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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묻지마 범죄와 분노: 분노, 악마적이고도 성스러운 화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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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7-29 ㅣ No.1254

[경향 돋보기 - ‘묻지마 범죄’와 분노] 분노, 악마적이고도 성스러운 화염



분노의 심리적 역동성

아파트의 층간 소음으로 이웃을 살해하고, 아무 이유 없이 생면부지의 행인을 폭행하고, 사소한 말다툼 끝에 친형제를 죽이는 등, 홧김에 저지르는 범죄가 거의 매일, 뉴스나 신문에 등장한다. 해가 갈수록 ‘홧김’ 범죄의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뉴스에 나올 만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삶의 다양한 현장에서 타인의 크고 작은 분노를 경험하고, 또한 나의 분노를 느끼며 살아간다.

분노는 현재 그 사람의 눈앞에 벌어진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는 즉흥적인 감정으로 보기 쉽지만 사실 한 개인의 내면에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다양한 감정들이 동시에 일으키는 뿌리 깊은 감정의 역동성이다.

심리 상담을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에 부모나 가까운 이들로부터 부당하게 대우를 받아서 생긴 크고 작은 심리적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어릴 때 받은 상처는 마음속에 아물지 않는 생채기로 남는데 그 상처는 개인이 기억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무의식중에 많은 심리적 에너지가 그리로 흘러가게 된다.

심리적 상처는 그 사람의 정신 에너지를 거머리처럼 빨아들여 몸집을 키운다. 그 이유는 상처 자체가 치유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몸집을 키워 개인의 삶에 불편한 영향력을 자꾸 일으켜 상처 입은 사람에게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콤플렉스의 정체이다.

따라서 콤플렉스는 사람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치유를 지향하는 목적론적인 의미를 지니는 심리 현상이다. 그렇지만 상처를 입은 자신이 상처의 본질을 직시하고 치유하려고 나서지 않는 이상 그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지는 않는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 안에 있는 콤플렉스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자신에게 해를 가했거나 불쾌함을 초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명명백백한 주범으로 삼게 된다. 또한 콤플렉스는 기회만 되면 언제라도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마음속에 억압된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누구라도 걸려들면 그 한 사람에게 모두 쏟아내고 싶어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우발이든 고의든 콤플렉스의 중심핵인 어린 시절의 상처를 건드리면 그동안 중심핵 주변에 집중되었던 복합적인 감정의 정신 에너지가 연료가 되어 핵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분노의 치유를 위한 이야기 하나

분노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anger’이다. 이 단어의 원뜻은 ‘제한하다’이다. 분노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누군가에게 제한받거나 침범당했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분노를 느낀다.

다시 말해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할 때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그 분노의 뿌리가 어린 시절의 상처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 분노를 풀어나갈 수 있는 지혜가 담긴 옛이야기 하나를 보고자 한다.

한 용감한 병사가 군 복무 중, 집에서 100루블을 받았다. 그것을 안 상사가 병사에게 그 돈을 빌렸다. 돈을 갚을 때가 되었지만 상사는 돈을 갚기는커녕 몽둥이로 병사의 등을 100대 때리며 말했다. “나는 네 돈을 구경도하지 못했는데, 네 놈이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병사는 화가 나서 깊은 숲으로 달아나 나무 아래에 쉬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가 여섯 달린 뱀 한 마리가 날아와 병사에게 말했다. “자네는 무슨 일로 숲 속에서 헤매고 있는가? 내게 와서 3년 동안 일하고 싶으면 내 등에 올라타게.” 그러자 병사는 바로 등에 올라탔다.

뱀은 병사를 자신의 궁궐로 데려갔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일을 맡겼다. “3년 동안 솥 옆에 앉아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면서 죽을 끓이게!” 그리고 뱀은 세상을 돌아다니러 날아갔다. 병사에게 맡겨진 일은 힘든 것이 아니었다. 솥 아래 장작을 넣고는 그 옆에 앉아 보드카를 마시며 안주를 먹는 것이 전부였다. 3년이 지나 뱀이 날아왔다. “병사 양반, 죽이 준비되었나?” 병사가 말했다.“ 물론 준비되었지요. 3년 동안 저는 불을 한 번도 꺼뜨린 적이 없었거든요.” 뱀은 단숨에 한 솥을 비우더니 충실하게 봉사한 병사를 칭찬한 뒤 3년을 더 고용하겠다고 했다.

