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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저명한 성서 주석가며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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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71

[교부들의 가르침]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저명한 성서 주석가며 신학자

 

 

안티오키아 학파

 

고대 그리스도교에 기둥이 되는 가장 유명한 두 학파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이다. 안티오키아 학파는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에 이르러 학설체계가 잡히기 시작하고 그와 그의 뛰어난 제자들의 활동에 힘입어 4~5세기에는 전성기를 누렸다. 4세기부터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관한 교의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안티오키아 학파는 성서해석 방법에서 특히 역사적 의미와 문자적 의미를 중시하였다. 이와 달리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서의 알레고리적.도덕적.신비적 의미를 강조하여 성서의 깊고 감추어진 의미를 찾는 데 몰두하였다. 교의의 관점에서 안티오키아 학파는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구분하려는 경향이 강한 반면,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하느님의 세 위격과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의 일치를 더 강조하였다. 두 학파의 이러한 대략적이고 전형적인 특성은 확실히 근본적인 경향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경솔히 도식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생애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테오도루스는 350년경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던 것 같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이교인 수사학자 리바니오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테오도루스는 스무 살 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알게 되는데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서로를 평생지기로 여기며 우정을 나누었다. 그들은 함께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가 세운 학교에 다녔다.

 

테오도루스는 한 동안 결혼과 독신 가운데 어느 길을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체 신학 공부를 마쳤지만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적 위기는 겪지 않았다. 그가 이 학교에서 배운 공부는 그의 영적 삶과 성서주석 방법에 도움이 되었다. 공부를 다 마친 뒤 그는 안티오키아의 주교 플라비아누스에게서 383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안티오키아 분열 시기에 사목자와 신학자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테오도루스는 386년부터 몇 년간 타르수스에 머물다가, 392년에 올림피우스의 뒤를 이어 킬리키아 지방 몹수에스티아의 주교로 서임되었다. 36년 동안 주교로 있으면서 그는 수많은 주석서와 교의서를 저술하였을 뿐 아니라 성령부인론자와 토론을 벌여 성령의 신성을 변론하였다. 테오도루스는 428년 네스토리우스 논쟁이 일어나기 전에 생을 마쳤다.

 

 

성서주석

 

테오도루스의 전기를 다룬 진술은 별로 없지만 그가 저술한 작품들은 매우 많다. 그는 성서의 거의 모든 책을 주석하여 안티오키아 학파의 가장 저명한 성서주석가로 이름이 났으며, 페르시아 교회에서는 성서를 주석하지 않은 네스토리우스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손꼽힌다.

 

테오도루스의 성서해석 방법은 근본적으로 스승 디오도루스의 방법을 계승하면서 그 방법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심화시켰다. 그에 따르면, 인류사는 크게 두 시기로 발전하여 왔는데 그 중간 시기가 그리스도의 육화이다. 따라서 구약성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하는 경우에 역사적 상황은 예형론적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예형론적 해석에는 세 가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첫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사건들이 비교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사건들은 구약성서 안에서 구체적인 구원의 힘을 지녀야 한다. 셋째, 그 사건들은 신약성서의 사실성에 적합해야 한다. 두 번째 인류의 시기는 그리스도의 육화로 시작하여 종말론적 완성까지 계속된다는 관점에서, 신약성서도 과거보다 장래에 대한 예언적 의미를 더 많이 지닌다.

 

구약성서, 특히 예언서에 관한 테오도루스의 역사적-문법적 성서주석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 해석과 상반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성서의 예형론적 고찰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예형론적 해석에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의 역사적 실재가 미래의 구원사건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기에 역사적 의미도 강조된다. 예를 들면, 모세가 뱀의 재앙 때 구리뱀을 기둥에 단(민수 21, 4~9) 사건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 방법으로 해석한다면 구약의 역사적 사건이 그 의미를 잃는 반면, 안티오키아 학파의 해석은 구약의 역사적 사건도 구원사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론

 

오늘날의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교의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오로지 무작정 믿기만 한다. 그러나 4~5세기에는 신과 관련된 매우 미묘한 문제들이 노상에서까지 매우 격렬히 토론되었는데, 니싸의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이전의 이러한 상황을 조롱조로 보고한다.

 

"거스름 돈이 얼마냐고 물으면, 가게 주인은 태어난 사람과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 관한 신학적 연설을 하였다. 빵 한 개가 얼마냐고 물으면, ’성부는 성자보다 위대하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목욕물이 준비되었느냐고 물으면 종은 ’성자가 무에서 태어났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시기에 테오도루스만큼 그리스도론 발전에 기여한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테오도루스는 그리스도론을 펼치면서 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인성의 완전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이러한 배후에는 그리스도는 참으로 인간이 되신 우리의 형제라는 것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하면 우리가 그를 따르는 경건성에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테오도루스는 생전에 정통 신학자라는 호평을 받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는 네스토리우스 논쟁 때 그에게 이단자라는 오명을 씌웠다. 서방에서처럼 동방에서도 그와 그의 작품은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를 받았다. 테오도루스는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특히 페르시아 교회에서 성인으로 존경을 받은 반면에, 그의 반대자들는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에서 그를 단죄하였다. 이미 네스토리우스 논쟁을 통해 상당한 손상을 입은 테오도루스는 이때부터 비잔틴 전 제국교회에서 이단자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일부 라틴 신학자들은 테오도루스를 결코 네스토리우스 이전의 네스토리우스주의자로 보지 않았으며, 테오도루스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일부 미숙한 표현에도 아랑곳없이 교의사적 가치를 인정하고 당시 반칼케돈 성향에 대해 그가 펼친 두 본성론을 강력히 변론하였다.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3일,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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