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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 전례 쇄신을 위한 베네딕도회의 기여 - 발간된 전례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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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4-11 ㅣ No.683

[특집 2009년도 심포지엄] 성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와 문화 활동


한국 교회 전례 쇄신을 위한 베네딕도회의 기여 - 발간된 전례서를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2. 미사 전례서의 발간과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통한 미사 전례 쇄신
3. 성가집의 발간과 그레고리오 성가의 보존과 보급
4. 시간전례서의 발간과 신자들의 공동 기도 촉진
5. 성경의 번역과 말씀 전례의 활성화
6. 성사 안내서의 발간과 신자 재교육
7.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우리 일행이 옥사덕에 도착한 첫날 밤, 수도 가족들은 마당에 모여 참으로 오랜만에 저녁기도(Vesper)를 노래하였다. 우리의 메말랐던 마음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는 느낌이었다. ‘오, 마리아, 이 탄식의 골짜기에서 우리를 도와주소서’라는 성모 찬가를 목청껏 외쳐 불렀다. 이 찬가는 수도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아갈 장소에서 처음으로 성모님께 외친 구원의 부르짖음이었다. … 다음날인 8월 7일은 주일이었다. … 옥사덕에서 첫 미사 때에는 … 안 아르눌포 부원장 신부가 미사 강론을 하였다. 신부님은 ‘어제 우리가 올라온 이 산이 고통과 궁핍과 귀양살이 속에서도 오히려 천상적 영광을 위한 산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요지의 강론을 하여 모든 수도 가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수녀님들 쪽에서는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1) 이 증언은 지 에르네스토(Ernestus Siebertz, 池仁洙, 1907~2000) 신부를 비롯한 베네딕도회원들의 삶에서 전례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덕원 수도원이 강제 폐쇄되고 옥사덕 수용소에서 노동과 착취에 시달릴 때에도 그를 지탱해 준 것은 바로 공동체 전례에서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여기서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전례의 일상화이다. 전례가 신앙 생활이고 신앙 생활이 곧 전례인 셈이다. 베네딕도회는 이 땅에서 100년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결코 전례 생활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평양 인민 교화소에서도 기억에 의지해서 성체도 성혈도 없는 이른바 ‘마른 미사’를 드렸다. 옥사덕 수용소에서도 그들은 전례 생활만은 규칙적으로 했다. 한국인 수도자들은 부산 피난살이 중에서도 미사와 공동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만큼 베네딕도회원들은 전례를 사랑하는 수도자들이다. 베네딕도 수도자들은 전례 안에서 힘을 얻고, 그들이 거행하는 전례는 그들 삶의 역동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전례 중심적인 생활 안에서 베네딕도회원들은 많은 전례서들을 펴낸 것이었다. 이 땅에서 베네딕도회원들이 발간한 많은 전례서들은 교회와 신자들을 위한 그들의 봉사와 사랑을 드러낸다.

본 논문의 목적은 첫째로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잊고 지내 왔던, 베네딕도회에서 발간한 전례 서적들을 그 종류별로 정리하고 소개하는데 있다. 이 작업을 통하여 옛 전례서에 관한 틀린 정보를 바로잡고, 옛 전례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둘째로 베네딕도회가 전례서 발간을 통하여 한국 교회 전례 쇄신에 기여한 바를 살펴보는 데 있다. 이 고찰을 통해 20세기 초 유럽에서 시작된 전례운동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에 이르기까지의 전례 개혁 흐름에 한국 베네딕도회가 역동적으로 동참했으며, 한국 교회의 전례 쇄신에 선구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서 선교 사업에 동참한 투칭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펴낸 전례서들은 다루지 않겠다. 백동 · 덕원 · 연길 · 왜관 수도원에서 발행한 전례서들만 살펴보겠다. 본 작업을 해 나가면서 필자가 부딪힌 큰 난관은 독일어 참고 자료의 해독이었다. 왜관 수도원의 독일인 형제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논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수집하였거나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전례서들을 종류별로 분류하고 발간 연도별로 나열하면서, 그 발행 목적과 의의를 고찰할 것이다. 제1장에서는 전례서들 중 가장 중요한 미사 전례서들을 살펴보겠다. 이 전례서들은 한국 교회 미사 전례 쇄신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제2장에서는 미사에서 부르는 성가집의 발간과 그레고리오 성가의 보존과 보급 방식을 고찰해 볼 것이다. 제3장에서는 시간 전례서들의 발간에 관해서 다루겠다. 특히 평신도들의 성무일도 참여를 촉진한 점은 대단히 선구적이다. 제4장에서는 성경의 번역과 말씀 전례에 관련된 서적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전례 교육을 목적으로 한 서적의 발간과 베네딕도회원들이 전례를 통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함양하고자 했던 노력을 살펴볼 것이다. 부록으로 지금까지 간행된 전례서의 서지(書誌) 정보를 밝히겠다.


2. 미사 전례서의 발간과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통한 미사 전례 쇄신

1947년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Mediator Dei〉(하느님의 중개자) 105항에서 말한다. “신자들을 더욱 쉽고 효과적으로 미사에 참여시킬 생각으로 그들을 《로마 미사 경본》에 친숙해지게 하고 사제와 하나 되어 교회의 말과 감정으로 함께 기도할 수 있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찬사를 받아 마땅합니다. 또한 외적인 방식에서도 전례를 거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거룩한 행위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찬사를 받아야 합니다.” 베네딕도회원들의 선교 방법 중 하나는 신자들을 거룩한 전례, 특히 미사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시키는 일이었다. 이는 한국 교회 전례 쇄신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1930년대부터 베네딕도회원들은 전례운동에 자극을 받아 다양한 한국어 미사 전례서들을 발행하고 수도원과 본당에서 이것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사목에 활용하였다. 그것은 미사 전례에 대한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미사 전례서를 통하여 베네딕도회원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도 미사 전례의 개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 미사 전례서 발간 과정과 내용 분석

(1) 미사 전례서들의 발간 과정

덕원 수도원과 연길 수도원의 베네딕도회원들은 한국어 미사 전례서 발간을 위해 서로 협조하면서 그 목표를 일관성 있게 추진해 나갔다.

우선 덕원 수도원에서는 1930년 초부터 홍 루치오(Lucius Roth, 洪泰華, 1890~1950) 원장 신부의 주도 아래 한국어 미사 경본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 작업을 시작했다. 그 첫걸음은, 홍 루치오 원장 신부가 한국인 평수사와 수녀를 위해 라틴어 ‘미사 통상문’(Ordo Missae)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등사판 책자로 펴낸 것이었다.2) 비록 이것이 한국인 수도자만을 위한 번역이었지만, 최초의 미사 통상문 번역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장차 신자들이 한국어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이후 발간될 여러 종류의 미사 전례서들을 준비하는 데 중요한 단초를 마련했다. 동시에 미사 전례 용어를 한국어로 정립하는 데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3) 덕원 수도원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1932년 대림 제1 주일부터 그날 미사 경문을 홍 루치오 원장 신부가 한국어로 번역하여 낱장 본으로 미사 전에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으로써 신자들은 주일과 축일 미사에 더욱 충만하고 능동적으로 참례할 수 있었다.4)

한편 연길 수도원에서는 덕원 수도원보다 한발 앞서 미사 전례서 발간을 준비하였다. 신자들을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케 하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연길 지목구 용정 본당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시도하고 있었다. 1931년 연길 지목구의 부감목 겸 용정 본당 주임인 박 콘라도(Conradus Rapp, 朴敎範, 1896~1932) 신부는 지목구장인 백 테오도로(Theodorus Breher, 白化東, 1889~1950) 신부의 승인 아래 능동적 미사 참례의 방법을 면밀히 연구하였다. 그 결과로 《미사 규식》이란 이름으로 등사판으로 만들어 연길 지목구 내 본당에 보급하였다.5) 연길 수도원의 서 빅토리노(Victorinus Zeileis, 徐相熱, 1888~1957) 신부를 비롯한 여러 신부들이 《미사 규식》에 들어갈 미사 경문들을 번역하는 데 협력하였다.6)

그 후 박 콘라도 신부 후임으로 용정 본당 주임이 된 배 발뒤노(Balduinus Appelmann, 裵光彼, 1902~1975) 신부는 1932년 말 《미사 규식》의 정식 출판을 준비하기 위해 용정 본당에서 덕원 수도원으로 왔고,7) 1933년 여름에는 최종 마무리를 하기 위해 다시 덕원 수도원에 6주간 머물며 작업한 끝에 《미사 규식》을 백 테오도로 신부의 인준으로 덕원 신학교 활판부에서 인쇄 발간했다. 그는 용정 성당에서 9월 말부터 이 책을 미사 때 사용하였다.8) 정식으로 간행된 《미사 규식》은 이전 등사본과 순서는 동일하지만, 미사 경문의 번역문은, 편집자가 서언에서 밝힌 바대로, 덕원 수도원의 홍 루치오 원장 신부가 완전히 새롭게 손을 본 것이었다.

1933년 초 덕원 수도원에서는 그동안 낱장으로 나왔던 한국어 미사경문을 한 권으로 묶어 최초의 등사본 ‘한국어 미사 경본’을 펴냈다. 비록 등사본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미사 통상문과 주일과 대축일 미사와 주요 성인 축일 미사 경문들이 실려 있다.9)

1935년부터 1936년까지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등사본 미사 경본을 정식 책으로 간행하기 시작한다. 1935년에 《미사 경본 - 주년 미사》와 《미사 경본 - 성인 첨례 미사》를 출간하였고, 《미사 경본 - 주년 미사》에는 넣을 수 없었던 사순 시기 미사 경문들을 번역하여 《미사 경본 - 봉재 때 미사》도 출간하였다.10) 라틴어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은 한 권인데, 한국어 《미사 경본》을 여러 권으로 출간한 이유는 당시 얇은 종이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라고 《미사 경본 - 봉재 때 미사》 개정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11) 1936년에는 《미사 경본》을 출간하였다. 이것은 《미사 경본 - 주년 미사》와 《미사 경본 - 성인 첨례 미사》를 합친 것으로서, 《미사 경본 - 주년 미사》에 싣지 못한 성인 축일, 성인 공통, 헌원 미사(기원 미사) 경문 등을 보충하여 더 체계적이고 완전하게 만든 미사 경본이었다.

이 《미사 경본》들의 출간으로 한국 교회는 처음으로 온전한 미사 경본을 모두 갖게 되었다. 연길 수도원에서 발행한 《미사 규식》과 덕원 수도원에서 간행한 《미사 경본》은 수도원은 물론 연길 대목구와 원산대목구의 본당들에서 오랫동안 신자들을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시킨 교과서 역할을 하였다.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나고 연길 수도원에서 펴낸 《미사 규식》은 남한 교회에서 잊혀졌지만, 《미사 경본》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바오로 6세 로마 미사 경본》(1970년/1975년)에 따라 1976년 두 권으로 된 새 한국어 《미사 경본》이 나오기까지, 한국 교회에서 유일한 한국어 미사 경본으로서 덕원 수도원과 왜관 수도원에서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왔다.12)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에는 교회 전례에서 쇄신의 바람이 일어났다. 전례운동의 영향으로 교황 비오 12세(1939~1958)는 교황청 예부성성 안에 전례위원회를 두어 전반적인 전례 쇄신을 준비하였다. 그는 공심재를 완화하고, 부활성야를 다시 성토요일 밤에 거행하며(1951년), 성주간 예식서들을 복원하여 펴내게 하였다(1955년).13) 1960년대에는 한국 교회를 비롯한 전 세계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특히 미사 거행에서 변화의 과도기에 놓여 있었다. 그동안 사용하던 덕원판 《미사 경본》은 한글 맞춤법의 변화와 교회 전례 상황이 이미 많이 달라져 그대로 사용하기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1962년 2월 왜관 수도원 원장 이 티모테오(Timotheus Bitterli, 李聖道, 1905~1990) 몬시뇰은 주코르비니아노(Corbinianus Schrafl, 周聖道, 1901~1990) 신부에게 개정판 작업을 지시했다. 그 결과 1963년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와 분도출판사의 김윤주 편집장의 노력으로 《미사 경본(연중 매일 미사 경문)》(분도출판사)이 간행되었다. ‘개정판에 붙이는 말’에서 덕원판 《미사 경본》을 전면적으로 수정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처음에는 전의 《미사 경본》을 철자법이나 고쳐 그대로 출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미사를 번역하여 삽입하다 보니, 문장이 고르지 못한 어색한 책이 될 것 같아, 난삽한 어귀들을 쉬운 말로 고치고 문장도 가급적 현대화하는 등 많은 손질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첫 판이 나온 1963년부터 1967년까지 모두 9판이 인쇄되어 30만 부 이상이 한국 교회에 보급되었다. 그 후에도 주문은 계속 들어왔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에 따라 한국 교회에서 새로운 한국어 미사 경본이 곧 나올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인쇄하지 않았다.14)

1964년 12월 15일 분도출판사에서 《미사 경본(연중 매일 미사 경문)》에서 발췌하여 미사 주례 사제용 《미사 봉독서》를 출간했다. “미사 봉독서”라는 제목 밑에는 “천주교 한국 주교단의 명에 의하여 매일 미사 경본에서 발췌함”이라는 사항이 적혀 있다. 이것은 〈전례 헌장〉 54항에서 모국어 사용 가능성을 허락함에 따라, 한국 주교단이 한국어 미사를 위한 첫 준비로 《미사 경본(매일 미사 경문)》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1965년 3월 30일에는 《미사 봉독서》에는 없는 성지주일, 성화요일, 성수요일, 성금요일의 ‘수난 복음’을 넣어 그 부록으로 《성주간 전례서》를 간행했다.15)

1932년부터 1976년 새로운 한국어 공식 《미사 경본》이 발간되기까지 44년간 한국 교회는 베네딕도회가 발간한 미사 전례서들을 가지고 성찬례를 거행했다. 이로써 베네딕도회의 주도적 기여의 시대는 끝난 셈이다.

