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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단 하나의 책인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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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8-22 ㅣ No.301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단 하나의 책인 성경

 

 

함께 사는 저희 집 수녀님들이 가끔 저를 놀립니다. 신문을 읽을 때 기사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아니라 주로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들고 있는 것을 힐끗힐끗 읽다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주워듣고 오기는 하는데 정확히 아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사건인지는 모르고, 누가 죽었다는 것은 아는데 누가 죽였는지는 모르고, 이런 식입니다. 집에 와서 무슨 해설위원 같은 수녀님의 설명을 듣고 나면 ‘아, 그게 그 말이었구나!’ 합니다. 신문 기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더라면 이러지 않았겠지요.

 

추리소설을 생각하시면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범인을 알려면 책을 구석구석 잘 읽어야 합니다.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은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그 결과를 염두에 두고서 쓰는 것이지요.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범인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 한마디를 알아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한 부분을 올바로 알아들으려면 성경 전체를 그 맥락으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성경의 내재적 단일성’이라는 원칙입니다(39항).

 

 

73권의 책들이 하나

 

이 원칙 자체에 대해서는 5월호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성경의 한 구절을 해석한다고 할 때, 그것을 문맥에서 떼어내면 쉽게 본래의 뜻을 벗어나게 되고 실제로 많은 이단들이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해석을 하려면 그 구절이 들어있는 단락, 그 단락이 들어있는 책, 구약 또는 신약이라는 맥락, 그리고 그 다음으로 구약과 신약 전체의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전제되는 것이 구약의 책들 46권과 신약의 책들 27권 모두가 ‘하나의 책’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구약 46권과 신약 27권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을 39권만 받아들이는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이 하나의 책을 이룹니다. 어쨌든, 우리는 그 73권의 책들이 ‘하나’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의 한 부분을 읽을 때에는 그 73권을 그 문맥으로 간주하며 그 구절을 해석하게 됩니다.

 

 

가톨릭의 성경 해석

 

이러한 원칙은 특별히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사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서는 2001년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 발행한 문헌인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에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우리말로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2010년에 번역 출간하였습니다.)

 

그 문헌의 제1부에서는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예를 들어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 해석하는 등(마태 1,23 참조) 예수님의 생애에서 어떤 일들이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밖에도 많은 곳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어떤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잠시 생각을 해봅시다. 신약성경을 경전으로 여기지 않는 유다교인들에게, 위에 인용한 이사야서의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의 그리스도교적 해석입니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짧은 글에 이런 설명을 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굳이 이 문제를 다루는 이유는, 가톨릭 성경 해석이 다른 성경 해석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드리려는 생각에서입니다.

 

성경 본문의 의미는 처음 저자가 생각했던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처음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썼던 글은 다른 맥락 안에 자리하게 될 때에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자체 안에서도 이루어진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예언자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은, 다른 시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변모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과정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과 함께 하나의 책을 이루게 됨으로써 일단락지어진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본다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교회의 전통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경의 해석입니다.

 

여기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유다교와 개신교와 가톨릭의 입장을 살펴본다면, 유다교의 구약 해석은 신약은 고려하지 않고 그 대신 유다교 전통의 고유한 부분인 미쉬나, 탈무드 등의 전승 안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합니다. 개신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함께 경전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가톨릭에서는 거기에 ‘성전’을,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을 함께 고려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한 부분을 해석하려고 할 때에 고려해야 하는 ‘문맥’의 범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말씀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가르치시던 어떤 신부님께서 예언의 해석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임마누엘 예언에 대해, 그 예언이 예수님께 적용될 것인지는 “이사야도 몰랐고 마태오도 몰랐고 천주 성령만 아셨다.”고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가 이렇게 신약에 비추어 구약을 해석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는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41항)에 있습니다.

 

계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늘 인용되곤 하는 히브 1,1-2의 말씀대로, 같은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그 아드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보여주셨다고, 곧 그 아드님이 계시의 절정이시라고(계시헌장, 2항)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성경은 신약의 계시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약속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약은 그 약속을 보게 했습니다. 구약이 감추어진 방식으로 예고하는 것을, 신약은 온전히 현존하는 것으로 선포합니다. 그래서 구약은 신약의 예언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대한 최고의 주해는 신약입니다”(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성인들의 삶으로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

 

교회 안에서의 성경 해석에 관한 다른 부분들은 생략하고, 3부로 된 “주님의 말씀”의 제1부 ‘하느님의 말씀’을 마치면서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인들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경 해석입니다. 많은 성인들의 삶은 성경의 말씀들을 삶 자체로 살아냄으로써 그 말씀을 해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성인의 예를 하나만 든다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금도 은도 돈도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읽고는 곧 그것을 그대로 살기를 갈망하여 가난한 수도자의 삶을 시작했고, 그 자신의 삶으로 이 말씀이 뜻하는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도 이 세상 안에 울려 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꼭 성인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제2부 ‘교회 안의 말씀’과 제3부 ‘세상을 위한 말씀’에 가면 우리 역시 우리의 삶으로 성경 말씀을 오늘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해야 한다는 것,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대로 우리 각자도 성모님처럼 말씀의 육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1년 7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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