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레지오ㅣ성모신심

길위의 사람들: 말씀을 간직하며 살아가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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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3-09 ㅣ No.799

[길위의 사람들] 말씀을 간직하며 살아가신 어머니

 

 

조롱을 받으시는 예수(The mocking of Jesus)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 과정 중 로마 군인에 의해 모욕과 수치를 당하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이는 ‘천사 같은 수도자’의 의미를 담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라는 예명으로 널리 알려진 도미니코회 성직 수도자, 귀도 디 피에트로(Guido di Pietro 1387-1455)의 작품입니다. 이 ‘조롱을 받으시는 예수’ 프레스코화 안에 담긴 성모님의 모습이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 영성 생활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에 소개합니다.

 

이 그림은 눈이 가려진 채로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극대화합니다. 산헤드린의 대사제 카야파의 집과 총독 빌라도의 관저에서 침 뱉음을 당하고, 손으로 모자를 들고 경의를 표하며 ‘유대인의 왕’이라고 빈정대는 조롱을 받고, 가시관을 막대기로 누르는 잔혹한 고통을 받는 것을 한 화폭에 다 담았습니다. 공격하는 손의 이미지는 몸과는 분리되어 보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운데 위치한 예수님의 모습이 집중되도록 이끕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분을 주먹으로 쳤다. 더러는 손찌검을 하면서, “메시아야,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마태 26,67-68)

 

예수님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한 중년 여인이 앉아 있습니다. 성모님이십니다. 왼쪽에는 성경을 펴들고 성령의 빛을 따라 묵상하는 도미니코 성인이 보입니다. 어떤 모욕과 수모, 그리고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중심을 잃지 않고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도미니코 성인의 모습과는 달리 성모님은 아무것도 없이 홀로 앉아 깊은 사색에 빠져 계십니다. 성모님은 왜 성경을 들고 계시지 않을까요.

 

성모님은 몸소 구약을 완성하신 분이시고, 신약이신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고, 키우면서 동행하신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신약의 첫 신자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마음 깊이 새기면서 살아가신 순명의 모델이십니다. 복음적 순명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모님은 몸소 구약과 신약의 말씀과 동행하셔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서는 겸손, 순명, 온유, 기도, 고행, 순결, 인내심, 지혜, 사랑, 믿음을 성모님의 덕목으로 일컫습니다(28쪽). 이 덕목은 몽포르의 루도비코 성인의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 108항에서도 언급됩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안으면서 예수님 곁에 계시는 중에 드러난 면모들입니다. 성모님은 말씀을 사셨습니다. 그리하여 몸소 구약과 신약의 말씀과 동행하십니다. 몸으로 성경을 살아가셨으니 성모님께는 당연히 성경이 필요치 않으십니다.

간직하고 살아온 말씀을 묵상하는 성모님이야말로 지혜의 모델이십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수난당하는 아드님의 모습,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도 말씀을 되뇌면서 꿋꿋하게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신 성모님을 전해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안나 자매님은 말씀으로 어둠을 이겨낸 저의 든든한 이웃입니다. 구내 청소를 하면서도 빛을 잃지 않는 자매님을 동반하게 된 것은 저에게 큰 은총이었습니다. 제가 한창 렉시오 디비나를 전하고 있을 때 자매님은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느 아이들처럼 학교에 잘 다녔으면 좋을 딸 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인데 중퇴하겠다고 해서 하소연 겸 상의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니까 묵주 기도를 하면서 성모님의 지혜를 청하자고 했습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의 상태를 들어보니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딸 마리아는 어둠에 사로잡힌 듯했습니다. 혹시 어릴 적에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니 자매님은 딸이 네 살 적에 두 달간 집을 나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영업을 하다 빚더미에 쌓인 남편의 폭언에 진저리가 나 뇌전증을 앓고 있던 아들과 이제 막 네 살이 된 마리아를 두고 집을 나와 정처 없이 떠돌며 행상을 하다가 정신이 들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이가 어려서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겠거니 했는데, 청소년기를 지나는 동안 자신이 버림받았었다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딸이 써 놓은 낙서 안에 엄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도사리고 있는 단어들과 무서운 그림들을 발견하면서 자매님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결국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말씀을 필사하고, 마음에 와닿은 말씀에 비추어 매듭 풀어

 

어둠 속에서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자매님에게 인척들은 굿을 권했습니다. 빚을 내어 굿을 하는 동안 촛불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촛불은 제 몸을 태워 불을 밝히는데 나도 저런 촛불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 내가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 있을까.’ 의례가 끝나자마자 꿈에서 깨어난 듯 자매님은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청하면서 모든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단원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레지오 마리애를 잠시 쉬면서 보속하겠다고 단장님에게 알리고는 저를 찾아와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자매님과 함께 딸 마리아가 정상적인 정서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매일 프라하의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9시간 기도를 함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 후 6개월 동안 매일 아침 8시에 자매님의 쉼터로 찾아가 9시간경을 시작하고, 오후 4시에는 감사기도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말씀으로 기도해보자고 권유하면서 틈나는 대로 말씀을 필사해 보라고 신구약 합본 성경을 건네드렸습니다. 자매님은 잘 따라 왔습니다. 마리아는 엄마가 펴놓은 성경책을 뒤집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방해도 했지만, 자매님은 그때마다 원상태로 되돌려 놓고, 침묵으로 이겨내 지금은 완전히 새로워진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성경 필사를 다 마친 후에는 매일 미사 말씀을 쓰고, 마음에 닿는 중심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여정을 적어가면서 어린 시절부터 추구했던 물처럼 맑은 삶을 살고 싶던 소망도 되찾았습니다. 7년 동안 성경 필사한 공책만도 50권을 넘어서면서 어느덧 변화된 남편은 필사본들을 집안의 가보로 두자고 했지만, 자매님은 혹시나 교만해질까 두려워 식구들 모르게 다 없애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하루하루 말씀을 수행하는 동안 어두웠던 집을 떠나 볕 좋은 연립주택으로 이사도 했고, 지금은 주택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마리아는 작은 일상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밝은 모습으로 집안 살림살이를 돕고 있습니다. 안나 자매님은 말씀을 필사하고, 마음에 와 닿은 말씀에 비추어 매듭을 풀며 어려움을 통과한 그때가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자매님은 여전히 하느님 말씀에서 오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3월호, 이은주 마리 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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