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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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죽음에 대한 신학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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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121

죽음에 대한 신학적 성찰

 

 

들어가는 말

 

인간이 생성되어 왔고 생활하고 있으며, 또 진화적으로 성취해 나가는 세계 속에서 죽음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죽음 앞에서 인간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보존하고 싶어하고 한없이 연장하려 한다. 그렇지만 죽음은 이러한 본성을 거슬러 인간의 삶에 결부되고야 만다. 인간은 죽음을 향하는 존재이며,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죽음의 불가피성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자연적으로 볼 때에 모든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신 생명도 육체적 조직을 통하여 유지되고 그 조직의 해체와 함께 죽음에 이른다. 이런 죽음은 단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 주는 삶의 사건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계 문명의 발달과 전통적 사고의 붕괴는 인간이 인격화 과정의 마무리 단계에서 겪어야 하는 마지막 순간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자세를 정립하는 데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 그대로의 삶, 개인의 생활을 위한 삶에만 온 정신을 쏟기에 죽음을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더 나아가 죽음을 기피하고 오히려 현실 생명의 연장에만 매달리고 있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이 때문에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조차 할 여유를 갖지 못하고 종말이 없는 생의 지속이라는 환상 속을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죽음의 문제를 아무리 외면하고 거부한다 할지라도, 죽음은 우리에게 문제를 던지며 다가온다. 이러한 죽음의 문제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움과 좌절에 빠져 죽음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특히 신앙의 문제와 관련하여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인 죄의 결과와 처벌로서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관문으로서의 수동적이고 지엽적인 의미로서의 죽음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 과연 죽음이 무엇이며 무슨 의미를 줄 수 있는가? 또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서 허무한 죽임을 당하는 것,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과 비명횡사, 요절, 무죄한 이의 죽음 등과 같은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특히 죽음에 대한 의문과 한계성에 직면하여 사람들은 '하느님이 불러 가셨다', '하느님의 뜻이다' 등으로 죽음의 의미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과연 하느님의 뜻인가?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신다면 불의의 사고, 질병 등에 따른 조기 사망이나 비명횡사까지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반면에 인간의 운명을 하느님께서 주재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불행이나 조기 사망, 비명횡사에서 우리를 보호에 달라는 기도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의 문제는 한 인간의 개인적인 삶의 문제인 동시에 신앙의 문제이기에 신학은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내려줄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과연 신학은 이러한 의문에 어떤 답을 제시할 수 있는지 성찰하고 그 해답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1.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

 

세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창조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또한 죽는 것이 있는 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 계획에 따라 이러한 생성에는, 어떤 존재들의 출현과 더불어 다른 존재의 소멸이 ......자연의 건설과 더불어 파괴가 포함되어 있다."1) "또한 생성과 소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 속하는 것이며, 일단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때, 하느님께서 인간과 물리적인 우주를 완성하실 때, 그때 비로소 자연 안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을 것"2)이라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죽음의 불가피성을 전하고 있다.

 

