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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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5: 익명의 교부가 쓴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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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34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5) 익명의 교부가 쓴 ‘디오그네투스에게’에서

 

 

“영적 세계의 특수한 법”


[본문]

 

그리스도 신앙인은 신앙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나라를 달리 하는 것도, 언어를 달리 하는 것도, 복장을 달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고유한 도시에 살지도 않으며, 어떤 특수한 방언을 쓰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생활에는 특수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교리는 쓸데없이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상상이나 꿈이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듯이 인간적 학설을 내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각자의 운명에 따라 그리스의 도시 혹은 야만인들의 도시에 흩어져 삽니다. 그들의 복장과 음식과 생활방식은 그들이 사는 지역의 관습을 따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속하는 영적 세계의 특수하고 역설적인 법을 나타내 보입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조국에 살면서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습니다. 시민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나그네와 같이 모든 것을 참습니다. 타향 땅이 그들에게는 조국과 같고 모든 조국이 타향과 같습니다. … 모든 사람들이 하듯 그들도 결혼하여 어린 아이를 가지지만 아기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육신을 지니고 있으되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

 

「디오그네투스에게」 5, 1~6. 8~9.

 

 

인과응보가 아닌 섬김과 사랑으로


[해설]

 

위 본문은 익명의 교부가 남긴 문헌의 일부이다. 

 

15세기 초에 그리스어를 공부하러 콘스탄티노플에 갔던 젊은 학생이 어느 생선가게의 헌 종이 꾸러미 안에서 이 문헌을 발견하였다. 2세기 말부터 3세기 초 사이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디오그네투스라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에 대해 저자에게 질문하였고 저자는 그 질문들에 답하는 일종의 호교서이다.

 

위에 인용한 본문은 그리스도 신앙인의 생활 태도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부분이다. 문장은 수려하고 운율(韻律) 있는 어조(語調)가 돋보인다. 저자의 수사학(修辭學)적 능력이 엿보인다.

 

그리스도 신앙은 오랜 세월 동안 역사 안에 살아오면서 여러 문화권을 경험하였다. 인간의 언어와 실천은 항상 시대적 성격을 지닌다. 신앙 언어와 실천도 시대적 해석과 더불어 역사 안에 살아왔다. 오늘 우리의 신앙 언어와 실천에는 과거의 문화적 유산이 많이 첨가되어 있다. 우리가 교부들의 저술을 소중히 읽는 것은 사도 시대 이후의 문화권에서 생겨난 문헌들이기 때문이다. 교부들은 신약성서가 전하는 복음을 그들의 문화권에서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물려받은 신앙 유산에는 중세 유럽의 문화적 요소와 복음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 우리의 문화권에서 예수의 복음을 새롭게 조명하고 복음적 요소와 중세의 문화적 요소를 구분하고 취사선택하기 위해서는 교부들의 문헌이 시금석이 될 수 있다.

 

오늘의 본문은 말한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 세상의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수 언어, 특수 복장, 특수 거주 지역, 특수 습관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지역의 문화권에 흩어져 그 지역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지만 그들의 삶을 움직이는 원리는 다르다. 그리스도 신앙은 사회에서 외형상 격리 고립된 집단을 만들지 않는다. 각자가 자기 조국에 살지만 그들이 따르는 삶의 원리는 『그들이 속하는 영적 세계의 특수하고 역설적인 법』이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과 사랑의 법이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들 삶의 원리가 다르기에 자기 조국에 살면서도 나그네와 같은 체험을 한다.

 

인류 역사가 소중히 여기는 삶의 원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원인이 있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다는 원리이다. 잘한 만큼 상 받고 못한 만큼 벌 받는 원리이기도 하다. 열심히 지키고 많이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아 잘 살겠다는 생각은 인류역사가 제공하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르는 자세이다. 위 교부의 본문은 그리스도 신앙인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이라고 말한다. 인과응보가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섬김과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원리를 따라 산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되 신앙인의 실천은 하느님 생명의 실천이라는 말이다.

 

중세 유럽 사회는 신분 사회였다. 신분에 따라 복장을 달리하였다. 가톨릭 교회에서 통용되는 특수 복장들은 모두 중세 유럽의 유물(遺物)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라 복장을 달리하지 않는다. 오늘(날)은 통치자들도 복장으로 자기 신분을 과시하지 않는다. 가톨릭 교회에는 아직도 복장으로 자기 신분을 나타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중세 유럽의 유물을 안고 살겠다는 것이다. 그런 유물은 섬김과 사랑이라는 『영적 세계의 특수한 법』을 감추고, 신분 상승이라는 허세와 군림(君臨)이라는 중세 유럽의 시대착오적 관행을 나타내는 것이다.

 

※ 더 읽을거리 : 『내가 사랑한 교부들』(분도출판사 2005)

 

[가톨릭신문, 2005년 5월 1일, 서공석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부산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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