하였으나 충분하지 못하여 첫 성당의 중요한 부분이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149년 십자군 시대에 로마네스크식 성당으로 재건되었고 1170년경에는 종탑이 세워졌다. 오늘날 우리가 찾게 되는 주님 무덤 성당은 십자군에 의해 보수된 것이다.

 

십자군 성당은 지금과 같이 남쪽 안뜰에서 두 개의 문을 통해 들어갔다. 돔의 밑에는 중랑을 두었는데 지금은 가톨리콘(Katholikon)이라 부른다. 동쪽에 기둥으로 막은 개방적인 원형 제단을 두었다. 이렇게 하여 원형 제단을 바라볼 때 골고타는 그 오른쪽에 자리 잡게 되었다. 원형 제단 주변은 주보랑이 있고 그것에 따라 바깥쪽으로 세 개의 경당이 붙어 있다. 중앙과 오른쪽 경당 사이에는 성녀 헬레나 경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으며, 또 성녀 헬레나 경당의 남쪽 모퉁이로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바로 그 십자가를 발견한 경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이어진다.

 

1852년에 체결된 현상 유지 원칙(Status Quo)에 따라 성당 안에서의 전례나 소유권 등이 발효된 시점 상태로 묶여 있다. 주님 무덤 성당은 현재 가톨릭교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가 각각 관할하며, 아나스타시스 로툰다는 가톨릭 등 세 교회가 공동소유하고 있다. 성당 정문을 여닫는 권한은 위임받은 두 무슬림 가문이 가지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5월 21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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