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교의신학ㅣ교부학

[교부] 삶의 지혜15: 오리게네스의 원리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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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144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15) 오리게네스의 ‘원리론’에서

 

 

완덕(完德)의 길


[본문]

 

오리게네스의 수덕적 삶

 

몇 년 동안 오리게네스는 젊은이를 유혹하는 모든 향락을 멀리한 채, 철학적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엄격한 생활방식에 따라 낮에는 힘든 일을 많이 하였고, 밤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때로는 단식하면서 때로는 잠자는 시간을 줄이면서 가능한 한 엄격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침대에서 자지 않고 맨 바닥에서 잤다(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6, 3, 9).

 

완덕의 길

 

인간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품위를 받았기에, 하느님을 완전히 닮도록 열성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이 완덕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은 창조 때부터 모상이라는 품위로 인간에게 주어졌고, 하느님을 온전히 닮는 일은 우리의 성실한 삶을 통해 마지막 날에 완성되도록 하느님께서 이미 배려해 주셨다.

 

「원리론」 3, 6, 1

 

 

“완덕이란 하느님을 닮는 것”


[해설]

 

교회는 오리게네스(185~253/ 255년)를 성인(聖人)으로 공경하지는 않지만, 그는 백과사전과 같은 지식과 놀라운 창의력을 지닌 천재적인 인물로서 초기 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라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난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지도하던 교리학교에서 공부하였다. 202년에 그의 아버지가 순교하자 장남이었던 그는 집안을 돌보며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임을 지녔지만, 순교에 대한 열정도 불타고 있었다. 오리게네스는 어머니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옷을 감추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를 따라 순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교사직을 맡았다. 마침 클레멘스가 박해로 인해 피신 중에 있었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는, 18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학식과 인격과 성덕에서 모두에게 모범이 된 오리게네스를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오리게네스는 학자로서 신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신학의 요람으로 꽃피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덕적인 삶에서도 강철 같은 성품과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인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초기교회 영성의 대가 오리게네스는 이론가이면서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초기 교회 영성의 대가였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영성 생활에 가장 필요한 완덕의 개념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완덕이란 「하느님을 닮는 것」이다. 인간의 목적은 최선을 다해 하느님과 비슷해지는 것이고, 이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으로만 가능하다. 오리게네스는 완덕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기에(창세 1, 26) 하느님과의 깨어진 질서를 되찾는 일, 곧 하느님을 닮는 일이 완덕의 길이고 그러한 여정이 바로 영성 생활이다. 

 

영성은 인간이 「하느님께 향하는 특성」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어 「인간과 세상으로 향하는 특성」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영성이나 하느님께 향하지 않는 영성은 잘못된 신심이다. 그래서 우리의 영성 생활은 하느님에게서 시작하여 하느님께 향하는 생활로써,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일상의 시작과 마침을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도 완덕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성덕의 경지에 이르도록 보편적인 부름을 받았다. 완덕의 혼이요 중심이요 척도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의 덕을 닦는 데 가장 필요한 요건은 겸손이다. 

 

사랑은 그리스도인 삶의 중심이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거저 주는 것이며, 실천이 뒤따라야 하는 역동적인 것이다. 올바로 사랑하는 자는 올바로 믿고 올바른 희망을 품는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마태 22, 37~39). 

 

곧, 우리 구세주 예수께서는 철학자들처럼 사랑에 대한 사상이나 이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몸소 비난과 모욕과 매질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써 사랑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셨다. 

 

사랑은 애매모호한 감상주의적인 태도가 아니라, 실제로 타인에 대한 봉사로 나타나는 「인격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다. 또한 성서 읽기를 사랑하고 묵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들어가는 첩경이다. 성서는 모든 진리와 삶에 대해 가르치는 책이며 그리스도의 삶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권유하는 책이다. 우리는 성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영성 생활을 위한 중요한 자양분을 얻을 수 있다. 성서에서 깨달은 이러한 진리는 늘 「구체적인 사랑」과 연관되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05년 7월 10일, 배승록 신부(한국교부학연구회 · 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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