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910년대 경향잡지를 통해서 전개한 한국천주교회의 의료계몽활동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1-10 ㅣ No.1469

1910년대 『경향잡지』를 통해서 전개한 한국천주교회의 의료계몽활동

 

 

국문초록

 

1910년대 한국천주교회가 전개한 의료계몽의 모습은 『경향잡지』의 ‘각색문제’, ‘학문’, ‘위생’ 난들을 통해 파악된다. 종교적인 내용 수록만을 허용받은 『경향잡지』에는 일제식민정책이나 통치의 실상을 비판 · 비난하는 글을 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향신문』 창간 목적이었던 “요긴한 지식”을 “모든 사람이 알아듣기 쉽게” 만들 수는 있었다.

 

‘각색문제’, ‘학문’, ‘위생’ 난에 수록된 의료지식은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당시 한국인들에게 요긴한 지식이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던 외국인 선교사, 한국인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걸렸던 각종 질병, 그리고 그들 곁에서 각종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한국인들의 생생한 모습이 의료 계몽을 위한 ‘난’들을 마련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난’에서 다룬 주제와 내용은 당시 한국인들이 겪고 있던 질병과 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활용했던 각종 약재들과 치료방법들을 보여준다.

 

‘각색문제’ 난은 각종 질병과 증상, 치료약재들과 조제방법들을 간략하게 그러나 다양하게 설명함으로써 질병치료에 도움되고자 하였다. 정신적인 건강과 함께 육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정보와 지식은 『경향잡지』가 계승한 『경향신문』이 창간 목적으로 강조하였던 ‘요긴한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학문’ 난은 전염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위생을 강조하였다. ‘각색문제’ 난은 질병에 걸린 후의 치료에 중점을 두었는데, ‘학문’ 난은 전염병의 원인과 전염병 매개체, 그리고 전염병 예방을 설명하는데 주력하였다. 의료 계몽의 방향과 내용이 치료에서 예방으로 한 단계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생’ 난은 질병예방과 소아위생을 강조하였고, 교회와 연계하여 의료를 계속 설명하였다. 그리고 소아위생을 강조함으로써 어린이와 잉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한국인들의 민간진료방법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는 하였으나 의사의 진료와 치료를 강조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의료계몽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비슷한 내용들을 되풀이하고, 1920년대에 발행된 각종 신문잡지들이 위생과 건강의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기에 종교잡지인 『경향잡지』는 1911년부터 시작한 의료 관련 기사 수록을 마무리하였다.

 

 

Ⅰ. 머리말

 

1906년 10월 19일자로 창간된1) 한국천주교회의 기관지 『경향신문』은 일제의 한국강점 직후부터2) 폐간의 압박에 시달렸다. 1910년 9월 10일 일제는, 『경향신문』에 종교적인 내용만 수록해야 한다고 프랑스영사관을 통해 한국천주교회에 통고하였다.3) 10월 15일에는 『경향신문』의 편집책임을 맡고 있던 드망즈(Florian Demange, 安世華) 신부에게 경시청 출두 소환장을 보냈다.4) 이어 순 종교잡지로 바꾸거나 보증금5)을 내야한다고 협박하였다.6) 한국천주교회는 보증금을 내겠다고 하였는데, 일제의 목적은 보증금이 아니라 폐간이었다. 일제는 사전 검열을 조건으로 신문 발행을 허락하였다.7) 그러나 일제는 검열을 위해 천주교회에서 보낸 교정지에 수많은 줄을 그어 기사들을 삭제하였다.8) 일제의 검열 교정지를 받아든 한국천주교회는 『경향신문』 220호(1910년 12월 30일)를 마지막 호로 발간하였다.9) 이어 『경향신문』의 부록 『보감』을 『경향잡지』로 제호 변경하여 1911년 1월 15일자를 221호(1911년 1월 15일자 26면 분량)로 발행하였다.

 

한국천주교회는 일제의 압박 때문에 『경향잡지』를 종교잡지로 발행하겠다고 하였다.10) 그런데 『경향잡지』를 살펴보면 ‘각색문제’, ‘관보적요’, ‘법률문답’, ‘위생’, ‘학문’ 등 종교적인 내용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각색문제’ 난의 상당 부분, ‘학문’ 난의 일부분, ‘위생’ 난은 전체가 질병·치료방법·위생을 다루고 있다.

 

1910년대 한국에서는 약 50종의 잡지가 발행되고 있었는데,11) 『신문계』, 『조선휘보』 등 9개 잡지에12) 수록된 위생 관련 기사를 분석한 연구자들은, 대부분의 잡지들이 식민지배의 효과 선전이나 정책 소개 논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다.13) 『경향잡지』의 위생 기사 수록이, 사람들에게 의학 기초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 논문도 있다.14) 그런데 『경향잡지』의 ‘각색문제’ 난에 소개된 수많은 질병과 증상 중 학질 · 속에 열이 나는 것 · 해소만을 언급하였고, 치료약재로 회양목 · 소금 · 감초 · 유황, 그리고 발표(發表)를 거론하였으며, 편집 방향이 민간요법을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학문’ 난은 자연과학 지식전달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의학 관련 내용도 서양의학을 기준으로 서술하였고, ‘위생’ 난은 기초해부학과 소아위생을 전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각색문답’ · ‘학문’ · ‘위생’ 난들이 대중의 알고픈 지식, 조선총독부의 허락한 지식, 천주교회의 알리고픈 지식이 모두 만족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발전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은 ‘각색문제’ · ‘학문’ · ‘위생’ 난의 내용을 거의 분석하지 않았기에 많은 한계와 아쉬움을 보인다. 

 

본고는 1910년대 『경향잡지』에 수록된 질병·치료·위생 기사들을 분석하여, 천주교회의 의료계몽활동의 실상을 파악하고자 한다.15) 이는 1910년대 한국인들의 질병·치료방법·위생의 실제적인 모습을 추적하는 것인데, 『경향잡지』의 의료 관련 기사들은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이, 그리고 신자들이 그들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문은 그동안 일제측 자료들을 토대로 이루어진 선행연구들에서 놓쳐버린 한국인들의 질병과 위생의 실상을 파악하게 될 것이다.

 

 

Ⅱ. 민간약재와 치료방법 제시

 

‘각색문제’ 난은 종교잡지를 표방하고 발행한 『경향잡지』 221호(1911년 1월 15일)부터 313호(1914년 11월 15일)까지 3년 10개월 동안 계속되었다.16) 『경향잡지』의 다른 ‘난’들과 마찬가지로 ‘각색문제’ 난도 왜 시작하는지, 무슨 내용을 수록할 것인지, 왜 끝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각색’(各色)이란 온갖 종류 또는 여러 종류를 뜻하는데, ‘각색문제’ 난을 살펴보면 질병, 질병의 매개체, 약재들, 그리고 생활상식에 관한 내용이다.

 

국판 1/2면의 서너 줄 분량이지만 ‘각색문제’ 난에는 많은 질병과 증상, 치료약재와 약재 사용방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각색문제’ 난에서 거론한 질병과 증상은 다음과 같다.

 

간혈병, 감기, 고창, 담 결릴 때, 답답증, 대소변 불통, 두근거림, 두통, 마른버짐, 면통, 목구멍이 부었을 때, 목이 쉴 때, 바람증, 방광의 열기, 복통, 상한증, 설사, 소아 복학, 소화불량, 손목발목 삐었을 때, 손에 동상, 손이 틀 때, 아편이나 독한 물건을 먹었을 때, 안질, 연주창, 열증, 오줌소태, 옴, 이질, 장부통, 장열, 종기, 체증, 치질, 치통, 토혈, 폐병(肺病 신음병), 풍습, 피곤할 때, 학질, 해소, 화상, 황달, 횟배.

 

이상의 질병·증상들을 선정하고 내용을 집필한 사람은 『경향잡지』의 책임자와 협력자들일 것이다. 『경향잡지』의 편집책임은 드망즈 신부에서, 1911년 4월 23일 멩(Jean Marie Georges Meng) 신부로 변경되었고,17) 1913년 5월 말부터는 한기근(韓基根) 신부가 맡았다.18) 드망즈 신부가 『경향신문』의 발행·편집책임자였을 때 편집실무는 김원영(金元永) 신부가 맡았는데,19) 『경향잡지』로 변경된 이후에도 한국인 신부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20)

 

‘각색문제’ 난에 수록한 질병·증상의 선정 기준은 한국인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주 겪는 질병·증상이었을 것이다. 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은 많은 질병에 시달렸고,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리고 전국의 신자들을 자주 방문하면서 한국인들이 겪는 육체적인 질병과 통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색문제’ 난의 내용 작성에는 신자들도 참여하였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천주교 신자 의약인들은 약국을 운영하였고21) 전통 한방의술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시약했다.

 

‘각색문제’ 난에서 가장 먼저 거론한 질병·증상은 “담 결릴 때와 손목 · 발목을 삐었을 때”였다. 긴급하고 위중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자주 고통받는 아픔이었다. 농업이 위주였던 당시 한국인들은 많은 육체노동을 하였고, 육체노동은 피로와 통증을 수반하였기 때문이다.

 

‘각색문제’ 난에서 많이 언급한 질병·증상은 대소변 불통, 소화불량, 종기인데 약재·조제방법·복용방법 등을 다양하게 설명하였다. 대소변 불통의 치료 약재와 방법은, 대황(大黃 Rhubarba) 2돈을 끓는 물 반 근에 담갔다가 2시간 후에 짜서 2시간에 2냥씩 복용(294호), 흑축과 백축 5~8푼을 물에 타서 먹거나 설탕물과 환으로 만들어 복용, 또는 자황(雌黃 Gomime gitte) 말 5돈과 계피(桂皮 Cannelle) 말 2돈과 건강(乾薑 Gingembre) 말 2돈을 물 5돈과 설탕 3냥과 섞어 오동나무열매 크기의 환으로 만들어 4시간마다 1개씩 복용이었다.(297호) 또한 노가주나무 열매나 잎 1냥을 끓는 물 1근에 30분 동안 담갔다가 3회로 나누어 복용(299호), 공이로 찧은 노가주나무 열매나 잎 8돈을 끓는 물 1근에 2시간 동안 담갔다가 0.5~2.5냥씩 1일 3회 복용(300호), 염초 1돈~1돈 8푼을 물 4~6냥에 타서 1냥씩 1일 3회 복용(313호)하라 하였다.

