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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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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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01 ㅣ No.298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응답하는 인간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이 노래 가사를 뒷부분까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둘 다 짝사랑이었습니다. 아마 그 사랑을 표현하려고 각자 나름대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그렇게 뚜렷하지 않아서 서로 못 알아들었을 겁니다. 알아들었으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 사랑의 표현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거기에 응답할 수 있었더라면 노래가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짝사랑이 사랑이 되려면 바로 그것, 사랑을 알아듣고 응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하느님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랑을 표현하려고 보내는 신호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시는 ‘말씀’들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전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들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자연 질서를 통해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신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을 알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먼저 말을 걸어오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갑돌이와 갑순이 사이의 대화는 둘 중에 누구라도 시작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던 때에 이미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도 그분은 언제나 사랑의 신호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보듯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것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하늘과 달과 별들을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이라고 부릅니다(시편 8,4). 그 손자국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 달과 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에서도 인간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26),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아직 하느님을 찾아나서지 않았고 주파수를 맞추지 않았기에 그분께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수는 있지만, 하느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응답을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하느님의 대화 상대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지닌 특전입니다.

 


하느님과 대화하기를 거부하는 인간

 

그러나 때로는 인간이 스스로 귀를 막습니다. 신호를 보내시는 것을 알지만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사랑의 표시인 줄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 내가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아서 듣지 않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현대에 많은 이가 하느님은 인간의 문제들에서 동떨어져 계시며 오히려 인간의 갈망들을 희생시키고 또 인간의 자율성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이 인간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퍼져있는 것입니다. 거창하게 무신론적인 사상들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뜻대로 살려면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죽어야 하고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을 보전하고자 편리함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며 나에게 짐스러운 사람을 나의 형제로 받아들여 지고 가야 합니다. 손해 아닌가요?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요?

 

사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 하느님과 대화를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가로막는 죄입니다. 모든 사랑의 대화가 그렇듯이 사랑의 신호를 보내시는 하느님은 인간에게 응답을 강요할 수는 없으십니다. 강요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고 사랑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많은 경우 실제로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하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태초의 인간에게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느님처럼” 되리라고 말합니다(창세 3,5). 하느님의 말씀을 어김으로써 인간이 지금의 위치보다 더 올라가서 더 완전하게 자신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바벨탑의 유혹은 오늘에도 계속됩니다.

 

 

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까?

 

이러한 시대에 필요한 일이, 하느님께서 인간의 목마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마음에 새겨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물이 어떤 물인지를 모릅니다.

 

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합니까? 왜 성경을 읽고 공부하려 합니까?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이시라면 아마 하느님의 말씀에 적어도 관심은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취미생활을 하듯이 성경을 공부하고 아니면 다른 학문들을 할 때와 다를 것 없는 태도로 성경을 연구한다는 느낌을 갖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알고 싶어하는 욕구들은 매우 강하지만 그것이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정말로 알아듣으려면, 그 말씀이 나의 삶을 비추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께 강의를 하는 것이 참 부담스럽습니다. 삶의 경험이 더 풍부한 그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저보다 더 깊이 알아들으시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기말고사에서, 시험 문제를 열두 개쯤 미리 드리고 각자 두 개씩 선택하시라고 했습니다. 꽤 많은 분이 “욥기와 인간의 고통”이라는 주제와 “코헬렛, ‘허무로다 허무.’라는 말과 ‘인생을 즐겨라.’라는 말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주제를 택하셨습니다.

 

답안지를 읽으며 속으로 놀랐습니다. 많은 분이 그 질문들을 택한 것은, 삶 안에서 한 번씩은 큰 고통을 겪으셨고 성경 안에서 그 답을 찾아가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끊임없이 창조되어야 할 우리

 

그렇지만, 우리의 질문에 대한 성경의 응답은 언제나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논리적인 추론을 머리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고, 과학적으로 명백한 사실을 입증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그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 상응한다는 것, 우리를 완성시켜 더 온전한 하느님의 모상이 되게 한다는 것을 발견할 따름입니다. 그러고는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창조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분의 사랑으로 알아들어 그 말씀으로 하루하루의 삶이 엮어지게 할 때, 우리는 창세기의 진흙처럼 하느님의 손으로 빚어지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응답하여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데에 협력하신 성모님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역할이 맡겨져 있습니다. 교황님은, 신앙을 지닌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수태하고 출산하는 것이라는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말씀은 오늘도 이 세상에 육화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은 오늘도 우리에게 응답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응답이, 우리의 삶이 없이는 그 말씀이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 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 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1년 4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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