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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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ㅣ심리ㅣ상담

[상담] 부부의 엇갈린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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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14 ㅣ No.240

[심리 상담] 부부의 엇갈린 소통

 

 

부부의 소통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몇 년 전 당장이라도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기라도 할 것 같은 한 부부가 찾아왔다. 

 

부인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는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 남편이 말을 너무 함부로 한다. 나를 무시하고 비난하고 정말 이대로는 살 수 없다. 정신적으로 이상하다. 심리검사를 해 봐야 한다.”

 

남편이 말을 이었다. “내가 언제 무시했느냐? 당신이 나를 무시하고 내 부모를 무시했지?” 

 

부인이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순간 나는 잠깐 멈추게 하고 남편에게 지금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다. 남편은 기분 대신 부인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이 사람은 내가 무슨 말을 못하게 한다. 무슨 말만 하면 꼭 트집 잡고, 비교하고, 정말이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밖에도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지만 거의 비슷한 내용이다. 내가 부인에게 얘기했다. “남편으로부터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니 많이 속상하시겠어요.”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부인은 펑펑 울면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자기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았는데. 시댁 일 우선이고 내 일은 뒷전이었는데...” 하면서 펑펑 울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떤 기분이냐고 물으니 억울하다고 하였다. 그렇다. 억울한 마음인 것 같다. 억울한 감정을 들으니 부인의 감정과 행동이 이해가 갔다. 이 모습을 남편은 짜증나는 듯이 보고 있었다. 마치 여러 번 이러한 광경을 본 듯하다. 

 

그래서 남편에게 어떤 기분이냐고 물으니 “아주 지겨워 죽겠어요. 언제까지 저 타령인지.” 두 부부 사이에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다음엔 캐묻고 따지고 ‘그렇다’, ‘아니다’를 입증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즉 “내가 언제 그랬느냐?” “당신이 매번 그러곤 꼭 시치미다. 난 그게 더 화가 난다.” “몇 날 며칠 어떤 상황에서 그랬다.” “그럼 그때 왜 얘기 안 했느냐?” 등이다. 

 

부부 상담에서 이러한 모습은 낯선 장면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때에 무시당한 느낌이냐고 물었다. “너무 많아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이라는 말을 붙이면서 예를 들어 “아침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된장찌개에 밥을 차려 주면 꼭 짜다는 둥 싱겁다는 둥 한 번도 고맙게 먹어 주지를 않는다.” “내가 언제 매번 그러느냐? 지난번 된장찌개를 끓였는데 너무 짜더라고요. 그래서 좀 짜네 했더니 갑자기 먹기 싫으면 먹지 마 하면서 가져다가 쏟아 버리더라고요. 먹기 싫은 것도 아니고 그냥 좀 짜기에 짜다 했는데 저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뭐 하는 짓이냐고 아침부터 화를 내다보니 또 싸움이 된 거예요.” 부인이 말을 받았다. “당신은 내가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심지어 음식도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하잖아?” 남편이 말을 이었다. “내가 언제?” 부인이 답했다. “당신 형수는 일하면서도 살림을 해 나가는 거 보면 정말 놀랍다고 했잖아. 그 얘기가 그 얘기지?” 남편이 받았다. “그 얘기가 왜 그 얘기야?” 

 