 

대소변 불통 치료방법은 소화불량 치료에도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약쑥 잎 2돈을 뜨거운 물 1사발에 담갔다가 식전에 복용(278호), 피마자기름 5돈~1냥을 더운 물·흰설탕·달걀노른자 등에 타서 식후 2시간에 복용(소아는 1~2돈, 대인은 3~4돈씩)(293호), 겨자(芥子 Moularde)를 3푼씩 하루에 3회 복용(298호)하는 것도 소화불량 치료방법으로 소개하였다. 또한 민들레 생뿌리 즙 4근을 중탕으로 1시간 동안 끓인 후 식혀서 매일 1~2푼씩 복용(302호), 민들레 잎이나 뿌리 8돈을 부드럽게 찧어 물 1사발과 1시간 동안 끓여서 매일 1~2.5냥씩 복용(303호), 민들레 생뿌리즙을 화주나 독한 소주 1냥에 7일간 담갔다가 1~2돈씩 매일 2~3회 여러 달 복용(304호)하는 것도 소화불량 치료법으로 제시하였다. 약재의 명칭과 사용하는 약재의 부위와 양, 조제방법, 복용하는 방법과 횟수까지 매우 자세히 설명하였다.

 

열이 날 때의 치료방법으로는 설사하기가 강조되었다. 피마자기름 5돈~1냥을 더운 물·흰설탕·달걀노른자 등에 타서 식후 2시간에 소아는 1~2돈, 대인은 3~4돈씩 복용하여 설사(293호), 대황 2돈을 끓는 물 반 근에 담갔다가 2시간 후에 짜서 2시간마다 2냥씩 복용하여 설사(294호), 현명분(玄明粉 Sulfate de Soude(sol de glauber)이나 마그네슘(硫酸 Sulfate de Magnlsie) 2돈이나 4돈을 온수 1사발에 타 마시거나 흑축과 백축(黑丑, 白丑 Kaladana) 2.5냥을 소주 0.5근 4냥에 7일간 담갔다가 2~3돈씩 마심으로써 설사하라(296호)고 하였다. 또 다른 방법은 흑축과 백축 5~8푼을 물이나 설탕물에 타서 복용하거나, 자황(雌黃 Gomimegitte) 말 5돈과 계피 말 2돈과 건강 말 2돈을 물 5돈과 설탕 3냥과 섞어 환으로 만들어 4시간마다 1개씩 복용하라(297호)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찬 약과 사할 약을 먹기(307호), 염초(焰焇) 3푼 5리~5푼을 물 2냥에 타 복용함으로써 열을 발표(發表)시키(308호)는 방법도 있다고 하였다. 흑축과 백축의 사용 용량과 방법을 통해, 같은 약재일지라도 함께 사용하는 것들에 따라 분량과 조제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또한 “서양 약 마그네슘”을 소개함으로써 민간약재 소개에만 머물지 않았다. 서양약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은 구입하여 사용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마그네슘 사용방법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마그네슘을 구입할 때 설명서가 있거나 판매자로부터 설명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화불량, 대소변 불통, 열날 때의 증상은 모두 소화기병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고통받고 있던 질병이 소화기병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886년 4월 작성된 알렌의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H. N. Allen and J. W. Hers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R. Meiklejohn, 1886)는 소화불량 환자가 많다고 하였는데,22) 1904~1906년의 질병자와 사망자 수를 조사한 『통감부 통계연보』(1907년 12월 발간)에서도 소화기병과 호홉기병의 비율이 매우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23) ‘각색문제’ 난에 소화기병 치료에 대한 설명이 많은 것은 1910년대에도 많은 한국인들이 소화기병을 앓고 있었고, 병원을 찾아가 치료하는 이들보다 경제적·지리적인 이유로 가지 못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병원을 찾지 못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각색문답’ 난은 민간치료약재를 소개한 것이다.

 

종기 치료는 소금·참기름·돼지기름 각 2돈씩을 합해 종기에 붙이기(238호), 밀 1냥과 송진 14냥과 참기름 10냥과 적열병유(的列並油)24) 1냥을 섞어 고약으로 만들어 모든 종기에 바르기(243호), 기름 3냥과 비누 3냥과 밀 3냥과 돼지기름 3냥을 섞어 고약으로 만들어 종기에 사용하라 했다.(244호) 또한 간 마늘과 참기름을 섞어 종기에 붙이라 하였으며(281호), 마늘 1통을 잿불에 구워 종기에 붙이라 하였다(2983호). 마늘 외에는 기름을 이용하여 고약을 만들어 종기를 없애는 방법들이었다.

 

전염병인 학질과 이질의 치료방법도 소개하였다. 학질은 알렌의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서 가장 흔한 질병이었고,25) 이질은 대한제국정부가 1899년 8월 16일 발표한 「전염병 예방규칙」이 대상으로 한 6개의 전염병 중 하나였다.26) 1909년 말 조사에 의하면 전염병 중 가장 많은 환자와 사망자 수를 기록한 것은 두창이었고 이어 장티푸스와 이질이었다.27) 그런데 ‘각색문제’ 난에서 학질과 이질을 거론한 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들 전염병으로 고생한 때문이었다. 특히 천주교회의 기록에 의하면, 학질은 키니네에 의존하였지만,28) 많은 성직자들이 이질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다.29)

 

학질 치료를 위해서는 회양목 잎을 말린 후 부수어 꿀에 개어 먹으라 하였고(222호), 금계랍도 효험이 없으면30) 아침 공복에 소금 2돈을 국에 넣어 먹으라 하였으며(239호), 약쑥 잎 2돈을 더운 물 1사발에 한참 담갔다가 차 마시듯 식전에 복용하라(278호) 하였다. 금계랍을 언급하면서도 회양목 잎, 약쑥 잎, 소금을 치료약재로 소개한 것은 쉽게 구할 수 있고 오랫동안 사용해 왔으며 저렴한 때문이었다. 이질은 매우 자세히 증상을 설명하였는데, 창자 속에 소화 안된 것들과 대변이 맺혀 배가 아프고 대변이 안 나오는 것으로 시작되니 설사해야 한다며, 피마자기름 5돈~1냥을 더운 물이나 흰설탕이나 달걀노른자에 타서 식후 2시에 복용하되 소아는 매회 1~2돈, 대인은 3~4돈씩 복용하라 하였다.

 

질병의 매개체인 개미와 파리를 잡는 방법도 소개하였다.31) 그런데 모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학질 치료법을 3회나 소개하면서도 학질을 일으키는 모기에 대한 주의나 퇴치방법은 언급하지 않았다. 모기가 학질의 매개체라는 것을 몰랐거나,32) 모기 퇴치방법을 알지 못한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각색문제’ 난에서 언급한 질병·증상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소개하였다.

 

가래나무 잎, 감초, 건강(乾薑 Gingembre), 겨자(芥子 Moularde), 계피(桂皮 Cannelle), 그을음, 노가주나무의 열매와 잎, 달걀노른자, 대황(大黃 Rhubarba), 돼지기름, 마늘, 민들레 잎과 뿌리, 밀, 박하 잎, 백두구(白 荳蔲), 백반(白礬), 비누, 생강, 석유, 소금, 소주, 송진, 수버들 껍질, 수수술, 약쑥 잎, 염초(鹽硝), 용뇌(龍腦), 유황(硫黃), 원지(遠志), 자황(雌黃 Gomime gitte), 적열병유(的列並油), 정향(丁香), 주정(酒精), 참기름, 피마자기름, 현명분(玄明粉 Sulfat e de Soude(sol de glauber), 호두나무잎, 화주(火酒 alcol), 회양목 잎과 뿌리, 후추가루, 흑축과 백축(黑丑, 白丑 Kaladana)33)

 

대부분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지 않으며,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들이다. 1896~1899년 전남 강진 병영의 ‘박약국’(朴藥局)에서 판매한 약재 목록에서도 감초, 계피, 망초, 박하, 백반, 원지, 유황, 정향을 확인할 수 있다.34) 또한 1915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위생과에서 발간한 『조선위생풍습록』(朝鮮衛生風習錄)에도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사용한 민간치료약재로 마늘, 미나리, 밀가루, 생강, 석유, 소금, 소주, 유황 등이 언급되어 있다.35) ‘각색문제’ 난에서 소개한 약재들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사용한 것인데, 그것은 치료효과가 입증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경향잡지』는 ‘각색문제’ 난에 소개하는 것이 “좋은 약”이라고 강조하였다.36)

 

‘각색문제’ 난에서 많이 소개한 약재는 소금, 소주, 돼지기름, 마늘, 참기름 등이다. 소금은 감기·눈병·목병·종기·풍습·토혈·학질 등의 치료에, 소주는 옴·횟배·소아 복학·설사·대소변 불통 치료와 열이 날 때, 몸을 강건케 하는 데 사용한다고 하였다. 기름 종류를 많이 소개하였는데 돼지기름은 동상·마른버짐·종기·화상 치료에, 참기름은 치통과 종기 치료에, 그리고 들기름은 질병의 매개체인 개미와 파리를 없애기 위해 다른 재료들과 함께 사용한다고 하였다. 마늘은 폐병(肺病 신음병), 종기, 횟배, 연주창, 버짐 치료에 좋다고 하였다. 소금, 소주, 마늘, 돼지기름은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것들이었는데, ‘각색문답’ 난은 많은 질병의 치료약재로 소개하였고, 하나의 약재가 여러 질병·증상의 치료에 사용된다고 설명하였다.

 

건강(乾薑 Gingembre), 겨자(芥子 Moularde), 계피(桂皮 Cannelle), 대황(大黃 Rhubarba), 자황(雌黃 Gomime gitte), 현명분(玄明粉 Sulfate de Soude(sol de glauber), 화주(火酒 alcol), 흑축과 백축(黑丑, 白丑 kaladana)에는 서양언어가 병기되었는데, 왜 이것들에만 서양언어를 기록하였는지 알 수 없다. ingembre, Moularde, Cannelle, Rhubarba, Sulfat e de Soude(sol de glauber은 프랑스어이고, alcol은 ‘alcool’의 오기인 것 같다. Gomime gitte와 kaladana은 어떤 언어인지 파악하기 어렵다.37)

 

1910년대 일제는 ‘효율’·‘위생’·‘개발’을 앞세우며 한국인들의 전통 의료 관행을 파괴, 해체, 변용하려 하였다.38) 한국인들의 민간치료법을 매우 부정적으로 기술한 『조선위생풍습록』은 인분, 소변, 동물의 분뇨 등을 언급하여 한국인들의 민간치료가 비문명적임을 강조하였다.39) 그러나 복통일 때 약쑥을 복용하고, “안병에 걸렸을 때는 염수로 세척”하며, “해수에 걸렸을 때는 분말로 한 유황을 따뜻한 탁주에 섞어서 복용(경남)”한다고 한국인들의 민간치료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였다.40) 일제가 아무리 부인할지라도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사용해온 약재와 치료방법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각색문제’ 난은 한국의 전통치료법, 민간치료법을 소개하였다.

