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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인물과 영성 이야기15: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 (중)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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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7 ㅣ No.791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15) 우리를 미소 짓게 하는 성인들 (중) :  “하늘을 나는 수도사” -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


스스로를 비웠기에 날아올랐다

 

 

- 루도비코 마찬티 작품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

 

 

천사는 자신을 가벼이 여기기에 날 수 있었음을…

 

“새가 본성상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약함이 곧 힘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힘 안에는 그 스스로를 공중에 지탱시키는 일종의 가벼움이 있다. 기적사의 연구가들은, 연구하는 학자들은 ‘공중 부양’이 위대한 성인들의 특징임을 진지하게 인정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나아가서 위대한 성자들의 특징은 엄숙함을 피하고, 경박해질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천사들이 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을 가볍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만함은 모든 것을 아래로 끌어내려 쉽게 엄숙함에 이르게 하고, 일종의 자기중심적인 심각함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에 집착하지 않는 명랑함으로 올라와야 한다.… 자기자신을 심각하게 여기는 것은 마치 본성적인 경향과도 같아 쉽게 행하게 된다. 반면에 웃음은 일종의 도약이다. 무거워지는 것은 쉽고 가벼워지는 것은 어렵다. 사탄은 중력에 의해 추락하였다.” - G.K.체스터튼의 「정통」 중에서

 

추리소설인 「브라운 신부」 단편들로 잘 알려진 영국의 작가이자 언론인이며 20세기에 활동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호교론자’라고 할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이 1908년에 출판한 「정통(오소독시)」은 근대 문화와 세태에 대한 예리하고 근본적인 비판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열정적이면서도 설득력 있는 변호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근대인들이 빠져있는 ‘힘’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지적하면서 위에 인용한 것처럼 하늘을 나는 천사의 ‘가벼움’이 지닌 영성적 의미에 대해서 인상 깊은 성찰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세시대 이래 사람들은 탈혼에 결부된 공중부양의 현상을 한 성인의 성성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날아오르는 성인’이라는 표현을 듣게 될 때 그저 하나의 은유처럼 받아들이기 마련이겠지만, 실제 교회 안에는 백여 번 넘게 공중부양의 은사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하늘을 나는 수도자’로 불린 성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금 공중에 뜬 것이 아니라 탈혼 중에 마치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올랐다고 그 당시 사람들은 목격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체스터튼이 그리도 그리워했던 덕성인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겸손과 단순함과 유쾌함을 지니고 많은 이들을 미소 짓게 했던 성인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쥬제페 데사, 곧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1603~1663)입니다. 살아서 이미 성인으로 존경받고 사랑받았던 그는 1767년에 공식적으로 시성되었으며, 역시 미소와 쾌활함으로 잘 알려졌던 요한 23세는 20세기의 과학발전에 발맞추어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을 모든 비행사와 우주비행사들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겸손함, 단순함, 쾌활함, 그리고 인내

 

성인이 살았던 17세기는 교회와 유럽사회가 종교분열이라는 커다란 혼란과 시련을 겪은 후 학자, 신비가, 교회행정가, 사회적 애덕의 선구자 등 다양한 방향에서 위대한 성인들이 연이어 나타나 영성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교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질서를 재정립하던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위대한 성인의 시대에 코페르티노의 성 요셉은 그야말로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과 소박함, 그리고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쾌활함으로 많은 이들을 위로해주고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미소를 전해주는, 작은 보석같이 반짝이는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이 태어난 코페르티노는 장화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이탈리아 지도의 뒤축쯤에 위치한 브린디시라는 도시의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가난한 목수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고 곧 사망했기에 그의 어머니와 그는 늘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헤벌린 입’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듯이 착하기만 하고, 재빠르거나 능란하지 못하여 그의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기술을 익혀 장인이 되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은 가망 없는 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그를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한 갈래인 카푸친회의 수사로 살게 하려 했지만 그는 카푸친회가 요구하는 수도원 일과 규율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서툴렀습니다. 다행히도 집안에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신부가 있어서 그는 성모성지로 유명했던 그로텔라의 수도원에 입회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은 제3회원의 신분으로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그의 순박하고 깊은 신심과 착한 품성이 점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어서, 정식 수련자로 받아들여지고 마침내는 사제직을 준비하도록 선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공부에는 재능이 없었기에 사제직에 요구되는 지적인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걱정하였지만 그에게는 우리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하는 주님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시험관은 직접 교구의 주교가 맡았는데 첫 번째 시험에서 주교가 요구한 복음서 암기 문제는 공교롭게 그가 유일하게 외울 수 있었던 루카복음의 한 대목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에선 주교의 갑작스런 바쁜 일정으로 그에게는 질문이 생략되어 그냥 통과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그래서인가요? 그는 언제부터인가 ‘수험생들의 주보성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사제직을 수행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평 없이 수도회의 가장 허드렛일을 기쁘게 한 그는 미사나 기도 중에 깊이 잠심하곤 했으며, 가끔씩 탈혼 중에 제대 위까지 날아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예수님께서 선사하신 깊은 사랑에 충만하여 그를 찾는 수많은 시름에 잠긴 이들과 병자들을 보살피고, 평소에는 어눌하고 아둔하게 보였던 그가 이럴 때는 놀랍게도 사람의 내면을 깊이 통찰하며 적절한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한 마리 ‘나귀’에 즐겨 비유할 정도로 겸손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사랑만이 아니라 지독한 질시와 오해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서 다른 수도원으로 유폐되어 공적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금지당하기도 하는 시련의 시기를 인내와 겸손으로 견뎌야 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1657년 그는 오시모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과의 만남은 제한을 받았습니다. 영성작가 크리스티안 펠트만에 의하면 그는 1663년 오시모 수도원에서 마지막 미사를 마치고 선종할 때 미소 지으며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이제 나귀가 산을 오르는 것을 시작하는구먼….”

 

능력과 똑똑함만이 인정받는 시대에 ‘하늘을 나는 수도자’가 시련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어린이다운 단순성과 겸손함, 그리고 쾌활함이 우리를 미소 짓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줍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17일, 최대환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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