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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건축 이야기14: 아울라 에클레시에라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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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4-10 ㅣ No.942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14) ‘아울라 에클레시에’라는 성당


건물 전체를 직사각형 홀로 만든 새로운 형식의 성당 등장

 

 

키르크비제의 성당 남쪽 벽, 시리아. 출처=Wikimedia Commons

 

 

새로운 형식의 성당

 

‘교회의 집(도무스 에클레시에)’은 기존의 주택을 개조하거나 확장했다. 그러나 성당은 ‘교회의 집’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바실리카 형식으로 직접 변한 것이 아니다. 이 둘 사이에 또 다른 성당 형식이 있었다. 250년에서 313년까지는 더 넓은 집회실, 공동식사보다는 성체성사을 거행하는 규범을 갖춘 성당이 필요했다. 또한, 갈리에누스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가 중지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다시 시작되기까지 비교적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40년간, 특히 270년에서 303년까지는 개종자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에 교회는 한쪽 끝에 제단을 두고 하나로 통합된 ‘홀과 같은’ 크고 단순한 건물이 필요했고, 이런 새로운 형식의 성당은 여러 지역에 공개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마이클 와이트(Michael White) 교수는 홀을 뜻하는 ‘아울라(aula)’에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에(ecclesiae)를 합해 이런 성당을 ‘아울라 에클레시에(aula ecclesiae)’라 불렀다. 영어로는 ‘the hall of the church’, 독일어로는 ‘잘키르헤(Saalkirche, Saal 홀, kirche 성당)’라 한다. 이는 ‘도무스 에클레시에(교회의 집)’가 발전한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아울라 에클레시에’는 ‘교회의 집’과 공식적인 교회 공간인 바실리카 형식 사이에 있던 성당의 유형이다.

 

- 크알브 로제의 성당, 시리아. 출처=Mustfa Habib

 

‘아울라 에클레시에’는 건물 전체를 직사각형의 홀로 만들어 종교적 기능을 담고 그 주위에 부속실, 별채 등을 두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집’보다는 훨씬 의식적이고 건축적이었다. ‘교회의 집’처럼 ‘아울라 에클레시에’도 외관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긴 축으로 제대를 향하는 행렬을 정하는 등 내부는 ‘교회의 집’과 확연히 달랐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보호 아래에서 기념비적인 바실리카가 지어질 때만이 아니라, 바실리카 형식이 성당 건축의 표준이 된 이후에도 ‘아울라 에클레시에’는 계속 지어졌다. ‘아울라 에클레시에’가 표준화가 되지는 못했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심지어 5세기까지도 남아 있었다. 이렇게 보면 로마의 공공건물인 바실리카가 새로운 그리스도교 바실리카 성당의 직접적인 모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아울라 에클레시에’을 거치면서 바실리카 형식의 성당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성당 건축을 말할 때 ‘아울라 에클레시에’ 유형의 성당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율리아노스 성당

 

요르단 북부의 움엘지말(Umm el-Jimal)에는 아주 중요한 성당이 많이 지어졌다. 지금은 비록 돌무더기에 몇몇 벽만 서 있을 뿐이지만, 앞으로 성당 건축 연구에서 주목해야 할 지역이다. 그중 399년과 402년 사이에 세워진 성당이 ‘율리아노스 성당(Julianos Church)’이라 불리고 있다. 몇 채의 주택이 성당의 벽에 붙어 있어서 성당만 따로 독립해 있던 것이 아니어서 주변은 ‘교회의 집’ 주변을 닮았다. 평면은 가로와 세로의 비가 대략 2:5 정도인 긴 직사각형이며, 목조 트러스 위에 박공지붕을 얹었다. 유다인의 회당처럼 독서하고 강론하는 베마(bema)를 단랑(單廊)인 평면 한가운데에 두었다. 안마당에 면한 남쪽 긴 변에는 세 개의 문이 있었고, 그 앞에 일곱 개의 기둥이 있는 포티코가 붙어 있었다. 북쪽에서도 전체 길이의 절반이 되는 입구 전실을 지나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니 바실리카 성당처럼 서쪽에서만 들어온 것이 아니다.