 

‘각색문제’ 난은 약국판매 약들도 소개하였는데 간유,41) 글리세린,42) 금계랍, 마그네슘, 요도정기 등이다. 간유는 기운이 없을 때 강장케 하고 연주창 치료에 사용하며,43) 요도정기도 연주창에 좋은 약이며,44) 글리세린은 동상(凍傷) 치료에,45) 금계랍은 학질에,46) 마그네슘은 열이 날 때 해열을 위해 설사하는 데47) 사용한다고 하였다. 간유는 “肝油 Huile de foie de morne”, 마그네슘은 “硫酸 Sulfate de Magnlsie”, 요도정기는 “沃度丁幾 Teinture d’iode”라고 ( ) 속에 한자와 프랑스어를 병기하였고, 글리세린은 ( ) 속에 “glycerine”이라 프랑스어를 표기하였다. 키니네는 금계랍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기에 ‘Quinine’이라는 서양 언어의 병기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때문이라 여겨진다.

 

약국 판매 약들은 한국인들에 그렇게 낯설지 않았고, 효과도 좋았기에 ‘각색문제’ 난에서 소개하였다고 생각된다. 간유는 1907년 『황성신문』에 6개월,48) 1880년경 조선에 들어온 이후 학질 특효약으로 알려진49) 금계랍(金鷄蠟=키니네)은 『독립신문』에 1896년과 1897년에 5개월 동안 광고가 실렸다.50) 약국을 포함하여 매약상(賣藥商)51)은 1908년 말 3,840명(한국인 3,265명, 일본인 575명)이었고 이는 인구 1만명당 4.31명꼴이었다.52) 매약상의 숫자는 1910년 9월 1일 3,869명(한국인 3,103명, 일본인 766명),53) 1911년 12월 말에는 3,601명(일본인 387명, 조선인 3,203명, 외국인 11명)으로 집계되어54)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1만명당 4명이라는 매약상의 숫자는 적다고 할 수 없지만, 신문들에 약품광고들이 실렸으니 서양약품은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서양약품은 물론 한약재도 구입하기 어려웠다. 약재 원가의 5배 또는 그 몇 배였던55) 약값은 조선후기부터도 일반 물가보다 비싼 편이었기 때문이다.56) 대부분의 질병이 가난과 연관되어 있었고,57) 사람들은 약을 구입할 수 없을 만큼 대부분 가난했다.

 

‘각색문제’ 난은 각종 질병과 증상, 그리고 그 질병과 증상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들과 조제방법들을 매우 간략하게 그러나 다양하게 설명하여 한국인들의 질병치료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정신적인 건강과 함께 육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정보와 지식은 『경향잡지』가 계승한 『경향신문』이 창간 목적으로 강조하였던 ‘요긴한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Ⅲ. 전염병과 위생을 경고

 

해열·소변불통·장부통의 치료약재와 복용방법 소개를 마지막으로 ‘각색문제’ 난이 막을 내린지 1년 5개월여 후인 1916년 ‘학문’ 난에 전염병과 위생에 관한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학문’ 난은 341호(1916.1.15.)부터 366호(1917.1.31)까지 13개월 동안 연재되었는데 양력, 음력, 일식과 월식, 주야, 조수, 화산과 지진, 물·이슬·서리·안개·구름·비·눈·진눈깨비·싸래기눈·우박, 호박의 헛꽃을 따지 말 일, 전기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파리를 힘써 없이 할 일(348호), 위생에 주의할 일(357·358호), 공기(349·350·351·352호), 음식(359·360·361호), 운동(362호), 열(365·366호) 등 전염병과 위생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균(黴菌)이 파리의 발에 붙어 음식으로, 이어 사람의 입으로 옮겨져 전염병을 발생시키고 사람의 생명을 헤친다고 하였다. 그리고 파리는 더러운 곳을 쫓아다니므로 파리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청결’이라고 주장하였다.58) ‘각색문제’ 난에서 “파리 잡는 법”을 설명하였지만(229호) 왜 잡아야 하는지 이유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문’ 난에서는 파리 박멸 이유, 특히 봄철에 파리를 없애야 하는 이유까지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또한 각 집들이 깨끗하면 동리가 깨끗하고, 각 동리들이 깨끗하면 고을이 깨끗해진다면서 청결이 모두에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각색문제’ 난과 비교할 때 ‘학문’ 난은 국판 2~4면으로 분량이 크게 증가하였기에 자세한 설명이 가능하였다.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학문’ 난은 독자들에게 충분한 이해와 공감을 주었을 것이다.

 

‘학문’ 난은 신선한 공기가 위생에 도움이 된다고59) 주장하였다.60) ‘각색문제’ 난에서는 “제일 좋은 바람을 쏘이는 것”이 위생에 좋다고 했었는데,61) ‘학문’ 난에서는 시골 공기가 신선하여 위생에 좋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오랜 박해시기를 거치면서 산중으로 숨어들었고, 그래서 산골·시골 중심으로 교우촌을 형성한 천주교 신자들의 삶의 공간을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학문’ 난은 “병에 걸리지 않기로 미리 방비함”을 위생이라 하였다.62) 따라서 항상 위생에 주의해야 하는데 특히 환절기에 조심해야 한다고 하였다.63) 그리고 ‘신체학’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각자 위생에 주의할 것을 제시하였다. 즉 ① 장위(腸胃)가 건강하면 전염병의 미균이 번성할 수 없으니 장위를 튼튼하게 할 것, ② 소화에 부담되지 않도록 모든 음식은 익혀서 절조있게 섭취, ③ 잠은 사람의 “육신의 기계”를 쉬게 하므로 더운 방에서 7~8시간 자기, ④ 의복 청결, ⑤ 집안 청결이었다.

 

그런데 ‘신체학’, ‘육신의 기계’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의 신문잡지들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신체학’은 사람 몸의 구조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고, ‘육신기계’는 사람의 몸을 기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사람의 몸을 정교한 기계로 인식한 하비(W. Harvey) 등의 이론·증명64)을 거쳐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65) 서양의학서들을 받아들인 조선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영향을 미쳐 최한기(崔漢綺)는 『신기천험』(身機踐驗, 1866)에서 사람의 몸을 기계라고 생각하여 ‘신기(身機)’라 하였다.66)

 

‘학문’ 난은 “순사가 다니며 청결시키는 것을 까다롭다고 생각하지 말”고, 청결케 하는 것을 “각 사람의 본분으로 힘쓰”라 하였다.67) 일제의 강점 이후 한국의 위생은 경찰조직이 담당하였고, 일제는 ‘위생경찰’68)을 통하여 한국인의 삶을 감시·통제하였다.69) 위생경찰은 통제의 측면에서 한국인의 위생을 인식하고 접근하였다. 일제는 1916년 9월 콜레라 환자들이 발생하자, 한국의 위생시설이 불완전하고 한국인들의 위생사상이 유치하기 때문에 개인들의 자제력·공덕심(公德心)에만 의뢰할 수 없다며 “위생상 다소의 압박을 가하”70)겠다고 협박하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학문’ 난은 일제경찰의 통제를 “까다롭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유는 일제의 통제가 두려운 때문이 아니라, 청결은 사람이 지켜야 할 본분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각자 청결해야 이웃들도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정책을 홍보하는 것도, 식민정책에의 협력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었다.

 

일제는 강제합병 이후 한국의 위생문제를 전염병 방역으로 집중시켰다.71) 매년 전염병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집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염병 환자와 사망자 수는 크게 감소하지 않았다. 일제는 호역(虎疫)이 습격하면 한국·한국인들의 피해는 일본과는 비교 안 될 정도로 클 것이라고 협박하였다.72) 콜레라의 발생도 전염도 그로 인한 피해도 모두 한국인들의 책임이라는 것이었다. 온갖 규제와 선전을 했음에도 일제가 방역에 성공한 전염병은 콜레라와 천연두였는데,73) 콜레라와 천연두가 전체 전염병 발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다.74)

 

‘학문’ 난에서 전염병과 위생을 자세히 설명한 이유는 당시 콜레라 등 전염병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1916년 일본에서 성행한 콜레라가 부산으로 유입되어 부산, 진주, 거문도, 인천 제물포 등에서 환자들이 발생하였고, 여기저기서 장티푸스와 이질도 유행하였다.75) 1916년 8월 22일 경북 방어진의 한 일본인이 “의사(疑似)호열자”에 걸려 부산검역소에서 검사를 받았고,76) 8월 30일 부산 입항 관부연락선 고려환(高麗丸)의 탑승객이 의사호열자에 걸려 대전과 수원역에서 검역이 이루어졌다.77) 9월 5일에는 부산 입항 일지환에 탑승한 일본인이 목포행 기차 안에서 의사호열자로 진단되어 같은 기차에 탑승한 86명이 검역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78) 『매일신보』와 『부산일보』에서 ‘의사호열자’라고 하였지만 분명 콜레라였다. 9월 19일에는 인천에서 13명, 부천에서 10명, 군산에서 1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였고, 인천에는 첫 환자 발생 이후 “호열자 수 22명”이라는 기사가 실렸다.79)

 

당시 콜레라의 유행 상황은 교회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콜레라가 만연한 제물포 싸리재역이 폐쇄되었고,80) 제물포성당이 위치한 사동(寺洞)거리가 격리되어81) 제물포성당으로의 통행이 금지되었다.82) 대구성당도 10일 동안 출입이 금지되었고,83) 로베르(A. Robert, 金保祿) 신부와 페셀(P. Peschel, 白鶴老) 신부는 그들이 탑승한 전차84)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여 부산격리소에 36시간 동안 머물렀다.85) 일제경찰은 대전을 사목방문한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를 “전염병 유행지역인 대구에서 오는 사람”이라 기록하였다.86) 종현수녀원에서 돌보고 있던 100여 명의 아이들도 콜레라 예방접종을 해야 했다.87)

 

1916년의 콜레라 발병 이전에도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은 전염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11년 한반도와 지리적·교회적으로 밀접한 만주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페스트로 사망하였고,88) 종현수녀원에서는 열병으로 수녀지원자가 사망하고 프랑스인 수녀와 한국인 지원자들이 앓아누웠다.89) 1912년에는 콜레라로 일본인 신자가 사망하였고,90) 1914년에는 종현수녀원에 성홍열91)이 유행하였다.92) 1915년 2월 제물포수녀원에서는 수녀들과 수녀들이 돌보는 아이들이 열병을 앓았고,93) 종현수녀원에서는 장티푸스에 걸린 수녀가 의사의 권유로 격리되었으며,94) 베네딕도회 수사도 장티푸스에 걸렸다.95)

 

