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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공소11: 춘천교구 곰실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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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28 ㅣ No.939

[공소(公所)] (11) 춘천교구 곰실공소


춘천교구의 모태가 된 유서 깊은 공소

 

 

곰실공소는 춘천교구 발상지이며 효시인 유서깊은 신앙 공동체이다. 곰실공소 전경.

 

 

한국 가톨릭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외국인 선교사들의 전교 없이 자발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신앙 공동체를 설립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교회 전통을 그대로 답습 유지한 지역 교회가 바로 춘천교구다.

 

 

고향으로 돌아 온 천주학쟁이

 

19세기 말 춘천시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한학에 열심했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집에 세 들어 살던 체반 장수의 권유로 가톨릭교회 교리서인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곧바로 회심하여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가톨릭 교리를 제대로 배우고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큰 형과 함께 천진암 인근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춘천 지역 가톨릭 선교의 대부가 된다. 바로 엄주언(마르티노, 1872~1955) 회장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엄 회장은 동네 사람들에게 ‘천주학쟁이’라고 냉대를 받고 내쳐진다. 그는 외가 친척의 도움으로 대룡산 자락에 있는 동내면 고은리 윗너부랭이 폐가를 사서 이주해 그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낮에는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밤에는 사람들을 모아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남에겐 겸손하고 친절했으나 자신에겐 늘 엄격했다. 장티푸스가 유행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자 그는 가족들조차 손을 대지 않고 방치해 놓은 시신들을 거두어 정성스럽게 염을 하고 홀로 시신을 어깨에 메고 뒷산에 매장해 주곤 했다. 이러한 행동에 많은 주민이 감동을 하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춘천 지역에 처음으로 생긴 가톨릭 신앙 공동체가 바로 ‘곰실공소’다.

 

- 곰실공소는 춘천교구 공동체의 발상지로 품위에 맞는 성미술 작품들을 갖추고 있다.

 

 

엄 회장의 지도로 신앙을 키워간 곰실공소 교우들은 무엇보다 신앙생활에 열심했다. 주일 공소 예절은 물론 매주 수ㆍ금요일에는 단식재와 금육재를 철저히 지켰다. 엄 회장은 풍수원본당 주임 정규하 신부를 1년에 한 차례 모셔와 50여 명씩 세례를 줬다. 엄주언 회장은 곰실의 교우수가 300명 넘게 늘어나자 성직자 영입을 추진한다. 그는 신부를 모시기 위해 직접 사제관을 짓고 우물도 팠다. 그리고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과 강원도의 유일한 본당이던 풍수원성당을 여러 차례 방문해 뮈텔 주교와 정규하 신부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했다. 1920년 9월 사제품을 받고 풍수원본당 보좌로 임명된 김유용(필립보) 신부가 곧바로 춘천 지역으로 파견되면서 곰실공소는 춘천교구의 모태가 된다.

 

김 신부와 엄 회장은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선 춘천 시내에 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엄 회장의 주도로 곰실 신자들이 성전 건립 기금을 조성한다. 엄 회장은 ‘애령회’를 조직해 15세 이상의 모든 교우를 가입시켰다. 회원은 종신토록 1인당 50전씩 거두었고,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짚신 삼기로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았다. 엄 회장은 1928년 애령회 기금과 자신의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 춘천 약사리 418번지 김영식의 목조 함석집을 사서 고쳐 성당으로 사용하고 본당을 이전한다. 이때 교우수가 600여 명을 헤아렸다. 엄 회장은 이후 춘천지목구장으로 부임한 퀸란 신부와 함께 춘천 약사리 고개 도토리밭을 사서 성당을 짓는다. 바로 오늘날 춘천교구 주교좌 죽림동성당이다.

 

곰실공소는 많은 순례자가 끊임없이 찾아와 기도하는 곳이다. 곰실공소 전경. 

 

 

신앙의 향기를 지닌 공소

 

엄주언 회장은 가족과 교우들에게 늘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며, 남의 말을 하지 말고, 잘 입지도 먹지도 말며, 진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며, 죽은 사람 장사를 잘 지내 영혼을 구해주라”고 권면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의 영혼 구령은 천하의 어떤 복보다 위에 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엄주언 회장은 춘천 지역 가톨릭 전교의 대부로서, 죽림동 주교좌본당의 창설 공로자로서, 그리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춘천교구민들에게 지금까지 존경받고 있다. 춘천교구는 「우리의 뿌리」에서 “엄주언을 중심으로 곰실공소에서 태동한 춘천의 천주교회가 국지적이고 한정적인 사목 활동에서 춘천의 전 지역을 공동체로 하는 본격적인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

 

춘천교구 거두리본당 관할인 곰실공소는 춘천시 동내면 동내로 220에 자리하고 있다. 곰실은 ‘고은리’(古隱里)의 옛 지명이다. 곰실은 ‘뒤쪽에 있는 마을’ 또는 ‘큰 산, 신성한 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곰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대룡산은 기우제를 지내던 신성한 산이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곰실을 후상리, 후중리, 후하리라는 행정지명으로 고쳐 불렀다. 따라서 곰실은 옛날 신성한 산으로 여긴 대룡산 뒤편에 숨어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다.

 

곰실공소는 6ㆍ25 전쟁 때 소실되는 수난을 겪었다. 춘천은 6ㆍ25 전쟁 발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북한 인민군의 포격으로 초토화됐다. 다 지은 죽림동 주교좌 성당은 인민군의 집중 포격으로 파괴됐다. 아울러 1951년 5월 유엔군의 공습으로 또 한번 파괴됐다. 당시 곰실공소에는 인민군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반격 작전에 나선 유엔군은 곰실공소를 폭격해 완전히 부숴버렸다. 오늘날 곰실공소는 인민군에 피랍돼 압록강 중간진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다 풀려난 퀸란 주교가 춘천교구로 돌아와 새롭게 지은 건물이다. 제6대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가 2009년 이 건물을 다시 지었다.

 

장익 주교가 중창한 곰실공소는 단출하다. 엄주언 회장과 교우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박하고 수수하다. 그러나 속은 탄탄하다. 집도 그 집에 사는 사람을 닮는 모양이다. 공소 내부는 기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제단과 회중석 바닥은 원목으로 꾸며져 있다. 제단 중앙 십자가는 김혜림(베아타) 작가의 작품이다. 제단과 독서대는 김겸순(마리 테레시타, 노틀담수녀회) 수녀가 디자인했다. 사방 흰 벽의 좌우편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돼 있다. 춘천교구 공동체의 발상지이며 효시의 품위에 맞게 성미술 작품들이 잘 갖춰져 있다.

 

곰실공소에는 많은 순례자가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이다. 침묵 가득한 공소 안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평생을 봉헌하며 복음을 선포했던 엄주언 회장과 옛 신앙 선조들을 기억하고 그 신앙을 본받고자 기도한다. 꽃이 지닌 생명의 가치는 아름다움과 향기이다. 곰실공소는 신앙의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꽃 같은 존재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3월 26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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