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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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천주교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 이장에 관한 자료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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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20 ㅣ No.1544

천주교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 이장에 관한 자료 연구*

 

 

Ⅰ. 머리말

Ⅱ. 관련 자료 소개와 그 성격

Ⅲ. 수습, 안장[이장]의 시기별 지역별 특성

Ⅳ. 맺음말



국문초록

 

이 논문은 천주교 ‘박해시기’ 순교자 시신의 수습, 안장, 이장 관련 자료들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그 특성을 밝히려는데 목적이 있다. 1791년(신해) 이후 1879년(기묘)까지 순교한 신자들과 관련된 자료들을 통해 시신의 수습 · 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는 275명[안장 231명, 안장 못함 44명]이다. 조선 정부의 기록에는 신자들의 시신이나 무덤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순교자 시신에 관한 천주교 측의 기록은 선교사제나 신자들의 서한[보고서], 순교자의 행적[약전], 시복 수속을 위한 증인 재판[시복재판록]에 나오는데, 시복재판록 기록이 가장 상세하고 신빙성이 높다. 재판 조목 중에 시신의 수습과 안장, 이장, 관련된 영적(靈蹟) 사실을 묻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 · 안장 관련 자료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는 상대적으로 선교사제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시신이나 무덤에 나타나는 영적에 대한 증언이 많은 반면 수습 · 안장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이 명확하게 기술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신 수습과 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 275명을 시기별 지역별로 분류해 도표로 제시하고, 그 특성을 살펴보았다. 1839년과 1846년 박해 때처럼 신자들이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나섰을 경우 수습 · 안장 비율이 높았다. 반면, 1801년과 1866년 박해 때처럼 천주교 박해가 혹독하여 신자들이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는 수습 · 안장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순교자 시신의 수습·안장 수치를 지역별로 비교하면 순교자의 지역별 수치와는 비례하지 않는다. 1866년 이후 박해가 혹독했던 경기 지역은 순교자가 많이 배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의 수습 · 안장 비율은 낮았다. 충청 지역은 1868년 박해가 격화되면서 순교자 시신 · 안장은 1866~67년에 주로 이루어졌다. 1866년 박해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전라와 경상 지역에서 수습·안장된 시신은 대부분 1839년 이전에 순교한 경우이다. ‘박해시기’라는 특성 때문에 안장된 순교자의 시신이 이장되는 경우는 서양 선교사제와 김대건 신부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 이 논문은 2022년 3월 31일에 개최된 초남이성지 2차 학술세미나 ‘초남이성지 역사재조명과 종교문화유산으로서의 위상 제고 방안’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보완한 글이다. 발표 당시에는 시신의 수습 · 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가 273명[안장 229명, 안장 못함 44명]으로 파악되었는데, 발표문을 수정보완하는 과정에서 순교자 2명[안장됨]이 누락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누락된 내용을 추가하여 시신의 수습 · 안장 여부가 확인된 순교자를 275명[안장 231명, 안장 못함 44명]으로 정리했다.

 

[학술지 교회사학 제21호, 2022년(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418688&Page=1&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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