사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죽음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혜서에서는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며,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볼 것"(2,24)이라고 했고, 사도 바오로는 죄 때문에 이 세상에 죽음이 왔다고 가르친다(로마 5,12).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에게 죽음과 내세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함께 죽음을 하나의 죄악이며 파멸, 공포의 실재로서 제시하고 있다. 죽음은 원조의 죄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죄의 벌로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고", "인간이 범죄치 않았던들 모면할 수 있었던 육체의 죽음을 당한다."3) 사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으며(지혜 1,13), 불사 불멸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원조의 죄로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이 세상에서 죄악을 범한 인간은 죽음이라는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우리의 본성과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악일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간에게 쓰디쓴 잔이고, 죄의 대가이며(로마 6,23), 원조의 잘못에 대해 모든 인류가 연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 연대 책임으로 모든 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서 전반에서도 죽음의 보편성과 아울러 죽음과 연관된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다. 죽음은 각 사람에게 닥칠 어떤 것으로 모든 사람이 보게 될 것이요(시편 39,49), 또한 맛보게 될 것이며, 인류의 공통된 숙명인 동시에 "온 세상이 가야 할 길이다"(1열왕 2,2; 사무 14,14; 집회 8,7). 그리고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하니 땅에 쏟아져 다시 모을 수 없는 물과 같으며(2사무 14,14),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져 있으며(창세 3,19.22), 사라질 존재요 입김이다(시편 38,6. 12;49,13.21;82,7;89,43). 그리고 인생은 한갓 그림자요, 하나의 숨결, 허무일 따름(시편 39,5;89,48.90; 욥기 14,1-12; 지혜 2,2)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은 야훼의 선물인 생명의 변경으로서 인간이 하느님과 맺고 있는 그 관계 속에 포함되기에 하느님의 지배 아래 있으며(신명 32,39), 따라서 이 또한 하느님의 지령으로 생각하고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여호 23,14; 1열왕 2,2). 이런 의미에서 죄인들의 경우에 죽음은 자연적인 운명으로서가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귀한 선물, 곧 생명의 박탈이라는 처벌의 성격을 지닌다.4) 또한 구약성서는 죄를 짓는 악인에게 죽음의 정당성을 나타내기도 한다(욥기 18,5-21; 시편 37,20-28.36;23,27; 에제 18,20). 이러한 죽음의 특징은 자기 명대로 살지 못할 때, 곧 제때가 되기 전에 죽는 죽음으로 묘사된다. 때가 차지 않은 죽음은 언제나 생명의 원수로 나타나고 있다(2사무 12,16).5) 이런 의미로 죽음은 자연히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며, 현세 삶의 파괴자이고, 인간 삶의 원수로 이해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죽음의 실재를 부인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가 절정에 이르고, 죽음 자체가 영원한 소멸에 대한 공포를 주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은 영원히 분해될 수 없는 영혼과 썩어 없어질 육신과의 분리 상태이므로, 영혼은 심판을 받아서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고, 지복직관을 누리고, 하느님의 생활에 참여하게 되지만 대죄 중에 죽은 사람은 끝없는 벌을 받는다는 것이 분명히 규정된 가르침이다.6) 그러므로 사람의 죽음은 그의 시련기의 끝을 맺는, 곧 이 세상의 나그네길을 끝마치는 것이며 다음에 우리의 모든 생활이 죽음을 최정상으로 하여 완성되고 승리를 위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요, 앞날의 부활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활로 영광을 얻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므로 죽음은 하나의 통과 의식(通過儀式, rites de passage)이며, 부활을 위한 전초적인 단계인 동시에 죽음 후의 심판과 부활하기 위한 하나의 시작 단계로서밖에는 큰 의미를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부활 사상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죽음의 극복과 승리를 나타냄으로써 죽음은 죄 또는 악이며 인간에게는 원수로만 이해되기에 죽음의 이해는 성서적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이해된 죽음의 의미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의문을 던져 주고 있다. 곧 항상 수동적인 입장에서 맞이해야 하는 삶의 최후로 죽음을 생각하기에 죽음에 대한 인격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의 추구보다는 일상에서 자신이 잘못한 삶에 대한 보복으로 하느님께서 개인 각자에게 내리시는 무섭고 두려운 재앙과 벌로 인식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제기되는 의문이 바로 '죽음이란 개인을 처벌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인가?' 하는 것이다.

 

 

2. 죽음은 하느님의 뜻인가?

 

죽음은 사실 인간에게 하나의 재앙이다. 그래서 성서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 만드셨다."(지혜 1,13-14)라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죽음은 일종의 자연적인 사건이고, 하느님께서 죽음을 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성서의 이 말씀에 대해서 가끔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때때로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예기치 못한 죽음 앞에서, 무죄한 이의 죽음 앞에서, 또는 어린아이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인간 존재의 수수께끼는 그 절정에 달한다."7)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이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이유는 구약성서의 표상에서 죽음이 하느님께서 죄인에게 내리시는 단죄나 처벌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여호 23,14; 1열왕 2,2).