(2) 미사 규식 : 미사 설명과 4가지 미사 참례 방식 제시

1933년에 간행된 《미사 규식》은 사제와 신자들이 미사를 거행하는 4가지 방식(규식)을 담은 미사 전례서이다. 이 책은 서언, 미사성제(해설), 제1 규식~제4 규식, 각종 첨례 감사서문경, 기타 기도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전례서의 핵심적인 부분은 미사를 거행하는 구체적 방법을 4가지로 상세히 제시하는 ‘제1 규식~제4 규식’이다. 4가지 미사 규식을 사용하는 때를 이해하기 쉽게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 책은 한국어 미사 통상문과 감사송을 수록한 최초의 미사용 전례서이다. 덕원 수도원의 홍 루치오 원장 신부가 《미사 규식》이 간행되기 1년 전에 번역한 한국어 미사 통상문이 네 가지 규식 가운데 제4 규식의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편집자는 ‘서언’에서 한국어 미사 통상문을 미사의 제4 규식으로 책에 수록한 목적을 밝힌다. “제4 규식의 기도문은 사제가 드리는 기도문과 똑같아서 비교적 총명한 이로 하여금 더욱 정성껏 사사로이 미사에 참례하는 길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16) 다시 말해서,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할 때 사제가 라틴어로 드리는 미사를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실 《미사 규식》에서는 미사 거행 때 바뀌지 않는 부분인 ‘미사 통상문’ 외에 그날의 미사 성격(전례주년과 성인 축일들)에 따라 바뀌는 고유 경문들인 ‘축문’(祝文, 본기도), ‘묵념축문’(默念祝文, 예물 기도), ‘영성체경’(領聖體經, 영성체송), ‘성체 후 축문’(聖體後祝文, 영성체 후 기도)들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참다운 의미의 ‘미사 경본’(Missale)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에는 평일부터 연미사까지 다양한 미사의 ‘감사서문경’(感謝序文經, 감사송)들이 번역되어 수록되어 있다.17) 따라서 《미사 규식》이 비록 참다운 의미에서 볼 때 교회의 공식 전례서인 ‘미사 경본’은 아니지만, ‘미사 경본’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딘 ‘최초의 본격적인 미사 전례서’라고 보겠다.

‘서언’에서 이 전례서의 목적을 밝힌다. “일반 교우들을 가르쳐 될 수 있는 대로 탁덕(鐸德, 사제)과 같이 미사의 본 경문을 외우면서 밖의 예절까지 합당한 마음으로 참례하게 함이다.” 즉, 이 책의 목적은 신자들이 수동적인 관람자로서 주님의 성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찬례를 주례하는 사제와 내적 외적으로 일치하고 사제와 함께 능동적으로 성찬례를 거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이 《미사 규식》 전반에 걸쳐 탁월하게 구현되고 있다.18) 이 책에서 미사 거행의 ‘공동체적 특성’을 드러내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미사 해설인 , ‘미사성제’ 항목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희생제사의 재현인 미사를 내적으로 잘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 의미도 지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덕원 수도원의 김 올라보(Olavus Graf, 金大振, 1900~1976) 신부가 저술한 미사에 대한 입문 수준의 해설이다. 이 부분은 모두 78면에 이르며, 미사에 대한 37개의 질의응답과 시각적으로 쉽게 두 개의 천연색 그림을 통하여 미사의 의미와 기원과 역사, 그리고 미사의 전체 구조 등을 체계적이며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 원산 대목구와 연길 대목구의 거의 모든 본당에서는 이 전례서를 가지고 미사 강론 때 미사에 대하여 교육하였다.

둘째, ‘제2 규식’과 ‘제3 규식’에서 드러난다. 이 두 규식은 사제와 신자들이 대화 형식으로 미사를 거행하는 방식이다. 특히 제3 규식은 주일과 축일 미사 때 사용하는 것으로서, 신자들이 사제와 더불어 성가를 부르면서 대화 형식으로 성대하게 미사를 거행하는 방식이다.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1937년에 간행한 《미사 고해 지도서》 머리말에서 제2 규식과 제3 규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2, 제3 두 가지 규식은 교우들이 미사를 참례하는 데 있어 다른 어떠한 신공보다도 마땅한 기구로서 사제로 더불어 함께 성제를 드릴 수 있는 것이며, 더구나 제3 규식 같은 것은 사제의 드리는 신공의 계응을 보미사자(복사)만이 하지 않고 오직 교우 전체가 하게 되었다. 또한 이 경문은 할 수 있는 데까지 사제가 드리는 경문과 꼭 같은 것이다.”

셋째, ‘몇 가지 주의’라는 제목으로 된 일러두기에서 미사의 공동체적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러두기에서 전례 봉사자들을 도형으로 세분해 놓았다. “△ 지도자 (부득불 할 것), ▲ 지도자 (시간 있는 대로 할 것), * 성가대원, + 남교우, × 여교우, ○ 합송, ⊙ 탁덕.” 각 전례 봉사자의 역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도자’(指導者)는 신자들이 할 경문의 첫 구절을 시작하는 주송자(呪誦者)이다. 넓게 보면 오늘날 미사 해설자 역할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성가대원’(聖歌隊員)은 성가를 선창하고 이끄는 역할을 한다. ‘남교우’(男敎友)와 ‘여교우’(女敎友)는 해당되는 미사 경문을 남녀 교송으로 바치는 표시이다. ‘합송’(合誦)은 남녀 교우 모두가 함께 경문을 바칠 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제가 할 기도문에는 ‘탁덕’이란 표시를 한다. 《미사 규식》에서 각 봉사자들은 고유한 자기 직무를 수행해 나가면서 공동체적으로 미사를 거행한다. 여기서 〈전례 헌장〉 28항의 정신을 발견한다. “전례 거행에서는 누구나 교역자든 신자든 각자 자기 임무를 수행하며 예식의 성격과 전례 규범에 따라 자기에 딸린 모든 부분을 또 그것만을 하여야 한다.”

각 전례봉사자를 표시하는 도형의 순서에서도 미사의 공동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전례서들이나 기도서에서는 사제가 하는 부분을 표시하는 도형을 제일 앞에 내세운다.19) 《미사 규식》의 일러두기에서는 봉사자의 순서를 지도자, 성가대원, 남교우, 여교우, 남녀 합송, 탁덕 순이다. 사제보다도 다른 평신도 봉사자들을 앞세웠다는 것은, 미사가 사제 혼자 주도하는 제사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거행하는 제사라는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전례의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정신이다. 《미사 규식》의 미사 안에서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여러 지체들로 구성된 신비체로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전례 헌장〉28ㄴ항에서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전례 행위는 “교회의 몸 전체에 관련되고 그 몸을 드러내며 영향을 끼친다. 교회의 각 지체는 위계와 임무와 실제 참여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으로 관여한다.”

(3) 미사 경본 : 최초의 한국어 미사 경본

《미사 경본》은 《로마 미사 경본》의 한국어 완역본이다. 이 번역은 한국 교회 초유의 업적이다. 《미사 경본》 네 권의 전체적인 구조는 대동소이하다. 1936년에 최종판으로 간행된 《미사 경본》을 보면, 서문, 목록, 성인표, 성교회 이동 첨례표, 미사성제(해설), 미사 순서(Ordo Missae 미사 통상문), 주년 미사(Proprium Missararum de tempore 전례 시기 고유), 성인의 고유 미사(Proprium Missae Sanctorum), 성인의 공통 미사(Commune Sanctorum 성인 공통), 헌원 미사(기원 미사), 연미사, 성분도회 고유 미사로 구성되어 있다.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1935년 11월 1일에 쓴 《미사 경본》의 〈서문〉에서 발간 목적을 밝힌다. “조선 교우들로 하여금 사제와 밀접히 연락하여 미사성제를 거행하며, 또한 미사성제 시에 교회에서 채택해서 여러 세기 동안 사용하여온 귀중한 경문을 사제와 한 가지로 드리게 하기 위하여 《로마 미사 경본》 중에서 그 대부분을 한글로 번역하였노라.”20) 따라서 《미사 경본》을 발간한 근본적인 목적은 신자들이 라틴어 미사 경문을 한국어로 알아들음으로써 능동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발간 목적은 단순히 한국어 미사 경본을 만들어 신자들이 알아듣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미사 경문을 한국어로 쉽게 이해함으로써 미사의 근원적인 신비, 곧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십자가 희생제사에 공동체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서문’에서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십자가 희생제사와 교회가 거행하는 미사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는 전 인류를 위하야 드리신 것인지라, 그리스도 이 제사를 당신 교회에 끼치사 하여금 이를 새롭게 함으로 전 인류에게 그 열매를 내리시고저 하셨나니라.” 교회는 미사를 거행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하여 봉헌하신 구원의 열매를 모든 사람에게 전달한다. 미사는 전 인류를 위한 십자가 희생제사이기 때문에 사제 혼자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사제는 “교회의 이름으로 또 교회를 위하여” 미사를 거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미사 거행이란 사제와 신자들이 한 교회로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 앞에 모여 함께 신약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제사를 그리스도 신자들이 공동으로 드리는 경우에라야 이 신약의 제사의 사상이 완전히 맞갖으리니,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신자의 단체가 제대 앞에 모여 사제와 한가지로 이 제사를 드리되 그와 계응으로 기구하던지 혹은 제사를 거행할 때에 그와 계응으로 기구하지 못할 경우에는 이 제사의 거행을 숭경(崇敬)하며 따라가야 그 사상에 상응하리로다.” 이와 같은 목적이 이 전례서 전반에 걸쳐 구현되고 있다.

첫째, ‘미사성제’라는 제목의 미사 해설에서 발견된다. 이는 모두 44면에 실려 있는데, 미사의 역사와 구성과 정신적 참례, 그리고 교회 연력(전례주년)에 대한 자세한 설명, 미사 경본의 사용법 등 미사 전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자들은 이 미사 해설을 통하여 미사 전례의 신학을 지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사제와 함께 더욱 능동적으로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둘째, 전례주년의 시기마다 첫 면에 그 시기의 전례적 영성적 의미를 쉽게 설명함으로써 이 전례서의 목적을 구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탄시계 때’(성탄 시기)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림(대림) 때는 예수 성탄 시계의 예비기라. 성탄 첨례는 이 시계의 중앙이 되어 천주 성자 사람이 되심을 생각케하고 20일 후의 삼왕내조 첨례(주님 공현 대축일)는 사람이 되신 천주의 아들이 외교인의 빛으로 발현하신 것을 생각케하고 삼왕내조 후 여러 주일은 이 시계의 마지막 부분이니라. 이 여러 주일의 수는 해마다 부활첨례를 일찍 지내고 늦게 지냄을 따라 변하나니 성모취결례(聖母取潔禮, 주님 봉헌 축일)는 이 시계의 마지막 첨례날이니라.”

셋째, 성인 축일인 경우에도 전례서의 목적에 따라 그 축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붙여놓았다. 신자들은 그날 미사에 기념하는 성인의 간단한 행적을 앎으로써 미사에 더 깊이 참례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0월 18일 ‘성 루가 성사 첨례’(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성 루가는 본시 안디오키아에서 의업에 종사하시다가 성교회에 나오신 후에 성 바오로 종도를 모시고 전교하셨으며 성 바오로의 가르치시는 대로 복음을 저술하시고 종도행전(사도행전)도 기록하시니라. 복음 첫 장에 자가리아(즈카르야)의 제사에 대한 말씀이 있으므로 성사는 구약 시대의 제사에 쓰는 소로 모상(模像)되는도다. 성사(복음사가)는 후에 아하야(아카이아)에서 전교하시다가 그리스도를 위하야 피를 흘리셨도다.”

이처럼 《미사 경본》은 신자들의 입장에서 그날 드리는 미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구성되었다. 이 전례서를 통해서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신자들은 “사제, 나아가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기도와 뜻에 마음을 합하여 찬미와 탄원, 속죄와 감사를 드림으로써 하나의 동일한 제물을 바치며 사제의 가시적인 예식에 따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게”21) 되었다.

