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 (수)
(백)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평협ㅣ사목회

교황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10-17 ㅣ No.22

문헌 풀어 읽기 - “평신도 그리스도인”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

 

 

스무 해 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우리에게 “평신도 그리스도인”(Christifideles Laici, 1988년 12월 30일)이라는 권고를 하셨다. 집안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밭에 나가서 일을 해라, 세상을 복음으로 갈아엎어라, 일꾼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의 포도밭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하라는 명령이셨다.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하여 이 세상을 복음화하여야 하는 평신도들의 소명과 사명을 일깨우는 교황님의 권고였다.

 

 

순교자들에게서 피어난 신앙이지만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1987년에 열린 정기총회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20년을 지낸 교회와 세계에서 평신도의 소명과 사명”을 그 주제로 다루었는데, 그 모임에 참석하신 전 세계 주교님들의 건의안을 바탕으로 교황님께서 평신도 동원령을 내리신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이야말로 이땅에 스스로 복음을 들여왔다는 더 없는 긍지를 지니고 있다. 적어도 처음에는 제 할 일을 제대로 해냈다. 우리 선조들은 이른바 ‘극동’이라는 세계의 변방에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 그러나 닫혀있던 그 나라의 문을 열어젖혀 세상을 바꾸려고 하였다. 엄격한 신분제 아래서 갑갑하게 살아야 했던 어둡고 가난한 땅에, 반상의 구별도, 남녀의 차별도 없는 평등한 세상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외쳤다. 다 잡혀 죽거나 첩첩 산골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피에 전 순교자들의 몸뚱이는 신앙의 씨앗으로 썩어갔을 뿐이다.

 

그들의 죽음은 200년이 지난 뒤 한강 한복판에서 ‘기적’으로 되살아났다. 한국의 많은 신자 수가 바로 순교자들이 이룩한 기적이라고 하여, 세계 교회의 인정을 받았다. 그 기적의 증거였던 신자들이 여의도를 가득 메운 가운데, 로마 밖에서는 처음으로 거행된 시성식에서, 우리는 순교 선열들의 영광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었던 교황님에게 더 환호했다. 그때 교황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거룩하게 살아라.” 한 평신도는 맥이 빠졌다. 피맺힌 한에 젖어 사는 이 백성에게, 엄청난 ‘광주’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는 이 민중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고작 “거룩하게”라니, 그의 조국 폴란드에서 “연대(솔리다리치)”를 외치시던 열정에 찬 포효를 기다렸던 것이 잘못인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그런데 또 “거룩하게 살라.”고 하신다. 평신도의 근본 소명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이 교황 권고는 밝힌다. 반드시 가정에서부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두운 거리에서도. 자기 일터에서, 사회에서 곧 ‘세속’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세상을 복음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골목에도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

 

평신도가 집안 살림은 팽개쳐 두고 성당 주변만 맴돌아서는 안 될 일이다. 교황님은 이 권고에서 이렇게 걱정하신다. “흔히 평신도들이 받는 유혹의 하나는 평신도들이 교회의 봉사와 임무에 지나치게 강렬한 관심을 가짐으로써 전문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분야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며, 또 하나의 유혹은 신앙과 생활의 부당한 분리, 곧 현세와 현시대의 다양한 상황에서 수행하는 활동과 복음의 수용을 분리시켜 버리는 것이다”(2항).

 

한마디로, 성당 안에서만 신자고, 성당 문만 나서면 미신자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나’를 두고 교황님은 걱정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세속에 살면서 세상을 바꾸어놓으라고 내보냈더니, 다시 성당 안으로 기어들어와 혹여 돈벌이가 없나 두리번거리는 내 꼬라지를 지적하시는 것 같아, 이 대목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몹시 부끄러움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고도 여전히 ‘하느님 말씀’과 교황님 말씀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은 그 서론에서 우리를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여야 할 ‘일꾼’이라고 못을 박은 다음에, 제1장에서는 포도나무의 신비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평신도는 “현세의 일을 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관리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9항)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그 신원을 밝힌다. “모든 평신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세상 어디에나 더더욱 널리 가 닿도록 노력하여야 할 빛나는 짐을 지고 있다”(17항).

 

그 다음 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펼친 ‘친교의 교회론’을 바탕으로 교회 생활에 대한 평신도의 적극적인 참여를 권장하며, 평신도의 다양한 직무와 임무와 역할, 참여의 여러 형태를 제시하였다. 이 문서를 비롯하여 사도좌에서는 사제 직무에 대한 평신도의 협력을 권장하면서도, 교회 권위의 위임을 받아 그렇게 봉사하는 평신도가 바로 사제나 성직자와 같아지려고 나서면 아니 된다고 한다.

 

이어서 평신도 단체들을 인정하는 명확한 기준, 곧 ‘교회성의 기준’을 제시한다. 맨 먼저, 성화 소명이다. 그리고 가톨릭 신앙고백, 친교의 증언, 사도직 참여, 교회의 현존을 위한 사회적 투신 등이 그 기준이다. 평신도 단체는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라 인간의 전인적 존엄성에 봉사하여야 한다. 효과적인 참여와 연대로 더욱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신자들만의 친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준에 맞는 모임이어야 교회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준에 따라 교회 관할권자의 동의를 얻어야 ‘가톨릭’이나 ‘천주교’라는 이름을 내걸 수 있다(교회법 제300조 참조).

 

그리고 제3장에서는 선교에 대한 평신도의 공동 책임을 역설한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온 세상에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자기 자리에서 인간의 존엄과 생명권을 존중하며,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복음화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고을고을 십자가가 넘쳐나고, 정치인 경제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많아도, 나라는 그저 그 모양인, 아니 뒤로만 돌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기 집값 몇 푼 오른다니까 아무데나 표를 던져버리는 그런 행태로는 정치판이고 세상이고 나아질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세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먼저 실천하여야 할 사람은 바로 평신도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람 냄새가 나는 시장이나 경제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삶, 민족 문화, 인류 문화를 복음화하여야 한다.

 

제4장에서는 평신도의 다양한 소명을 밝히며, 젊은이들, 어린이들, 노인들, 여자들, 남자들이 저마다 제자리에서 할 일을 제시한다. 마지막 제5장에서는 평신도 교육 문제를 말한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알아야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다.

 

교황님은 새로운 천년기를 바라보시며, 평신도들이 인간과 사회에 봉사하는 가운데 새로운 복음화라는 위대한 과업에 투신하라고 호소하신다. 먼저, “거룩하게 살아라.” 그리고 기도하신다. “하느님 나라 / 새 하늘 새 땅을 기다리는 / 기쁨에 넘치는 희망을 품게 하여 주소서.”

 

* 강대인 라이문도 - 서울대교구 창5동성당 신자. 주교회의 번역실에서 일하며, 성서위원회 위원이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역자이다.

 

[경향잡지, 2009년 10월호, 강대인]



4,482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