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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44: 성녀 소화 데레사의 생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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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3-27 ㅣ No.783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44) 성녀 소화 데레사의 생애 ④


2015년 10월 18일 성녀의 부모 동시 시성

 

 

- 부모님(루이 마르탱씨와 젤리 게렝 부인)과 함께한 소화 데레사.

 

 

성녀를 탄생시킨 못자리인 성가정

 

소화 데레사라고 하는 현대의 대표적인 성녀 중에 한 분이 탄생한 데에는 못자리인 그 가정, 특히 소화 데레사를 비롯해 그의 네 언니를 잘 길러냄으로써 성교회를 위해 온전히 일생을 바친 다섯 명의 거룩한 수녀를 배출한 성녀의 부모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작년 가을 ‘교회와 현대 세계에서 가정의 소명과 사명’을 주제로 진행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기간 중인 10월 18일 성녀의 부모인 복자 루이 마르탱과 복녀 젤리 게랭을 동시에 성인품에 올리셨습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의 구원과 성화라고 하는 대의(大義)를 실현함에 있어 가정의 성화(聖化)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성인이 탄생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그에 대한 한 사람의 목숨을 건 응답과 노력이 있습니다. 동시에 거기에는 그 사람이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온전히 열어젖힐 수 있도록 건강한 본성을 준비시켜 준 못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상 그 못자리는 부모님에 의해 준비됩니다. 예로부터 신학에서는 은총이 본성을 전제로 하며 본성을 완성시킨다는 공리(公理)가 전해져 옵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소화 데레사의 가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화 데레사라는 거목을 가능케 한 그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어머니, 성녀 마리아 젤리 게렝

 

소화 데레사의 어머니 마리아 젤리 게렝 부인은 1831년 12월 23일 프랑스의 오르느 지방에서 태어나 1877년 8월 28일 알랑송에서 46세의 나이에 일찍 임종했습니다. 게렝 부인은 어린 시절에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 후 예수성심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훌륭한 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소싯적에 수녀가 되고자 알랑송에 있는 수녀원의 문을 두드렸지만, 당시 원장 수녀님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며 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수도 성소에 대한 좌절을 경험한 그는 한동안 힘들어했지만 이내 레이스를 짜는 기술을 배워 그 분야에 종사했으며 1858년 27세에 루이 마르탱씨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역시 결혼 전에 한동안 수도자가 되고 싶어 했으므로, 두 사람은 결혼한 후에도 약 1년간 주님을 위해 동정을 바쳤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성가정을 꾸리는 게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한 두 부부는 이후 슬하에 2남 7녀를 두게 됩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미 산아제한이 시작되었지만, 두 부부는 자녀들을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가장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이며 정성껏 키웠다고 합니다. 

 

마르탱씨 부부가 낳은 9명의 자녀 가운데 두 아들과 두 딸은 어려서 죽고 슬하에 마리아, 폴리나, 레오니아, 셀리나, 데레사 이렇게 다섯 명의 딸을 키우게 됩니다. 

 

마르탱씨 부부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라 딸들을 철저히 교육했습니다. 특히 젤리 겔렝 부인은 결혼한 후에도 아이들을 키우며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틈틈이 레이스 짜는 일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자녀 출산에 양육 그리고 무리한 노동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됐고, 결국 1877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성녀의 나이 고작 네 살밖에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아버지, 성 루이 마르탱

 

성녀의 아버지 루이 마르탱씨는 1823년 8월 22일 보르도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따라 알랑송에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19세가 되던 1842년, 그는 귀금속 세공 기술을 배우러 영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그 후 약 2년간 스위스로 건너가 슈트라부르크에서 시계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됩니다. 

 

이듬해인 1845년 가을, 그는 그간 마음에 두고 있던 그곳의 어느 시토수도원에 가서 입회를 청했지만 라틴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맙니다. 수도자로서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그 후 3년간 파리에 살다가 27세가 되던 1850년 고향인 알랑송으로 돌아가 시계, 귀금속점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 1858년 35세가 되던 해 젤리 게렝을 만나 결혼해서 성가정을 꾸렸습니다. 

 

소화 데레사가 쓴 「자서전」을 비롯해 여러 편지를 살펴보면, 마르탱씨는 가정에 충실한 모범적인 분이자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게렝 부인의 말을 빌리면, 마르탱씨는 모든 여인이 얻고 싶어 하는 아주 반듯하고 신심 깊은 남편감이었다고 합니다. 여러 자료에 드러난 증언에 따르면 마르탱씨는 게렝 부인과 함께 영원에 관해 즐겨 얘기하곤 했습니다. 또 어느 때에는 지복의 얼굴을 하고 먼 곳을 바라보면서 깊은 기도에 잠기곤 했습니다. 

 

그는 늘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면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습니다. 매일 미사와 성체조배에 충실했으며 종종 밤늦게까지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속의 정신으로 자주 순례를 했고 지켜야 할 재계(齋戒)를 엄수했으며 사제들을 존중하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와주었습니다. 

 

예컨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거나 화재로 곤궁에 처한 노인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을 했으며 여러 수도원과 수녀원에 많은 희사를 했다고 합니다. 

 

또한 마르탱씨는 재담이 풍부하고 흉내를 잘 내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곤 했습니다. 마르탱씨의 다섯 딸은 어려서부터 이런 좋은 성향들을 물려받아 인간적인 면에서나 신앙에 있어서 모두 건강하게 자라며 성성(聖性)을 향한 소망 품게 됐으며 특히 그 가운데 소화 데레사는 남달리 대성인(大聖人)이 되고 싶은 원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3월 27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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