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술ㅣ교회건축

전례미술칼럼: 건축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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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03-20 ㅣ No.933

[전례미술칼럼] 건축 현장에서

 

 

건축 초년생 시절,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며 성당 건설 현장에 투입되어 관리 · 감독 일을 시작했습니다. 인부 아저씨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몰라서 그저 원칙대로 하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겁 없이 일을 시작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2000년대의 문턱을 넘기 전 건설 현장은 얼마나 차갑고 무뚝뚝했는지, 아저씨들의 귀에는 제 목소리만 들리지 않는 듯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내 나라 언어로 겪는 몰이해와 편견에 비하면 힘겨웠던 외국 유학도 젊어서 겪을 수 있었던 행복한 고민이었음을 실감나게 했습니다.

 

한국의 건설 현장에 여자가, 더구나 수녀가 감독을 맡아 현장을 관리한다는 것이 생소하고 이질감이 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겠지요.

 

그렇게라도 현장을 다니는 것이 맞는지, 혹시 헛수고하는 건 아닌지 하는 별의별 생각으로 기운 빠져 귀가하기를 며칠, 어느 날 점심시간에 목공 아저씨들이 흙바닥에 앉아 배달 음식이 식을까 봐 허겁지겁 드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몇 가지 안 되는 반찬과 식은 국을 보면서 왠지 모를 측은지심에 저분들도 각자의 집에 가면 존경받는 아버지이자 남편이요, 노모에게는 사랑받는 아들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순간 서운했던 감정들이 사르르 녹았습니다. 반면에 매 끼니 따뜻하고 정갈하게 올라오는 제 밥상이 몹시도 송구스럽고 새삼 감사로웠습니다.

 

몇 날을 현장을 겉돌며 고민하다가 드디어 어느 날 용기 내어 인부 아저씨들 밥상에 제 숟가락을 한번 얹어 볼까 하는 생각으로 바닥에 함께 앉아보았습니다. 자세를 낮추고 함께 음식을 먹으니 역시나 현장에는 알량한 지식보다 소박한 정이 더 필요했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같은 눈높이에서 땀과 먼지로 까매진 이마의 주름들이 보였습니다. 이는 마치 그분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훈장인 듯 귀한 보석 같았습니다.

 

밥 한 끼가 그 팀에 들어가는 통과의례가 되었을까요. 그날부터 조금씩 아저씨들과 한 팀이 되어 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훌쩍 흐른 지금까지도 그분들과 신뢰하며 가끔 협업도 하는 관계로 남아있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밥 한 끼에 차고도 넘치는 인생 공부를 했습니다. 책에서 배우고 익혔던 지식들은 파편이 되었습니다. 원리 원칙들로 무장되었던 저의 완고함과 부족함은 한동안 뼈저린 반성의 계기가 되었고 지금도 가능한 현장에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무슨 일에 앞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 먼저 겸손하게 주위를 살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아직까지도 여러 상황에서 잘 지키지 못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한 일은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매사에 인내로이 살펴봐 주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2023년 3월 19일(가해) 사순 제4주일 서울주보 6면, 황원옥 마리아에스텔 수녀(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 · 가톨릭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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