 

반원 제단은 동쪽을 향하게 했다. 지금은 벽이 다 무너져 버렸지만, 회중석에서 보면 크고 높은 아치가 제단 앞에 있었고, 그 뒤로 조금 떨어져서 이보다는 작고 낮은 아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원 제단 위는 1/2 돔이 아니라 벽에서 내쌓기 방식으로 평지붕을 얹었다. 두 아치 사이의 평지붕은 높고, 제단과 그 앞의 아치 사이의 평지붕은 이보다는 낮았다. 공간을 깊이를 더하여 제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시리아 북서쪽의 초기 비잔티움 정주지인 키르크비제(Qirqbize)에도 중요한 성당이 남아 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세워져 6세기까지 계속 사용된 성당이다. 특이하게도 이 성당은 다른 주택들과 함께 아주 큰 주택 바로 옆에 있었다. 이 주택의 소유자가 그 옆에 성당을 특별히 지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거실과 찬방 사이의 벽을 없애고 더 큰 방을 만들었으나, 후에 이것을 직사각형 홀의 간소한 단랑(單廊) 건물로 바꾸었다. 평면 가운데에는 단을 올린 베마가 있었다. 밖에서 보면 고대 그리스 신전처럼 목조 트러스 위에 박공지붕을 얹었다. 이 성당도 남쪽의 긴 벽에만 두 개의 문을 두었고, 지어진 지 한참 지난 5세기나 6세기에 원기둥이 있는 포티코를 그 앞에 덧붙였다. 동쪽에는 단이 없이 낮은 벽으로 막기만 하고 15×7.5m인 대좌 위에 제대를 두었다. 미사를 드릴 때는 14명 정도 올라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두었고, 나중에는 제단 앞에 개선문 아치를 덧붙여 평신도와 사제를 공간적으로 구분했다. 또 제단의 좌우에는 제의방과 유해실을 두었다.

 

- 오도로스 주교의 이중 성당(검은색)과 산타 마리아 아순타 대성전(초록색). 출처=Wikimedia Commons

 

 

테오도로스 주교의 이중 성당

 

바실리카 성당 이전에 ‘아울라 에클레시에’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아퀼레이아(Aquileia)에 있는 ‘테오도로스 주교의 이중 성당(The double church of Bishop Theodore)’일 것이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전후인 대략 308~319년에 테오도로스 주교가 이 자리에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고 모자이크 바닥의 헌정문에 적혀 있다. 건설 단계의 경위는 복잡하다. 원래 1세기나 2세기에 로마의 주택 도무스가 있었는데, 그 터 위에 북쪽으로는 37m×17m, 남쪽으로는 37m×20m인 다주식 ‘아울라 에클레시에’ 두 개가 지어졌다. 그런 다음 아트리움, 세례당 등 여러 방으로 두 홀은 연결되었다.

 

두 홀로 이루어진 이 옛 성당은 본래 활발한 무역 구역에 있었다. 성당 바로 남쪽에는 고대 로마 시대에 사용된 공공 창고인 커다란 호레움(horreum)이 있었고, 가까운 곳에는 이보다는 작은 상업용 창고 두 개가 있었다. 이 창고는 달리 쓰였으므로 두 개의 홀은 크기도 다르고 구조도 달랐다. 테오도로스 주교는 두 개의 홀을 단순히 병합하고 여러 건물을 성당으로 개조하여 이를 ‘아울라 에클레시에’로 사용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성당(검은색 도면) 위에 산타 마리아 아순타 대성전(Basilica di Santa Maria Assunta, 초록색 도면)을 세웠다.

 

시리아 이들리브(Idlib) 지역의 크알브 로제(Qalb Lozeh)에는 밀라노 칙령 이후 150년이 지난 460년대에 지어진 ‘아울라 에클레시에’가 남아 있다. 남쪽과 북쪽의 긴 변으로 각각 두 개의 입구를 두었다. 1/2 돔을 얹은 반원제단과 함께 베마가 평면 한가운데 있었다. 아케이드 벽면 좌우로는 좁은 측랑을 더 두었고 높은 벽에 고창을 만들었다. 어떤가? ‘아울라 에클레시에’가 600년 후에 나타난 로마네스크 성당과 너무나 닮지 않았는가?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4월 9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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