(4) 미사 경본(연중 매일 미사 경문) : 미사 경문의 현대화

1963년에 간행된 《미사 경본(연중 매일 미사 경문)》의 구성은 전체적으로 볼 때 덕원판 《미사 경본》을 따라가고 있지만, 구성 순서에서 약간 변화되었고 새로운 내용도 들어갔다.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도입 부분으로 덕원 수도원의 홍 루치오 원장 신부가 1935년 11월 1일에 쓴 옛 《미사 경본》의 서문을 실은 ‘서(舊版)’, 이 책의 출판 목적과 희망을 피력한 ‘개정판에 붙이는 말’, 미사의 의미를 간단히 설명하는 ‘미사 해설’, 미사를 거행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일러두기’, ‘이동 축일 일람표’, 그리고 ‘차례’가 이어진다. 특히 옛 《미사 경본》의 서문을 제일 앞면에 실었다는 사실에서 이 책이 덕원판 《미사 경본》의 정신과 전통을 계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책의 중심 부분은 다음의 순서로 되어 있다. ‘시계(時季) 미사’라는 제목으로 전례 시기에 따라 바뀌는 미사 경문들(입당송, 본기도, 독서, 층계송, 알렐루야, 복음, 봉헌송, 봉헌 기도, 영성체송, 영성체 후 기도)과 성경 말씀을 실었다. 그 다음으로 ‘미사 통상문’을 넣었다. 그리고 ‘성인 축일 미사’(성인 고유 미사와 성인 공통 미사), ‘헌원 미사’(기원 미사), 그리고 ‘연미사’를 넣었다. 그런데 ‘미사 통상문’과 ‘성인 축일 미사’ 사이에 새로운 요소로 시간 전례 ‘찬미경’(아침 기도)과 ‘종과경’(저녁 기도)이 삽입되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덕원 수도원에서 간행된 《수사통경기구》(1938년)와 《성모소성무일과》(1946년) 밖에는 한국어 성무일도서가 없었다. 새로운 공식 성무일도서가 나오기 전까지 시간 전례의 중요한 두 기둥인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이 책에 임시방편으로 수록했던 것이다. 그리고 1966년 제8판에는 ‘분도회 고유 미사’가 맨 뒤에 첨가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이 1963년 12월 4일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공의회 문헌 가운데 제일 먼저 반포되었다. 전례 개혁의 정신에 따라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는 이 책이 한국 교회 전례 기도문의 현대화에 이바지하기를 소망했다. “작금 논의되고 있는 한국 천주교 각 기도문의 현대화에 하나의 계기가 된다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없겠다.” 이 책의 첫판이 간행되자 한국 교회 안에서는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다. 특히 당시 기도서나 성경에서 하느님께 대한 호칭을 “너, 네, 너의” 등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미사공과》(1946년)에 나오는 “성 요셉을 향하여 하는 경”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요셉이여, 너는 오 주 예수를 기르신 아비시오…”라고 하면서, 요셉 성인을 “너”라고 부른다. 이처럼 한국어 어법에 맞지 않은 전통적인 옛 경문의 표현을 과감히 수정하였다. 이 논란은 얼마 되지 않아 수그러들었다.22) 그래서 이 책의 가치는 미사의 옛 경문을 현대어로 수정했다는 점이다. 기도문의 현대화 시도는 이후 나오는 모든 공식 전례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이 전례서에서는 미사 본기도 결문을 “성부와 성신과 함께 천주로서, 세세에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옵나이다”로 번역했다. 그러나 주교 회의가 인준한 1976년 한국어판 《미사 경본》에서는 “성부와 성신과 함께 세세에 영원히 생활하시고 왕하시는 천주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로 상당한 차이점을 보였다. 그런데 2000년 8월 15일에 발표된 미사 통상문 개정으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로 수정되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본기도 결문은 《미사 경본(연중 매일 미사 경문)》의 것과 매우 흡사하다.

(5) 미사 봉독서 : 최초의 주례 사제용 한국어 미사 경본

1964년에 12월 15일에 발간한 《미사 봉독서》는 판형을 크게 하였다. 덕원판 《미사 경본》이나 1963년판 《미사 경본》은 신자들이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작은 판형이었다. 이 전례서가 《로마 미사 경본》과 같이 큰 판형으로 출간된 것은 주례 사제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례서는 최초의 ‘주례 사제용 한국어 미사 경본’인 것이다. 이것은 1976년에 간행된 공식 한국어판 《미사 경본》의 판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체 구성은 《미사 경본(매일 미사 경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특징은 구성 요소 가운데 “Ordo Missae”(미사 통상문)가 주례 사제가 사용할 수 있도록 같은 면 왼쪽에는 라틴어, 오른쪽에는 한국어 대역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Canon Missae”(미사 전문)는 라틴어로만 되어 있다. 이것은 1964년 9월 26일 교황청 예부성성에서 공포한 〈전례 헌장〉의 올바른 실천을 위한 첫째 훈령 〈Inter Oecumenici〉(세계 공의회) 57항에서 ‘미사 전문’의 모국어 사용은 아직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능동적 참여를 통한 미사 거행의 쇄신

(1) 유럽 전례운동과 한국 교회 전례 쇄신 운동과의 관계

베네딕도회에서 발간한 미사 전례서 가운데 《미사 규식》과 《미사 경본》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미사 전례서들은 미사 전례 쇄신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었다. 이 두 전례서에서 우리는 이 땅의 베네딕도회원들이 20세기 초 유럽 교회에서 시작된 전례운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음을 발견한다. 이미 이들은 유럽에 있을 때 베네딕도 수도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전례운동의 세례를 받았고,23) 한국에 와서는 유럽에서 간행된 전례서들과 전례 잡지들을 통해서 자극을 받았다. 베네딕도회원들이 유럽의 전례운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의 자서전에서 그가 《미사 규식》의 발행에 큰 역할을 했던 박 콘라도 신부에게서 받은 인상을 서술한 대목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박 신부님한테서 받은 가장 깊은 감명은 전례에 관한 그분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관심이었다. 박 신부님은 그 시절에 독일에서 발행되던 유력한 전례운동에 관한 잡지를 나한테 소개해 주시고 직접 주문까지 해 주셨다.”24)

전례운동은 19세기에 시작된 베네딕도회의 부흥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 중심적 인물은 1833년에 베네딕도회 솔렘(Solesmes) 수도원을 재건한 프로스퍼 게랑제(Prosper Guerange, 1805~1875) 아빠스다. 그는 베네딕도 수도 규칙에 따라 시간 전례와 성찬례를 수도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로마 교회와 굳건히 연대하면서 전례 기도, 특히 그레고리오 성가의 복구에 힘을 쏟았다. 프랑스어권 벨기에에서는 1872년에 설립된 베네딕도회 마레쥬(Maredsous) 수도원에서 제르라르드 반 칼로엥(Dom Gerard van Caloen) 신부가 1882년에 첫 프랑스어-라틴어 미사통상문이 들어간 《신자들의 미사 경본》(Missel des fideles)을 간행했다.

게랑제 아빠스의 전례에 대한 관심과 업적은 독일에도 퍼져나갔다. 1863년 독일 베네딕도회 보이론(Beuron) 수도원의 설립과 함께, 1884년 보이론 수도원의 안셀름 쇼트(Anselm Shott, +1843) 신부는 독일 최초의 《독일어 - 라틴어 미사 경본》(Das Messbuch der HI. Kirche)을 발행하였다. 이후 이 책은 계속 개정 발간되고 있다.25) 1933년 덕원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 최초로 등사판 ‘한국어 미사 경본’을 펴냈다. 오틸리아 연합회 창립자인 안드레아스 암라인(Andres Amrhein, 1884~1927) 신부와 안셀름 쇼트 신부는 보이론 수도원에서 함께 수련을 받은 동기였다는 점은 이 번역본의 발간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덕원 수도원 연대기 저자는 이 등사판 미사 경본을 당시 독일어권 교회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쇼트 미사 경본》의 이름을 따서 “쇼트 미사 경본의 한글판”이라 불렀다.26)

본격적인 의미에서 전례운동의 대표자는 벨기에 베네딕도회 몽 체사르(Mon Cesar) 수도원의 람베르트 보뒤엥(Lambert Beaudouin, 1873~1960) 신부이다. 1909년 9월 23일 벨기에 메헬른(Mecheln)에서 열린 ‘전국 가톨릭 단체 대회’(Congres national des oeuvres catholiques)에서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 전례에 충만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전례의 민주화’를 역설하였다. 그의 연설을 전례운동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여긴다.27) 사실 전례운동의 바탕에는 새로운 교회상이 숨 쉬고 있었다. 교회는 자신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여러 지체들인 신자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Christi mysticum)이며 ‘하느님의 백성’임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적인 교회상의 재발견에서 전례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 도출되었다. 곧, 하느님 백성이 함께 행동하고 공동 책임으로 예배를 행하는 전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28)

1914년 이후부터 독일 보이론 연합회 소속 마리아 라흐 수도원(Maria Laach)이 전례학과 전례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4년 성주간에 이 수도원의 힐데폰스 헤르베겐(Hildefons Herwegen, +1946) 아빠스는 젊은 평신도 단체와 함께 최초로 대화 형식 미사를 거행했고, 이때 협력한 오도 카셀(Odo Casel, +1948) 신부는 추후 가장 유명한 전례학자로서 전례운동을 이끌었다. 우리가 살펴본 《미사 규식》의 제2 규식과 제3 규식 역시 ‘대화 형식 미사’의 시도였다.

이러한 전례운동은 오스트리아에도 전파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아우구스티노회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 수도원이 있었다. 피우스 파르쉬(Pius Parsch, 1884~1954) 신부는 “성경을 대중을 위한 책으로 만들고, 전례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바꾸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그 결과로 1922년부터 미사 일부분을 평신도들이 독일어로 노래하였다. 특히 전례주년 전체를 걸쳐서 미사 경본과 성무일도를 주석한 잡지 Das Jahr des Heiles(구원의 해, 1923년 창간)를 발행하는 등 오스트리아 전례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29) 덕원 수도원의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이 수도원의 전례 개혁에서 자극을 받아 1932년부터 미사 경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낱장 본으로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교우들을 미사에 더 쉽게 참여시키고자 장림 첫 주일부터, 주일 미사와 첨례 미사의 경문이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의 미사 경본과 비슷한 형식의 미사 용지를 그때마다 발행했다.”30)

전례운동은 교회 안에서 수많은 의혹과 반대에 부딪혔다. 이런 논쟁 속에서 1947년에 발표된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Mediator Dei〉(하느님의 중개자)는 전례운동이 지금까지 맺어온 열매를 받아들이고 몇몇 개념을 정확히 하는 등 전례 쇄신 요구에 대응한 교회의 결정적인 문서였다. 교황은 전례의 부분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전례운동의 정신은 교황 요한 23세(재임 1958~1963)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이어졌고,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가 반포한 〈전례 헌장〉을 통해 풍부한 결실을 거두었다.31) 〈전례 헌장〉 반포 이후 왜관 수도원은 선구적 역할로 미사 전례 개혁에 앞장을 섰다.

(2) 미사 전례 개혁의 예언자적인 실천

① 덕원 수도원과 연길 수도원의 미사 전례 개혁

미사 전례 개혁은 베네딕도회원들이 맡고 있던 본당에서 구현되었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 원산 대목구와 연길 대목구의 본당에서는 당시 그 어떤 독일 성당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형태로 미사를 거행했다.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는 1954년 다시 한국에 파견되어 부산 초량 본당에서 당시 남한 신자들의 미사 참례 수준을 자신이 사목했던 연길 대목구 신자들과 비교하면서 느꼈던 차이점을 말한다. “그 시절의 이곳 신자들의 미사 참례 수준은 우리 연길 교구 신자들에 비해 적어도 30년은 뒤떨어진 형편이었다. 신자들은 함께 능동적으로 공동체적인 인식 아래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제멋대로 나름대로의 기도를 바치며 앉아 있었던 것이다. 중학생들은 미사와는 관계가 없는 곡을 노래 부르는가 하면, 회장이 서간경을 봉독할 때에도 한쪽에서는 부녀자들이 열심히 묵주알을 굴리고 있었으며, 3월이 되면 영성체 직후에 회장이 성 요셉 성월 기도문을 낭랑한 목청으로 낭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대에서 지금 무엇이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주목도 하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으며, 오직 영성체하기 위해서만 미사에 모여들었다.”32)

먼저 연길 용정 본당의 연대기(1932~1934)의 보고를 보자. 배 발뒤노 신부(연대기 저자)는 “《미사 규식》은 매일 미사를 공동으로 드릴 때 사용되고, 처음의 문제점은 오랜 기간에 걸쳐 극복되었다. 많은 신자들 대부분이 이 미사 소책자를 저렴한 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모든 신자가 힘찬 목소리와 아름다운 리듬으로 경문을 낭송하면서 응송을 받을 때, 그것은 하나의 정신적 고양이요, 기쁨이었다. 또한 신자들의 태도에서도 사제와 함께 미사를 드린다는 것이 표현되었다.”33)

원산 대목구 회령 본당과 연길 대목구 용정 본당에서 거행된 미사는 정확히 일치한다. 민 프리돌리노(Fridolinus Zimmermann, 閔德基, 1900~1946)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회령 본당 미사 전례에 관하여 당시 본당수녀였던 원산 수녀원의 제르트루트 링크(Gertrud Link, 1908~1999) 수녀는 이렇게 기록한다. “모든 미사는 평신도와 사제가 한국어로 주고받는 공동의 미사이다. 고정된 기도 말고 미사 때마다 바뀌는 기도문은 소년이나 선창자가 독서대에서 낭독한다. 예물 봉헌 순서가 되면 신자들은 제대 바로 앞 계단까지 예물을 바쳤다. 영성체가 시작되면 수많은 신자가 기뻐하며 제대 바로 앞까지 나아간다. 제대 쪽으로 다가가는 신자들을 막는 난간은 없다. 미사 전체가 살아 움직이며 극적이고 다채롭다. 갓 신자가 된 사람은 그의 감각과 그의 정신과 그의 마음을 다 에워싸는 이런 신앙 생활에 기꺼이 참여하고 싶다고 느낀다. 미사에서는 각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스스로 기도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봉헌한다.”34)