‘학문’ 난은 파리와 쥐가 전염병의 매개체라며 박멸을 주장하였다.96) 그런데 쥐는 “가장 무서운 전염병인 흑사병(黑死病 페스트)을 전염시키므로 무섭다”고 하였지만, 파리가 매개하는 구체적인 전염병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염병을 4가지로 분류하였다. ① 역질(痘瘡)·홍역(痲疹)·양독반은 바깥 피부로부터 병균이 전염되고, ② 흑사병은 대개 사람이 호흡할 때 병균이 코와 입으로 들어가서 전염되고, ③ 가슴병(肺結核 폐결핵, 토질병, 男음허화동, 女노점병)·염병·괴질은 병균이 입으로 들어가서 식통으로 창자로 들어가 전염되며, ④ 이질은 한국인들이 전염병으로 여기지 않지만97) 외국 의사들은 전염병으로 파악한다고 설명하였다.98) 두창·홍역·성홍열 외에는 모두 입을 통해 전염되는 전염병들이었다. 그래서 손을 자주 씻고, 음식 섭취에 주의하라 하였다.99) 그리고 음식이 인간의 몸 안에서 소화 배설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100) 미균을 구분하여 된장·간장·초에 많이 있는 미균은 사람에게 해가 안 되고, 초는 조금씩 먹으면 이질에 쉽게 전염되지 않는다고 하였다.101) 이어 전염병 등 질병의 원인이 되는 기생충을 요충, 십이지장충, 회충, 도충(條蟲=寸蟲)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회충·촌충은 한국인에게 많은데 “촌충을 전에는 석류나무 뿌리나 비자로서 잡더니 지금은 불과 몇십 전만 허비하면102) 어렵지 않게 잡는다”고 하였다.103) 기생충 약이 개발되었고 비싸지 않으므로 쉽게 박멸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경향잡지』 366호(1917년 1월 31일) ‘학문’ 난의 마지막 문장에는 “(미완)”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학문’ 난의 마지막이었다. 계속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다. ‘학문’ 난은 전염병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전염병 예방을 위한 위생을 강조하였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전염병의 매개체인 파리와 쥐를 박멸해야 하고, 인체의 구조를 알고 음식이 잘 소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각색문제’ 난은 질병에 걸린 후의 치료에 중점을 두었는데, ‘학문’ 난은 전염병의 원인과 전염병 매개체, 그리고 전염병 예방을 설명하는데 주력하였다. 의료 계몽의 방향과 내용이 치료에서 예방으로 한 단계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Ⅳ. 질병치료 전문가와 종교적 설명 강조

 

‘학문’ 난이 미완으로 끝난 지 5개월 후인 1917년 6월 30일자 『경향잡지』 376호에 ‘위생’ 난이 마련되었다. 국판 1.5~3.5면 분량의 ‘위생’ 난은 성인 대상으로 27회, 잉부와 소아 대상으로 17회를 수록하였는데 559호(1925.2.15)까지 계속되었다.104) 수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생 개괄, 태양의 광, 사람의 골격, 피부, 음식 소화하는 기계, 염통, 허파, 배설기, 신경계, 오관[五官 : 후관(嗅官), 미관(味官), 성음(聲音), 시관(視官), 청관(聽官)], 하절 위생, 병을 전해주는 두 매개, 근일에 유행하는 독한 감기, 유행독감에 주의사항, 추절 위생, 냉수치료법, 각기 혹 각기병(脚氣 脚氣病), 채독은 십이지장충, 광견에게 물리고 치료 안 하면 참혹히 죽음, 소아 위생[부모 의무, 어린아이란, 유아사망율, 잉부, 잉태 시초의 증상과 위생, 잉부의 위생(음식, 정신, 운동, 의복, 대소변, 청결, 의사진찰과 치료 받아야 할 증세), 해산시 위생(해산준비 : 방, 소변, 산파, 산후), 아이 태 자른 후, 산모의 산후, 산모 음식, 산모 미역국, 산모 돌봄, 어린이의 육신기계, 소아 1년, 소아 2년, 젖, 소아의 의복, 모기장, 소아의 잠, 젖먹이는 횟수, 젖먹인 후, 젖의 호불호, 우유, 소아의 대소변, 소아의 목욕, 소아의 입청결, 소아의 우는 것]

 

성인 대상 내용은 생명의 시작과 건강, 위생법, 사람의 골격, 피부, 소화기, 호흡기, 배설기, 신경계, 오관, 질병의 매개체, 여름과 가을의 위생, 유행독감, 냉수치료법, 각기병, 채독, 광견병에 관한 것이다. 잉부와 소아 대상 내용은 잉부의 위생과 출산과 산후조리, 소아의 위생과 건강에 대한 것이다.

 

‘위생’ 난은 ‘각색문답’이나 ‘학문’ 난과 달리 왜 ‘위생’ 난을 마련하는지 설명하였다. 즉 『경향잡지』는 천주교 신자들의 영신 위생은 물론 육신 위생도 돌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05) 성인(聖人)들은 부모·처자·돌봐야 할 사람 없이 산중에서 혼자 수도하므로 괴로움을 자청할 수 있고, 자기를 편태할 수도 있고, 창질에서 구더기가 기어나오면 다시 집어넣을 수도 있고, 좋은 음식에 먼지나 재를 섞어 먹었다. 그러나 부모·처자·돌봐야 할 이가 있는 사람은 육신이 강건해야 노동을 하여 부양할 수 있으므로 위생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378호) 또한 “육신이 병들어 매우 아프면 신공을 열심히 하기 어려우므로 신공을 항상 잘 하기 위해 육신 위생을 돌보아야 한다고 하였다.(401호) 그리고 의원과 약은 병든 후에 쓰는 것이고, 위생법은 “당초에 병에 걸리지 않기로 미리 방비함”106)이니 “위생법을 잘 지켜 병에 걸리지 않으면 약이 필요치 않”다고 하였다.(376호)

 

‘위생’ 난은 인간의 생명이 천주의 창조라 정의하면서 시작하였다. 즉 “천주가 각 사람에게 보배로운 생명을 주셨으니 이 생명을 잘 기르고 잘 보존하고 잘 호위하면 병 없이 오래 살 것이”며, 나쁜 공기를 마시거나 상한 음식이나 해로운 음식을 먹거나 과음과식을 하거나, 태양의 빛과 열 섭취·운동이 부족하거나, 심신이 과로하면 병을 자청해 빨리 죽고 비명에 죽는다고 하였다. 또한 사람과 모든 생물은 천주가 천지만물 중 가장 먼저 만든 태양의 광을 받아야 생장한다고 하였다.107) 인간의 생명 등 천지만물이 천주의 창조물임을 강조하여 종교적인 시각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설명은 계속되었다. ‘사람의 골격’을 설명하는데도, 천주가 아담의 늑골로 여자를 만들어 남자의 늑골은 11대와 12대이고 여자의 늑골은 좌우 12대라 하는데, 천주가 아담의 늑골 하나를 빼낸 후 새 늑골 하나를 주었으니 남녀의 뼈는 각각 207개라고 하였다.108) 해산 때는 “고명한 의사와 산파의 치료를 받”되 주성모께 의탁하여 보호하심을 구하라 하였다며109) 성모(聖母)도 언급하였다. 여러 신부들이 말하기를 고해영성체하고 성모께 의지한 잉부는 모두 순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의술과 약 등 사람의 힘[人力]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천주와 성모께 의지하고 잉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110) 인간의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종교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경향잡지』가 천주교회에서 간행하는 종교잡지임을 분명하게 드러낸 서술이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의 관계를 “서로 긴절히 결합한 것”으로 보는 천주교회는111) 사람의 육신 어디에나 영혼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112) 그리고 인간이 천여 가지 소리를 한꺼번에 들을지라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육신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혼의 판단 때문이라 하였다.113) 또한 천주가 모든 인간에게 육신기계를 주시는데, 육신기계가 정밀치 못하게 되거나 불구가 되는 것은 부모나 그 자신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114) 따라서 특별히 어린아이의 부모, 장차 부모가 될 사람은 소아위생에 각별히 주의하라 하였다. 어린아이는 “천주께 받은 큰 보배”이므로 잘 기르고 가르쳐 건강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부모의 본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이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출생 후 철나기까지를 말하는데, “인류발달의 근원, 가족과 사회와 나라의 근원, 현세에는 교우숫자를 증가시켜 교회를 확장, 후세에는 천국 성인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근본이라 하였다. 따라서 어린이는 잉태된 순간부터 위생에 주의해야 한다면서 소아위생115)을 거론하였다.116)

 

‘위생’ 난은 1918년부터 한반도에 휘몰아친 “독한 감기” 즉 스페인독감117)도 거론하였다.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이 병을 서양에서는 인플루엔자(유행독감)118)라 하는데 원인도 예방법도 치료법도 알지 못하는 전염병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이 병에 걸리면 “감기에 먹는 탕약을 복용하고 땀을 내며 이삼일은 밖에 나가지 말고 찬바람을 쐬지 말”고, ‘보음익기전(補陰益氣煎)’119)과 시교복령탕(柴翹茯苓湯)이라는 한약방문을 활용하라 하였다. 또한 집안 청결, 방안 환기, 의복과 침구를 햇빛에 소독, 사람 많은 곳에 안 가기, 병자의 가래침과 오예물 등 소독, 의사에게 진찰받기라며 경시청 훈령120)을 실었다.121) 그리고 독감에 걸려 몸조리를 못하면 티푸스(열병)나 폐렴(肺炎 허파병)으로 변하기 쉽다며 주의사항도 언급하였다.122)

 

『부산일보』는 1917년 12월에 독감이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하였으며,123) 『매일신보』는 1918년 10월 11일 독감에 관한 첫 기사를 수록하였다.124) 서울교구장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는 1918년 10월 20일부터 독감에 걸린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신자들의 상황을 그의 일기에 기록하였다. 즉 용산신학교의 학생들이 독감에 걸렸고, 드뇌(E. Deneux, 全學俊)·라리보(A. J. Larribeau, 元亨根)·멜리장(P. Mélizan)·클랭페터(Klempeter, 葛) 신부는 독감 때문에 미사를 드리지 못했다. 종현수녀원의 수녀들과 수녀들이 돌보는 아이들, 제물포본당학교의 선생수녀들도 독감에 걸렸다. 독감 때문에 일요일 미사 참석자 수가 크게 감소하였고, 지방에서도 많은 신자들이 성당에 가지 못했다.125) 대구교구에서도 드망즈 주교와 많은 성직자들과 유스티노신학교의 학생들 대부분이 독감에 걸렸다. 그래서 이듬해 4월까지 대구성당의 동굴 미사를 중단하였다. 전북 진안의 장재동공소에서는 신자들 중 1/3이 독감 때문에 찰고(擦考)를 하지 못했다.126)

 

1919년 1월경 진정 국면에 접어 들었던 독감은 그해 11월 초순부터 다시 유행하여 1920년 봄까지 많은 사상자를 냈다.127) 베네딕도수도회에서는 독감에 걸린 신부가 병자성사를 받았고, 성탄 자시 미사 참석자 수도 예년보다 적었다. 약현본당 신부도, 송도본당의 복사와 사무원도 독감에 걸렸다. 교회는 독감이 1920년에 접어들자 세력이 약해졌다고 기록하였다.128)

 

