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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건축 이야기17: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바실리카식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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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5-03 ㅣ No.953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17)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바실리카식 성당


콘스탄티누스 대제, 로마와 예루살렘에 바실리카식 성당 봉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 13세기 프레스코화. 출처=Wikimedia Commons

 

 

최초의 바실리카식 성당

 

313년에서 337년까지는 교회의 결정적인 시기였다. 교회의 위치와 조직은 전적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달려 있었다. 그는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은 평신도였지만 그는 자신을 13번째 사도이자 교회 공의회도 직접 주재하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본디 라테라노 가문에 속한 땅을 기증하고 최초의 바실리카식 성당을 313년에 짓기 시작하여 324년에 완공했다. 이 성당이 바로 ‘전 세계와 로마의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요 머리의 교회’인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이다. 그 후 12세기부터 교회는 11월 9일을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로 지내고 있다.

 

이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매우 소중한 성당을 지어주었다. 성지 예루살렘에는 주님 무덤 성당(325~335년)을, 이를 모범으로 하여 제국의 수도 로마에는 성 베드로 사도 묘 위에 세운 옛 성 베드로 대성전(Old St. Peter‘s Basilica, 330년경)을, 성 바오로 사도 묘 위에 세운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 395년) 등을 지었다. 이 세 대성전은 440년 무렵에 세워진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과 함께 4대 상급 대성전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는 로마 바실리카의 기능과 디자인이라는 익숙한 틀 안에서 새로 창조된 것이다. 그 이전에도 그리스도교인들은 로마의 산 크리소고노 성당처럼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은 홀형 성당인 ‘아울라 에클레시에’를 지었다. 그러나 이제는 도시 중심에 보통 건물보다 훨씬 높고 더 큰, 그래서 그것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성당이 필요했다. 더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후원하는 건물인 성당은 황궁에 어울리는 건축적 어휘를 구사한 최상급의 공공건물로서, 공간은 널찍하게 지어지고 내부는 빛나는 재료로 마감되어야 했다. 바실리카를 선택하여 성당 건축으로 만들어주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황실이 승인해 주었다는 도장과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기념비적인 건물을 갖게 된 교회는 주변의 국민을 향해 새로운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그리스도교가 제국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시각적으로 선언할 수 있었다.

 

- 성 밖 성 바오로 대성전, 395년. 출처=Wikimedia Commons

 

 

주님의 집인 회합 홀

 

바실리카식 성당은 융통성이 큰 건물 유형이었다. 예를 들어 335년에 완공된 주님 무덤 성당에서는 중랑 좌우에 이중 측랑을 두었듯이 측랑을 더하거나 회중석을 확장하면 쉽게 바꾸거나 넓힐 수 있었다. 측랑 위에는 갤러리를 두어 많은 신자가 들어가게 할 수도 있고, 로마의 옛 성 베드로 대성전처럼 회중석과 제단 사이를 직각으로 가로지르는 횡랑을 두면 평면이 라틴 십자가 형태가 되었다.

 

평면의 한쪽 끝인 반원형 앱스에는 제대를 두었는데, 그 뒤는 연단인 데이스(dais)에 신트로논(synthronon)이라고 하는 계단으로 층을 이룬 구조물을 덧붙여서 사제석을 두었고 제단 뒤 가운데에는 주교가 앉았다. 이렇게 하면 제단의 크기를 늘릴 수도 있고, 반원 제단인 앱스의 벽 밑에 또는 벽을 따라 통로를 만들 수 있었다. 또 상징적인 의미도 빨리 흡수했다. 반원 제단을 동쪽에 두고 긴 변을 동서축으로 놓아 떠오르는 태양의 방향을 예고함으로써 서유럽 그리스도인에게는 예루살렘을 가리키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는 넓은 의미에서 회합 홀인 바실리카의 하나였다. 그들은 이렇게 새로이 등장한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를 ‘주님의 집인 회합 홀(basilica id est dominicum)’이라 부른다든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Apostolic) 보편(Catholic) 회중을 위한 바실리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자신도 골고타 위에 세운 주님 무덤 성당을 “어떤 곳보다도 아름다운 바실리카”라고 말했다.

 

게다가 당시의 포럼 바실리카, 공중목욕탕 바실리카 등 로마 제국의 바실리카는 세속과 종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가진 건물이었다. 따라서 새로 생긴 그리스도교 바실리카는 이 시대 로마 제국 시민의 눈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종교적 의미를 담은 또 다른 기념적인 공공 회합 홀이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건물 유형이었다.

 

황제의 후원을 받은 그리스도교는 최상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은 337년에는 교회의 권력과 제국의 권력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260년에서 305년까지 평화의 시기에 교회의 위계적 조직은 이미 강화되고 있었다. 밀라노 칙령 이후에는 제국의 행정 조직처럼 마을과 교구마다 성직자가 있고, 도시마다 주교가 있었다. 전례는 로마의 관료 집단과 황실의 의식 절차에서 많은 특징을 빌려왔다. 이렇게 하여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등 제국 각지에는 많은 성당이 바실리카식 공간으로 지어졌다. 바실리카는 빠르게 공식적 건물 유형으로 자리매김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계승한 콘스탄티누스 2세와 그 이후의 그리스도교인이 된 통치자 밑에서 더 많이 반복되었다.

 

- 신트로논, 하기아 이레네. 출처=ByzantineLegacy

 

 

주님을 뵙는 알현실

 

그러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왜 바실리카를 선택했는가? 우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성당은 로마 제국에서 의미가 깊은 건물이어야 했다. 그런데 바실리카는 황궁 안이나 그것에서 가까운 황제 알현실이었던 궁정 바실리카도 당연히 종교적 건물이었다. 황제는 바실리카의 끝에 마련된 앱스의 높은 왕좌에 앉아 그의 백성에게 엄숙하게 나타났다. 그러니 로마 제국 시민은 바실리카라는 건물의 형태만 보아도 그것이 황제와 국가의 건물인 것은 누구나 금방 알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의 성당 건축가들도 전혀 새로운 건물 형태로는 그리스도교 성당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가 종교적이며 황제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로마 제국의 건물 유형 바실리카를 사용하게 된 이유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실리카식 성당을 지어주었다고 바실리카식 성당이 생긴 것이 아니다. 바실리카식 성당에서 교회와 황제는 의미를 서로 주고받았다. 교회는 ‘그리스도 왕(Christ the King)’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더욱 엄격하고 장엄한 전례 공간을 요구했다. 교회는 이에 적합한 공적 영역의 건축이면서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던 건물 유형인 바실리카를 선택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에만 건축가들은 바실리카를 새로이 변형하여 전례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인 새로운 성당 공간 안에서 황제와 주교단은 물리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연대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사회적 힘은 크게 구별됨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로써 하늘의 임금께서 제국을 다스려 주신다는 생각이 점점 커지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신의 이미지를 재구축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들은 실제로 겸손한 이들의 하느님, 기적을 행하시는 구세주보다는 점차 하늘에 계신 ‘주님을 뵙는 알현실’이 되어 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4월 30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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