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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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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6-10 ㅣ No.1248

[생명 사랑]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주셨다



아담과 하와(알브레히트 뒤러, 1507년작).

야훼 하느님께서는 가죽옷을 만들어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주셨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었다. (창세기 4, 21~23)

알프레드 뒤러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베어 먹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이 알몸임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성서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아담과 하와’는 각각의 공간을 따로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아비와 지어미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은 두 사람이 나누는 시선과 손에 들린 선악과뿐입니다. 이들은 인식의 열매를 베어 먹고 눈이 열려서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신성의 위험한 영역에 첫발을 들인 것입니다. 갑자기 밝아진 눈은 부끄러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알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자 이들은 나뭇잎을 엮어 앞을 가리고 동산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알몸 이외에 모든 것을 보고 누렸던 인간의 행복한 눈이 알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림 배경에는 어둠의 짙은 장막이 드리웠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배경을 깔고 밝게 빛나는 인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뒤러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빚어 만드신 것처럼 붓을 휘저어 인간을 그려냈습니다.

인식의 나무에 긴 몸뚱이를 휘감은 뱀이 서 있는 여자를 유혹합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는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하와는 뱀의 달콤한 유혹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처럼 밝은 눈을 갈망한 것입니다. 뒤러는 하와의 눈을 밝게 빛나도록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는 주님과 마리아의 구약적 예형입니다. 그들이 묶은 것을 이들이 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악의 원형을 들어 이들이 속량했기 때문입니다. 어깨선이 아름다운 하와는 눈부신 허벅지를 교차시키면서 뒤에서 앞으로 걸어 나옵니다. 결단의 행동입니다. 선악과의 선택에도 주저함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머리카락이 바람 없이 휘날립니다.

여자의 행동을 지켜보던 아담도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끄럽게 만납니다. 신의 당부를 깨뜨리는 아담의 인간적 의혹과 망설임이 눈길에 스칩니다. 그의 걸음걸이가 좌우로 주춤거립니다. 뒤로 젖힌 그의 오른손에는 억제할 수 없는 유혹에 기울어지는 마음과 내키지 않는 거부의 심정이 고통스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원죄, 죽음의 문화

에덴이 낙원인 까닭은 바로 이곳에서 인간은 자기 본연의 위치를 깨닫고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기쁨을 항상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낙원은 풍요의 상태이기보다는 삶의 근원을 찾고 그 위에서 인간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생명과 사랑의 원상태인 것이다. 2장 8절에 이어 3장 15절에는 다시 한 번 하느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 데려다 놓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특히 아담을 데려다 놓은 목적이 뚜렷이 언급되는 데 그것은 동산을 돌보는 일입니다. 히브리성서에 의하면 돌보는 일이란 가꾸는 일과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아담에게 맡기신 의무이자 사명은 곧 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동산의 한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먹지 말라고 금지명령을 내립니다. 이 명령은 인간의 한계성, 자유의 제한을 뜻합니다. 이 금지명령은 인간을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사랑의 질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되게 사는 길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뜻을 따르는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 나무열매를 먹으면 죽으리라는 절대적 명령을 내림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지켜나가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은 인간을 시험하려는 걸림돌이 아니라 인간이 지켜야 할 삶의 질서인 동시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는 방종과 독선으로서 인간 공동체는 물론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뱀은 아주 조심스럽게 동정심어린 어조로 여인에게 말을 건넵니다. “하느님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하느님이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셨느냐? 너희에게는 그것이 해당되지 않는 것 아니냐?”

여인은 뱀의 질문에 부정하면서도 하느님의 금지명령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열매에 ‘손도 대지 말라고 하셨다’ 라고 과장하여 말한다. 여인의 잘못은 하느님 말씀의 참, 거짓 여부를 묻는 뱀의 잘못된 질문에 걸려들어 진실을 과장하였다는 것이다.

뱀의 유혹의 핵심은 인간이 신들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암시에 있다. 신들의 특권은 죽지 않음과 완전한 앎에 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뜻대로 자신에 유리한 것과 해로운 것을 규정지어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이루려는 자율성을 가지게 됨을 뜻한다. 이 자율성은 실로 하느님만이 행사할 수 있는 신성한 특권입니다.

뱀의 속삭임은 인간이 바로 이 특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3장 6절에는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열매에 대한 욕심은 단순히 감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뱀이 말한 것과 같이 자신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인은 열매를 따서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주었습니다.

이제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행위가 저질러진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무시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대한 범죄라고 합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한 아담의 죄는 원죄(原罪)라고 불려왔습니다.

열매를 먹은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알몸인 것을 알고 그들의 앞을 가렸습니다. 뱀의 말이 외견상 옳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발견한 것은 신과 같이 된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벗은 알몸이었고, 갑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뱀의 말은 엄청난 거짓이었습니다.

이윽고 날이 저물고 야훼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오자 그들은 그토록 친밀한 관계였던 하느님이 두려워 급히 나무사이에 숨어 자신을 감추려고 합니다. 두려움은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피하려 할 때 그들은 더 이상 하느님과 함께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결코 하느님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계속 지켜보신 하느님은 서둘러 인간을 애타게 부르십니다.(3,9) 하느님은 인간이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행위를 나무라지만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려고만 할 뿐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회피하고 모든 잘못을 일방적으로 상대방에 돌리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에게도 그 책임의 일단이 있다는 듯이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주신 여자가 ‘열매를 따주기에’”(3,12) “당신이 만드신 이 뱀에게 속아서” (3,13) 먹었을 뿐이라고 투덜거립니다.

이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했던 친밀한 관계와 조화는 깨졌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타인에 대한 부끄러움은 인간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게 됩니다.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에 이은 처벌로 여인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과 무거운 짐으로 지어지고, 남자는 밥 한 그릇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 생계의 쪼들림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하와의 창조와 원죄(우세로 파올로, 1432-36년작).


하느님의 자비


죄에 대한 처벌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인간의 생명이 보존시켜주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처벌로 인한 이런 절망스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들이 이어가는 생명은 놀랄만한 신비요 사랑입니다. 3장 20절에서 또 다시 여인은 이름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습니다. 생명,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를 의미하는 새로운 이름은 하와였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를 지은 다음에도 그를 내치지 않고 거두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심으로써 그들이 무화과 잎으로 만든 엉성한 가리개 대신 더 튼튼하고 따뜻하게 그들을 감싸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림 배경에 어둠의 짙은 장막이 드리워짐을 봅니다. 죄를 지음으로서 처하게 된 짙고 깊이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 어두움 속으로 밝은 빛이 비쳐옵니다. 아담과 하와를 눈부시도록 밝게 비추는 그 빛은 죄를 지은 인간을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시고 하느님의 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죄를 짓고 낙원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지만 하느님의 마음은 아담과 하와 곁에 함께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 곁에도 계시고 우리를 당신의 눈으로 밝게 비추고 계십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6월호, 지영현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www.wga.hu/art/d/durer/1/06/1adameve.jpg)

(원본 : http://www.wga.hu/art/u/uccello/1green/2gree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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