이번의 3년도 흘러갔다. 뱀은 병사가 준비해 놓은 죽을 다시 먹은 뒤 또다시 3년을 봉사하도록 하였다. 3년이 끝나갈 무렵 병사는 ‘나는 9년째 이곳에서 죽을 끓였는데 아직까지 죽 맛을 보지 못했어. 맛 좀 보아야지!’ 하고 솥뚜껑을 들어올렸다. 솥 안에는 자신의 상사가 앉아있는 게 아닌가.

병사는 생각했다. ‘잘됐군. 나는 너를 박살 낼 거야. 네가 내게 했던 짓에 앙갚음해 줄 거야!’ 그래서 병사는 장작더미를 끌어다 되도록 더 많이 솥 아래 밀어넣어 상사의 살점뿐 아니라 뼈까지 깡그리 고아지도록 불을 세게 지폈다.

얼마 뒤, 뱀이 날아와 죽을 먹고는 병사를 칭찬했다. “아, 병사 양반, 이전의 죽도 훌륭했지만 이번 것은 훨씬 맛이 좋군! 봉사한 대가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골라보게.”

병사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용맹스러운 말 한필과 두툼한 천으로 짠 루바슈카를 골랐다. 그 루바슈카는 평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입으면 누구든지 천하제일의 용사가 되는 마법의 루바슈카였다. 병사는 왕을 찾아가 용맹한 말과 루바슈카의 힘을 빌려 힘겨운 전투에서 왕을 돕고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까지 했다(러시아 민담, ‘마법의 루바슈카’).

이 이야기를 읽으면 억울한 일을 당한 병사의 처지에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분노는 우리 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처럼 지혜롭게 자신의 분노를 처리하는 사람은 드물다. 병사는 뱀의 인도를 받아 궁궐로 간다. 뱀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많은 문화권에서 치유와 지혜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병사가 뱀의 궁궐에서 9년 동안 죽을 끓이는 일을 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 쌓인 분노를 해소하는 내면적인 작업을 의미한다. 9년이라는 세월은 아주 큰 인내를 요구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 시간 동안 병사는 상사에 대한 자신의 분노가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죽을 끓인다.

결국 작업을 훌륭하게 수행하였기에 뱀한테서 용맹한 말과 마법의 루바슈카를 선물로 받는다. 그리고 그 선물 덕분에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용맹한 말은 우리가 내면의 분노를 잘 처리했을 때 생기는 새로운 정신적인 활력을 의미한다. 마법의 루바슈카는 외부의 자극에 더 이상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강건해진 새로운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천하제일의 용사가 된다는 것은 ‘인자무적(仁者無敵)’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주는 분노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 새로 얻은 삶의 기쁨과 활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분노를 병사처럼 내면적인 작업으로 풀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누군가에게 그 화살을 쏘는 것으로 풀려고 한다. 내면적인 작업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분노의 화살을 날리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함께 머무르면서 분노의 근원을 살펴보는 시간을 말한다.

병사는 상사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화가 났을 때, 상사에게 즉각 반격을 가하지 않고 숲으로 달아나 나무 아래로 간다. 숲으로 달아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내향적인 자세를 말한다.

병사가 9년 동안 죽을 끓이려고 지폈던 것은 바로 장작불이다. 분노의 감정에 머무르는 것은 불덩어리 속에 있는 것만큼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분노의 화살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화살을 쏘아서 풀려고 하면 미움과 증오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눈앞에 미운 가시가 박힌 사람이 늘 나타날 수밖에 없다.

죄를 지칭하는 그리스어는 ‘hamartia’인데 이 말은 ‘화살이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여 죄를 짓는 것은 바로 엉뚱한 사람을 과녁으로 삼아 잡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분노 반응은 거의 ‘근원적인 분노’를 바탕으로 일어난다. 그 분노는 어린 시절 자신의 부모나 키워준 사람에게 받은 상처에서 비롯된 분노이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행동을 했을 때 지나친 분노가 생기는 것은 이 근원적인 분노가 건드려져서 폭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분노의 원인을 지금 눈앞에 걸려든 사람에게만 돌리는 것이다. 과녁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서로 철천지원수가 되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근원인 자신의 내면으로 화살을 향할 때에만 올바른 과녁을 정조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분노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될 것이다.