 

그렇다면 과연 죽음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신앙인들은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전능이란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언제 어디서나 이 세계 안에서 실현시키실 수 있으며, 이 세계의 모든 흐름뿐만 아니라 개별 인간의 온갖 운명마저도 자유 자재로 주재하실 수 있는 절대적인 만능의 힘을 의미한다. 그래서 죽음 또한 하느님께서 발생시키시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믿는 경향이 있으며, 죽음을 놓고 표현할 때에 '하느님이 불러 가셨다', '하느님의 뜻이다' 등의 말에서 인간의 죽음이 하느님에 의해서 좌우되고 조정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8)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표상을 유아기적인 신앙의 형태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인식과 삶의 형태들을 우리는 생활 주변에서 많이 보고 또 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곧 하느님께서 전능하시고 인간의 운명까지도 주재하시는 분이시라면 불의의 사고, 질병 등에 따른 조기 사망이나 비명횡사까지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반대로 인간의 운명을 하느님께서 주재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 앞에 닥칠지도 모르는 재앙이나 불행 더 나아가 조기 사망이나 비명횡사에서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 같은 것을 할 필요성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닥치기도 전에 이미 이 삶의 현장에서 참혹한 곤경과 고통을 당하여 하느님께 절규하였을 것이다. 그토록 절규했던 그들이 하느님께 들었던 해답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을 채 누려 보기도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야 했던가? 여기에 대해서 던질 수 있는 해답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당신 스스로가 아니라 피조물들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통찰을 주지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이 세계 안에서 물리학적으로, 화학적으로 또는 생물학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이다."9) 그리고 단순한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영속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사건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창조 개념은 모든 실재의 정신적 기반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룩하신 이 창조 세계를 영구히 현존하도록 포괄적으로 지탱시키시며, 결코 무로 소멸되지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하느께서는 이렇게 모든 개별적 조물과 그의 행업, 그리고 그의 모든 작품과 삶을 통틀어 지탱하시는 것이다. 하느께서는 자신의 창조 세계를 부단히 지탱시키시기를 원하시고, 창조 세계 안에서 생성되는 것은 무엇이건 간에 무로 밀쳐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만물이 당신 안에서 완성에 이르도록 인도함으로써 당신의 보살핌과 보호를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에서 하느님의 보살핌은 창조 세계가 제정된 진화 법칙과 독자적 활동 능력을 따라 자유롭게 진행되도록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 세계를 어디로 인도하시려는지를 알고 있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물론 인류는 이 과제를 거부할 수도 있지만 인류는 자신의 활동 공간을 시험하고 창조주가 자신에게만 유보한 영역에 세력을 미치려고 시도하는 중에 언젠가는 반드시 진화의 법칙과 함께 주어져 있는 능력의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10) 그러므로 참으로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 위한 조건은 죽음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이란 낡은 것의 전적인 소멸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다른 조물적인 원인들처럼 그들과 함께 경쟁하는 원인으로서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점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곧 진화란 진정으로 피조물들이 궁극적 결단을 내리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피조물로서 하느님께 태도를 표명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 다른 자유로운 피조물이 생겨나기 위하여 내어 놓아야만 하는 대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진화 과정 안에는 시간과 함께 덧없음과 무상성도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학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온갖 세상사에 다 개입하신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을 세계 안의 다른 원인들처럼 하나의 세계 내적 원인으로 격하시켜 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에 입각하여 이 구체적인 세계 안에서 언제 어느 때라도 스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룩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책임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하느님을 세상사의 원인으로 찾아 헤매는 행동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배우기 위한 체험을 쌓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체험들이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께서 세상 만사와 만민을 지탱하시고 수용하시며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말씀을 건네주신다는 참된 신앙심을 파멸시키지는 않을 것이며, 오히려 이 체험들이 하느님께 대한 미신 행위와 유아기적인 신앙을 제거해 줄 것이다.11)또한 그리스도교적으로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모든 죽음, 곧 불의의 사고, 질병, 재앙 등에 따른 조기 사망까지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매우 적절하지 못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맞이해야 하는 죽음은 그것이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한 희생적인 죽음이 아닌 한 언제나 무의미하다. 곧 조기 사망이 사망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의미는 결코 목적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만약 여기에 죽음의 의미가 있다면 역설적이지만 자살에까지도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 죽은 모든 사람들이 비록 하느님의 사랑 안에 놓여 있고 이들이 자기들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들이 희망하던 목표에 도달했다고 믿을 수 있다 하더라도 미리 닥친 죽음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죽음은 라너(K. Rahner)가 말한 것처럼 "진화론적 세계관 안에서는 다른 생명을 위해 생물학적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회학적 의미를 지닌다."12) 죽음이 의미 있는 것은 그동안 자기가 점거하고 있었기에 차단되었던 역사의 한 공간을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 자연스럽게 비워 준다는 데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이 일도 한 개인이 충만된 삶을 산 후에 자연스럽게 맞는 생물학적 종말에 가서야 의미가 충만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사(事故死), 비명횡사 등의 조기 사망에 죽음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경우 죽음이 가져다 주는 어찌할 수 없는 막막함과 좌절감 앞에서 인간적인 마음으로 '하느님의 섭리'나 '타인을 위한 속죄'라는 해설을 덧붙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설명은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조기 사망이나 비명횡사의 원인을 해결해야 하는 삶의 과제에서 인간의 면책권을 찾으려는 부당한 행위이거나 부당한 합리화로 평가될 수 있으며, 하느님께 대한 잘못된 신앙을 형성시킬 수 있고 신앙을 왜곡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영웅적이고 경건한 죽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전쟁과 고문과 기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과시하기 위하여 그 윤리적 경고의 방법으로써 이러한 죽음을 원하신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무의미한 죽음에다 억지로 상대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3) 곧 하느님도 목적으로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인들은 죽음에 대한 이러한 해석으로 더 이상 하느님을 모든 질병을 보내시고 사고(事故)를 지령하시며 전생을 통하여 인간들을 당신의 헤아릴 길 없는 뜻에 예속시키시고자 하는 분으로 알아들어서도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찍 닥친 무의미한 죽음의 책임은 하느님의 섭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범죄, 등한 그리고 태만 등에 있다고 하겠다.14)