이러한 공동체적이고 능동적인 미사를 위해 건축 분야에서도 쇄신과 변화가 있었다. 그 성당 건축 개혁의 한 가운데는 안 알뷔노(Albuinus Schmid, 安경빈, 1904~1978) 신부가 있었다. 연길 대목구 돈화 본당의 제대는 신자들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이는 파격적이고 선구적인 교회 건축의 전형이었다.35)

전례 쇄신 운동이 연길 대목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증거는 1940년 7월 14일 사제 수품 은경축을 맞이하여 백 테오도로 아빠스 주교가 사제단과 신자들과 함께 거행한 장엄 미사를 촬영한 사진이다. 이날 백 테오도로 아빠스 주교는 처음으로 ‘신자들을 향한’(versus populum) 미사를 거행했다.36) 은경축 미사에 관하여 연길 수녀원의 데오다타(M. Deodata Katenkamp, 1908~1996)는 이렇게 보고한다. “서품 은경축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공동체 미사였다. 말하자면 주교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수녀들이 수년 동안 노력한 결실이었고, 또한 전례 분야에서 선교사들이 이룩한 성과이기도 했다. 선종하신 박 콘라도 신부님은 이미 1931년 자신의 본당에서 신자들을 전례적 삶으로 더 깊이 인도하셨다. 오늘 우리는 준비를 마쳤다. … 주교님과 사제단이 성당 입구에 나타나자 모든 신자가 자리에 일어났다. 침착하고 경건하게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청소년들의 음성이 들렸다. 모든 성가는 소녀 합창단, 소년 합창단, 성인 합창단이 번갈아 가며 불렀다. 사제단과 신자들이 라틴어로 불렀던 응답송은 감동과 감격을 안겨주었다. 다음으로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는 만민을 향한 사제직이라는 주제로 강론을 하기 시작했다. … 강론이 끝나자 보조 사제는 음조를 높여 노래하기 시작했다. 각 본당 대표자들은 예물을 눈높이로 경건하게 모셔, 엄숙하고 장엄한 태도로 나아갔다. …”37) 백 테오도로 아빠스 주교는 교구 발전을 위해 박 콘라도 신부가 개척한 전례운동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20년 전인 당시 유럽에서는 이런 전례를 소모임에서 채택했을 뿐이지, 주교좌 성당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적’ 미사를 거행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이러한 미사 개혁의 실천은 《미사 규식》과 《미사 경본》의 보급을 통해서 다른 대목구로 전해졌다. 덕원 수도원 연대기의 보고를 보면, 《미사 규식》과 《미사 경본》은 주로 원산과 연길의 베네딕도회 선교 지역에 판매되었지만, 점차적으로 평양 대목구를 맡고 있던 메리놀회 신부들도 구입했고, 더 나아가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에서 사목하는 한국인 신부들도 《미사 경본》을 여러 권 주문했다.38) 특히 《미사 규식》은 1938년에 제2판이, 1941년에 제3판이 출간되었다.39) 이렇게 베네딕도회원들의 미사 전례 쇄신은 교회 전체에 점차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② 왜관 수도원의 미사 전례 개혁

덕원 수도원과 연길 수도원이 강제 폐쇄된 후 부산과 대구를 거쳐 1952년 왜관에 정착한 베네딕도회원들은 덕원과 연길에서 수행했던 전례운동을 계승하고자 했다. 1956년 3월 3일 오틸리아 연합회와 대구 대목구 간의 포교지 계약이 포교성성에서 승인되면서 전례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었다. 1962년 분도출판사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전례서 발간에 힘을 썼다. 또한 왜관 수도원은 1964년 4월 28일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아빠스로 선출된 오 오도(Odo Haas, 吳道渙, 1931~ ) 아빠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을 수도원에 구현하기 위해 미사 전례 개혁에 착수하였다. 물론 이 개혁 작업에서 주례자용으로 1964년 12월 15일에 펴낸 《미사 봉독서》는 큰 역할을 했다.

백성들을 향하여, 공동 집전 미사(1964. 12. 25)
우선 오 오도 아빠스는 사전 준비로서 주 코르비니아노 부원장 신부와 안 알뷔노 신부에게 수도원 성당의 구조를 새로운 전례에 맞게 재정비하도록 하였다. 1964년 안 알뷔노 신부는 제대 뒤 벽면을 손수 그린 벽화로 장식하고, 벽에 붙어 있던 제대를 떼어 앞으로 옮겼다. 그리고 성당 지하에 있던 개인 미사용 제대 9개 중 하나만 놔두고 모두 없앴다. 이 공간은 사제들이 라틴어 시간 전례를 바치도록 개조했다.40)

1964년 12월 25일 성탄 대축일 미사 때 처음으로 오 오도 아빠스는 주례 사제용 미사 경본인 《미사 봉독서》로 수도 형제들을 향하여 공동 집전 미사를 거행했다. 이것은 한국 교회 최초로 왜관 수도원 성당에서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에 따라 ‘백성들을 향하여’(versus populum) ‘공동 집전’(Concelebratio)으로 미사를 거행한 것이다.41) 1965년 부활 대축일부터는 개인 미사를 수도원에서 모두 폐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몇 성직 수사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난관은 모두 극복되고 마침내 1966년 이후부터는 모든 사제들이 매일 공동 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했다.42)

이러한 왜관 수도원의 미사 전례 개혁은 로마 교황청의 공식 허락보다도 앞선 것이었다. 교황청 예부성성은 1965년 3월 7일 훈령 〈Ecclesiae semper〉(교회는 항상)를 통해서 미사의 공동 집전을 몇 가지 경우에만 공식적으로 허락하였다. 이 훈령에 따라 교구 사제들도 공동 집전 미사를 준비하였다. ‘공동 집전’이라는 생소한 미사 전례 형식을 배우기 위해 부산교구와 마산교구, 그리고 인천교구 등의 주교들을 비롯하여 교구 사제들도 함께 ‘왜관 피정의 집’에서 열린 전례 연수에 참석하였다. 그들은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와 수도원 사제들의 전례 설명과 지도로 공동 집전 미사를 배우고 실습하였다. 이미 1965년 1월 18일 왜관 피정의 집 경당에서 몇 주교들은 최초로 공동 집전 미사를 거행했다.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의 주례로 한공렬 주교(전주), 나길모 주교(인천), 윤공희 주교(수원), 오 오도 아빠스 등이 공동 집전 미사를 거행했다.43) 1965년 성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때 전국의 모든 주교좌 성당에서 교구 신부들이 처음으로 공동 집전 미사를 거행했다.44)

한국어 미사, 양형 영성체, 손 영성체(1966년)
왜관 수도원은 백성들을 향한 미사와 공동 집전 미사에 이어 더 획기적인 개혁을 실시한다. 1966년부터 미사 전체를 ‘한국어’로 거행하고, 매 주일과 대축일에 ‘양형 영성체’와 ‘손으로 영성체’를 했던 것이다. 수도원 미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은 영성체 때 두 줄로 제대에 나아가서 성반에서 성체를 손으로 직접 집어서 영했다. 주일에는 성체를 성혈에 적셔서 영하고, 대축일에는 공동 집전 사제들처럼 직접 손으로 성작을 잡고 성혈을 마셨다.45) 이러한 획기적인 개혁은 교황청의 공식 허락보다 앞선 것이었다. 1967년 5월 25일 예부성성에서 성체 신비 공경에 관한 훈령 〈Eucharisticum Mysterium〉(성체성사의 신비) 32항을 통하여 양형 영성체를 공식적으로 허락하였다. “복음삼덕을 서원하는 단체나 수도 서원으로 하느님께 자헌(自獻)하든지 서약하는 단체들이 자기네 성당에서 공동 집전 미사가 있을 경우 모든 회원들과 그 집에 주야로 거처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혈도 받아 모시는 것이 허락되었다.

왜관 본당의 미사 전례 개혁(1965년)
이러한 수도원의 전례 개혁은 점차 왜관 감목 대리구 내 본당들로 확대되었다. 1964년 8월 6일 장 엘마로(Elmarus Lang, 張輝, 1933~ ) 신부가 왜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왜관 감목 대리구 왜관 성당에서부터 전례 쇄신이 시작된다. 사실 장 엘마로 신부는 상주 본당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이미 새로운 형태의 미사 거행을 시도했다. 장 엘마로 신부는 안 알뷔노 신부와 주 코르비니아노 부원장 신부의 도움을 받아 미사 거행의 쇄신을 준비했다.

안 알뷔노 신부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1928년에 세운 성당 내부를 새로운 미사 전례에 맞게 개조하기 시작했다. 제대 공간과 신자 공간을 둘로 나누었던 ‘성체 난간’(communion Rails)을 없애고, 제대를 신자석 앞으로 옮겼으며, 제대 위 벽 세 곳에 있었던 성인상(聖人像)들을 신자 공간 좌우 통로 끝에 있는 소(小) 제대 위 벽으로 옮겼다. 그리고 새로운 미사에 대한 이론적 준비는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가 맡았다. 이렇게 사전 준비를 완료한 다음 1965년 3월 7일 사순 첫 주일에 전국 본당들 가운데서 최초로 ‘신자들을 향하여’ ‘한국어’로 미사를 거행했다. 주 코르비니아노 부원장 신부는 이날 미사 강론에서 제대 배치의 의미와 신자들을 향하여 드리는 미사의 의미를 설명했다.46)

한국 주교단이 1965년 11월 28일 대림 첫 주일부터 한국어 미사를 드리기로 결의하였지만, 미사 전체가 아니라 미사 고유 부분만을 한국어로 거행하기로 확정했다.47) 따라서 1964년부터 시작된 왜관 수도원과 왜관 본당의 전반적인 전례 쇄신은 한국 교회에서 최초로 시도된 미사 전례 개혁의 실례이다.


3. 성가집의 발간과 그레고리오 성가의 보존과 보급48)

실제 전례 거행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성음악이다. 성음악 중 성가는 거룩한 전례의 아름다움에 이바지하고 신자들의 신앙과 신심을 쉽게 북돋우고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전례운동에서도 성가 부흥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성가에 대한 관심은 1928년 교황 비오 11세의 성음악에 관한 교황령 〈Divini cultus〉(거룩한 예식)에서 확인되었다. 이 문헌에서 교황은 신자들은 “말없는 구경꾼”처럼 전례 행위에 수동적으로 참여해서는 안 되며, 전례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인식하고 정해진 규범에 따라 사제나 성가대와 번갈아 노래하며 거룩한 예식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베네딕도회원들은 신자들의 능동적인 전례 참여를 촉진시키기 위해 라틴어나 한국어로 신자들이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성가를 적극 장려하고 한국어 성가집을 발간하는 등 성가 발전에 큰 관심을 가졌다.

베네딕도회원들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보존과 보급에도 앞장섰다. 1955년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Musicae Sacrae〉(교회 음악) 71항에서 선교와 그레고리오 성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가톨릭교회가 아직 신앙의 빛을 받지 못한 나라들에 복음의 설교자들을 파견하였던 초창기부터 이들 나라에, 거룩한 예법과 함께 그레고리오 선율이 포함된 음악 곡들을 도입하고자 노력하였고 …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레고리오 선율에 힘입어 개종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더욱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네딕도회원들은 한국 진출 초기부터 그레고리오 성가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하고, 각 본당에 성가대를 조직하여 그레고리오 성가를 신자들에게 보급하였다. 또한 왜관에 정착한 이후에는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발간하여 그레고리오 성가의 보급에 앞장섰다.

1) 한국어 성가집의 발간

베네딕도회원들은 1920년 독자적 선교 지역인 원산 대목구를 맡게 되자 신자들을 교회 전례에, 특히 미사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주례자와 신자들이 ‘다 함께 노래하는 것’이 필요했다. 당시 조선 교회에서는 이미 1911년부터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이 발간한 몇 개의 등사본 성가책들이 있었다.49) 그러나 많은 곡들이 독일 베네딕도회원들의 마음에 들지도 않고 부족한 점도 많아서, 그들은 독자적인 성가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성가집들에 들어간 대부분의 곡들은 독일 성가로 멜로디는 그대로 유지한 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고,50) 어떤 곡들은 한국 전통 가락으로 만든 것이었다.51)

한국 교회 최초의 공식적인 성가집은 서울 백동 수도원에서 1923년 간행한 《朝鮮語 聖歌》이다. 이 책은 신 보니파시오(Bonifat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아빠스 주교의 인준을 받아 등사판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성가집은 현재 소실되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어서 안타깝다.

서울 백동 수도원이 1927년 덕원으로 완전히 옮긴 직후 1928년에 《朝鮮語 聖歌》는 새로운 곡들이 첨가되어 재판으로 출간되었다. 총 80곡으로 구성된 재판의 1면에는 초판에 실렸던 원산 대목구장 신 보니파시오 아빠스 주교의 인준서(1923년 6월 30일)와 바로 밑으로는 원산 대목구 총대리 김 크리소스토모(Chrysostomus Schmid, 金時練, 1883~1962) 원장 신부의 재판 허가 서명(1928년 4월 5일)이 들어 있다. 이 초판 인준서와 재판 허가서에서 소실된 1923년 초판 《朝鮮語 聖歌》의 존재를 알 수 있다. 2면에는 이 성가책의 편집을 담당한 옥 안드레아(Andreas Eckhardt, 玉樂安) 신부의 머리말(Praefacio)이 있다.