그다음 단계에서 남편이 그 얘기는 이러저러한 뜻에서 얘기한 것이고 당신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이를 진정성 있게 부인이 받아준다면 어렵지만 대화는 그냥저냥 마무리되기도 한다. 하지만 남편의 대답이 그냥 둘러대는 얘기라고 믿고 끝까지 남편의 말을 믿지 않을 경우 부인은 또 다른 증거를 찾아 가며 남편이 자신을 무시했다는 것을 입증하면서 대화는 더욱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남편 또한 가만히 있지 않는다. “무슨 피해의식이 있는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저렇게 반응하니 무슨 말을 못하겠다.” 하면서 그야말로 넘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넌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대화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닌 것 같다. 공감하고 존중하고 수용하면 된다지만 어떻게 공감하고, 어떻게 존중하고,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들어가면 매우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하며 상호작용적이고 역동적이어서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게 대화이다. 대화에는 개인의 사연이 있고 과거 상처가 있으며, 소망이 있고,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이 담겨 있다. 아침에 식사 준비를 하는 부인의 마음은 ‘어제까지의 싸움은 잊고 사랑받고 싶다’는 소망을 된장찌개에 담아 표현한 것이므로 된장찌개가 좀 짜다는 남편의 말을 부인은 ‘그 사랑 안 받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그야말로 자기 맘인 것이다. 그리하여 ‘받기 싫으면 받지 마라. 나도 너 사랑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화를 내면서 전달하게 된다. 그냥 단순하게 “찌개가 좀 짜네!” 했을 뿐인데 그 말이 이렇게 복잡한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 남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은 너무도 많다. 부인이 새 옷을 입은 것을 보고 “웬 옷이야?” 하는 물음에 “왜 나는 옷 같은 것 사면 안 돼? 나는 평생 누더기 같은 옷만 입어야해?” 하는 반응이 올 때도 있다. 즉 부인은 남편의 ‘웬 옷이야?’에 ‘경제 사정도 안 좋은데 주부가 왜 이렇게 낭비를 하고 살아?’ 하는 말로 알아듣고 그 말에 반응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속사정을 모른 남편은 정말 어이없을 뿐이다. 남편의 방어적인 반응도 있다. 부인이 “어머니 언제 오신데?”라고 묻는 말에 “오래 있진 않으실 것 같아.” 언제 오는가라는 질문에 오래 머물지 않겠다는 남편의 대답은 물론 부인이 어머니 오시는 것을 싫어할 거라는 생각 속에 내뱉은 말이다. 이렇듯 대화는 표현되지 않는 많은 사연과 개인의 두려움과 상처를 담고 있어서 단순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대방 말의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가? 상대방이 이야기하지 않은 두려움과 불안, 과거의 상처를 얼마나 잘 알아채고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가? 이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다른 대화도 그렇지만 특히 부부 간의 대화는 그 뜻과 의미 그리고 기능이 매우 복잡함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의 과거 상처가 무엇이며 두려움과 불안은 무엇인지 이해하고 치유해 주는 과정을 통해 상대가 그 상처에서 벗어나 적어도 ‘나의 배우자는 나를 사랑한다’라는 깊은 신뢰를 확신할 때 된장찌개가 짜다는 말을 그냥 찌개가 짜다는 말로 알아들을 수 있다. 그 상처를 이해할 때 내가 짜다고 한 말을 부인은 비난으로 알아들을 수 있겠구나 하면서 부인의 민감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때서야 “아, 미안! 아침부터 고생했는데 짜다고 해서 속상하겠네. 짜긴 짠 데 맛은 있어. 물만 좀 넣자.”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짜다는 사실을 아닌 것처럼 포장하지도 않는 건강한 대화는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과정에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창의성이 발휘되어 나타나는 결과다. 

 

위 사례의 부부는 상담을 계속하는 가운데 각자의 상처를 알아차렸다. 부인은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으며 남편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인은 남편이 자신에게 달콤한 말을 안 하고 무심한 것 같으면 불안하여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는 모드로 변하고 된장찌개도 끓여보고 이쁜 옷도 사 본다. 남편은 무심한 듯하다. 그러나 결코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익숙해졌고 편안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짜다고도 할 수 있고, 웬 옷이냐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반응이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부인에게는 섭섭함이고, 외로움이고, 억울함이다. 이 부부가 자신들의 강력한 욕구를 알아챘을 때 남편은 부인을 사랑하고 있음을 더 자주 확인시켜 주었고, 부인은 자신의 두려움이 비난으로 나옴을 알아차리고 두려우면 두렵다고 이야기하여 남편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손상시키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 즉,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상대방의 언어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어서 관계가 보다 단순해지고 명료해질 수 있었다. 물론 완전하지 않아 여전히 실수하고 허우적거리지만 실수조차도 예전처럼 절망적이지 않게 되었다. 

 

대림주간이다. 성모님의 모습을 본받아 나를 반성하고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동시에 배우자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욕구와 외로움을 존중하고 수용하면서 성가정을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본다. 

 

[평신도, 2014년 겨울호(VOL.46), 조은영 히야친다(영성심리상담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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