분노는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성스러운 화염

분노의 감정은 상징적으로 보면 불처럼 타오르는 감정이다. 분노를 제대로 처리하려면 불이 끝까지 타게 두어야 한다. 타오르는 장작에 물을 부어서 억지로 식혀버리면 타다 남은 흉측한 나무 찌꺼기들이 남게 된다. 그러나 기름을 붓던지 해서 다 태워버리면 고운 재만 깨끗하게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감정을 억지로 가라앉히려 한다. 그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얼른 쫓아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종교적 덕목으로 분노를 억지로 식혀서 잠재우려 한다. 또한 기도를 통해 미운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다. 자칫하면 기도가 아직 처리되지 않은 분노의 감정을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오히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 안에서 타오르는 분노의 감정은 사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성령의 작용으로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성령을 불로 표현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개인 안에 있는 정신적인 콤플렉스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고 영혼을 정화하려고 성령께서 불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나를 사로잡아 고통스럽게 하는 감정의 불길이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동일한 불길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훨씬 견디기 쉬워질 것이다. 성령께서 그런 불길로 나를 단련시킬 때 내가 할 일은 화염 속을 지나가는 시련을 인내하면서 ‘내 탓이오!’를 부지런히 외는 것이다. 그러면 끝까지 타고 고운 재만 남는다. 그것을 참지 못하고 ‘네 탓이오!’를 연발하며 미운 놈만 계속 생각한다면 분노는 악마적인 화염으로만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를 통해 참된 평화를 얻고자 한다면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불길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고승들의 다비 뒤에 사리가 남듯이 성령의 불길 속에서 훨훨 다 타고 남은 고운 재가 바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지혜와 힘이다.

불순물들이 모두 태워지고 나면 성령께서 고요하고 달콤하게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실 것이다. 그때부터 성령께서 더 이상 화염이 아닌 시원한 바람으로 작용하신다.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바람은 ‘신바람(神風)’이다. 신바람은 새로 찾은 삶의 생기요 활력이다. 내 마음에 고요한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숨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평화이다.


인간 심리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와 배려가 필요한 교회

영혼의 구원을 위한 교회가 시한폭탄 같은 분노를 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과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여기서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보다는 현대인들의 다양한 심리적 증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교회가 다양한 심리적 증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정신과나 심리상담소에 그 역할을 떠넘긴 지 오래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이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거대 담론에 주로 집중되어 있을 뿐 인간 내면의 심리적 역동성을 섬세하게 헤아리지 못한 결과이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동적인 생명력은 배고프고 상처 받은 영혼들을 치유하고 생명력을 되살려주는 종교 본디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렇지만 비대해진 제도 종교는 개개인의 주관적인 종교체험을 중개해 주는 역할보다는 제도 자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치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겨지면서 개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서 일어나는 하느님 체험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인간의 모든 체험은 사실 정신적인 것이다. 정신은 인간 체험의 유일하고도 일차적인 기관이다. 이것은 하느님 체험에도 적용된다.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 또한 정신적인 현상으로 먼저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정신을 거치지 않고 지각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신학자 칼 라너는 “인간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자기 통교의 장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가장 탁월한 통로는 인간의 감정, 인간의 내면, 인간의 정신을 통해서이다. 바꾸어 말하면 심리적인 상처 때문에 왜곡되고 억압된 심리적 내용물로 가득한 인간의 정신은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결정적인 장해가 될 수 있다.

교회가 이러한 인간의 심리적 과정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영혼의 구원사업을 펼치기를 바란다. 세상과 영혼의 구원에 대해 교회는 많은 말을 쏟아낸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의 홍수 속에서 배고프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실질적으로 치유받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 김기환 요셉 - 안동교구 신부. 미국 포담대학교에서 사목상담을 전공하였다. 경북 예천본당 주임신부로 있으며, 신자와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심리치료를 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5년 7월호, 김기환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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