연길 수도원에서는 구 베드로 카니시오(Petrus Canisius Kugelgen, 具傑根, 1884~1964) 신부가 1934년에 《聖歌》를 출간하였다.52) 이 책은 등사본 성가집으로 모두 46면에 43곡이 실려 있다. 여기에는 전례시기 성가, 미사 통상문 성가, 기타 성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연길 수도원의 배 발뒤노 신부가 1935년경에 《가톨릭 성가》(Katholisches Liederbuch)를 만들어 보급했다.53)

1935년경에 원산 대목구 회령 본당에서 김 올라보 신부가 총 408면에 364곡의 한글 성가와 독일의 일반 노래를 모아서 《聖歌乃俗歌集》을 펴냈다. 이 모음집의 특징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펴냈다는 점이다.54)

그리고 마침내 베네딕도회원들이 간행한 성가집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 간행되었다. 덕원 수도원의 진 볼프라모(Wolframus Fischer, 陳道光, 1903~1938) 신부가 작곡 편집하여 1938년에 정식 인쇄본으로 발행한 《가톨릭 성가》이다. 그는 고원 본당 신부로 재직하면서 “기존의 성가책에서 진부하고 별로 아름답지 못한 것을 빼버리고, 아름다운 가사와 정서가 풍부한 멜로디를 지닌 많은 새 노래들을 선택하여”55) 총 256면에 전례주년에 따라 성가 213곡(성가 번호 214번은 가사만 있다)을 수록하였다. 이 성가집의 특징은 각 곡의 마디마다 ‘S’ 또는 ‘Cho’의 기호를 붙여, 독창자와 합창대의 교창 방법을 알려 준다는 점이다. 이 성가집은 수도원과 원산 대목구와 연길 대목구의 본당 신자들이 오랫동안 사용하였다. 《朝鮮語 聖歌》와 《가톨릭 성가》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용하는 《가톨릭 성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왜관 수도원에서는 한국어 미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1965년부터 수도원 내부용으로 동일한 이름의 몇 가지 성가집을 펴냈다. 먼저 덕원판 《가톨릭 성가》에서 104곡을 선정하여 1965년 10월 18일에 98면으로 된 등사본 《성가집》을 엮어냈다. 그 후 1968년 12월 새로운 《성가집》을 시험용으로 등사 인쇄하여 사용하였다. 이 성가집 뒷면에는 “이 성가집은 시도해보기 위하여 꾸민 것임으로 외부에서의 사용을 불허함 - 1968년 12월 -”라는 주의 문구가 들어 있다. 그리고 추후에 1968년판 《성가집》에 새로운 곡을 증보하여 발행 연도 미상인 새 《성가집》을 냈다. 이 성가집은 총 331면으로 제1부에는 창미사곡, 연중찬가, 성체찬가, 성심찬가, 성삼찬가, 시계노래(대림, 성탄, 사순, 부활, 성신강림, 성모노래, 종도노래, 일반성인노래), 제2부에는 연중공통미사곡, 전례주년 외의 연중 축일, 그리고 제3부에는 시편 노래 순으로 구성되었다.

왜관 감목 대리구 본당들에서도 독자적으로 성가집을 발간해서 사용하였다. 필자가 찾은 본당용 성가집은 2종류가 있다. 곽 미카엘(Michael Futterer, 郭美傑, 1912~1998) 신부가 재직했던 김천 평화동 성당에서 간행한 등사본 성가집들이다. 하나는 97면의 《가톨릭 성가집》이라는 제목으로, 다른 하나는 제목 미상의 288면으로 된 성가집이다. 둘 다 간행 연도는 알 수 없다. 다른 본당에서도 성가집을 간행했겠지만 소실되어 확인할 길이 없다.

2) 성가대 조직과 그레고리오 성가의 보존과 보급

원산 대목구과 연길 대목구의 본당에서 성가대를 조직하는 일은 베네딕도회의 전통과 수많은 전례 개혁 단체의 모범에서 착안되었다. 교황 비오 10세의 확실하고 단호한 전례 개혁 의지의 실현은, 모든 본당에서 그레고리오 성가 미사의 실행을 가져왔다. “신부들과 수사들은 모원(母院)에서 배운 것을 본당에서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데, 특히 교회의 첨례를 아름답고 품위 있게 거행하는 솜씨가 거기에 속한다”56)라고 덕원 수도원 연대기가 보고하듯이, 이 미사는 수도원의 공동체 미사와 완전히 일치했다.

무엇보다도 청소년이 베네딕도회원들의 지도로 그레고리오 성가의 지극히 단순한 노래에 익숙해지게 되었다.57) 특히 연길 대목구 본당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타르시치오회’의 젊은이들은 그레고리오 성가를 통하여 신앙을 함양시켰고 그레고리오 성가 보급에도 기여했다.58) 덕원 수도원에서는 덕원 신학교 신학생들을 중심으로 성가대를 구성하여 수도원 미사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59)

왜관 감독대리구 내 본당에서도 베네딕도회원들은 우선적으로 성가대를 조직하여 그레고리오 성가를 본당 미사에 도입하였다. 이들 성가대는 특히 대축일에 그레고리오 성가의 아름다운 선율로 미사 거행에 봉사했다. 탁 파비아노(Fabianus Damm, 卓世榮, 1900~1964)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김천 평화동 성당의 경우를 보자. “탁세영 파비아노 신부가 성당 설립 이후 독일에서 중고 오르간 1대를 기증받아 도입하셨다. 아주 희귀한 악기라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며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선율은 모든 이의 심금을 울렸다. 이를 계기로 1960년도 … 남녀 청년회원들로 성가대가 조직되었으며 명칭은 ‘천주교 평화동 성가대’로 하였다. 교재가 없어서 원지를 철판에서 등사하여 악보를 나누어 보고 부활, 성탄 대축일 때 그레고리오 성가를 열심히 연습하여 하느님을 찬양하였다.”60)

왜관 수도원은 대구 수녀원과 함께 그레고리오 성가의 보급을 위해 그레고리오 성가집 간행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첫 작품이 1984년에 나온 《Liber Usualis》이다. 이 성가집 안에는 수도원 예식서도 함께 들어 있다. 백 쁠라치도(Placidus Berger, 白利根, 1933~ ) 신부와 대구 수녀원의 김봉자(라파엘라) 수녀의 공동 편집으로 간행된 이 성가집은,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 전문을 다 싣지 않고 편의에 따라 줄였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교회에서 유일한 그레고리오 성가집이었다.

그 후 왜관 수도원은 《우수알리스》의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 한국 교회에서 전무한 그레고리오 성가집을 신자들이 쉽게 접하고, 그레고리오 성가의 보급을 촉진하기 위해 2005년 《그레고리오 미사곡》(분도출판사)을 발간했다. 이 책은 1993년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라틴어 가사 밑에 독일어 번역과 그레고리오 성가 악보 위에 고대 사본 기호가 들어간 미사용 그레고리오 성가집인 《Choralbuch》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었다. 곡 선정은 장 엘마로 신부가, 라틴어 본문의 번역은 이형우(시몬 베드로) 아빠스가, 그리고 최종 편집은 인영균(끌레멘스) 신부와 선지훈(라파엘) 신부가 맡아서 했다.

왜관 수도원에서는 매 주일과 평일에 한번 《그레고리오 미사곡》으로 그레고리오 성가 미사를 거행하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특히 주일 미사에 와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통하여 수도원 전례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고 있다.


4. 시간전례서의 발간과 신자들의 공동 기도 촉진

백동 수도원은 1914년에 첫 한국인 지원자들을 받아들였고, 1919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3명의 한국인 형제들이 처음으로 청원 착복식을 하였다.61) 원산 수녀원과 연길 수녀원에서는 한국 진출과 동시에 각각 1925년과 1931년에 첫 한국인 지원자들을 받아들였다.62) 베네딕도회는 성 베네딕도 규칙에 따라 ‘하느님의 일’(Opus Dei, 시간 전례)을 수도 삶의 중심으로 삼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한국인 지원자들은 라틴어 성무일도를 뜻도 모른 채 힘들게 낭송하고 노래하였다. 그래서 베네딕도회에서는 한국인 평수사와 수녀들을 위한 한국어 성무일도서가 필요했다.

수도원에서 거행하는 ‘하느님의 일’은 신자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성무일도가 신자들에게도 공감을 얻게 된 것은 베네딕도회원들이 신자들에게 교회의 기도방식에 대해 감명을 주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시간 전례를 본당 신자들에게 도입함으로써 본당의 기도생활은 촉진되고 풍요롭게 되었다.

1) 한국어 시간전례서의 발간

1938년 덕원 수도원에서 홍 루치오 원장 신부의 편역으로 《오틸리아 연합회 평수사 소성무일도》(Bruderoffizium der Benediktinerkongreation von St. Ottilien)를 원본으로 하여 최초의 한국어 성무일도서 《수사통경기구》를 한국인 평수사를 대상으로 간행하였다.63) 수녀들과는 달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단순 서원을 발하는 평수사들과 성대 서원을 발하는 성직 수사들은 시간 전례를 함께 바치지 않았다. 성직 수사들에게만 법적인 의무가 있었다. 성직 수사들은 가대(Chorus, 공동 기도석)에서 라틴어 성무일도서로 시간 전례를 바쳤다. 반면에 평수사들은 수사 경당에서 간단한 방식으로 한국어 시간경을 바쳤다.

이 성무일도서는 서론, 주간 일과(주일-토요일), 성교회 주년, 성인첨례, 성영(聖詠, 시편) 일람표, 기타 신심 기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에서 시간 전례의 신학과 의미, 이 기도를 바칠 대상, 시간경을 바치는 방법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시편의 수는 전체 150편 가운데 102편만을 선별 수록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 분도(베네딕도)의 분부하신 대로 무릇 수도자는 일주간에 일백 오십의 성영을 다 외울 것이니라. 그러나 이 책의 소성무일과는 평수사를 위하여 정한 것인 까닭에 그 성영 중에서 일백이만을 선택하였나니라.” 102편의 시편들은 성 베네딕도 규칙서에 따라 한 주간 배열로 되어 있다. 매일의 시간경 순서는 새벽에 바치는 야과경(독서 기도), 해가 뜰 때 바치는 찬미경(아침 기도), 낮 시간에 바치는 소시간경들인 일시경(오전 6시), 삼시경(오전 9시), 육시경(정오), 구시경(오후 3시), 해가 질 때 바치는 만과경(저녁기도), 그리고 일과를 마치고 마지막에 바치는 종과경(끝기도) 순으로 되어 있다. 종과경은 성 베네딕도 규칙서에 나온 대로 매일 같은 시편을 바쳤다.

베네딕도회원들은 한국 전쟁 당시 부산 피난 시절에도 이 책으로 기도드렸다. 왜관 수도원에서 가장 연장자인 이석철(미카엘) 수사는 증언한다. “부산 피난 시절에 부산 중앙 성당 2층 다다미방에서 아침에 그리고 일이 다 끝난 저녁에 형제들이 모여서 수사 통경 기구 책을 가지고 성무일도를 바쳤다.”64) 《수사통경기구》는 한국에서 유일한 성무일도서로서 한국인 수도자들이 이 기도서로 시간 전례를 바쳤다.

그 밖에도 연길 수도원 원장 서 빅토리노 신부는 연길 수녀들을 위해, 성무일도 책자인 《수녀기구예절서》65)와, 1941년에는 정식 성무일도서는 아니지만 간단한 기도문들을 담은 《수녀 공과》를 번역해서 발간했다.66)

1969년 왜관 수도원에서 ‘성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60주년’을 기념하여 소성무일도서인 《수도자의 기도》(분도출판사)를 간행하였다.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가 한국어 성무일도서의 필요성을 절감한 오 오도 아빠스의 지시와 사도직 생활을 하는 수녀회들의 부탁으로 부산 올리베따노 수녀원 김의자(마리 로사) 수녀의 도움을 받아 펴냈다.67)

이 기도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새롭게 개정된 축일표를 따랐고, 시편 배열은 주일에는 1주간으로, 평일에는 2주간으로 편성되었다. 반면에 끝기도는 2주간 배열로 매일 같은 시편을 반복하도록 했다. 시간전례서에서 가장 중요한 시편은 최민순 신부의 번역본을 사용하였다. 전체 구성을 보면, 제1편(주간 기도문)으로 주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주간 시편경과 끝기도를 배치했고, 제2편(시계 기도문)으로 전례 시기에 따라 시간경을 넣었고, 제3편(성인 축일 기도문)으로 성인 공통 시간경과 성인 고유 시간경을 배열했다. 그리고 끝에는 부록으로 성경소구 일람표와 시편 색인을 넣었다. 1977년에 발간한 제3판에서는 베네딕도회를 위해 마지막 부분에 ‘밤기도’를 2주간 배열로 첨가했다. 또한 백 쁠라치도 신부의 “성무일도에 관한 고찰”을 부록 형태의 별지로 넣었다. 하루의 시간경은 1973년 제2판까지는 야과경(밤기도)을 제외한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순으로 배치했고,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으로 되어 있는 소시간경들을 ‘낮기도’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었다. 《수사통경기구》와 비교할 때 매우 단순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말〉에서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가 밝힌 대로 이 책은 옛 성무일도서와 새 성무일도서 사이의 ‘임시판’이었다. 《수도자의 기도》는 1977년 제3판을 내기까지 10년 동안 많은 수도회와 교구 성직자들이 애용했으며, 1978년 공식 《성무일도》(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68)의 편찬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9년 《수도자의 기도》가 발간되자 왜관 공동체의 시간 전례 거행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독일인 사제들과 한국인 사제들이 라틴어로, 독일인 수사들은 독일어 성무일도로, 한국인 수사들은 1965년 부활 대축일부터 수사 경당이 아닌 성당에서 《수사통경기구》로 시간 전례를 바쳤다. 1969년 대림 첫 주일부터 국적을 불문하고 성당에서 모든 수도자들이 함께 《수도자의 기도》로 한국어 시간 전례를 거행했다.

