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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레지오 단원의 힘은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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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3-09 ㅣ No.798

[허영엽 신부의 ‘나눔’] 레지오 단원의 힘은 기도

 

 

신학생 때 각반에는 쌍뚜스(?)가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거룩하다’는 뜻인데 신학교 각 학년마다 한두 명은 자타(?)가 공인하는 쌍뚜스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명칭은 존경보다는 약간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너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보통의 신학생들(?)과는 다른 부류가 그랬는지 모릅니다. 신학교 1학년 어느 날 우리 반 쌍뚜스 신학생과 산책을 했습니다. “마티아, 너는 하루에 몇 번 화살기도를 바치니?” 나는 그 질문에 당황했습니다. 나는 사실 한 번도 바치고 있지 않았거든요. “응? 화살기도? … 한 10번?” 나는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해 거짓말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빈정이 상해 나도 되물었어요. “너는 하루에 화살기도를 몇 번씩 하는데?” 그는 별생각 없이 바로 대답했어요. “나는 하루에 천 번을 해.”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어요. “천 번?” 지금 생각하면 그 신학생은 매일매순간 하루종일 화살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요즘 몇 년째 고통받는 코로나19로 사람들이 건강한 삶에 특별한 관심을 갖습니다. 개인과 사회가 감염병 방역에 온 신경을 쓰고 있고 개인 건강을 위해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고, 좋은 음식과 영양보조제 등을 챙겨 먹는 등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합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감소하는 근력을 유지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되고 각종 병에도 면역력을 높여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들의 무엇으로 신앙의 힘을 튼튼하게 할 수 있을까? 신앙도 기초체력처럼 신앙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기도입니다. 신앙인에게 기도는 마치 사람이 숨을 쉬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사람이 숨을 쉬기 힘들거나 쉬지 않으면 건강은 물론 목숨이 위험합니다.

 

기도한다고 하면 흔히 신에게 소원을 빌어서 무언가를 달라고 하고, 부족함을 채우고, 행복을 찾는 기원행위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도를 가톨릭 교리에서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대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사전을 찾아보면 보면 다음과 같이 기도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도란 일반적으로 하느님과 인간과의 대화라고 정의한다. 예전에는 신공(神功)이라고도 하여, 기도와 선공(善功), 혹은 신에게 바치는 공양(供養)이나 돈(佛供)을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기도란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올리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을 말한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대화’

 

우리는 기도를 할 때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대화’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대화는 인격체가 서로 상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그 의미와 목적은 서로의 뜻을 알고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한쪽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을 대화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대화는 상대에 대한 경청에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누군가 대화할 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도는 인간이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향해서 흠숭과 감사, 속죄와 청원을 발하는 신앙 행위’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기도 생활을 중요시하고 신앙인의 삶 자체가 기도이어야 하고, 기도는 신앙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것이며, 신앙의 전체이고 신앙의 도구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 예수님에게서 기도에 관해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 항상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8,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 11,2)하시면서 기도의 필요성보다는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주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주님의 기도입니다(마태 6,9-13).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면서 하느님을 인격적인 존재인 ‘아버지’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친밀성을 더 깊이 있게 심화시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나타나는 최대 관심사는 한마디로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오심”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완전한 평화와 자유, 정의와 생명이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완전한 평화, 정의, 자유, 생명을 자기 스스로 차지하지 못하고 마련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온전히 하느님의 활동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창조주이며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며 그 새로운 시작은 그분이 인간의 역사 안에 직접 개입하고 참여하심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은총인데, 이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와 자신을 전적으로 그분께 의탁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기도에 관해서 한층 더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즉 기도는 단순히 인간적 욕구를 승화시키고 하느님의 선물을 바라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 자신을 바라는 마음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주 기도하셨고 때로는 산 위에서 혼자서(마태 14,23), 때로는 사람들이 찾고 있을 때에 외딴 곳(루카 9,18)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고 제자들의 교육을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 만찬 때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직접 당신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여 제자들의 일치를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일치해서 해야 할 일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계명은 사랑이므로, 이 사랑이야말로 기도의 조건이고 목적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도에서처럼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청해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가 여기에 오심”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독백이나 메아리로 그쳐서는 안 되고 생활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경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필립 2,5).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는다는 것은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새로 입어, 그리스도의 고난을 함께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필립 3,10).

 

우리는 기도할 때 자주 하느님의 손에 의해 인도되고 있으며 자신의 힘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예속시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모두 다 절대적으로 얻게 되리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생활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스스로는 사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 안에서 기도하는 분이 그리스도의 성령이라 믿어야 합니다.

 

 

기도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중요한 수단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을 본받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당신의 생활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 나라에 둔다면 다른 것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밖의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깊이 탄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상황, 그것이 고통과 가난, 억압 속이라 할지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뼈저리게 현실을 아파하면서, 영으로만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현실을 외면한 기도는 사치하고 거짓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살과 뼈가 묻어나는 고통의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역시 우리의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떠한 극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 마지막 희망을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는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 기도를 잘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느님과 대화를 기도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 무엇이라도 중얼거리고 철부지 어린아이 떼쓰는 것과 같은 것도 충분히 기도가 됩니다, 어떤 영성가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훌륭한 기도라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힘들다고 짜증을 부리고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막 따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끝까지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십니다.

 

또한 신자들은 개인뿐 아니라 초대교회 때부터 함께 모여 공동체가 함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기도는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즉 교회가 인간적인 모임이 아니라 신앙모임의 성격을 띠는 것은 바로 함께 기도하는 데 있었습니다. 교회가 참다운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첫 번째 조건은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참다운 의미의 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게 되면 당연히 인간적인 갈등과 문제가 야기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도 이 기도 안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먼저 기도함으로써 사랑과 일치, 용서의 관점, 즉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기도를 통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기도는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표현이고, 하느님께 신뢰하는 삶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기적이 일어납니다.

 

레지오 단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특별히 열심히 하는 신자들입니다. 레지오 활동의 기본이 바로 이 기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구현되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3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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