‘위생’ 난은 환절기 특히 여름철과 가을철의 위생을 강조하였다. 환절기에 많은 병이 발생하므로 매년 언급하였지만, 위생 개념이 머릿속에 새겨지도록 또 거론한다고 하였다. 특히 경성에 파라티푸스(염병의 종류)가 성행하는데,129) 생선과 생나물이 질병의 제일 원인이라고 의사들이 말했다며 경고하였다. 또한 파리와 쥐가 “위생의 제일 원수”이니 박멸해야 한다고 하였다.130) 음식·침소·의복·집안 청결에 주의하고, 본인의 위생은 물론 소아의 위생도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31)

 

질병의 가장 큰 매개체로 공기와 물도 거론하였다. 산중에 깨끗한 공기 가득하므로 산중에서 생활하는 신자들은 육신건강에 좋을 뿐 아니라 수계하기에도 편하다고 주장하였다.132) 토질, 가슴병 등 전염병 환자들이 함부로 가래침을 뱉지 않도록 관청에서 법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타구 그릇을 두게 한 것은 위생을 위해서라고 하였다.133) 그리고 호열자(콜레라, 괴질)·티푸스(염병)·적리병 등 수인성 전염병은 물론 조충(螩虫 촌백충)·회충·십이장충·토질충 등 기생충도 모두가 물로 전염하니 물과 모든 음식을 익혀 먹을 것을 강조하였다. 위생을 위해 수돗물을 사서134) 먹는 것이 좋다고도 하였다. 그러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수돗물 값은 결코 저렴한 것이 아니었다.135)

 

‘위생’ 난은 의사[洋醫]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육신의 질병 치료 전문가로136) 거듭 강조하였다. 즉 “의사는 항상 사람의 맥을 짚어 보기로 숙습하는 고로 다른 사람보다 맥 노는 것을 더 잘 알고”137)있다.(390호) 독감에 걸리면 즉시 의사에게 진찰 받으라고 경시청에서 훈령138)하였다.139) 독감은 티푸스(열병)나 폐렴(허파병)으로 변하기 쉬우니 의사에게 즉시 진찰과 치료를 받으라.140) 잉부의 잉태 시초의 몸·정신·식성·본증의 변화와 구역증이 평상시보다 과하면 위태한 병이니 즉시 의사에게 진찰받고 치료해야 한다.141) “조선사람은 뒤 굳는 것을 병으로 여기지 않지만 의사들을 매우 해롭다고 생각하니”, 변비가 여러 날 계속되면 의사에게 문의하여 치료를 받으라.142) 고명한 의사와 산파의 치료를 받고, 오래도록 후산이 안되고 피가 많이 나오거든 즉시 의사나 산파를 청하여 치료를 받게 하라.143) 산모의 대변이나 소변이 불통되는 지경에 이르거든 즉시 의사의 진찰과 치료를 받게 하라.144) 소아가 38도가량이면 음식 소화와 신경기계를 조당하여 병이 나기 쉬우니 이런 경우에는 의사를 청하되 특별히 소아과 의사를 청하여 진찰과 치료를 받게 하라.145) 의술이 진보되어 사람의 건강을 진찰할 때 대소변을 검사하니 소아의 대변에 특별한 증세가 있거든 의사에 진찰을 청할 것이다.146) 병독의 침입을 막기 위해 소아의 입속과 입 주위를 소다수로 씻기는데, 소다는 의사에게 청구함이 가하다.147) 소아가 인후병이나 지후테리 병이 있어 울 때는 의사에게 진찰을 청하여 치료하라.148) 십이지장충(채독)에 걸리면 서양법대로 의술 공부한 의사에게 가서 병론을 하고 진찰을 청하면 약을 주며 먹는 법을 가르쳐 준다149)라며 계속하여 의사의 진료와 치료를 주장하였다.

 

또한 잉부가 “불가불 의사의 진찰과 치료를 받아야 할 증세”로, 구역증과 구토증이 잉태 후 삼사 개월까지 연속할 때, 소화불량으로 항상 속이 거북하고 불편할 때와 대변 횟수가 너무 적고 대단히 불편할 때, 정신이 이상하고 반미치광이 같고 잠이 오지 않고 잡생각이 많을 때, 유종이 일어나 몸이 덥고 젖가슴이 홧홧하며 붉어지며 부을 때, 충치로 힘들 때, 경도(經度)가 멈추지 않을 때, 소변 불통 때, 가슴이 울렁거리고 답답하고 숨이 찰 때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였다.150)

 

이처럼 ‘위생’ 난은 의사를 질병치료의 전문가로 계속 언급하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위생’ 난은 “서양 법대로 의술을 공부한 의사”의 “즉시” 진료와 치료를 강조한 한편으로 한국의 전통치료와 민간치료 방법을 경계, 폄하하였다. 즉 한국사람들은 미친개에게 물리면 마늘 뜸질을 하거나 비단벌레를 볶아서 가루로 만들어 술에 타 먹으면 낫는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다.151) 소아 변비일 때 “마구 자기 주견으로 상약을 쓰지 말고 의사에게 문의함이 좋”고,152) 병이 들면 “무식한 구습으로 이것저것 상약을 하지 말고, 똑똑한 의사에게 진찰과 치료를 받”으라.153) 산모의 대소변이 불통되면154) “아무 이치도 없는 상약을 마구 쓰지 말지니, 이런 상약은 공연히 사람만 괴롭게 할 뿐 아니라 생사람을 죽게 하는 폐단이 있으니 아주 조심”해야 한다.155) 채독은 십이지장충156)으로, 치료약은 “이것저것 상약 여러 가지인 중 흔히 겅금(黑礬157)물 들이는 재료)을 먹어서 혹 낫기도 하고 고치지 못하고 죽은 일도 많”다고158) 하였다.

 

‘상약(常藥)’은 “가정, 개인이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 쓰는 약”이다. 그런데 상약이 아무 이치도 없고 사람을 죽게도 만든다며, 상약하는 것을 무식한 구습으로 폄하하였다. 전문가인 의사에게 질병을 치료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지라도, 상약을 부정적으로만 서술한 것은 한계이다. 상약은 많은 한국인들이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오랜동안 이용했던 것이고, 경제적·지리적인 이유 등으로 의사와 약국에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질병을 치유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병원과 의사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1910년 9월 1일 현재 한국에 있는 병원은 106개(관공립 24, 사립 78개 : 일본인 96개, 한국인 10개), 의사는 2,176명(일본인 370, 한국인 1,806)을 기록하였는데,159) 2년 후인 1912년에는 145개 병원(관공립 22, 사립 123), 의사 수 2,167명(일본인 409, 한국인 1725, 외국인 33)으로 의사 수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또한 당시 한국인들은 서양식 병원과 서양의술을 펼치는 의사들에 익숙하지도 않았다.

 

질병의 전문가 치료와 소아위생을 강조한 ‘위생’ 난은, 의료 문제를 교회와 연계하여 계속 설명함으로써 『경향잡지』가 종교잡지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소아위생을 강조함으로써 어린이와 잉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한국인들의 민간진료방법을 폄하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는 하였으나 의사의 진료와 치료를 강조함으로써 한국인들이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위생’ 난에 수록할 내용의 순서를 제시하였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으며,160) 두 번뿐이지만 “이 다음 호에는”라고 하여 다음 호의 내용을 예고하였고,161) ‘소아위생’ 부분은 “아오스딩 최상훈(崔相勳)”162)이라고 필자를 밝혔다. 질병 치료보다는 예방, 민간치료보다는 전문가 치료를 강조한 ‘위생’ 난은 ‘각색문답’ 난과 ‘학문’ 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의료계몽의 방향이었다.

 

 

Ⅴ. 맺음말

 

『경향잡지』의 ‘각색문제’·‘학문’·‘위생’ 난들은 1910년대 한국천주교회가 전개한 의료계몽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종교적인 내용 수록만을 허용받은 『경향잡지』에는 일제 식민정책이나 통치의 실상을 비판·비난하는 글을 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향신문』 창간 목적이었던 “요긴한 지식”을 “모든 사람이 알아듣기 쉽게” 실을 수는 있었다.

 

‘각색문제’·‘학문’·‘위생’ 난에 수록된 의료지식은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당시 한국인들에게 요긴한 지식이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던 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을 괴롭혔던 질병들이 의료 계몽을 위한 ‘난’들을 마련하게 하였다. 이들 ‘난’에서 다룬 내용은 당시 한국인들이 겪고 있던 질병들과 그 질병의 치료약재, 그리고 다양한 치료방법들을 잘 보여준다.

 

‘각색문제’ 난은 각종 질병과 증상, 치료약재들과 조제방법들을 간략하게 그러나 다양하게 설명하여 질병치료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정신적인 건강과 함께 육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지식은 『경향잡지』가 계승한 『경향신문』이 창간 목적으로 강조하였던 “요긴한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학문’ 난은 전염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위생을 강조하였다. ‘각색문제’ 난은 질병에 걸린 후의 치료에 중점을 두었는데, ‘학문’ 난은 전염병의 원인과 전염병 매개체, 그리고 전염병 예방을 설명하는데 주력하였다. 『경향잡지』가 펼친 의료계몽의 방향과 내용이 치료에서 예방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생’ 난은 질병예방과 소아위생을 강조하였고, 교회와 연계하여 의료를 설명하였다. 소아위생을 강조함으로써 어린이와 잉부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으며, 한국인들의 민간진료방법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는 하였으나 의사의 치료를 강조함으로써 한국인들이 전문적인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랬다. 이는 질병치료의 대상을 구별하지 않았던 ‘각색문제’ 난이나 ‘학문’ 난에서 전개한 의료계몽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고, 교회와 연계하여 설명함으로써 『경향잡지』가 전개한 의료계몽의 특징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비슷한 내용들을 되풀이하고, 1920년대에 발행된 각종 신문잡지들이 위생과 건강의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1911년부터 시작된 『경향잡지』를 통한 한국천주교회의 의료계몽활동은 1925년에 마무리되었다. 

 

 

참고문헌

 

『가톨릭신문』, 『경향잡지』, 『관보』, 『대한매일신보』, 『동아일보』, 『매일신문』, 『매일신보』, 『부산일보』, 『조선총독부관보』, 『황성신문』

『고종실록』, 『드망즈주교일기』, 『뮈텔주교일기』, 『타벨라』, Compte Rendu de la Société des M.E.P. de Seoul(1911).

한국전통지식포털(https://www.koreantk.com/ktkp201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각사등록(http://db.history.go.kr/id/ks)

내부 위생국 편, 『한국위생일반』, 1909.

재컬린 더핀, 신좌섭 옮김, 『의학의 역사』, 사이언스북스, 2006.

정진석, 『한국잡지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조선총독부 엮음, 신종원·한지원 옮김, 『조선위생풍습록』, 민속원, 2013.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통계요람』, 1911.

황상익, 『근대의료의 풍경』, 푸른역사, 2013.

강신익, 「동서 의학의 신체관」, 『생명윤리』 3-2, 한국생명윤리학회, 2002.

김덕진, 「한말 醫藥需要를 통해 본 약값과 질병 : 전라도 강진의 박약국 사례-」, 『인문학연구』 60,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0.