1978년 한국어판 《성무일도서》가 간행되자 왜관 수도원에서도 이 기도서로 시간 전례를 바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왜관 수도원은 《테사우루스》(Thesaurus)에서 제시한 ‘스케마’(Schema)대로 베네딕도회 고유 시간전례서를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그리고 《테사우루스》의 수도승 시간 전례 총 지침 24항에 “만일 오늘날 어느 수도원이 로마 예법에 따라 시간 전례를 채택하더라도 수도원적 특성에 맞게 거행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하여 4주간 시편 배열로 되어 있는 로마 시간 전례를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었다.69) 1982년 백 쁠라치도 신부를 중심으로 김치삼 알렉산델 수사가 협력하여 저녁기도와 끝기도를 그레고리오 성가로 바치기 위해 《안티포날레》(Antiphonale, 분도출판사)를 간행했다. 시편 배열은 로마 시간 전례를 따라가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테사우루스》에서 제시한 베네딕도회 시간 전례 구조를 따랐다.

1990년에는 주일과 파공 대축일의 독서기도와 아침기도를 그레고리오 성가로 부르기 위해 수도원 내부용으로 《찬미의 노래》를 펴냈다. 1983년 8월에 부원장과 성가대 책임으로 부임한 장 엘마로 신부는 이덕근 마르티노 아빠스의 지시로 독서기도와 아침기도의 작곡을 시작하였다. 1986년부터 낱장으로 인쇄하여 공동체에서 사용하면서 수정 작업을 계속하였다. 1990년 최종 수정 작업이 완료되어 책으로 엮었다.

현재 베네딕도회에서는 ‘베네딕도회 고유 시간전례서 편찬위원회’(인영균(끌레멘스) 신부, 김복희(마리 소피) 수녀, 신수정(부르노) 수녀)를 결성하여 《테사우루스》에서 제시한 ‘스케마’ B형식대로 2주간 시편 배열을 따라 고유 시간전례서를 준비하고 있다. 시편은 대구 수녀원 배은주(이사악) 수녀의 번역본을 사용할 예정이다.

2) 평신도 공동 기도의 실천과 촉진

1947년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Mediator Dei〉(하느님의 중개자) 150항에서 권고했다. “초기에는 교회법으로 정해진 이 기도에 많은 신자가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차츰 중단되면서, 앞서 말씀드렸듯이, 현재에는 성직자와 수도자들만의 의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축일에 본당에서 바치는 저녁기도에 평신도들의 참석이 여전히 크게 요망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형제 주교님들,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신심 관습이 보존되도록 이것이 중단된 곳에는 가능하면 부활시키기를 간곡히 권유합니다. 합당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저녁기도를 바칠 때, 이는 분명히 유익한 결과를 낳을 것이며, 신자들의 신심을 증진시킬 것입니다.” 덕원과 연길의 베네딕도회원들은 이러한 교황의 권고를 본당에서 미리 실천에 옮겼다.

연길 용정 본당 사목을 맡고 있던 배 발뒤노 신부는 본당 신자들의 공동 기도를 위해 1934년에 등사판으로 《예수성탄 성무일과》, 《성주간 성무일과》, 《주일과 부활절, 성령강림 대첨례와 종도 첨례 만과경》, 1935년에는 《성녀 아가다와 성녀 세실리아 첨례 성무일과》를 펴냈다.70) 연길 팔도구 본당 주임이었던 왕 레지날도(Reginaldus Egner, 王默道, 1906~1975) 신부가 보고한 1937년 팔도구 본당 연대기에서 본당 신자들이 거행한 시간 전례의 구체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연길에서 발행한 《미사 규식》이 오래전부터 공동체 안에서 사용되었다. 그 후 우리는 용정 청소년 대회에서 했던 것처럼 시험적으로 한국어로 하는 일시경, 종과경과 만과경 몇 가지를 본당에서 실시해 보기로 했다. 신자들이 기꺼이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여 우리는 한 주에 두 번 일시경과 종과경을 했고, 만과경은 첨례날에만 노래로 불렀다.”71) 또한 스위스인 아폴로니아(M. Apollonia Buhler, 1910~1985) 수녀가 팔도구본당의 성탄 대축일 미사에 대하여 스위스 캄 모원에 보낸 편지에서도 신자들이 시간 전례를 노래로 바쳤다는 사실을 감동스럽게 말하고 있다. “학생들은 한국어로 야과경과 찬미경을 불렀다. 대축일 성경 말씀은 레지날도 신부와 교사가 번갈아 가며 독송했다. 매우 감동적이었다. 아시아의 신자들은 전례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다.”72)

덕원 수도원의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수사통경기구》 〈서론〉에서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시간 전례 참여를 권고하고 있다. “날과 주간(주일)과 주년(일년)을 축성하는 성교회의 시간경은 사사기구(개인 기도)가 아니매 혼자서 드릴지라도 단체의 기구가 되나니라. 이 성무일과는 성교회의 법규에 따라 대품(성품성사)을 받은 성직자와 성대하게 허원을 발한 수도자들만이 드릴 본분이 있으나 다른 일반 교우도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성교회에서는 원하나니라.” 한국인 수사와 수녀를 위해 간행된 《수사통경기구》를 본당 신자들도 많이 구입해서 사용했다. 1946년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신자들이 쉽게 구입하여 시간 전례를 바칠 수 있도록 《성모소성무일과》를 간행했다. 이 시간전례서는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며 바치는 짧은 성무일도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의무적으로 바치는 성무일도서를 본떠서 간략하면서도 차별성 있게 만들었다.73) 이 책은 작은 크기의 총 101면 분량의 매우 간단한 기도서로 서론, 주년성모소성무일과로 구성되어 있다.

평신도를 교회의 공적 기도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해 성무일도서를 발간하고 본당에서 신자들이 함께 노래로 시간 전례를 거행한 베네딕도회원들의 이러한 선구적 실천은 요즘에 와서 많은 본당에서 활발히 시도되고 있다.


5. 성경의 번역과 말씀 전례의 활성화

전례 거행은 하느님 말씀을 기반으로 하고 거기서부터 힘을 얻는다. 모든 전례 기도문들은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또한 전례 거행 안에서 하느님 말씀이 선포된다. “신자들의 전례 행위 참여는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을 더 깊이 알아듣는 만큼 활기차게 되며, 신자들 스스로 전례에서 거행한 신비를 삶에서 구현함으로써, 그리고 일상적 삶을 전례 안에서 변화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육화한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게 된다.”74) 성경은 특별히 말씀 전례 안에서 육화되어 삶과 영적 활기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례와 성경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베네딕도회원들은 신자들의 능동적 말씀 전례 참여를 촉진하고자 성경을 직접 번역하고 성경과 말씀 전례에 관련된 서적들을 간행하였다.

1) 성경 번역

1940년 연길 수도원의 왕 레지날도 신부는 어린이들이 쉽게 성경을 접할 수 있도록 《어린이의 성서》를 간행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이 신약 · 구약 성경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과 설명과 간단한 기도문으로 꾸몄다.

연길 수도원에서 1945년에 서 빅토리노 신부는 신자들과 ‘일반 대중’을 위하여 《합병복음》(合倂福音)을 간행했다. 이 책은 네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서 예수님의 전 생애를 한눈에 알기 쉽게 엮었다. 크게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대,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 예수님의 영광 순으로 나누었다.

1930년대까지 한국 교회에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복음서는 1910년에, 사도행전은 1922년에 번역이 되었지만,75) 사도 서간과 묵시록은 번역이 안 된 상태였다. 1935년 조선 주교회의 결의에 따라 성경의 조선문 번역 간행은 덕원 수도원에 일임되었다. 그래서 1941년 덕원 수도원 부원장 안 아르눌포(Arnulfus Schleicher, 安世明, 1906~1952) 신부는 아직 번역이 안 된 사도 서간과 묵시록을 완역하여 《新約聖書 - 서간, 묵시편》을 출간하였다. 그는 라틴어 성경을 참고하면서 그리스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였다. 이로써 한국 가톨릭교회는 비로소 완전한 한국어 신약성경을 갖게 되었고 전례에서도 더 풍성하게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되었다.

1963년에 왜관 수도원의 최창성(안드레아) 신부는 독일어 《엑케르 성서》를 옮긴 간추린 성경인 《구세사》(분도출판사)를 간행했다. 그 후 1970년에는 김윤주 편집장이 개정판을 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개신교 일부 종파와 함께 성경 본문을 의역 중심으로 번역한 《공동 번역 성서》(1977년 출간)를 전례에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의역을 하였기 때문에 성경 원문과 멀어진 단점이 많았다. 그래서 왜관 수도원에서는 분도출판사의 임 세바스티아노(Sebastianus Heinrich, 林仁德, 1935~ ) 신부를 주축으로 하여 그리스어 원문에 충실하며 전례에도 사용할 수 있는 신약성경 번역을 하기로 결정하고, 1974년부터 ‘성서 번역위원회’를 구성하여 오랜 번역 끝에 1991년 《200주년 신약성서》를 발간하였다.76)

2) 말씀 전례의 활성화 촉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35항과, 〈전례 헌장〉의 올바른 실천을 위해 교황청 예부성성에서 공포한 첫째 훈령인 〈Inter oecumenici〉(세계 공의회, 1964년 9월26일) 37항~38항에서는 사제가 없는 곳에서도 평신도들이 말씀 전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전례서를 준비하라고 권고했다. 이 권고에 따라 분도출판사에서는 1966년에 《말씀의 전례(전례주년의 성경 예절서)》를 발간했다. 전례주년에 따라 입당송, 독서, 강론, 기도, 마침 성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특히 공소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1983년 분도출판사 편집장 정한교 선생의 편역으로 전례주년에 따라 주일과 주요 축일에 봉독하는 미사 독서를 해설한 《오늘의 말씀》을 간행했다. 그러나 이 책은 공식 전례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미사 전이나 중이나 후에 독서 말씀에 대한 신자 개인의 묵상을 돕고 안내하고자 펴낸 것이다.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독일 보이론 수도원에서 새롭게 엮은 《쇼트 미사 경본》가운데 제1권인 《쇼트 주일 미사 경본》(Der Grosse Sonntagsshott)에서 주일미사의 안내와 해설을 뽑아서 옮긴 것이다.


6. 성사 안내서의 발간과 신자 재교육

베네딕도회원들은 본당 사목에 헌신하면서 신자들이 교회 삶의 원천인 미사를 중심으로 교회 성사들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성사 안내서들을 발간하였다. 특히 덕원 수도원에서 발행한 책자들의 특징은 내용이나 부피 면에서 간단하고 가격 면에서도 저렴하여 많은 신자들이 쉽게 구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책들로 신자들은 본당에서 전례 교육을 받고 더욱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하였다.

교회의 전통과 삶을 가장 잘 표현하는 전례는 교리교육의 무한한 원천이다. 전례는 살아 있는 교리 교육이다. 베네딕도회원들은 전례 안에서 신자들을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사랑의 삶으로 인도하였다.

1) 성사 안내서의 발간

여러 가지 전례 개혁을 실행한 교황 비오 10세는 1910년 교령 〈Quam singulari〉(개별적인 것)를 통해서 어린이들이 이성적인 나이에 이르면 곧바로 영성체를 하여 어린이들도 전례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77) 이러한 교황의 원의에 응답하여 베네딕도회원들은 어린이를 위한 두 가지 성사 안내서를 간행했다.

