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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건축 이야기15: 2만 순교자의 니코메디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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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4-19 ㅣ No.947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15) ‘2만 순교자’의 니코메디아성당


모든 그리스도인 구원하려 높은 곳에 우뚝 선 위대한 건물

 

 

‘2만의 니코메디아 순교자들’, 「바실리오의 메놀로기온 II」(11세기 비잔틴 사본, 바티칸 도서관) 출처=Wikimedia Commons

 

 

박해 중단 시기 건립된 성당

 

동로마 제국의 가장 오래된 수도 니코메디아(Nicomedia)에 아주 큰 성당이 있었다. 니코메디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의 동쪽을 다스리게 되면서 286년 신행정수도로 선택한 도시였다. 베드로 사도가 서간에서 인사하던 비티니아(Bithynia)의 수도였으며, 지금은 이스탄불 근처 도시 이즈미트(Izmit)이다. 그만큼 니코메디아는 그에 걸맞게 크게 개발되었는데, 당시의 도시 복원도를 보아도 수많은 건물이 가득 찬 대단한 큰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니코메디아 도시 개발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가 다름 아닌 한 성당의 위치와 규모였다. 황제의 계획이 어느 정도 실행되고 있었을 때도 이 성당은 높은 곳에 눈에 띄게 서 있는 “가장 높은 성전”(fanum editissimum)이었다고 당시 그리스도교 저술가 락탄티누스는 전한다.

 

성당은 큰 건물들로 둘러싸인 활기 넘치는 지역에 서 있었고, 그곳에서 새로이 개조된 궁전이 보였을 정도로 황궁과 가까웠다. 이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내와 딸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니 이들은 물론 친위대장 성 세바스티아누스도 이 성당에 자주 방문했을 것이다.

 

박해가 잠시 중단되었던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 그것도 황궁과 아주 가까운 곳에, 또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재력으로 이렇듯 가장 높게 세워진 성당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몹시 궁금하다.

 

하지만 이 성당에 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단지 교회 역사가 에우세비우스가 남긴 중요한 단서로만 몇몇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잠시 평화를 누리던 약 4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기존의 협소한 예배 장소에 만족하지 못해 더 넓고 큰 새로운 성당들을 도시 전체에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곧 이 성당을 파괴한 303년 이전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모은 돈으로 모든 도시에 큰 성당을 세우려 했다는 말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도 확연히 높은 곳에 세워진 바로 그 성당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을 토대로 보면 니코메디아의 그 성당은 260년에서 303년 사이에 완공된 것이 되는데,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10년 또는 53년 전이었다.

 

- 니코메디아의 옛 정경, Gaiaud 그림 출처=Le Tour du Monde, Paris, 1864

 

 

주님 성탄 대축일에 파괴된 성당

 

그리스도교 신앙은 니코메디아에 날로 퍼져나갔다. 한때 그 도시에 머물고 있던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에 격분하여 그들을 모두 학살할 방법을 궁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후임 갈레리우스 황제는 그 도시에서 아주 눈에 띄는 성당을 없애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고, 이를 기점으로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근절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302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당에 모일 것을 알고, 군인들에게 새로 지어진 그 성당을 포위하고 불을 질러 파괴하고 성경을 불태우며 귀금속도 압수하라고 명령했다.

 

자정이 지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당에 모여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했을 때, 군인들은 아무도 떠나지 못하도록 성당을 에워쌌다. 그리고 군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날은 로마의 신 테르미누스의 축젯날이니 즉시 그 신에게 제물을 받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모두 불에 타 죽게 하겠다”는 황제의 명령을 알렸다. 안티무스 주교는 이를 거절하고 성당 안에 있던 모든 예비신자에게 세례를 주고, 신자 모두에게 성체를 영해 줬다. 군인들은 사방에서 성당에 불을 질렀고, 무려 2만 명의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불에 탔다. 성당은 닷새 동안 불탔다. 성당이 불타는 동안 향기가 피어나고 찬란한 황금빛이 성당 주위를 에워쌌다. 이 모습을 그린 ‘2만의 니코메디아 순교자들’(11세기 사본) 성화가 정교회 전례서인 「바실리오의 메놀로기온Ⅱ」에 실려 있다.

 

락탄티누스는 이와는 조금 다른 기록을 전한다. 갈레리우스는 건물 전체에 불을 지를 생각이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많은 큰 건물에 둘러싸여 있는 성당에 불을 지르면 도시에 큰불이 번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아직 날이 밝지 않았을 때 강제로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 성경과 성화를 찾아 불태웠다. 도끼와 철제 도구로 무장한 근위병들이 전투 대열을 이루고 들어간 다음 사방에 흩어져 아주 높은 성당을 “단 몇 시간 안에(paucis horis solo)”에 완전히 파괴하여 땅처럼 평평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니코메디아 성당의 파괴는 도시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그달 말에 화재로 궁전 일부가 파괴되었고 16일 후에 또 다른 화재가 발생했는데,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화재의 주범으로 몰았다.

 

크알브 로제의 성당, 시리아 출처=thenationalnews.com

 

 

그리스도인의 구원 위한 주님의 집

 

니코메디아 성당에 대해서는 그 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도 이 성당을 둘러싸고 상상해야 할 것이 많다. 첫째, 니코메디아를 그린 오랜 그림을 보면 꽤 높은 지형을 따라 형성되어 있던 도시에서 성당이 ‘높은 곳에 눈에 띄게 서 있다’. 이는 주택의 외관에 가려 눈에 띄지 않으려는 ‘주택 교회’나 ‘교회의 집’과는 전혀 달리 뚜렷이 독립된 건물이었다는 뜻이다. 둘째, 3세기 후반 그리스도교를 비판했던 포르피리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신전과 같은 ‘거대한 건물’(μεγστου οικου)을 짓는다고 말한 바 있다. 황제는 이 ‘거대한 건물’ 안에 모일 모든 신자를 가두고 일망타진한 생각으로 그런 탄압을 계획했는데, 이는 그럴 정도로 그 성당은 규모가 상당했음을 전해 준다.

 

정교회는 니코메디아 성당에서 불타 순교한 이들이 2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하다. 황제들의 박해로 불안한 시기에 신자 2만 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중세 유럽 도시의 절반이 인구 4000~6000명이었고, 프랑스 대성당 중에서 가장 큰 아미앵 대성당은 당시 시민 약 1만 명이 모두 들어가는 크기였다. 한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면적을 1㎡로 보면 2만 명은 2만㎡, 7000평이 된다. 바닥 면적이 7700㎡(2330평)인 아미앵 대성당의 3배가 된다. 그런데도 “성당이 닷새 동안 불탔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닷새라는 숫자보다는 그 규모가 대단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건축역사가 크라우트하이머는 큰 성당이라 해도 집회실에 불과했다고 말한 점을 고려하든지, 로마 군인들에 의해 “단 몇 시간 안에” 성당 건물 전체가 파괴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2만 명은 그 성당에서 순교한 이들이 아니라 한 달 사이에 그 도시에서 순교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본래의 성당이 ‘2만의 니코메디아 순교자들’ 성화처럼 아케이드의 아치 기둥이 외벽 위에 놓였던 성당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 크라우트하이머는 이 성당이 오래된 도무스 에클레시에 형식이라고 보았다. 더구나 이 그림은 460년대에 지어진 ‘아울라 에크레시아’ 형식의 크알브 로제(Qalb Lozeh)의 성당을 닮았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선 가장 높은 성당이려면 알브 로제의 성당의 한 5배 이상은 커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괜찮다. 니코메디아의 성당은 당시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구원하려 우뚝 선 위대한 건물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4월 16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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