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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비정규 노동에 대한 교회의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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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22 ㅣ No.1246

[경향 돋보기 - 이 땅의 비정규직] 비정규 노동에 대한 교회의 응답



비정규직 : 또 다른 새로운 사태

19세기 인류는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사태’를 맞이했다. 18세기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이루어진 산업사회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독점 자본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사회 전체는 두 개의 계급으로 나뉘었고, 인류의 대다수는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은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한 최초의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함으로써 “인류 대부분이 ‘부당하게도 비참한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였다. 최고 목자는, ‘점차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인정머리 없는 고용주들의 무절제한 경쟁의 탐욕에 무참히 희생되어 온 노동자들’의 변호를 과감히 떠맡았다”(「사십주년」, 3항).

그로부터 90년이 흐른 뒤, 인류는 후기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사태’를 맞이한다. 기술, 경제, 정치의 영역에서 새로운 사태가 생김으로써 노동 분배 구조가 바뀌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과 가난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노동하는 인간」을 통해 “교회는 노동하는 사람들의 존엄성과 권리를 천명하고 그러한 존엄성과 권리가 침해되는 상황들을 고발하여, 인간과 사회의 참된 진보를 보장하는 것이 자신의 직무”(「노동하는 인간」, 1항)임을 분명히 선언하였다.

오늘날 한국사회 또한 그 이전까지 겪어보지 못한 여러 가지의 ‘새로운 사태’를 겪고 있다.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뒤에 겪게 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노동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계약직, 임시직, 시간제 근무, 파견과 용역 등의 비정규직 일자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들이 ‘새로운 사태’라 불리는 것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모든 일자리의 절반 정도가 임시직, 계약직 등 기간이 정해진 기간제 비정규직 일자리이거나 파견, 도급, 용역, 하청 등의 간접 고용 형태의 비정규직 일자리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한국의 비정규직 일자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비정규 노동은 개인이 자발적으로 시간제 노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고, 또 정규 노동을 보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비정규 노동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도 아니고, 정규 노동을 대체하는 성격을 가진다. 이는 한국의 비정규 노동이 다른 나라의 비정규 노동과는 달리 경기 변동에 따른 일시적 고용 형태이거나 정규 노동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대체되고 있음을 뜻한다. 실제 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 노동을 활용하는 기업의 대부분이 업무의 특성 때문이기보다는, 노동 비용을 절감하고 해고를 쉽게 하려고 비정규직 노동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은 정규직 노동으로 옮아가는 ‘다리’ 역할을 하지 못하고 비정규직의 발목을 잡는 ‘덫’에 머물고 있다. 비정규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젊은이와 여성의 대다수가 정규직으로 옮아가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식으로 비정규 노동의 규모가 확대됨으로써 오히려 비정규 노동이 이제는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노동 형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고용과 노동의 변화는 한국사회가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사태’이며, 이것이 우리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양극화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삶을 전반적으로 하향 평준화시킴으로써 가족생활과 교육 등에 미치는 영향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적 팽창을 넘어서 한국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비정규 노동문제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교회에 던지는 질문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비정규 노동과 고용에 대해 한국교회가 진지하게 응답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가톨릭교회가 이해하는 노동은 하느님의 세상 창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설명될 수 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땅을 다스리라.’(창세 1,28 참조)는 명령을 받았다. 이 말은 노동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하더라도 간접적으로 인간의 노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노동하는 인간」, 4항 참조. 이하 항만 표기).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자기 행동을 결정하며 자기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주체적이고 인격적 존재라는 뜻이다. 이러한 인격적 존재로서 인간은 노동의 주체가 된다.

인간은 노동의 대상을 발견하고 노동의 과정을 기획하며 수행함으로써 노동 자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더욱 더 인간답게’ 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실현하게 된다(9항). 동시에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고 창조의 일을 계승하며 발전시키는 가운데 완성에 이르게 한다(25항). 뿐만 아니라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가정과 더 큰 사회에 참여하게 되고, 노동을 통하여 사회의 공동선을 증진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어떤 종류의 노동이라도 노동은 그 자체로 인간의 자기실현과 창조주의 창조활동을 완성하게 하는 존엄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인간 편에서 볼 때 책임이며 의무이고, 노동자 편에서 볼 때 권리의 원천이다(16항).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은 하나의 상품으로 팔리게 된다(7항). 노동 또는 노동력이 시장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때 노동의 주체적이고 인격적 가치는 객관적 가치로 전도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노동의 대상과 노동의 과정에서 분리되어 노동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의 가치 전도와 소외에서 극복하려면, 노동이 시장 안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고, 노동의 인격적이고 주체적인 의미가 회복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올바른 노동제도가 필요하다(13항).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제시하시는 올바른 노동제도는 무엇보다 먼저 노동의 이중적 사명(하느님 창조사업의 발전과 인간의 자기실현)에서 흘러나오는 사물에 대한 인간의 우위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라는 원리가 구현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동에 대한 주체성이 드러나야 하고, 노동자가 하는 노동의 성격에 관계없이 모든 생산 과정에서 효과적인 참여가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올바른 노동제도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결국 자본에 대한 노동 우위의 원리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발견하거나 발굴한 자연 자원을 매개로 하여 인간 노동이 생산한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주신 것에 인간의 노동이 더해져 축적된 것이 바로 자본이다. 경제학에서도 이런 점을 충분히 인정하는데, 이를테면 아담 스미스는 자본을 “육화된 노동”이라고 했고, 리카도는 “축적된 노동”, 그리고 칼 마르크스는 “지나간, 대상화된,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노동하는 인간」에서 지적하시듯이, “인간은 노동의 모든 발전 단계에서 자연에 의해, 달리 말해서 궁극적으로 볼 때 창조주에 의해 마련된 선물의 주역이라는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인간의 노동에는 처음부터 창조의 신비가 작용한다. …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면 할수록, 우리가 마침내 익숙하게 지칭하게 된 자본에 대한 인간 노동의 우위성을 우리는 더욱 확신하게 된다.

