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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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삶의 지혜10: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마태오 복음 강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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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39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0)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마태오 복음 강해’에서

 

 

“성전을 장식하면서 고통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본문]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공경하고 싶습니까? 그분이 헐벗은 것을 볼 때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바깥 거리에서 추위와 헐벗음으로 고통당하시는 그분을 돌보지 않는 동안에는 이곳(성당)에서 비단옷으로 그분께 경의를 표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분이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분과 같은 분입니다. 제대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비단으로 된」 제대보가 아닌 깨끗한 마음을 필요로 하시며, 거리에 있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식탁에 금잔들이 즐비하지만 그분 자신이 굶어 죽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먼저 배고픈 이를 먹여 주고 난 다음 그 나머지로 식탁을 장식하십시오. 여러분은 금잔을 만들게 하면서 배고픈 이에게 물 한 잔을 주지 않습니다. 이로써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제대를 금으로 된 제대보로 꾸미면서 헐벗은 이에게 필요한 옷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

 

나그네로서 하루 밤을 묶을 곳을 찾으면서 헤매는 사람을 보면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나그네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성당의 바닥과 벽과 온 기둥을 장식합니다. 등경에다 은으로 된 사슬을 매달면서 감옥에서 사슬에 매여 있는 그분을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성당을 이런 물건들로 장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예물과 함께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여러분이 예물을 바치기 전에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도와주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성당을 장식하는 데 협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고소당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떨어지게 되고 악마들과 함께 고초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당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그는 돌로 된 다른 성당보다 훨씬 가치 있는 성전입니다.

 

「마태오 복음 강해」 50, 3~4

 

 

“하느님 심판의 기준은 사랑 실천”


[해설]

 

기원 후 313년 종교의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교는 급속히 성장하고, 성찬례와 세례의식을 포함하는 새로운 예식을 거행하기 위한 특별한 공간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새로운 형식의 많은 건물을 지어야했다.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는 교회 축성에 대한 축제 연설에서 티루스의 주교 파울리누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들이 세운 이 성전,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 진실로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성전은 진실로 거룩한 장소이며, 거룩한 것들 가운데 가장 거룩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신자들의 종교 생활은 성전에서 공식 예배에 참례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며 거룩한 장소이고, 전례와 미사를 드리는 곳으로 이해됐다.

 

그런데 동방교회 4대 교부 가운데 한 분이며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344/354~407년)는 성전을 장식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크리소스토무스는 381년 안티오키아 교구의 부제 당시,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동정녀, 어린이 교육을 위한 자선, 사회 복지 활동에 투신하였다. 그의 저서들은 항상 사목과 관련된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요구에서 씌어졌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된 뒤에도 크리소스토무스는 황실과 같은 화려한 주교의 삶을 소박한 생활방식으로 바꾸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소유물과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여행자들을 위하여 팔았다.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가능한 한 더 완전하고 철저히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그의 노력은 바로 「마태오 복음 강해」에서 드러난다. 

 

『성당을 장식할 때 고통 받는 형제를 못 본체하지 마십시오. 그는 돌로 된 다른 성당보다 훨씬 가치 있는 성전입니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는 분당 및 새로운 성전 건축, 리모델링 때문에 신부들도 신자들도 몸살을 앓고 있다. 사목자의 취향에 따라 성당 및 사제관의 구조가 때마다 바뀌어 본당 예산 가운데 건물관리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크리소스토무스 교부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성전을 더 아름답게, 거룩하게 장식하려는 사목자들과 신자들의 마음은 이해되지만, 가난한 형제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서울 강남에 자리한 개신교 영동교회는 교회건물의 관리비 및 재건축비에 쓰일 돈을 의료사업, 복지사업에 투자하는 모범을 보이고 있으니 고마울 뿐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이자 나의 구원관이다. 비록 내가 사제품을 받고 신부로서 평생 일을 했다 해도, 천국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으로 이웃 사람을 얼마나 도와주었느냐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다. 물론 나도 인간이기에 죄를 짓지만 그 죄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바랄 뿐이다. 나의 믿음의 결실이 얼마 만큼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도움을 베풀었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랑했느냐에 따라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곧 이웃에 대한 나의 사랑이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인생을 마무리 할 때 우리는 실천한 사랑을 근거로 심판받을 것이다.

 

심판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어려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을 때 내가 느끼는 행복감, 가슴이 뿌듯해지는 기쁨이다. 남을 도와주어 행복하다고 느끼는 기쁨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영복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죽어서 천국을 가느냐, 아니면 지옥을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내가 얼마나 하느님 나라의 영복을 미리 느끼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5일, 황치헌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수원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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