1936년 덕원 수도원의 진 알프레도(Alfredus Fuchs, 陳, 1905~1945) 신부는 어린이들의 고해성사와 영성체 준비를 위해 《아해들의 고해 성체 안내》를 발간하였다.78) 당시 신자들이 즐겨 이용하던 기도서인 《공과》에도 고해와 영성체를 위한 기도문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간략하고 또 그 대상이 어른들이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 책의 문체는 어린이들이 잘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어린이의 말투와 눈높이로 정감 있고 따뜻하게 쓰여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준비한 어린이들은 합당하게 고해성사를 보고, 성체를 경건하게 모시고, 성체성사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주님과 교회에 대한 사랑 안에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덕원 신학교 신학생들이 이 책에 내용을 더 보충하여 교리교사용 교재도 함께 출간하였다.79) 이 책은 고해성사 부분과 영성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해성사 부분에서는 고해성사 전과 후에 각 단계별로(고해 전 준비기도, 양심성찰, 통회, 고해성사, 고해 후 감사기도) 거기에 해당되는 간단한 기도문을 제시함으로써 어린이가 고해성사를 잘 보도록 안내한다. 영성체 부분에서는 성체를 영하기 전 기도문(성체전송)과 모신 후 기도문(성체후송)을 실으면서 어린이가 성체에 대한 흠숭과 감사의 마음을 갖고 성체를 잘 영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간행한 또 다른 책은 1936년에 펴낸 《아해들의 미사 고해 성체 안내》이다. 그런데 이 책은 두 가지 책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본 진 알프레도 신부가 저술한 《아해들의 고해 성체 안내》에다 원산 본당의 탁 파비아노 신부가 저술한 미사 설명을 첨가해서 간행한 것이다. 따라서 미사 부분이 덧붙여 들어갔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을 《아해들의 미사 고해 성체 안내》라고 한 것이다. 미사 설명 부분은 모두 34면으로 되어 있다. 탁 파비아노 신부는 독일 보이론 수도원 비클라이어(P. Bichlmeier) 신부의 책을 원전으로 하여 어린이들이 “미사성제를 잘 깨닫게” 하기 위해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의 심리를 잘 이해하고 있다. 즉, 미사 순서에 따라 중요한 부분을 차례대로 나열하면서 한 면에는 천연색 그림을, 다른 면에는 간단하고 쉬운 설명과 기도문을 배치했던 것이다.80)

1936년 덕원 수도원의 경 엘리지오(Eligius Kohler, 景道範, 1899~1963) 신부는, 특히 세례성사를 준비하는 예비신자를 대상으로 “성세성사의 텍스트와 예식을 설명한 영세에 관한 소책자”81)인 《성세성사》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세례성사의 역사, 세례성사의 중요성, 세례자의 영혼에 나타나는 효과와 세례 약속의 효과, 이전 예식과 현재 예식의 절차와 그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1937년 덕원 수도원에서 홍 루치오 원장 신부의 편집으로 소책자 《미사 고해 지도서》를 발간하였다. 이 책은 ‘미사 부분’과 ‘고해성사 부분’으로 되어 있다. ‘미사 부분’에는《미사 규식》의 네 가지 규식 중 미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제1 규식, 제2 규식, 제3 규식과 영성체 전송 후송을 담고 있다. 이 소책자에 《미사 규식》의 세 가지 규식을 실은 것은 저렴한 가격으로 이 책을 구입할 수 있게 하여, 신자들의 능동적 미사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고해성사 부분’은 덕원 수도원의 진알프레도 신부가 쓴 것이다. 이 성사의 전 과정에 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대상에 따라 양식(규식)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고해 지도서 제1 규식은 규칙적으로 자주 고해성사를 보는 열심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제2 규식은 가끔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을 대상으로한다. 제2 규식에 비해 제1 규식은 매우 상세하고 풍부하다. 제1 규식의 구성 요소를 살펴보면, 고해성사를 준비하는 기도문(예비경문, 豫備經文)으로 시작하여, 십계명82)과 성교사규(聖敎四規)83)에 따라 양심을 살핀 후(성찰, 省察) 기도문을 외우고(성찰후경문, 省察後經文), 범한 죄들에 대하여 뉘우치면서(통회, 痛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의 기도(정개경, 定改經)를 바치고, 고해소에 들어가서 사제에게 죄를 밝히고(고명, 告明), 고해를 마친 다음, 끝으로 감사와 다짐의 기도문(고해후송, 告解後誦)을 바친다. 반면에 제2 규식은 전송, 성찰, 통회와 정개, 후송 순서로 길이도 매우 짧고 내용도 간단하다.

덕원 수도원과 연길 수도원이 인쇄소를 통하여 다양한 전례 교육용 서적을 발행한 것과 같이, 왜관 수도원도 ‘분도출판사’(1962년 창립)를 통하여 전례와 관련된 다양한 서적을 발행함으로써 전례 교육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분도출판사에서 발행한 많은 전례 교육 서적 중 베네딕도회원들이 저술하거나 번역한 책들은 다음과 같다. 백 쁠라치도 신부의 《전례주년과 빠스카 신비》(1980년)와 《미사는 빠스카 잔치이다》(1986년), 김인영 유스티노 신부의 《문화사에 따른 전례의 역사》(1992년)와 《제대와 감실의 싸움》(1996년), 그리고 부산 수녀원의 김복희 마리 소피 수녀의 《전례신학》(1994년) 등이 있다.

1966년 왜관 수도원의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와 황춘흥(다미아노)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운데 제일 먼저 공포된 〈전례 헌장〉(1963년 12월 4일)을 공동으로 번역하여 분도출판사에서 《거룩한 전례에 의한 헌장(교황령)》이라는 제목으로 라틴어 대역판과 한글판 두 종류로 간행했다.84) 아직 전례 용어도 정립이 안 되었던 당시에 〈전례 헌장〉의 번역은 한국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을 받아들이고 전례를 쇄신하는 데 바탕이 되었다. 그 후 이 〈전례 헌장〉의 번역문은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1969년에 발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실렸다.

2) 전례를 통한 신자 재교육

1935년 덕원 수도원 연대기는 수도원에서 개최된 원산 대목구 ‘전교회장 강습회’에 관해서 보고하고 있다. “3월 3일 전교 회장들을 위한 한 주간의 강습회가 시작되었다. … 본당 신부들이 강의를 분담했다. 예수의 생애, 성세성사, 고해성사, 성경의 역사 등이 교육 내용이었다.”85) 전교회장들은 수도원 전례에 함께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또한 1936년 8월 17일부터 20일까지 덕원 수도원에서 원산 대목구 ‘청년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도 전례는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대회 중 미사와 특별 성체강복을 하였고 폐막 미사에서는 청년들의 세례 갱신식을 통해서 각자의 신앙을 심화시켰다.86)

한편 연길 대목구에서는 활발한 청소년 교육이 실시되었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이래 공산주의 사상에 빠질 위험이 있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이에 사회주의 이념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무장한 청소년들의 단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길 수도원의 박 콘라도 신부와 배 발뒤노 신부가 주축이 되어 청소년들을 모아 용정 본당과 대령동 본당에서 ‘타르시치오회’(Tarsitiusverein)를 조직하였다. 이 회의 성격은 성체에 대한 존경심의 함양과 그레고리오 성가의 보급을 통하여 신앙을 키우는 것이었다. 두 신부는 이 회의 확산을 위해 연길 지목구 청소년 대표자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1931년 8월 3일에서 5일까지 대령동 본당에서 ‘제1차 전 간도 가톨릭 소년회 연합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연길 각 본당에서 180명의 소년들이 참가했다. 미사성제를 대회의 주제로 삼아, 미사에 관련된 다양한 강연도 실시되었다. 이 대회에서 중요한 내용은 ‘전례 교육을 통한 신앙의 증진 이었다.’ 이 대회 후 타르시치오회는 연길의 모든 본당으로 확산되었고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 회의 청소년들은 본당에서 전례운동과 성가대 활동에 협력함으로써, 전례 개혁과 신앙 생활과 기도 생활의 심화와 강화에 큰 기여를 했다.87)

베네딕도회원들은 본당에서 미사 강론을 통해서 전례와 신앙 교육을 했다. 덕원 수도원 연대기는 북청 성당 봉헌식에 있었던 강론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노 안셀모(Anselmus Romer, 盧炳朝, 1885~1951) 교장 신부는 “당일 강론에서 참석한 많은 교우와 외인들에게 가톨릭교회와 미사의 중요성에 관해 설명했다.”88)

왜관 수도원에서도 전례 교육을 통한 성직자와 평신도의 신앙 쇄신에 힘을 쏟았다. 그 시발점이 된 계기가 바로 한국 교회 최초의 피정집인 1965년 1월 18일 ‘왜관 피정의 집’의 개관이다. 피정의 집은 무엇보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전례를 가르치고 실습하는 장소였다. 피정의 집에서 왜관 감목 대리구 ‘전교 회장 강습회’를 비롯하여 전국의 사제들과 교리 교사들을 위한 강좌를 개설하여 〈전례 헌장〉 문헌에 대한 강의와 수도원 전례 참여 중심으로 교육을 실시했다. 1980년 중반부터 왜관 피정의 집에서는 해마다 성탄과 파스카 성삼일에 ‘전례 피정’을 개최한다. 많은 신자들이 수도원 전례에 함께하면서 강의와 실습과 토론을 통해 구원의 신비를 체험함으로써 신앙을 심화시키고 있다.

2002년 여름부터 왜관 수도원은 해마다 두 차례씩 ‘수도생활 체험학교’를 열어 젊은이들을 수도 공동체에 초대하고 있다. 그들은 전례 공동체의 한 식구로서 수도원 일정에 따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일하는 단순한 생활을 한다. 특히 수도자들과 함께 전례를 거행하면서 전례기도 안에서 신앙의 진수를 발견한다. 또한 많은 예비신자들이 수도원을 방문하여 주일 미사에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본당에서 배운 신앙의 진리를 수도원 전례 안에서 직접 체험하고 있다.


7. 나가는 말

지금까지 베네딕도회가 발간한 전례서들을 소개하고 전례 쇄신에 기여한 점을 살펴보았다. 미사 전례서를 비롯한 전례서들과 전례 관련 서적들은 100년의 역사 안에서 베네딕도회가 전례 쇄신에 큰 기여를 했음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베네딕도회원들은 유럽에서 시작된 전례운동을 놀라울 정도로 빨리 이 땅에 정착시켜 전례 쇄신을 이루었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 〈전례 헌장〉이 추구하는 전례 쇄신을 실제로 유럽의 어떤 베네딕도 수도원보다 앞서 실천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베네딕도회는 근본적으로 전례 중심 공동체이다. 이 말은 전례 안에서 살아 계시고 체험되는 주님의 신비를 실제로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뜻이다. 전례를 실제로 사는 공동체였기에 이 공동체 안에서 전례서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전례서들 안에는 베네딕도회원들이 추구해온 분명한 목표인 주님의 현존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베네딕도회원들은 쇄신된 전례 거행 안에서 자신들이 체험한 주님과 그분의 교회, 다시 말해서 살아 계신 주님과 그분이 현존하시는 장소인 교회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이 전례서를 통해서 전례 개혁 정신을 배운 신자들은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전례 안에서 주님께 대한 신앙을 심화시켰다. 외교인들은 전례를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신앙인들의 살아 있는 모습에서 거룩한 그 무언가를 보고 신앙으로 이끌렸다. 이것이 바로 가장 베네딕도회적인 선교 방법인 것이다.

본 논문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한국 교회에 크게 시사하는 바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이다. 베네딕도회원들은 이미 1930년대에 어린이 대상으로 전례 교육 서적을 발간하고 청소년 대회를 개최하면서 그들을 전례 안에서 신앙을 심화시켰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생생한 하느님 체험을 원한다. 왜관 공동체는 해마다 ‘수도생활 체험 학교’를 열어 많은 젊은이들을 베네딕도회적인 전례에 초대하고 있다. 이들은 살아 있는 전례 거행 안에서 참된 진리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틀에 박힌 외향적인 전례가 아닌 내적으로 살아 있는 전례를 창조하는 데 힘을 쏟아 젊은이들이 이 전례 거행 안에서 주님을 체험하고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를 해나가면서 베네딕도회원들이 발간한 옛 전례서들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옛 전례서들은 한국 교회 전체의 살아 있는 유산이다. 이 유산은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의 전례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흩어져 있는 옛 전례서들을 발굴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복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전례서들을 깊이 연구하여 거기서 드러나는 전례 쇄신의 선례를 교회에 밝혀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을 통해서 베네딕도회원으로서 필자는 선배 수도자들이 그토록 많은 전례서들을 발간할 수 있었던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자들에 대한 관심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일 수도원이라는 자신들의 ‘울타리’에서만 안주했다면 전례서는 단 한 권도 교회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낡고 손때 묻은 옛 전례서를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길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과 함께 호흡했던 선배 베네딕도회원들의 숨결을 느꼈다.

베네딕도회가 전례서 발간을 선도하던 시대는 1960년대로 끝났다. 전례서 발간의 권리는 주교회의로 넘어갔다. 1964년 선종한 탁 파비아노 신부의 말은 베네딕도회원들에게 남아 있는 과제를 잘 요약해 준다. “우리의 가장 고귀한 과제는 전례운동의 확산이다. 전례 쇄신은 선교 활동 수행 안에서 가능하다.”89) 전례를 실제로 거행하고 삶으로 사는 것, 이것이 참된 선교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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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 에르네스토 신부의 증언, 1984년 11월 14일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 본원 사제관. 이정순, 《원산수녀원사》, 대구 :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88, 305쪽에서 재인용.

2)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2년 1월~7월 ; A. Kaspar, “Die Veroffentlichungen der Benediktinermissionare in Tokwon und Yenki”, A. Kaspar u. P. Berger, Hwan Gab, 60 jahre der Benediktinermission in Korea und in der Mansdschurei, Munsterschwarzach, 1973, p. 113.

3) 중국 교회의 경우에는 1941년에 전례서의 중국어 번역을, 1949년에 중국어 전례를 교황청에서 허락받았다(C. 쇠텐스 저, 김정옥 역, 《중국 가톨릭 교회사》, 왜관 : 분도출판사, 2008, 202쪽).

4)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3년 1월~7월.

5) 《미사 규식》 서언 ; 주성도,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왜관 : 분도출판사, 1993, 145쪽.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는 《미사 규식》이 세상에 빛을 발하는 데 박 콘라도 신부의 헌신적인 노고를 증언한다. “박 신부님은 기다란 담뱃대를 입에 물고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다음 주일 미사 경문을 번역하여 복사로 하여금 그것을 받아쓰게 했다. 복사는 말을 좀 고쳐서 신부님께 드렸다. … 그렇게 그날그날을 위한 번역을 차곡차곡 모아서 드디어 한권의 보배로운 《미사 규식》책을 이룩해놓았다. 북간도에서 조선 신자들이 수십 년 동안 사용해 온 《미사 규식》 책은 그 기원이 박 신부님의 노력의 결정이라고 나는 본다.”