 

 

나오는 말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많은 문제 가운데 하나인 죽음이 하느님의 뜻인가 라는 의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죽음은 유아기적인 신앙의 자세로서는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주어져 있는 문제이다. 사실 생물학적 역사적 구조를 갖고 현세의 어떠한 한계 안에서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이 이러한 죽음의 문제를 해설하고 의미를 제시하는 것조차 힘든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의미를 제시하는 것은 항상 종교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종교의 영역에서도 죽음을 하나의 공포나 신앙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 또는 막연한 해석으로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죽음의 의미를 유아적인 생각 속에 가두어 버리고 의미의 발견보다는 유아기적 신앙을 통한 기피의 대상으로 죽음을 여기게 할 수도 있고 자연 종교적이고 미신적인 자세로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에게 절대절명의 한계로 다가오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생명을 연장하려고 노력하는 인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유한한 삶과 생명은 항상 유한한 것으로 머물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삶과 생명이 무한하게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곧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함으로써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유한한 생명이 영원한 삶을 향한 하느님 생명에의 참여이며, 하느님의 약속에 따라 죽음 속에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영원성은 인간의 본성상 현세적이고 유한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현양됨을 뜻하기에15) 죽음은 희망과 구원, 곧 영원한 삶으로 나아가는 관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희망의 종결이 아니라 희망의 계속적인 과정의 한 사건이기에, 영원한 삶인 하느님과의 일치와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하겠다.16)이러한 죽음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의 충실성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또한 삶의 충실성 속에서 희망과 사랑과 믿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순간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결단의 생활이 요구된다. 이러한 삶만이 죽음의 의미를 수용하고 적극적 자세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이므로 죽음에 대한 올바른 자세는 올바른 삶의 자세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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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 교회 교리서], 310항.

2)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44항.

3) 사목헌장, 18항.

4) P. Grelot, "죽음", [성서신학사전], L. 뒤푸르 외 편, 광주가톨릭대학교 출판부, 552면.

5) E. Jungel, Tod, Stuttgart, 1971년, 101면.

6)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8.1039.1040항 참조.

7) [가톨릭 교회 교리서], 1006항; 사목헌장, 18항.

8) 우리의 삶 안에서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인명은 재천이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보다 더 큰 능력과 힘을 소유한 어떤 존재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9) H. Vorgrimler, Der Tod im Denken und Leben des Christen, Dusseldorf, 1978년, 13-15면.

10) 심상태, [그리스도와 구원], 36-56면 참조.

11) H. Vorgrimler, 앞의 책, 16면.

12) K. Rahner, Schriften zur Theologie, 8권, 253면.

13) H. Vorgrimler, 앞의 책, 36-41면.

14) 위의 책, 40면.

15) E. Jungel, 앞의 책, 60면. 

16) J. Ratzinger,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 장익 옮김, 239-246면 참조.

 

[사목, 2001년 11월호, 김정우(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윤리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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