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전례ㅣ미사

[전례] 응답하라, 전례: 전례에서의 성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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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4-13 ㅣ No.2204

[응답하라 ‘전례’] 전례에서의 성자는?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 소상공인들의 경제적 어려움, 의료진들의 희생적 헌신, 여행업의 몰락 등의 안타까운 현실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무색하게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만남을 제한받고 있는 상황이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물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발달하여 사람을 직접 대면하는 만남이 아니더라도 정보전달과 소통이 가능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인격적인 만남을 했을 때 더욱 성숙된 만남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은 하느님과 어떻게 인격적이고 성숙한 만남을 할 수 있을까요?

 

“전례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고, 그 만남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벨기에 전례학자 암브로스 베르홀 수사는 저서 ‘전례신학’에서 말합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중개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함을 요한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14,6).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게 해주는 예수 그리스도!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분으로 계속 묘사됩니다. 요한복음에서 아버지를 이 세상에 알려주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그러므로 필립보가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을 때, 그는 즉시 책망을 듣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9).

 

볼 수 없는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우리에게 오셨고 하느님의 자비를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모습을 띤 하느님이시고 인간으로서 그분이 하시는 모든 것은 인간적 형태 안에서 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이며, 육화의 한 형태로서 신적 활동이 인간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전례헌장, 7항)이라고 신학적 정의를 선언하면서 전례 개혁을 실행합니다. 이 정의는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위격과 행위의 사제적 성격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사제적 성격과 관련해서 모든 전례 거행의 특징으로서 이중 움직임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하행선과 인간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상행선입니다. 이것은 참된 신이며 참된 인간인 그리스도의 행위에서 먼저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행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늘 위에 계신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롭게 가까이 계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대사제(pontifex)가 되시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를 놓는 분”이십니다(pontifex는 원래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필립 2,6) 인간으로서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은 십자가 위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죄인인 인류를 구하시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상행선은 인간을 하느님께로 들어올려주는 신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아담으로서, 죄에 떨어진 인류를 위하여 인류의 머리요 지도자로서 성부께 가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성부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부로부터 오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전폭적인 순종으로써 성부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는 삶이여, 성부께 영광과 찬미를 드림으로써 자신을 그분께 들어올리는 삶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사제적 성격을 잘 드러냅니다. 육화의 신비로 하느님의 사랑이 이 땅에 내려오는 하행선을, 파스카신비로 인간을 구원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여 하늘로 오르게 하는 상행선을 구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두 가지 성격을 지닙니다. 첫째는 성부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해 성부로부터 보내져서 온 분입니다. 둘째는 성부께 돌아가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맏이로서 그분은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전례를 봉헌하고 인류를 성부께로 인도하십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성격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화해의 완전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하느님께 충만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전례헌장 5항). 전례의 목적이기도 한 인간을 구원하고 하느님께 완전한 영광을 드리는 일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복된 수난과 저승에서 살아나신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의 파스카 신비”(전례 헌장 5항)를 통하여 성취하셨습니다.

 

 

전례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대사제이신 중개자인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接點)입니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그분 안에서 또한 인간은 성부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인간의 접점인 예수 그리스도는 전례에서 어떻게 현존할까요? 교회는 다음과 같이 확언합니다. “이토록 큰일을 완수하시고자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교회에, 특별히 전례 행위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집전자의 인격 안에 또한 특히 성찬의 형상들 아래 현존하시어, 미사의 희생 제사 안에 현존하신다(…). 당신 능력으로 성사들 안에 현존하시어, 누가 세례를 줄 때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다.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성서를 읽을 때에 당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끝으로, 교회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께서 현존하신다.”(전례 헌장 7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제직을 교회가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내려주시고 또한 본인 자신도 다양한 방식으로 현존하시어 함께 하십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에, 집전자의 인격에, 미사의 희생 제사에, 성사들에, 당신 말씀에, 교회 공동체에 현존하시어 당신의 구원사업을 계속하도록 합니다.

 

전례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하행선인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을 받고 말씀을 들으며, 또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기억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상행선의 움직임을 행합니다.

 

전례에 현존하시는 구원의 중개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도하고 찬양할 때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양 노래를 부르십시오”(야고 5,13).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4월호, 윤종식 디모테오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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