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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성당 건축 이야기13: 두라유로포스 교회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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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4-04 ㅣ No.940

[김광현 교수의 성당 건축 이야기] (13) 두라유로포스 ‘교회의 집’


연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성당… 신앙 공동체 전례 정식화

 

 

- 두라유로포스 ‘교회의 집’ 가상도. 출처=Wladek Prosol

 

 

가장 오래된 교회의 집

 

‘도무스 에클레시에’ 곧 ‘교회의 집’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의 성당 중 유일하게 식별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성당이 1933년 시리아의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 발굴되었다. 이것은 400년 이후에 알려진 것도 없고, 230년 이전에도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이제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연대도 확인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유프라테스강 상류 지역에 있었던 두라유로포스라는 지명은 고대 도시 두라(Dura)를 헬라인들이 에우로포스(Europos)라고 불렀던 것에서 비롯한다. 두라유로포스는 본래 로마 제국의 동쪽 경계에 가까운 로마의 수비대 주둔지였다.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이 ‘교회의 집’은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그리스도교 건축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크게 받은 메소포타미아 주변의 작은 도시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복음이 시리아까지 전해졌음도 증명해 준다.

 

이 ‘교회의 집’은 대지가 약 100평이며 몇 가옥들을 제외하고는 이 도시에서는 큰 건물에 속했다. 가까운 곳에는 유다인 회당과 미트라스 신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은 성벽 옆에 있었으므로 257년 도시 벽이 보강될 때 무너지고 말았다. 이 ‘교회의 집’은 230년이나 232년 사이에 어떤 상류 로마인의 전형적인 주택을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예배의 장소로만 사용하도록 개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교회의 집’은 관습적인 열주랑 타입의 평범한 도시 주거였는데, 개축한 후에도 외관은 개인 주택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주변의 비슷한 집들 사이에서 잘 숨겨져 있었다.

 

좁은 북쪽 골목길에서 문에 들어서면 전실의 벽을 두어서 길에서 집 안이 직접 보이지 않게 했다. 본래의 주택은 안마당을 기둥 두 개가 앞에 선 포티코,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 5개의 방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마도 이 마당은 오늘날의 성당 마당 같은 구실을 했을 것이다. 주택의 남쪽에는 방이 3개 있었는데, 그중 식당인 트리클리니움과 작은방 등 두 방의 벽을 터서 긴 직사각형의 집회실로 바꾸었다.

 

- 두라유로포스 ‘교회의 집’ 세례실. 출처=Wikimedia Commons

 

 

이 방은 5m×13m(약 20평)이며 방 높이가 5.22m나 되어 꽤 높다. 이 방에는 70명 남짓한 신자가 들어갈 수 있었다. 6000명 내지 8000명이 이 도시에 살았으므로, 적어도 90명이나 120명 가운데 1명꼴은 그리스도교 신자였을 것이다. 또 이 군사도시 주민의 25~50%가 군인이었으므로 신자 중에는 군인이나 그 가족이 꽤 많았을 것이다. 이 정도의 신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려면 어떤 이의 주택의 식당을 빌려 사용한 ‘주택 교회’로는 더 이상 해결될 수 없어 주택을 ‘교회의 집’으로 개조했다.

 

이 집회실의 벽은 이전에 주택으로 쓰였을 때 있던 장식 일부가 남아 있었을 뿐 다른 장식이 거의 없는 흰 벽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특징은 방의 동쪽 끝에 약 1m×1m이고 높이가 20㎝인 돌로 만든 단인 베마(bema)를 두고 그곳에서 성경을 읽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에는 연장자, 설교자, 초대한 집주인으로 구분되었고 주택을 소유한 사람들이 모임을 이끌었지만, 이제는 성직자들이 모임을 이끌고 이 단에 앉아 신자들을 바라보았음을 말해 준다. 이렇게 사제와 일반 신자가 나뉘었고, 아이들은 베마에 가까운 곳에, 남자는 아이들 뒤에, 여자는 남자들 뒤에 자리 잡게 하여 신자들을 공간적으로 구분했다. 회중이 있는 ‘교회의 집’을 추정해 그린 그림을 보면 중심축 끝에 베마가 놓여 있고, 제단처럼 따로 구분된 자리에 장로들이 앉았으며, 회중은 가운데 통로를 두고 좌우로 나누어 앉거나 서 있었다.

