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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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복음전파, 정의 평화 위해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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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72

[교부들의 가르침]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복음전파, 정의 평화 위해 헌신

 

 

빼어난 복음 설교가

 

교부들의 설교는 아름답고 힘이 있다. 교부들은 어줍잖은 윤리 훈계 나부랭이를 늘어놓거나, 얄팍한 지식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참으로 말씀의 봉사자들이었으니, 인간의 헛된 이론이나 지식에서 짜내지 않고 살아 계신 말씀의 샘물에서 곧장 길어 올린 설교는 듣는 사람에게 생명을 건네준다. 그 까닭에 교부들의 설교는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교부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설교가는 뭐니뭐니해도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이다. 그는 감동적인 설교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금의 입’(크리소스토무스)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수백 개가 넘는 그의 ’설교’(sermones: 미사 강론)와 ’강해’(tractatus: 성서 특강)를 읽노라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선포하던 요한의 뜨거운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벗

 

요한은 안티오키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349년),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안투사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그는 한 때 변호사를 꿈꾸었으나, 세례를 받으면서 그 꿈을 접었다(372년). 세상 부귀와 명예가 자신의 궁극적인 열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디오도루스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에 들어가서 성서주석과 수행의 삶에 전념하던 요한은 얼마 후 독서직을 받았다(375년). 그러나 더욱 완전한 삶을 열망했기에, 대도시 안티오키아를 떠나 4년 동안 어느 수행가의 지도를 받으며 수도 생활을 했다. 그 후 2년 동안은 홀로 동굴에서 지내면서 날마다 성서를 되새김질하며 기도함으로써, 마침내 신구약성서를 통째 외우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고행으로 건강을 해친 요한은 고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그에게 부제품을 주었다(381년). 요한은 5년 동안 부제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정성껏 섬기다가, 386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12년 동안의 사제 생활 동안 요한은 깊은 성서 묵상으로 얻은 하늘 나라의 보화들을 설교 때마다 신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요한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득권층의 고삐 풀린 사치와 부자들의 탐욕을 끊임없이 고발했다.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가난한 사람)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배고픈 이들을 충족히 채워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 것으로 제단을 장식하십시오…그러므로 성전을 장식할 때 고통받는 형제들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살로 된 성전이 돌로 된 성전보다 훨씬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오 복음 강해’ 50, 3~4).

 

397년,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넥타리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유명한 설교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를 새 총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일찍이 ’사제직’(388~390년)이라는 작품에서 자기는 주교 직무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황제는 요한 몰래 특사를 보냈다. 요한을 태운 특사의 마차는 곧장 황제의 도시 콘스탄티노플로 달렸다. 그때에야 비로소 총대주교 임명 사실을 알게 된 요한은 어쩔 도리 없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나이 마흔 아홉이었다(398년).

 

 

성직자 · 수도자들 개혁

 

총대주교가 된 요한은 부패하고 타락한 성직자 수도자들을 과감하게 개혁했다. 에페소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성직을 사고 팔아 돈벌이하던 주교 여섯 명을 면직시켰다.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 차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추구하던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냈고, 부잣집만 뻔질나게 드나들며 호의호식하던 수도승들을 소속 수도원으로 돌려보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 총대주교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요한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몇몇 주교들과 적대자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며, ’좋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불의한 정치 권력에 저항한 주교

 

요한의 선임자 넥타리우스 총대주교는 황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요한은 정반대로 처신했다. 그는 설교 때마다 황실의 허례허식과 사치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특히 요한은 에우독시아 황비의 허영심과 탐욕을 모질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황비는 증오심에 가득 차서 요한을 내쫓을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안티오키아 교회와 경쟁관계에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루스는 이러한 정치 상황을 교활하게 이용하였다. 그는 요한을 반대하던 성직자들과 황비의 후원을 등에 업고서 칼케돈 근처에서 ’참나무 교회회의’(403년)를 열고, 요한을 거짓 고발하여 총대주교직을 박탈했다. 이로써 요한의 첫 번째 유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천벌을 받을까 두려웠던 황비는 귀양길에 올랐던 요한을 다시 불러오게 했다.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부패한 정치 권력에 대한 요한의 비판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결국, 요한은 404년 부활 예식을 거행하는 도중에, 황제의 명을 받은 군인들에게 끌려나와 종신 유배를 떠났고, 407년 9월 14일에 유배길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하여 영광 받으소서!"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교회 정치와는 전혀 거리가 먼 분이었지만, 정치 권력의 거짓과 위선에 맞서 용기 있게 싸우며, 복음을 힘있게 선포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루스는 부패한 정치 권력에는 철저하게 침묵했지만, 온갖 음모와 술수를 다 동원하여 교회 권력을 움켜쥐었다. 치릴루스가 쌓아올린 세상 명예와 권력은 금세 사라지고 썩는 냄새만 오늘날까지 진동하지만, 복음과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요한의 아름다운 향기는 영원히 스러지지 않는다.

 

※ 우리말 번역 : ’사제직’(’성직론’, 엠마오 출판사 1992), ’에페소서 강해’(지평서원 1997), ’로마서 강해’(지평서원 2000).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10일, 최원오 신부(부산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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