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일)
(백) 부활 제5주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현대 영성: 내가 죽고 나면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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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1-12 ㅣ No.1893

[현대 영성] 내가 죽고 나면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18년 11월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지인 이탈리아 아씨시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행렬을 보고 깜짝 놀랐으며, 수백 년이 지났지만 성인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그분을 통해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제자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놀랐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죽고 수백 년, 아니 수십 년 후,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를 기억할까?’ 함께했던 수도 형제들 마저 죽고 나면 역사의 무수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허무하고 보잘것없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도 그러하실까요? 성인이 되고 교황이나 주교가 되어야 사람들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억해 주실까요? 하느님께서 성인들을 특별히 불러 주시고 기적의 은총을 주시지만, 아무것도 아닌 우리는 그저 외면하고 계신 것일까요? 우리를 잊고 계실까요? 우리 인생은 아침 이슬처럼 한낮의 태양빛 아래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요?

 

그때 문득 예전에 생태학(Ecology)을 배울 때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셨던 대우주(Macro-cosmos)와 소우주(Micro-cosmos)의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의 대우주는 우리 각자의 소우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소우주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음 후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당신 영을 통해 직접 돌보고 계십니다. 각 사람의 소우주를 돌보는 하느님께서는 대우주를 관장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모든 다른 사람의 소우주,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소우주를 연결시켜 주십니다. 성인은 더 많게, 우리는 더 적게 연결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그 몫으로 충만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일상의 작은 소우주 안의 모든 삶을 주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당신의 대우주와 연결시켜 주고 계신 것입니다. 10달란트와 1달란트가 우리 눈에는 차이로 보이지만, 하느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인이 됨은 하느님의 대우주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뿐, 우리 모두는 우리 인간의 방식이나 인간의 생각을 넘어 하느님의 방식으로 대우주에 참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소중히 기억하고 사랑해 주시며 우리 모두가 당신의 대우주를 우리 각자의 소우주 안에 전하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이 부르심에 우리 각자가 자신의 여건 안에서 사랑으로 기꺼이 응답할 때 우리 역시 성인들처럼 하느님의 대우주를 세상에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부터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성인이 되기를 원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나의 소우주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선택할 때 나의 삶 안에서 크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몫을 다 한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각자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영역이 크든 작든 서로 다를지라도 그곳이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소우주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이 바로 교회요,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을 배우는 곳이요, 그곳이 하느님에게는 모두 소중하고 고귀한 나와 주님만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나에게 주어진 소우주요 그 활동 범위가 넓든 좁든 하느님께는 모두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침에 온 일꾼이나 오후 늦게 온 일꾼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시는 분이십니다(마태 20,1-16). 가진 것 중 일부를 봉헌하며 생색내는 부자보다 그 금액은 적지만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봉헌하는 그 과부의 작은 헌금이 더 크다고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루카 21,1-4).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이름을 남긴 이들만이 가치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한 명 한 명을 주님께서는 모두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 대해 후회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잔소리하는 아내, 무심한 남편, 저 멀리 가버린 듯한 자녀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 똑같은 삶인 듯하지만, 이곳이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세상이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하고 귀한 삶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않는 것에 마음 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기억해 주심에 감사하며 영적인 눈을 뜨고 깨어나는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2022년 11월 13일(다해) 연중 제33주일(세계 가난한 이의 날) 가톨릭마산 2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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