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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길 수도의 길: 로사리오 성모의 도미니코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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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2-21 ㅣ No.319

[영성의 길 수도의 길] (32) 로사리오 성모의 도미니코 수녀회


교육 사도직 통해 부자 · 빈자 함께 어울리는 세상 지향

 

 

자선바자에서 어묵을 팔고 있는 로사리오 성모의 도미니코 수녀회 수녀들.

 

 

한국교회에는 관상수녀회를 포함해 크고 작은 수녀회가 100여 개나 된다. 그 중에는 회원 수가 1000명이 넘는 대형 수도회가 있는가 하면 2~3명밖에 안 되는 작은 수도회도 있다.

 

'로사리오 성모의 도미니코 수녀회'(이하 도미니코 수녀회)는 수련자를 포함해 수녀 3명이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초미니 수도회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니 로사리오 기숙사(성북구 성북동) 건물 지붕이 보였다. 빨간 지붕 건물 한 동은 수녀원, 다른 한 동은 여대생을 위한 기숙사 건물이다.

 

초인종을 누르니 김명숙(마리 카트린느) 원장 수녀와 기숙사 사감을 맡고 있는 오하정(데레지타 마리) 수녀가 반갑게 맞아준다. 김 수녀와 오 수녀는 도미니코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기 전에 프랑스 남부 아베롱(Aveyron) 지방의 시골 마을에 있는 수녀회 본원까지 직접 찾아가 입회했다고 한다.

 

김 수녀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도미니코 수녀회 회원이 됐다. 2003년에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할 때 파견돼 인천교구 은행동본당 등에서 활동하다 프랑스 뚤루즈(Toulouse)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지난해 다시 한국에 왔다. 오 수녀는 프랑스로 여행가서 도미니코 수녀원에서 3주간 머무른 것을 계기로 이 수녀회에 들어갔다. 김 수녀와 오 수녀 말고도 프랑스 본부에 한국인 수녀 3명이 더 있다고 했다.

 

 

가족같은 분위기의 수녀원 기숙사

 

도미니코 수녀회는 교육 사도직이 유명하다. 한국에서 여대생을 위한 기숙사를 시작한 것도 전통적으로 유치원, 학교와 더불어 기숙사를 운영해온 고유 사도직과 무관하지 않다. 따뜻한 인간관계를 통해 스스로 정체성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고, 복음적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면서 젊은이들을 배려할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기숙사 운영이다.

 

기숙사라고 해서 무척 큰 건물을 상상했는데 생각보다 크지 않다. 16명 정원으로 기숙사라기보다는 하숙집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가정적 분위기라서 학부모들이 더 좋아한다. 수녀들과 함께 생활해서 그런지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딸을 혼자 객지에 보낸 부모들에게 인기가 높다. 시설 분위기도 쾌적하고 조용하다. 문을 연 지 5년밖에 안됐지만 새내기 여대생들의 입소 문의가 줄을 잇는다.

 

로사리오 성모의 도미니코 수녀회 수녀들과 로사리오 기숙사 학생들이 기숙사 마당 성모상 앞에서 함께 성가를 부르고 있다.

 

 

오 수녀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표정과 걸음걸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살핀다"며 "학생들도 수녀를 이모나 언니처럼 대하고, 부모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들어온 학생들도 일단 입소하면 거의 졸업 때까지 기숙사를 떠나지 않는다"고 자랑했다.

 

"보통 기숙사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시간을 정해 식사를 제공하지만 저희 집은 밥솥에 항상 밥을 지어두고 언제든지 식사를 할 수 있게 배려하고 있어요."

 

밤 11시 귀가시간 등 몇 가지 기본 규칙만 지키면 모든 생활이 자유롭다. 기숙사 규율이 엄격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다른 수녀회가 운영하는 기숙사와 마찬가지로 주일미사 참례, 고해성사, 성모의 밤 등을 마련해 학생들 신앙생활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다른 기숙사에 비해 저렴한 비용, 신앙 및 인생 상담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빼놓을 수 없다.

