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 (목)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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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신앙과 이성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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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8-22 ㅣ No.300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신앙과 이성의 조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마태 23,13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뼈 있는 농담으로 가끔은 이 말을 현대의 성서학자들에게 적용시킵니다. 성경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아서, 다른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고 자신들도 알아듣지 못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대로 가다가는 하늘나라의 문도 잠가버리게 되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분명 성경을 읽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셨고(루카 24,27), 제자들은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라고 말합니다(루카 24,32).

 

여기서 ‘풀이하다’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 뜻은 ‘펼치다’이고, 다른 언어들에서는 ‘열다’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성경을 ‘열어’ 주는 것, 이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들으려면

 

성경을 설명하려는 이성적 노력을 배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 “신앙과 이성의 조화”(36항)입니다.

 

오늘날 때로는 지나치게 신앙에서 멀어지고 신학적 차원을 잃어버린 성경 연구를 경계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학문적인(특히 역사비평적인) 연구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예만 든다면, 유다교에서 모세오경이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바룩 스피노자는 회당에서 쫓겨났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유다교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성경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처음부터 환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1920년대까지 가톨릭교회는, 이성적으로 성경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신앙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경계의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1940년대에 비오 12세의 회칙 “성령의 영감” 이후로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신앙과 이성을 조화롭게 사용하는 길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1940년대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는, 교회가 그전에 성경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경계했던 것을 보완하며 적절한 이성적 접근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경에서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방식으로 말씀하셨기에 성경 해석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경 저자들이 정말로 뜻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깊게 연구해야 한다”(계시헌장, 12항).

 

하느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듣고자 육화하신 말씀의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인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앙적인 차원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요.

 

 

역사비판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을 조화시켜야

 

그런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날이 갈수록 발전해 가는 성서학이 그야말로 성경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교황님은 성경 주석에서 역사비판적 차원과 신학적인 차원이 단절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위험성을 지적하십니다(35항).

 

첫째는, 성경을 과거의 책으로 머물게 할 수 있는 위험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을 냉동실에 넣어 보존하는 것입니다. 박물관이나 박제라고 하면 더 좋을까요? 그렇게 성경을 보존하면서 그것이 어느 시대에,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기록되었다고 연구하는 데에만 머문다면, “살아 있고 힘이 있는”(히브 4,12) 하느님의 말씀은 그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둘째는, 이러한 성경 해석 안에는 하느님이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실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만 설명하고 그런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인간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활동하시고 그 안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자리는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성찬례 제정에 대해서까지 역사성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신앙에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편협한 이성으로 하느님께 한계를 그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이성의 지평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36항).

 

 

이성을 더욱 넓혀가야

 

초등학교 1학년 때에 0보다 작은 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제 이성의 한계는, 숫자는 0, 1, 2, 3, 그렇게 간다는 것이었지요. 0보다 작은 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때에 가지고 있던 수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는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세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지요.

 

성경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와 유사합니다. 한번 깨어난 인간 이성을 다시 잠재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을 더욱 넓혀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접근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피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 안에서 모든 것들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개입을 인정할 필요가 없이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 또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비학문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입니다.

 

형들의 손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갔던 요셉이 생각납니다. 형들과 화해를 하고 나서,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난 다음 혹시 요셉이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두려워하던 형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19-20). 요셉은 자신이 겪었던 그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이만큼 넓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는 성경 해석 작업에 대해, “가톨릭 주석가들은 해석 작업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이 하느님 말씀을 해석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공동 임무는 그들이 사료를 판별하고 양식을 정의하거나 편찬 과정을 설명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서 본문의 의미를 오늘을 위한 하느님 말씀으로 설명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맡은 과업의 참다운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교회 안의 성서 해석”에서).

 

여기에서 성경 주석과 신학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계시헌장에서는 성경 연구가 신학의 영혼이라고 말했고, 지금 교황님은 그 말을 정확하게 풀이해 주십니다. “주석이 신학이 아닐 때에 성경은 신학의 영혼이 될 수 없으며, 역으로 신학이 본질적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이 아닐 때 그 신학은 기초가 없게 될 것입니다”(35항).

 

신-학이란 무엇입니까?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학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에 대해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자연을 바라보면서, 또는 인간의 이성적 노력으로 어느 정도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성경에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신학의 원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또한 성경을 읽는 모든 이는, 그 말씀에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역으로, 하느님을 알려고 하는 이들은 다른 무엇보다 앞서 성경 안에서 그분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의 노력이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는” 것이 되지 않고 “성경을 열어주는 것”이 되는 길입니다.

 

“제 눈을 열어주소서. 당신 가르침의 기적을 제가 바라보오리다”(시편 119,18).

 

* 안소근 실비아 -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1년 6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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