자본의 개념은 인간이 자의로 쓸 수 있는 자연 자원만이 아니라 인간이 이를 자기의 필요에 따라 변형시키는 수단의 총체도 역시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모든 수단들은 인간의 노동이 이룬 역사적 유산의 결과”(12항)인 것이다.

오늘날 경제에서 자본 없는 노동을 상상할 수는 없지만,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노동의 우위를 분명하게 말한다. 자본은 인간 노동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올바른 노동제도는 인간의 노동을 시장 안에서 판매되는 상품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이런 바탕에서 우리는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국가는 노동시장 안에서 간접 고용주로서 그 역할이 있다. 직접 고용주는 노동자와 일정한 조건에 따라 직접 노동계약을 맺는 사람 또는 단체를 뜻한다면, 간접 고용주는 실제의 노동협약과 노동관계를 실질적으로 규정하는 노동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가 간접 고용주로서 역할과 지위를 갖는다는 것은 윤리적이고 올바른 노동정책을 수립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올바른 노동정책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완전 고용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18항). 결국 노동의 영역에서도 국가는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가톨릭 사회교리는 가르치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제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 그리고 그 원리가 제대로 구현되어야 하는 올바른 노동제도, 노동시장에 대한 국가의 정책적 개입 등이 노동의 영역에서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온 것이다. 가톨릭 사회교리가 비정규 노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노동에 대한 일관된 가르침 안에서 우리나라의 비정규 노동에 대해 몇 가지 문제 해결을 찾아볼 수 있겠다.

먼저,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차별이 개선되어야 한다. 이미 살펴보았지만, 우리나라 비정규 노동의 성격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정규 노동을 대체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고용 형태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임금과 기업 복지 등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엄청난 차별이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업이 비정규직 노동자를 활용해야 할 요인을 줄여나가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을 개선하는 것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보편적 인권의 중요한 요소를 지키는 것일 뿐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도 노동의 인격적이고 주체적인 의미를 회복하게 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여러 판결들이 존중되어야 한다. 이미 대법원은 현대자동차 비정규직과 관련하여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다. 이로써 2년 이상 근무한 하청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함에도 아직 집행하지 않고 있다. 사실 불법 파견 노동의 문제는 현대자동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대기업에는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것들만이라도 엄격하게 집행된다면 비정규 노동문제가 조금은 나아질 것이다.

둘째로, 노동정책 전체와 관련해서 지나치게 시장 중심, 시장 만능의 노동정책에서 좀 더 적극적인 노동정책으로 정부의 정책기조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정책 입안자들은 지나치게 시장 중심, 경제 중심의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좀 더 인간과 노동을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앞세우는 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보편적 복지가 강화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전세계적 현상으로 비정규 노동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노동자들의 안정성을 위한 보편적 복지의 강화와 확대는 노동자들의 보호를 위해서도, 그리고 자본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오늘날의 노동조합운동에 대해서도 성찰할 때가 되었다. 1987년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 뒤, 노동조합운동의 성장은 저임금 개선과 기업 복지의 확대, 그리고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켰으며, 권위주의적 작업장 문화를 개선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통해 획득한 권리들은 사실상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 국한된 현상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1998년 현대자동차 고용 조정 갈등에서 노동조합은 정규직의 고용 안정을 위해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확대를 약속했는데, 이 일은 뼈아프게 성찰해야 할 대목이다. 앞으로 노동운동이 노동자 전체의 양극화를 개선하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국민과 시민사회가 등을 돌릴 것이다.

넷째, 좀 더 근원적이고 대안적인 접근에 대해서도 생각할 때가 되었다. 비정규 노동문제를 더욱 근원적으로 해결하려면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시도한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잔업과 특근 등을 제한하거나 폐지하는 것도 이제는 시도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자, 그리고 국민 각자가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본다.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 정부는 지나치게 기업과 자본, 특히 재벌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하여 끊임없이 노동자와 국민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비정규 노동문제의 해결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 이동화 타라쿠스 - 부산교구 신부.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구 노동사목을 전담하고 있으며,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5월호, 이동화 타라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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