 

 

부자와 가난한 이 잇는 중개자

 

공동체 생활을 중시하는 도미니코 수녀회는 온 가족이 가업에 동참하듯 모든 회원들이 하나의 사도직에 매달려 함께 활동을 펼치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학교를 운영할 때도 교사부터 문지기까지 각자 역할을 나눠 맡아 공동으로 이끌어 간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수도회 규칙에 따라 함께 의논해 결정한다.

 

"우리 수녀회는 개개인의 특성을 존중하고 배려해요. 공동체 대표를 정할 때도 민주주의 방식으로 선출하지요."

 

김 수녀는 "또 하나 특징은 '부자와 가난한 이를 같은 벤치에 앉힐 수 있는 수도회'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종차별이 극심한 브라질에서 백인 상류층과 가난한 인디언, 흑인들이 함께 공부하는 학교를 운영할 정도다.

 

"무조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투신하는 삶이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이들 모두와 어울리며 공존하는 삶을 지향하지요. 부유한 사람들에게 얻은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는 중개자 역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김 수녀는 "지금은 한국 공동체가 초기 단계지만 앞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긴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관심을 갖고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수도회 영성과 역사 - 문맹 퇴치해 신앙에 눈 뜨게

 

 

도미니코회 가족 수도회는 도미니코 수도회(제1회)와 1206년 도미니코 성인이 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관상수도회(제2회), 도미니코 영성에 따라 생활하고자 1280년 설립된 재속회(제3회) 등이 있다.

 

이외에도 사제ㆍ수녀들이 성 도미니코의 모범을 따라 설립한 활동 수도회(수도 회칙을 지키는 정규 제3회)들이 많은데, 로사리오 성모의 도미니코 수녀회도 그 중 하나다.

 

수녀회가 설립된 19세기 중반에는 프랑스인 두 명 중 한 명이 문맹일 정도로 기초교육이 열악했다. 특히 여성들은 교육 기회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또 젊은이들 신앙심을 약화시키는 반기독교주의가 팽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의 필요성이 더 절실했다.

 

프랑스 아베롱(Aveyron) 지방의 시골 마을 본당 사제였던 가발다(Gavalda) 신부는 "청소년들이 신앙에 눈을 뜰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 문맹을 퇴치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학교를 열었다. 특히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온갖 반대와 난관에도 여자 초등학교를 따로 설립해 고군분투했다.

 

가발다 신부는 더 많은 학교를 신설, 운영하기 위해 자신을 도울 독립 수녀회 설립을 원했고, 그의 조카인 알렉산드린 꽁뒤세(Alexandrine Conduche)가 수녀회 창설의 기둥이 된다. 오늘날 아나스타지(Anastasie, 사진) 수녀로 알려진 꽁뒤세는 가난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뛰어난 지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아나스타지 수녀는 삼촌인 가발다 신부의 부름에 응답해 1850년 18살 나이에 초등학교 교장을 맡고 새로 설립된 도미니코 수녀회의 수련장으로서 공동체 책임자가 된다.

 

수녀회가 설립한 학교는 사회적 신분을 가리지 않고 부유층과 빈곤층 자녀를 모두 받아들였고, 수업료는 경제적 형편에 따라 내도록 하되 아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상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또 수녀들은 학생들 수준에 맞춰 모든 학생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고 굳은 신앙을 심어주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수녀들의 주요 사도직은 교육이었으나 가장 가난한 이들과 병자, 장애인들을 위해 병원과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며 애덕을 실천해왔다.

 

로사리오 성모의 도미니코 수녀회는 브라질에서 선교하고 있던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들 활동에 참여하도록 요청 받아 1885년 대서양 건너 브라질에 진출한 이래 벨기에, 페루, 도미니카 공화국 등에서 수녀 350여 명이 선교에 힘쓰고 있다.

 

[평화신문, 2011년 2월 20일, 서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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