 

베마 뒤에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이 방에 벽감이 있는 것을 보아 제의방이 집회실에 인접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넓은 식당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안마당에서 단순한 형태로 공동식사를 했거나, 공동식사가 사라지고 성체성사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가 점차 제도화됨에 따라 새로이 나타난 ‘교회의 집’의 공간 배치는 바실리카 타입의 성당 공간을 앞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중풍 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출처=Yale University Art Gallery, Dura-Europos Collection

 

 

교회의 집에 투사된 교회 공동체의 본성

 

신자들에게도 세례받은 신자와 그렇지 않은 예비신자의 구분이 생겼다. 3세기부터는 세례받은 신자와 예비신자가 같이 한 방에서 봉헌하는 ‘예비신자를 위한 미사(오늘날의 말씀 전례)’가 생겼다. 이 미사가 끝나면 오늘날의 성찬 전례인 ‘신자들을 위한 미사’가 이어지는데, 예비신자들은 미사를 볼 수는 없는 이웃하는 방으로 물러나 듣기만 했다. 중세 성당의 나르텍스(narthex), 곧 문랑(門廊)이라 해야 할 장소는 이렇게 일찍 나타나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세례받는 것이 대단히 중요함을 예비신자에게 공간적으로 분명히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두라유로포스의 ‘교회의 집’에서도 예비신자는 ‘신자들을 위한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옆에 있는 서쪽 방으로 물러났다. 이 방은 4m×7m(약 9평)로 어림잡아 30명이 들어간다. 또 이 방은 예비신자가 세례를 준비하거나 다른 활동에 쓰였으며, 선반으로 책장을 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예비신자 교리실이었을 것이다.

 

두라유로포스의 ‘교회의 집’에서는 세례를 위한 방을 따로 두었는데, 옆 방에서나 안마당에서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 방 끝에는 벽면을 우묵하게 들어가게 해서 만든 알코브가 있고, 그 위는 둥근 기둥이 받치고 있는 볼트 천장을 덮었다. 같은 시기에 있던 인근의 유다인 회당에서도 같은 볼트 천장이 토라 두루마리를 덮고 있었으나, 이 ‘교회의 집’에서는 같은 형식을 세례반 위에 사용했다. 그곳에는 바닥보다 몇 단 올라온 타일을 붙인 제법 큰 수조가 있었는데, 이때는 어른들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례반 볼트의 아치에는 포도와 석류 등을 그려 천상의 잔치를 상징했고, 천장에는 푸른색 바탕에 별을 그려 밤하늘을 묘사했다. 벽에는 선한 목자, 아담과 하와, 우물가의 여인, 다윗과 골리앗, 물 위를 걷는 예수님과 베드로,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 등 오래된 그리스도교의 프레스코 그림이 있다. 특히 ‘중풍 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교 회화 중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이처럼 예술은 훨씬 오래전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되새기는 데 크게 활용되었다. 이 프레스코 그림은 현재는 미국 예일대학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식이 거의 없는 집회실과는 달리, 세례실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그린 장식을 풍성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는 집회실은 공적인 장소이고,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경험하는 의례의 장소로 구분하여 전례를 정식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도무스 에클레시에’ 곧 ‘교회의 집’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비록 주택을 개조한 소박한 성당이었지만, 서서히 성체성사, 강론, 세례라는 신앙 공동체의 전례를 공간으로 구분하고 특별한 의미를 담게 되었다. 그러나 먼 옛날에 ‘교회의 집’이 그러했다고 아는 것은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의 집’에 투사된 교회 공동체의 본성을 다시 보는 눈을 찾는 것, 그것이 훨씬 중요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4월 2일, 김광현 안드레아(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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