김문용, 「서양의학의 수용과 신체관의 변화」, 『동양고전연구』 37, 동양고전학회, 2009.

김택중, 「1918년 독감과 조선총독부 방역정책」, 『인문논총』 74-1, 인제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박승만, 「일제강점기 가톨릭교회의 지면을 통한 의료계몽활동 : ‘경향잡지’와 ‘가톨릭청년’을 중심으로」, 『연세의사학』 23-2, 의학사연구소, 2020.

방상근, 「조선후기 천주교회의 의료활동」, 『교회사연구』 5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신동원, 「일제하 한국인의 사망률 감소 원인에 관한 한 고찰-급성전염병 발생율, 사망률, 치명율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9-1, 한국과학사학회, 1987.

양정필, 「한약업자의 대응과 성장」, 『한의학, 식민지를 앓다』,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아카넷, 2008.

이영찬, 「최한기의 기학적 인간본질과 인성 덕목의 현대적 함의」, 『사회사상과 문화』 20-1, 동양사회사상학회, 2017.

이형식,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위생정책과 조선사회」, 『한림일본학』 2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2.

이흥기, 「19세기말 10세기 초 의약업의 변화와 개업의」, 『의사학』 19-1, 대한의사학회, 2010.

정혜경·김혜숙,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 구현된 위생정책」,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매일신보 : 1910년대』, 두리미디어, 2005.

조 광, 「경향신문의 창간 경위와 그 의의」, 『경향신문』 영인본, 1974.

 

………………………………………………………………………………………………

 

1) 1906년 5월부터 신문 창간과 담당자에 대한 일이 계획, 추진되고 있었다.(『뮈텔주교일기』 1906년 5월 3·4일)

 

2) 강점 이전에도 일제는 『경향신문』의 기사를 문제삼아 184호(1910년 4월 22일) “금수같은 헌병과 보조원”이라는 기사가 치안을 방해했다며 발매 반포를 금지하고 압수하였다.(『뮈텔주교일기』 1910년 4월 25일 ; 『관보』 융희 4년 4월 26일, 告示 : 내부고시 제39호)

 

3) 『가톨릭신문』 1988년 6월 26일, 최석우,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저항운동(13)”

4) 『뮈텔주교일기』 1910년 10월 15일.

5) 『뮈텔주교일기』 1910년 12월 5·8일.

6) 『뮈텔주교일기』 1910년 12월 5일.

7) 『뮈텔주교일기』 1910년 12월 9일.

8) 『뮈텔주교일기』 1910년 12월 28일.

 

9) 220호는 1910년에 발간된 『보감』 (169호~219호)에 연재된 기사들의 목록을 수록하였기에, 일제가 문제 삼을 내용은 없었다.

 

10) Compte Rendu de la Société des M.E.P. de Seoul, 1911.

11) 이중한, “잡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 정진석, 『한국잡지역사』, 커뮤니케이션북스, 2014, 40~42쪽.

 

12) 『조선휘보』, 『조선총독부월보』, 『조선총독부조사월보』 (이상 조선총독부 발간), 『朝鮮及滿洲』, 『신문계』, 『서광』, 『반도시론』, 『여자계』, 『서북학회월보』.

 

13) 정혜경·김혜숙,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 구현된 위생정책」,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과 매일신보 : 1910년대』, 두리미디어, 2005.

 

14) 박승만, 「일제강점기 가톨릭교회의 지면을 통한 의료계몽활동 : 경향잡지와 가톨릭청년을 중심으로」, 『연세의사학』 23-2, 의학사연구소, 2020.

 

15) 본고에서 다루는 ‘위생’난이 559호(1925.2.15.)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437호(1920.1.15.)-소아위생(소아의 우는 것), 465호(1921.3.15.)-위생(냉수치료법), 535호(1924.2.15.)-위생(각기 혹 각기병), 542호(1924.5.15.)-위생(채독은 십이지장충), 559호(1925.2.15.)-위생(광견에게 물리고 치료 안하면 참혹히 죽음)에만 수록되었다.

 

16) 305호(1914년 7월 15일)에는 ‘각색문제’ 난이 없다.

 

17) 드망즈 신부가 주교로 임명되어 편집책임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드망즈 신부의 주교 임명 전보가 서울의 주교관에 도착하였다.(『뮈텔주교일기』 1911년 4월 23일 ; C-R-S, 1911)

 

18) 『뮈텔주교일기』 1913년 5월 11·19·31일.

 

19) 조광, 「경향신문의 창간 경위와 그 의의」, 『경향신문』 영인본, 1974, 6쪽 ; 최종고, 「한말 ‘경향신문’의 법률계몽운동」, 『한국사연구』 26, 한국사연구회, 1979, 117쪽.

 

20) 한국인 신부는 ‘각색문제’ 난을 시작한 1911년 15명이었고, 1914년에는 18명이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부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324쪽.

 

21) 방상근, 「조선후기 천주교회의 의료활동」, 『교회사연구』 5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8, 89~90쪽.

22) 황상익, 『근대의료의 풍경』, 푸른역사, 2013, 344~345쪽.

 

23) 전염병, 발육 영양병, 피부 근육병, 골관절병, 순환기병, 신경계병, 호흡기병, 소화기병, 비뇨생식기병, 외과질환, 중독증 등 11개 질병균으로 분류하였는데 소화기병과 호흡기병이 전체 질병의 거의 절반이었다.(황상익, 『근대의료의 풍경』, 461~462, 464쪽).

 

24) 이것이 소나무 송진에서 추출한 테레빈유(turpentine)라는 것은 김나영 박사(일본사 전공)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2021.7.16.)

25) 황상익, 『근대의료의 풍경』, 344~345쪽.

 

26) 호열자, 腸窒扶斯(장티푸스), 赤痢(이질), 實布垤里兒(디프테리아), 發疹窒扶斯(발진티푸스), 痘瘡.(『고종실록』 광무 3년 8월 16일 ;『관보』 광무 3년 8월 29일)

 

27) 호열자(환자 110명, 사망 81명), 장티푸스(801, 230), 이질(349, 84), 디프테리아(40, 15), 두창(1,853, 478), 발진티푸스(1, 0), 성홍열(15, 10).(내부 위생국 편,『한국위생일반』, 1909, 12쪽)

 

28) 뮈텔 주교는 열이 나면 키니네를 복용하였는데(『뮈텔주교일기』 1899년 8월 22일)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비슷했을 것이다.

 

29) 『드망즈주교일기』 1912년 6월 13일, 7월 26일 ;『타벨라』 1912년 10월 30일(『타벨라』 1912년 제7호, 12월 1일 :『교회와 역사』 393, 2008년 2월, 10쪽) ; 『타벨라』 1912년 12월 1일(『타벨라』 1913년 제8호, 1월 1일 :『교회와 역사』 395호, 2008년 4월, 15~16쪽) ; 『타벨라』 1913년 6월 21일(『타벨라』 1913년 제2권 제2호, 7월 1일 :『교회와 역사』 400호, 2008년 9월, 13쪽) ;『드망즈주교일기』 1913년 10월 19·20일, 11월 2일 ;『타벨라』 1913년 10월 20일, 11월 12일(『타벨라』 1913년 제3권 제7호 :『교회와 역사』 404호, 2009년 1월, 12~13쪽)

 

30) 가짜 금계랍이 팔리기도 했던 것 같다.(『경향잡지』 221호, 1911년 1월 15일, “평론 : 약병의 거짓표”, 121쪽)

 

31) 『경향잡지』 227호, 1911년 4월 15일, “각색문제 : 개암이를 없이 하는 법”, 163쪽 ; 229호, 1911년 5월 15일, “각색문제 : 파리 잡는 법”, 212쪽.

 

32) 학질에 대해서는 1890년대에도 신문에서 언급하고 치료약을 제시하였다.(『매일신문』 1899년 1월 5일, “이틀 거리 학질에 유명이 신효한 보화단이라 하는 약을”) 그러나 학질과 모기를 연관한 기사는 1920년대에야 보인다.(『선봉』 1926년 7월 18일, “여름에 주의할 것은 모기가 중매하는 학질-말라리아” ; 『동아일보』 1929년 6월 23일, “모기가 날라다 주는 무서운 질병, 그중에도 학질이 제일 많다”.

 

33) 흑축은 붉은 나팔꽃의 씨, 백축은 흰 나팔꽃의 씨.

 

34) 김덕진, 「한말 醫藥需要를 통해 본 약값과 질병 : 전라도 강진의 박약국 사례-」, 『인문학연구』 60,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20, 112쪽의 <표 8>.

 

35) 조선총독부 엮음, 신종원·한지원 옮김, 『조선위생풍습록』, 민속원, 2013, 157~181쪽.

36) 『경향잡지』 223호, 1911년 2월, “평론 : 목마르게 하는 약”, 49쪽.

 

37) ( ) 속에 프랑스어와 한자를 표기하는 것이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 경우”라 주장한 연구자도 있는데,(박승만, 「일제강점기 가톨릭교회의 지면을 통한 의료계몽활동 : 경향잡지와 가톨릭청년을 중심으로」, 89쪽) 왜 이들 몇 개의 약재에만 그러한 표기를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38) 이형식,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위생정책과 조선사회」, 『한림일본학』 2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2, 6쪽.

39) 신종원·한지원 옮김, 『조선위생풍습록』, 157~169쪽.

40) 신종원·한지원 옮김, 『조선위생풍습록』, 158~159, 161쪽.

 

41) 247호(1912년 2월 15일)에서는 일본 약국에서 판다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274호(1913년 3월 31일)에서는 모든 약국에서 판매한다고 하였다.

 

42) 자료에 가장 먼저 보이는 양 약국은 1898년 4월 개업한 박일근(朴逸根)의 재생(濟生)의원(=재생당약국)과 1894년 개업한 염진호의 양 약국.(이흥기, 「19세기말 10세기 초 의약업의 변화와 개업의」, 『의사학』 19-1, 대한의사학회, 2010, 351쪽)

 

43) 『경향잡지』 247호, 1912년 2월 15일, “각색문제 : 강장케 하는 약”, 68쪽 ; 274호, 1913년 3월 31일, “각색문제 : 또 연주창에 약”, 139쪽.

 

44) 『경향잡지』 273호, 1913년 3월 15일, “각색문제 : 연주창에 약”, 116~117쪽. 대한제국은 1900년 요도정기를 ‘양약(洋藥) 중 극약(劇藥)’으로 분류하였다.(內部令 제27호 醫士규칙, 광무 4년 1월 2일 [『고종실록』 광무 4년 1월 2일 ; 『관보』 광무 4년 1월 17일 ; 각사등록 근대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 2021년 7월 31일 검색]).

 

45) 『경향잡지』 245호, 1912년 1월 15일, “각색문제 : 손 터진 것을 치료하는 법”, 20쪽.