6) A. Kaspar, 앞의 책, p. 113.
7)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3년 1월~7월 ; A. Kaspar, 앞의 책, pp. 113~114.
8) 같은 책, p. 113.
9)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3년 1월~7월.
10) A. Kaspar, 앞의 책, p. 114. 《미사 경본 - 성인 첨례 미사》는 왜관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지 않다.

11)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1938년 《봉재 때 미사 경본》의 재판(개정판)을 내면서 새로 쓴 머리말에서 두 권으로 미사 경본을 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조선말로 번역된 미사 경본도 《로마 미사 경본》과 같이 성교회 주년 간의 모든 미사 경문을 한 책에 실었으면 좋겠으나 지가(紙價)의 관계상 지질이 좋고 얇은 종이를 쓸 수 없는 고로 유감천만이나 이 《봉재 때 미사 경문》은 따로 한 책에 수록하는 바이다.”

12) 차기진, 〈미사 경본〉, 《한국가톨릭대사전》 5, 1997, 2950쪽 ; A. Kaspar, 앞의 책, p. 114.
13) J.P. Lang, 박영식 역, 《전례 사전》, 가톨릭출판사, 2005, 409쪽.

14) 주성도, 앞의 책, 328쪽. 인쇄를 더 이상 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주교회의 사무국과의 의견 마찰 때문이었다. 주 코르비니아노 신부는 자서전에서 “CCK 총재 신부가 이 책의 출판을 계속 말렸다”라고 증언한다.

15) 당시와는 달리 지금은 ‘수난 복음’을 성지 주일과 성금요일에만 봉독한다.

16) 이 논문에서는 옛 전례서에서 나오는 말 가운데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말들은 필자가 현대어로 손질하겠다.

17) 고유 감사서문경이 없는 미사에서 사용하는 “평일 감사서문경”(平日感謝序文經)과 주일에 사용하는 “성삼 감사서문경(聖三感謝序文經)”,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러 가지 첨례의 감사서문경”이라는 제목 아래 더 다양한 감사서문경들이 있다. 우선 전례시기에 따라 “예수성탄 감사서문경”, “삼왕내조 감사서문경”, “봉재 때 감사서문경”, “수난 감사서문경”, “부활 감사서문경”, “예수승천 감사서문경”, “예수성심 감사서문경”, “그리스도 왕 감사서문경”을, 그리고 성인 축일들에 사용하는 “성신 감사서문경”, “성모 감사서문경”, “요셉 감사서문경”, “종도 감사서문경”, “성 분도 감사서문경”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이들을 위한 미사에서 사용하는 “연미사 감사서문경”을 번역하여 온전히 실었다.

18) 덕원 수도원의 홍 루치오 원장 신부도 1937년 자신이 펴낸 《미사 고해 지도서》 머리말에서 《미사 규식》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미사성제는 우리에게 중대한 의의가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끼치신 바 가장 큰 보화인 것이다. 그러나 이 보화는, 우리가 사제와 연락하야 그와 함께 그리스도 자신을 제헌하는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야 1933년에 연길교구에서 《미사 규식》이란 책자를 발행하였다.”

19) 예를 들어,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매달 발간하는 《매일미사》의 일러두기에서 사제만 할 수 있는 부분을 표시하는 +가 다른 평신도 전례 봉사자의 표시보다 앞에 있다.

20) 또한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자신이 1937년에 편집한 《미사 고해 지도서》 머리말에서도 “날마다 다른 경문은 미사 경본에 있나니 모든 교우들이 그 경문을 더욱 잘 깨닫고 묵상하기 위하야 미사 경본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21) 교황 비오 12세, 〈Mediator Dei〉(하느님의 중개자) 93항.
22) 주성도, 앞의 책, 328쪽.

23)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전례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보이론 수도원 출신 안드레아스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에 의해 창설되었다.

24) 주성도, 앞의 책, 145~146쪽.

25) A.J. Chupungco, Introduction to liturgy, Handbook for liturgical studies 1,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p. 167. 안셀름 쇼트 신부는 1893년에는 《저녁기도서》(Versperbuch)를 출간하였다. 각 책에는 게랑제 아빠스의 《전례주년》(L’annee liturgique)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 들어 있다.

26)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3년 1월~7월.

27) B. 노인호이저, 김인영 역, 《문화사에 따른 전례의 역사》, 왜관: 분도출판사, 1992, 155쪽 ; A. 프란츠,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왜관: 분도출판사, 2006, 414쪽.

28) A. 프란츠, 앞의 책, 414쪽.
29) A.J. Chupungco, 앞의 책, p. 169.
30)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3년 1월~7월.

31) M. Auge, Liturgia-Storia, Celebrazione, Teologia, Spiritualita, Milano, Edizioni Paoline, 1992, p. 51.

32) 주성도, 앞의 책, 320쪽.
33) A. Kaspar, 앞의 책, pp. 113~114.

34) 젤트루트 링크 수녀의 편지. Dr. Johannes Mahr, Aufgehobene Hauser Missionsbenediktiner in Ostasien, 제4부. 분도출판사 미출간 원고에서 재인용.

35) 베네딕도회의 건축 분야에 관해서는 이 심포지엄에서 단국대학교 김정신 교수가 발표할 것이다.
36) P.H. 왈터, 정학근 역, 《승리의 십자가》, 왜관 : 분도출판사, 1978, 89쪽.
37) Dr. Johannes Mahr, 앞의 책, 제5부. 재인용.
38)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5년 전반기 ; 1936년 후반기 ; 1937년 7월~1938년 7월.
39) A. Kaspar, 앞의 책, p. 113.
40) 왜관 수도원 연대기, 1964년 11월~1966년 11월.
41) 같은 책.
42) Dr. Johannes Mahr, 앞의 책, 제9부.

43) 〈우리나라서도 공동 미사 집전〉, 《가톨릭 시보》 1965년 1월 24일자 3면. 공동 집전 미사를 거행한 주교들의 명단은 왜관 수도원 자료실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44) 〈전국 주교좌서 공동미사 봉헌〉, 《가톨릭 시보》 1965년 4월 25일자 3면.
45) 2009년 1월 오 오도 아빠스의 증언. 추후에 신자들이 직접 성반에서 성체를 영하는 방식은 시정되었다.

46) 장 엘마로 신부의 증언, 2009년 7월 5일 ; 왜관 천주교회 50년사 편찬위원회, 《왜관 반세기 - 왜관 천주교회 오십년사》, 왜관 : 천주교 왜관교회, 1978, 239쪽.

47) 〈우리말 미사경 사용 확대〉, 《가톨릭 시보》 1965년 11월 7일자 1면. “창미사와 대미사에 있어서 ▶ 서간경과 복음은 낭독조로 한다. ▶ 한국어에 맞춘 새로운 곡이 나올 때까지 미사의 고유 부분 즉〈초입경〉 · 〈층계경〉 · 〈봉헌경〉 · 〈영성체경〉과 〈교송〉(交誦) · 〈환호〉 · 〈축문〉은 한국어로 낭독조로 창하거나 성영송조로 창하고, 〈기리에〉 · 〈글로리아〉 · 〈끄레도〉 · 〈감사서문경〉 · 〈쌍두스〉 · 〈빠뗄노스뗄〉 · 〈아뉴스데이〉는 〈라띤〉어로 창한다.”

48) 여기서는 성가집의 전례적 측면만을 다룬다. 성가집의 음악적 고찰은 이 심포지엄에서 서울대교구의 최호영 신부가 다룰 것이다.

49) 조선우, 〈성가집〉, 《한국가톨릭대사전》 7, 1999, 4511쪽.

50) A. Kaspar, 앞의 책, p. 115 ; 선지훈,〈‘선교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선교 활동 - 일제시대 한국과 만주에서의 활동을 중심으로 -〉, 《敎會史硏究》 29, 2007, 92쪽.

51) A. Kaspar, 앞의 책, p. 117.
52)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3년 1월~7월.

53) A. Kaspar, 앞의 책, p. 115. 배 발뒤노 신부가 간행한 이 성가집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발행 연도는 알 수 없다.

54) 조선우, 앞의 책, 4512쪽. 이 성가집의 현존 여부에 관하여 필자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우의 글을 요약한다.

55)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8년 6월~12월. 진 볼프라모 신부는 이 성가책이 나오기 직전 1938년 8월 1일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덕원 수도원 연대기에서는 진 볼프라모 신부의 안타까운 선종과 그의 작품에 대하여 전하고 있다.

56) 같은 책, 1935년 전반기.
57) 선지훈, 앞의 책, 91쪽.
58) ‘타르시치오회’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이 논문 6-2)를 보라.

59)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4년 7월~1935년 1월. “쁠라치도(노이기르그) 신부에 의해 잘 연습된 신학교 합창단의 악곡과 몇 명의 소년의 노래가, 교우들의 노래와 계속 번갈아 가면서 훌륭한 화음을 이룸으로써 여기서도 고향의 모원에서처럼 장엄하게 지낼 수 있었다.”

60) 평화성당 50년사 편찬위원회, 《平和聖堂 五十年 1958~2008》, 천주교 대구대교구 평화동교회, 2008, 229쪽.

61) 서울 백동 수도원 연대기, 1920년 1월~3월.

62) 이정순, 앞의 책, 90쪽 ;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60년사 편찬위원회, 《은혜의 60년》, 부산 :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1995, 85쪽.

63) 또한 홍 루치오 원장 신부는 독일인 수사와 수녀들을 위해 독일-한국어 대역판 《독일어 - 한국어 수사통경기구》도 펴냈다.

64) 이석철(미카엘) 수사(95세)의 증언, 2009년 5월 4일.
65) 이 시간전례서는 소실되어 발행 연도를 알 수 없다.
66) A. Kaspar, 앞의 책, p. 118 ;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60년사 편찬위원회, 앞의 책, 107쪽.
67) 주성도, 앞의 책, 329쪽.

68) 1971년 4월 11일 교황청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라틴어 《시간전례》(Liturgia Horarum) 표준판이 발간되고 한국 교회에서도 곧 번역 작업을 착수하여 1978년 4월 1일 한국어판 《성무일도서》가 간행되었다.

69) 1977년 2월 10일에 베네딕도회 총연합회(Confederatio Benedictina)가 교황청의 인준을 받아 《수도승 시간 전례의 보화》(Thesaurus liturgiae horarum monasticae)를 출간하여, 모든 베네딕도 수도원은 이 책에 제시되어 있는 4가지 시편 배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시간 전례를 거행하도록 했다.

70) A. Kaspar, 앞의 책, p. 117.
71) 연길 팔도구 본당 연대기, 1933년 5월~1935년 5월.
72) 스위스 캄(Cham) 수녀원 소장, 1938년 3월 Sr. M. Apollonia의 편지.
73) 〈성모 소성무 일도〉, 《한국가톨릭대사전》 7, 1999, 4602쪽.
74) 미사 독서집 총지침 6항.
75) 김옥희,《韓國 敎會史 論著 解題集》, 순교의 맥, 1991, 208쪽.○

76) 《200주년 신약성서》는 분도출판사에서 1981년부터 《마르코 복음서》를 낱권으로 간행하기 시작하여 2002년 《요한 묵시록》 낱권 주석판을 내면서 번역이 종결되었다. 2001년에는 이러한 주석 낱권들을 모아 주석 합본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를 발행하였다. 또한 1991년판을 매끄럽게 다듬은 《200주년 신약성서 개정보급판》(1998년)을 발행하였다.

77) J.P. Lang, 앞의 책, 407쪽.

78)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6년 후반 ; 1937년 7월~1938년 7월. 이 책은 신자들에게 상당한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1판은 5,000부, 1937년 제2판은 6,000부, 그리고 1938년 제3판에서도 6,000부를 인쇄하였다.

79) 같은 책, 1936년 전반기.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교재용 팜프렛’은 현재 소실되었다.

80) A. Kaspar, 앞의 책, p. 115. 이 책은 제2판까지는 한국어로 되어 있었으나, 제3판은 일본어로 수정되어 나왔다. 한국 아이들이 한글을 더 이상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81)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6년 후반기.

82) 성찰을 할 때 기준이 되는 십계명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하고 있다. 일계, 이계, 삼계, 사계, 오계, 육계와 구계, 칠계와 십계, 팔계.

83) 교회의 네 가지 법규로서, 신자들은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고, 1년에 한 번은 고해성사를 봐야 한다.

84) 주성도, 앞의 책, 329쪽.
85)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5년 전반기.
86) 같은 책, 1936년 후반기.

87) Chi-Hun Son, Studien zur benediktinischen Missionsmethode von 1909 bis 1949 in Korea und in der Mandschurei, Universtat Munchen, 1996, 97~101쪽 ; 이석재, 《中國 天主敎會와 朝鮮 天主敎會의 連繫活動에 關한 硏究》, 인천 : 인하대학교, 2008, 145~147쪽.

88) 덕원 수도원 연대기, 1935년 후반기.
89) Dr. Johannes Mahr, 앞의 책, 제9부. 재인용.

[교회사 연구 제33집, 200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인영균(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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