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교의신학ㅣ교부학

[교부] 삶의 지혜11: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아가 강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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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40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1)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아가 강해’에서

 

 

하느님을 품을 수 있는 인간


[본문]

 

창조주께서 그대를 모든 피조물보다 얼마나 더 존귀하게 여겼는지 깨닫기 바라오. 그분은 하늘도 달도 태양도 아름다운 별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당신의 모습(eikon)에 따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대만이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본성의 모상이고 영원한 아름다움의 초상이며, 참된 신성(神性)의 닮음이고, 복된 삶을 담는 그릇이며, 참된 빛의 각인입니다. 그분을 바라보면, 그대는 그대의 순수함에서 반사되는 광채로 그대 안에서 빛나고 계신 그분을 닮아가면서(2고린 4, 6), 그분처럼 됩니다.

 

그러기에 피조물 가운데 그대의 위대함과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늘 전체는 하느님 한 뼘의 손으로 가릴 수 있고, 땅과 바다도 하느님의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위대하시고 능하신 분이시며 주먹으로 피조물 전체를 짓누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대가 완전히 품을 수 있는 분이 되시고 그대 안에 거처를 정하십니다. 그분이 그대의 본성 안에서 걸으셔도 결코 비좁아 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 안에서 살며, 그들과 함께 걷는다』(2고린 2, 16). 

 

만일 그대가 이 장면을 본다면, 그대는 이 지상의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리는 일이 없으며, 하늘을 더 이상 놀라운 것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 자신이 하늘보다 더 변함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오 인간이여, 어찌하여 아직도 하늘을 보고 감탄합니까? 하늘은 사라지지만(마태 24, 35), 그대는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곧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머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이 광활하게 펼쳐져있고 밀물이 끝없이 뻗어나간다고 놀라지 마시오. 그대는 땅과 밀물을 보면서 그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쌍의 어린 말을 탄 기수처럼 그대는 이 요소들을 그대가 좋게 여기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것들을 복종시킵니다. 곧, 땅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으로 그대를 도와주고, 바다는 말을 잘 듣는 어린 말처럼 그대에게 등을 내밀며 인간을 바다의 기수로 받아들입니다.

 

「아가 강해」 2, 68~69

 

 

“나는 하느님의 모상임을 자각해야”


[해설]

 

「교부들의 황금시대」라는 4세기에는 기라성 같은 교부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지방에는 더욱더 휘황하게 빛나는 세 별, 곧 카이사레아의 주교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주교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니사의 주교 그레고리우스가 있었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 395년경)는 젊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수사학을 공부하며 세속적 출세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누이 크리나와 형 바실리우스로부터 영적 감화를 깊이 받고, 또 형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의 권면으로 수도생활에 투신합니다.

 

그의 관상생활의 정화인 「아가 강해」는 이러한 수도생활을 바탕으로 하여, 형 바실리우스가 틀을 놓은 수도제도에 신비적 성격을 새겨 놓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특히 사순시기에 낭독되기도 하였으며, 훗날 「지성적 신비주의」라는 영성의 큰 줄기를 이루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구약성서의 「아가」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해석하였으며 「아가」가 뜻하는 영적인 가르침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특히 오늘날처럼 마음이 메마르고 분열되어있는 시대에 우리는 「아가」가 지니고 있는 「사랑의 언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가」를 문자 그대로 읽으면 실로 에로틱하여 종교적 글이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지만, 그레고리우스의 깊은 영적 해석에 따라 읽어나가면,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이 무한히 깊어져가고 영적으로 이해된 그들의 혼인에서 솟아오르는 즐거움을 구구절절 맛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레고리우스의 전 15편의 강해 가운데 둘째 강해로, 「아가」 1장 8절(여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이여, 만일 그대가 자신을 모른다면…)을 해석한 부분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여기서 진정으로 「자기를 아는(自己知)」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자기를 자기가 아닌 것과 구별하여 아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후자에 관한 해석입니다.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품을 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모상은 그 원형(原型)을 그저 가만히 닮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형에 대해 끊임없이 자기를 개방하면서 닮아가는 동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 말하는 덕(德)이란, 단지 인륜의 문제가 아니라, 신비에 관한 그의 또 다른 주저 「모세의 생애」의 부제(副題)가 말해주듯이, 그것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혼이 「사랑의 질서」 안에 흔들림 없이 뿌리를 내리며, 하느님과 그 사랑의 신비를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가톨릭신문, 2005년 6월 12일, 김산춘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서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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