46) 『경향잡지』 239호, 1911년 10월 15일, “각색문제 : 학질 앓는 데 쓰는 약”, 452쪽.

47) 『경향잡지』 296호, 1914년 2월 28일, “각색문제 : 열을 없이 하는 약”, 91쪽.

48) 간유 광고가 『황성신문』 1907년 6월 8일~12월 29일 자에 거의 매일 실렸다.

 

49) 금계랍은 1893년 이전 학질의 유일한 치료제로 알려져 있었다. (이홍기, 「19세기말 10세기 초 의약업의 변화와 개업의」, 350쪽)

 

50) 1896년 11월 7일~12월 26일 자와 1897년 3월 27일~5월 11일 자자에 ‘고샬기’ 상회에서 금계랍을 광고하였다.

 

51) 19세기까지는 한국인 약상(藥商)이 거의 보이지 않고, 청·일본 등 외국인 약상이 약재와 가벼운 환약을 방문판매나 시장판매 하였다고 한다.(김덕진, 「한말 醫藥需要를 통해 본 약값과 질병 : 전라도 강진의 박약국 사례-」, 98쪽의 각주 16)

 

52) 한성부 179명(한국인 116, 일본인 63), 경기 419명(378, 41), 충북 290명(235, 55), 충남 288명(258, 30), 전북 332명(314, 18), 전남 447명(406, 41), 경북 453명(396, 57), 경남 433명(333, 100), 강원 235명(209, 26), 함북 155명(129, 26), 함남 182명(156, 26), 평북 258명(216, 42) 평남 136명(93, 43), 황해 147명(116, 31)이었다. 청국인 매약상도 9명이 있었다.(내부 위생국 편,『한국위생일반』, 5~7쪽)

 

53) 조선총독부,『제1차 조선총독부 통계요람』, 1911, 72~73쪽.

54) 조선총독부,『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대정원년』 1912, 315쪽.

55) 양정필, 「한약업자의 대응과 성장」, 『한의학, 식민지를 앓다』, 연세대학교 의학사연구소, 아카넷, 2008, 251쪽.

56) 김덕진, 「한말 醫藥需要를 통해 본 약값과 질병 : 전라도 강진의 박약국 사례」, 119쪽.

57) 황상익, 『근대의료의 풍경』, 500쪽.

58) 『경향잡지』 348호, 1916년 4월 30일, “학문 : 파리를 힘써 없이 할 일”, 191~192쪽.

 

59) 신선한 공기와 위생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언급되었다.(『황성신문』 1906년 1월 13일, 위생과장 민원식씨, “寄書 위생문제要感” ; 『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16일, “시사평론”)

 

60) 『경향잡지』 349호, 1916년 5월 15일, “학문 : 공기”, 216쪽.

61) 『경향잡지』 274호, 1913년 3월 31일, “각색문제 : 또 연주창에 약”, 139쪽.

 

62) 위생이란 단어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위생하는 약을 갖추 보내시와 몸에 얽힌 병을 가히 치료하겠사오니”(藥備衛生 可治纏綿之證 : 『세종실록』 세종 7년 11월 13일) ; “위생에 대한 은혜가 흡족하사 특수한 약을 내리심을 입사오매”(恩洽衛生 獲紆殊錫 : 『세종실록』 세종 23년 12월 17일). 일본 도쿄[東京] 한국유학생모임인 태극(太極)학회가 발간한『태극학보』에서도 “위생법이란 병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라 설명하였다.(朴相洛, “위생문답”,『태극학보』 5호, 1906년 12월 24일)

 

63) 『경향잡지』 357호, 1916년 9월 15일, “학문 : 이 사이 위생에 주의할 일”, 405쪽.

64) 강신익, 「동서 의학의 신체관」, 『생명윤리』 3-2, 한국생명윤리학회, 2002, 47쪽.

65) 재컬린 더핀, 신좌섭 옮김, 『의학의 역사』, 사이언스북스, 2006, 73~74쪽.

 

66) 김문용, 「서양의학의 수용과 신체관의 변화」, 『동양고전연구』 37, 동양고전학회, 2009, 356쪽 ; 이영찬, 「최한기의 기학적 인간본질과 인성 덕목의 현대적 함의」, 『사회사상과 문화』 20-1, 동양사회사상학회, 2017, 8~9쪽

 

67) 『경향잡지』 357호, 1916년 9월 15일, “학문 : 이 사이 위생에 주의할 일”, 406~408쪽.

 

68) 위생경찰에 대해서는 정근식, 「식민지 위생경찰의 형성과 변화, 그리고 유산 : 식민지 통치성의 시각에서」, 『사회와 역사』 90, 한국사회사학회, 2011 참조.

 

69) 정혜경·김혜숙,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 구현된 위생정책」, 81~82쪽.

70) 『매일신보』 1916년 9월 21일, “사설 : 虎疫의 예방 박멸”.

71) 이형식,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위생정책과 조선사회」, 8쪽.

72) 『매일신보』 1916년 9월 2일, “사설 : 虎疫과 위생(再)”.

 

73) 대한제국정부가 1899년 8월 16일 공포한 <전염병 예방규칙>은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디프테리아, 발진티푸스, 두창 등 6가지 전염병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1915년 6월 5일 일제가 공포한 <전염병 예방령>은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두창, 발진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페스트를 대상으로 하였다.

 

74) 신동원, 「일제하 한국인의 사망률 감소 원인에 관한 한 고찰-급성전염병 발생율, 사망률, 치명율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9-1, 1987, 121쪽.

 

75) 『경향잡지』 357호, 1916년 9월 15일, “학문 : 이 사이 위생에 주의할 일”, 406쪽 ; 358호, 1916년 9월 31일, “학문 : 이 사이 위생에 주의할 일(속)”, 431쪽.

 

76) 『매일신보』 1916년 8월 23일, “울산에 호열자 발생, 내지인 어민계집의 의사괴질, 총감부 위생과의 예방할 회의”.

 

77) 『매일신보』 1916년 9월 2일, “수원 停留者 해방, 난리를 만난 수원군 백성, 검경을 마친 후 전부 해방” ; 『부산일보』 1916년 9월 2일, “콜레라 드디어 다가오다”.

 

78) 『부산일보』 1916년 9월 7일, “열차 내에서 콜레라 발생, 대구에서 86명 정류”.

79) 『부산일보』 1916년 9월 21일, “각지의 콜레라 환자 수”.

80) 『뮈텔주교일기』 1916년 9월 21일.

81) 『뮈텔주교일기』 1916년 9월 22일.

82) 『뮈텔주교일기』 1916년 9월 26일.

83) 『드망즈주교일기』 1916년 9월 29일, 10월 1·10일.

84) 『부산일보』 1915년 11월 3일, “부산전차 개통 당일 모습” ; 『매일신보』 1915년 11월 3일, “萊釜 전차 개통축하”.

85) 『드망즈주교일기』 1916년 10월 14·16일.

86) 『드망즈주교일기』 1916년 11월 3일.

87) 『뮈텔주교일기』 1916년 9월 26일.

88) 『뮈텔주교일기』 1911년 1월 20일, 2월 13일.

89) 『뮈텔주교일기』 1911년 4월 27·30일, 7월 23일. 열병은 장티푸스였던 것 같다.

90) 『뮈텔주교일기』 1912년 6월 12일.

 

91) 1914년 겨울부터 1915년 봄까지 한국에서 성홍열이 크게 유행하였고, 경무총감부는 성홍열 예방을 위해 진단, 시체 검안 때 관할 경찰관이나 관련기관에 신고하도록 지시하였다.(『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12월 5일, 경무총감부령 제11호)

 

92) 『뮈텔주교일기』 1914년 1월 11일.

93) 『뮈텔주교일기』 1915년 2월 17일.

94) 『뮈텔주교일기』 1915년 2월 23일.

95) 『뮈텔주교일기』 1915년 8월 2·31일.

96) 『경향잡지』 348호, 1916년 4월 30일, “학문 : 파리를 힘써 없이 할 일”, 191~192쪽.

 

97) 대한제국정부는 1899년 8월 29일 「적리예방규칙」(赤痢豫防規則)과 「디프테리아[實布垤里亞]예방규칙」을 시행하였는데(『조선왕조실록』 고종 36년 8월 29일) 당시 이질이 극성이었기 때문이고(『황성신문』 1899년 8월 15일. “적리노성(赤痢爐盛)”), 이질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질은 전염병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학문’ 난의 위 서술은 잘못된 것이다.

 

98) 『경향잡지』 358호, 1916년 9월 31일, “학문 : 이 사이 위생에 주의할 일(속)”, 431~432쪽.

99) 『경향잡지』 358호, 1916년 9월 31일, “학문 : 이 사이 위생에 주의할 일(속)”, 432쪽.

100) 『경향잡지』 359호, 1916년 10월 15일, “학문 : 음식”, 454~456쪽.

101) 『경향잡지』 360호, 1916년 10월 31일, “학문 : 음식(속)”, 480쪽.

 

102) 『황성신문』 1899년 8월 9일~10월 7일자에 회충약 광고가 있고, 촌충약 광고는 『국민보』 1914년 1월 24일~4월 18일자 “표류상점 광고”에서 볼 수 있는데 ‘촌충약 75전’이라 되어 있다.

 

103) 『경향잡지』 361호, 1916년 11월 15일, “학문 : 음식”, 502~504쪽.

 

104) 437호(1920년 1월 15일)까지 연재되었는데 381호(1917년 9월 15일), 384·387·388·392·395·398·400·402·405-408·412·417·419·422·423·428·431·433·435·436호(1920년 12월 31일)에는 ‘위생’ 난이 없다. 그리고 1921년에 1회(465호, 1921년 3월 15일), 1924년에 2회(535호, 1924년 2월 15일 ; 542호, 1924년 5월 15일), 1925년에 1회(559호, 1925년 2월 15일)의 ‘위생’ 난이 수록되었다.

 

105) 위생문제가 인간의 육체와 정신 모두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일본유학생단체 태극학회에서 간행한 『태극학보』에서도 찾을 수 있다. ( 『태극학보』 1907년 3월호, 박상락, “위생문답”)

 

106) ‘학문’ 난에서 언급했었다.(『경향잡지』 357호, 1916년 9월 15일, “학문 : 이 사이 위생에 주의할 일”, 405쪽)

107) 『경향잡지』 376호, 1917년 6월 30일, “위생”, 287~288쪽.

108) 『경향잡지』 377호, 1917년 7월 15일, “위생 : 사람의 골격”, 311쪽.

109) 『경향잡지』 418호, 1919년 3월 31일, “위생 : 소아위생(속)”, 143쪽.

110) 『경향잡지』 421호, 1919년 5월 15일, “위생 : 소아위생(속)”, 216쪽.

111) 『경향잡지』 387호, 1917년 12월 15일, “사람의 행실론(속)”, 531쪽.

112) 『경향잡지』 383호, 1917년 10월 15일, “위생 : 염통”, 456쪽.

