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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히에로니무스: 위대한 성서학자, 수덕생활의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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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73

[교부들의 가르침] 히에로니무스


위대한 성서학자, 수덕생활의 수호자

 

 

서방교회 4대 교부중 한 사람

 

오늘은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떠나자. 그곳에서 수도자, 사제, 불가타 성서를 번역한 가장 위대한 성서학자였던 히에로니무스를 만나보자. 고대 서방 교회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그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대 그레고리우스) 중 한 사람으로 ’신학교의 수호 성인’, ’수덕생활의 수호 성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동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교부였다. 사제이면서도 생애 대부분을 수도자로 살았던 그는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성인의 축일은 9월 30일이다.

 

342년경에 달마티아(오늘날 슬로베니아의 류블리아나)의 스트리도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2살 때 로마로 가서 문법과 수사학과 고전 라틴문학을 공부했다. 이 때 루피누스를 만나 후일 그와 함께 오리게네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370년경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발레리아누스 주교의 지도로 친구들과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 테르툴리아누스, 치프리아누스, 힐라리우스 등 라틴 교부들의 작품들을 읽었다.

 

더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374년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갖고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칼치스 사막으로 들어가 은수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러나 은수자들이 아리우스 이단 문제로 서로 대립하자, 은수자로서의 삶을 접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그곳에서 당대 최고의 주석가였던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우스로부터 성서 강의를 들으면서 성서주석 방법을 배우고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은수생활을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가 망설이고 있을 때, 꿈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너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키케로주의자이다. 너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고 꾸중하셨다. 꿈의 영향을 받아, 히에로니무스는 수도생활을 계속해도 된다는 조건으로 379년에 안티오키아에 바올리누스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38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로부터 성서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의 성서 주석방법에 매료되어 오리게네스의 작품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주교와 교류했다. 382년에 안티오키아의 바올리누스 주교와 함께 로마로 순례를 가서 다마소 교황을 만났다. 교황은 그를 비서로 삼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되어 있는 신구약성서를 당시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라틴어로 번역하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200년대부터 서방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으나 번역본들마다 내용이 서로 달라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20년 이상 번역작업 몰두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주던 다마소 교황이 사망(384)후, 그의 재능을 시기한 자들이 비난하자 예루살렘으로 떠나갔다(385). 뛰어난 라틴어 문필가이면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아라메아어 등 성서에 관련된 언어에 능통했던 히에로니무스는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신약성서를 번역했다.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오리게네스의 ’헥사플라’에 나오는 70인역을 히브리어 원문과 직접 대조해가면서 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20년 이상을 번역작업에 매달려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를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를 13세기 때부터 ’불가타 성서’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불가타(Vulgata)는 ’일상적’, ’대중적’이란 뜻이다. 불가타 성서는 히에로니무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

 

히에로니무스는 성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서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서가 여러분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서를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서가 여러분을 감싸줄 것입니다"(히에로니무스, ’편지’, 130, 20). 그 외에도 최초로 ’성서의 무류성’을 주장했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주장하면서, 남자들도 여자들처럼 순결은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펠라지우스 논쟁이 발생하자, 인간이 스스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고 반박했다(히에로니무스 ’펠라지우스주의 논박’ 2, 4).

 

 

최초 수도 규칙서 작성

 

393년에 그는 콘스탄티아의 에피파니우스와 예루살렘의 요한 사이에 벌어진 오리게네스 신학 논쟁에 휘말렸다. 오리게네스 논쟁은 전 교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에피파니우스를 지지하고, 그의 친구 루피누스는 요한를 지지했다. 이로써 그는 옛 친구 루피누스와 영원히 등지고 말았다. 오리게네스 신학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히에로니무스는 오리게네스 논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오리게네스를 성서 주석의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최초의 수도 규칙서인 ’파코미우스 규칙’과 서간 등 수도생활에 관련된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한 그는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전례시기에 맞추어 수도자들에게 정규적으로 강의도 하고 강론도 했다. 이처럼 그는 성서번역과 저술활동에 전념하면서도 남녀 수도자들을 지도하면서 수덕생활에 전념했다.

 

로마가 함락되었다(410)는 소식을 들은 히에로니무스는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전 세계를 사로잡았던 로마여, 이제는 사로잡힌 신세가 되었구나!’ 라고 탄식했다.

 

펠라지우스주의자들이 난동을 일으켜 베들레헴의 수도원에 불을 지르자(416), 간신히 몸을 피한 히에로니무스는 몇 년 후에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선종했다(419).

 

끝으로 히에로니무스가 제자 네포티아누스를 칭찬하면서 했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음미해봤으면 좋겠다. "그는 열심히 성서를 읽고 이를 고이고이 되새김으로써 자기 마음을 고스란히 그리스도에 관한 도서관으로 만들었다"(히에로니무스 ’편지’ 60, 10).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24일, 노성기 신부(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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