113) 『경향잡지』 399호, 1918년 6월 15일, “위생 : 청관(廳官)”, 264쪽.

114) 『경향잡지』 397호, 1918년 5월 15일, “위생 : 시관((視官)”, 215쪽.

 

115) 『대한흥학보』, 『서우』, 『서북학회 월보』, 『호남학보』, 『권업신문』, 『매일신보』 등에서도 잉부와 소아의 위생 및 소아 양육에 대한 내용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서우』 3-10호, 1907년 2월1일~1907년 7월 1일, 김명준, “가정학 譯述” ; 『서북학회 월보』 1호, 1908년 6월 1일, 이규영, “男女 及 小兒衛生의 最要注意” ; 『대한흥학보』 8호, 1909년 12월 20일, 9호, 1910년 1월 20일, 11호, 1910년 3월 20일, 12호, 1910년 4월 20일, 지성윤, “소아의 양육법” ; 『호남학보』 1호, 1908년 6월 25일, 李沂, “가정학설” ; 3~9호, 1908년 8월 25일~1909년 3월 25일, “가정학 속 : 소아의 衣食宿” ; 『권업신문』 1914년 4월 26일, 5월 9일, 6월 14·21·28일, 7월 5일, “가정학” ; 『매일신보』 1919년 7월 16일, “하계위생 위생비결(4) 차게 자지 말 것, 병인 처리의 주의, 어린아이의 위생.” ; 1919년 7월 19일, “하계에 대한 위생문제 : 소아위생에 대한 주의”(창동병원장 熊本 醫學士, 申弼休씨 談))

 

116) 『경향잡지』 411호, 1918년 12월 15일, “위생 : 소아위생”, 아오스딩 崔相勳, 551~552쪽.

117) 『부산일보』 1918년 10월 29일, “내무성 풍사 훈령, 유행하는 스페인 독감”

 

118) 인플루엔자는 1889~1890년에 파이퍼(Richard Pfeiffer)가 발견했다. 『부산일보』는 “불국인이 발견”이라 하였고, 『매일신보』는 26년 전 북리(北里) 연구소에서 파이퍼가 발견했다고 하였다.(『부산일보』 1918년 10월 29일, “인플루엔자 병원균 발견” ; 『매일신보』 1918년 11월 9일, “독감의 병원균, 북리연구소에서 발견”)

 

119) 한국전통지식포털에 의하면, “음허(陰虛)하여 외감(外感)에 감촉된 한열(寒熱), 해학(痎瘧)으로 생긴 변비(便秘) 및 외사침입(外邪侵入)을 치료하는 처방”으로 “생강 5편을 넣고 끓여 먹는다”.( https://www.koreantk.com/ktkp2014/prescription/prescription-view.view?preCd=P0003910)(2021년 2월 20일 검색)

 

120) 1918년 10월 26일 경시청에서 훈령 발표.(『부산일보』 1918년 10월 30일, “경시청도 풍사 훈령”)

121) 『경향잡지』 409호, 1918년 11월 15일, “위생 : 근일에 유행하는 독한 감기”, 503~504쪽.

122) 『경향잡지』 410호, 1918년 11월 30일, “위생 : 유행독감에 주의 사항”, 528쪽.

123) 『부산일보』 1917년 12월 9일, “惡한 독감”.

124) 『매일신보』 1918년 10월 11일, “평북 강계군에 악성의 유행병, 몹시 아픈 감기”.

125) 『뮈텔주교일기』 1918년 10월 20~22일, 24일, 27~28일, 30일, 11월 4·9·21일, 12월 3·9·30일.

126) 『드망즈주교일기』 1918년 10월 24~25일, 11월 1~2일, 18·20~22일, 12월 16·25일.

127) 김택중, 「1918년 독감과 조선총독부 방역정책」, 『인문논총』 74-1, 인제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7, 177~178쪽.

 

128) 『뮈텔주교일기』 1919년 12월 22·25·28일, 1920년 1월 1·9·26일 ; 『타벨라』 1920년 제3권 제5호 2월 1일(『교회와 역사』 415호, 2009년 12월, 10쪽)

 

129) 『매일신보』 1918년 6월 13일, “전염병 유행, 파라티푸스와 장질부사가 치성” ; 1918년 6월 15일, “전염병에 주의, 파라티푸스가 많다” ; 1918년 6월 18일, “여자와 小兒에게 多한 파라티푸스병은 만연될 염려가 있다, 푸성귀를 주의하라”.

 

130) 『경향잡지』 401호, 1918년 7월 15일, “위생 : 하절 위생”, 311~312쪽.

131) 『경향잡지』 428호, 1919년 8월 31일, “위생 : 추절 위생”, 384쪽.

 

132) ‘각색문제’ 난에서도 ‘학문’ 난에서도 신선한 공기가 위생에 좋다고 했었다.(『경향잡지』 274호, 1913년 3월 31일, “각색문제 : 또 연주창에 약”, 139쪽 ; 349호, 1916년 5월 15일, “학문 : 공기”, 216쪽)

 

133) 『경향잡지』 403호, 1918년 8월 15일, “위생 : 병을 전하여 주는 두 매개”, 360쪽.

 

134) 『매일신보』 1919년 11월 22일, “수도요금 인상, 오할이 올라” ; 『매일신보』 1922년 9월 29일, “井水를 사용하여 수돗물을 공급, 값도 장차 싸지겠다”.

 

135) 『경향잡지』 404호, 1918년 7월 31일, “위생 : 병을 전하여 주는 두 매개(속)”, 382~383쪽.

 

136) 신부는 “사람의 영혼에 필요하고”, 의사는 “사람의 육신을 위하여 힘”쓴다고 천주교회는 설명하였다. 속인(俗人)에게 사람의 생명을 맡길 수 없었기에 오랜동안 신부가 의사였는데, 각각 전문이 되는 것이 좋겠다 하여 신부와 의사의 직무가 나뉘게 되었지만, 두 직무는 항상 관계가 깊다고 하였다.(『경향잡지』 546호, 1924년 7월 15일, “미담 : 신부와 의사”, 323쪽)

 

137) 『경향잡지』 390호, 1918년 1월 31일, “위생 : 五官”, 47쪽.

138) 1918년 10월 26일 경시청에서 훈령을 발표하였다.(『부산일보』 1918년 10월 30일, “경시청도 풍사 훈령”)

139) 『경향잡지』 409호, 1918년 11월 15일, “위생 : 근일에 유행하는 독한 감기”, 503쪽.

140) 『경향잡지』 410호, 1918년 11월 30일, “위생 : 유행 독감에 주의 사항”, 528쪽.

141) 『경향잡지』 414호, 1919년 1월 31일, “위생 : 소아위생(속)”, 47~48쪽.

142) 『경향잡지』 416호, 1919년 2월 28일, “위생 : 소아위생(속)”, 93~94쪽.

143) 『경향잡지』 418호, 1919년 3월 31일, “위생 : 소아위생(속)”, 143~144쪽.

144) 『경향잡지』 421호, 1919년 5월 15일, “위생 : 소아위생(속)”, 215쪽.

145) 『경향잡지』 424호, 1919년 6월 30일, “위생 : 소아위생(속)”, 287쪽.

146) 『경향잡지』 430호, 1919년 9월 30일, “위생 : 소아위생(속)”, 431~432쪽.

147) 『경향잡지』 434호, 1919년 11월 30일, “위생 : 소아위생(속)”, 528쪽.

148) 『경향잡지』 437호, 1920년 1월 15일, “위생 : 소아위생”, 18쪽.

149) 『경향잡지』 542호, 1924년 5월 31일, “위생 : 채독은 십이지장충”, 237~238쪽.

150) 『경향잡지』 416호, 1919년 2월 28일, “위생 : 소아위생(속)”, 95~96쪽.

151) 『경향잡지』 503호, 1922년 10월 15일, “유공한 발명자”, 455쪽.

152) 『경향잡지』 416호, 1919년 2월 28일, “위생 : 소아위생”, 94쪽.

153) 『경향잡지』 416호, 1919년 2월 28일, “위생 : 소아위생(속)”, 93~96쪽.

 

154) ‘각색문답’ 난에서는 대소변 불통의 치료약재와 치료방법을 여러 번(299·300·302·303·304·313호) 소개했었다. 노가주나무 열매나 잎, 민들레 생뿌리즙, 염초 등.

 

155) 『경향잡지』 421호, 1919년 5월 15일, “위생 : 소아위생(속)”, 215쪽.

 

156) ‘학문’ 난에서 기생충의 종류를 말할 때 십이지장충을 언급했었다.(『경향잡지』 361호, 1916년 11월 15일, “학문 : 음식”, 503쪽)

 

157) 담(痰)을 제거하고 풍(風)을 삭히며 열을 빼주고 습을 말리며 갈증을 풀어주고 진액(津液)을 생성하고 뼈를 튼튼하게 하며 통증을 가라앉히는 효능이 있는 약재.(한국전통지식포털(https://www.koreantk.com/ktkp2014/)[2021년 3월 10일 검색]

 

158) 『경향잡지』 542호, 1924년 5월 31일, “위생 : 채독은 십이지장충”, 237쪽.

159) 『제1차 조선총독부 통계요람』, 72~73쪽.

160) 『경향잡지』 411호, 1918년 12월 15일, “위생 : 소아위생”, 552쪽.

161) 『경향잡지』 413호, 1919년 1월 15일, “위생 : 소아위생(속)”, 24쪽 ; 414호, 1919.1.31., “위생 : 소아위생(속)”, 48쪽.

 

162) 1897~?. 1919년 5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조선총독부관보』 1919년 6월 24일, “휘보 : 학사”), 그해 6월 18일 의사면허(면허번호 323호) 취득(『조선총독부관보』 1919년 7월 31일, “휘보 : 위생-의사면허”). 1922년 수원 남문 밖 제생당약방(濟生堂藥房) 안에 노동진찰소(勞動診察所)를 설치하여 가난한 이와 노동자 무료 진료(『동아일보』 1922년 10월 4일, “勞動診察所 수원 남문 밧게 설립”), 1923년 3월 6일 경성 황금정 2정목 22번지의 자택에 노동진찰소를 개설하여 노동자 무료 진료(『매일신보』 1923년 3월 7일, “무료 진단” ;『동아일보』 1923년 3월 10일, “노동진찰소 최상훈씨 미거” ;『동명』 2권 11호, 1923년 3월, 13쪽). 위생을 주제로 많은 강연을 하였다.(『동아일보』 1920년 7월 30일, “수원청년俱樂部 강연회” ;『동아일보』 1922년 6월 28일, “조선청년회연합회 巡講團 안성에서 강연회” ; 『매일신보』 1922년 12월 1일, “청년연합 강연” ;『동아일보』 1923년 3월 26일, “여자고학생상조회 주최 춘계대강연회”)

 

[학술지 교회사학 제19호, 2021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윤선자(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00942&Page=2&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파일첨부

83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