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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인박해 역사신문 제8호 1866년 10 · 11월: 한강 양화진, 신자들의 피로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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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26 ㅣ No.753

[병인박해 150주년 - 역사신문] 제8호 1866년 10 · 11월


한강 양화진, 신자들의 피로 물들다

 

 

병인양요 여파로 천주교 신자 박해가 다시 격화됐다.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략하는 데 천주교 신자들이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병인양요가 진행된 10월 14일~11월 24일 천주교 신자 20여 명이 서울에서 양천으로 이어지는 한강 연안의 양화진에서 처형됐다.

 

 

두달여간 신자 20여 명 처형 

 

10월 23일 이의송(프란치스코)ㆍ김이쁜(마리아)ㆍ이붕익(베드로) 일가와 김한여(베드로)ㆍ최경원(야고보) 등 5명이 가장 먼저 양화진 북쪽 잠두봉 근처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에 앞서 10월 22일 의정부는 “사학죄인 이의송ㆍ이붕익ㆍ김이쁜 등 3명이 조사 중 사학에 물들게 된 사정을 털어놓았다”고 보고하면서 “사람을 해치는 무리와 규합해 꾐에 빠져 재앙과 난리를 도모하려 한 주벌해야 할 인물들”이라며 고종 임금에게 처형 윤허를 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고종의 명에 따라 처형이 시행됐다. 

 

10월 25일 김중은(베드로)ㆍ박영래(요한), 11월 11일 김인길(요셉)ㆍ김진구(안드레아)ㆍ김진(베드로)ㆍ최수(베드로), 11월 16일 강명흠(베드로)ㆍ김큰아기(마리아)ㆍ이기주(바오로)ㆍ황기원(안드레아), 11월 20일 박성운(바오로)ㆍ원후정ㆍ이용래(아우구스티노), 11월 24일 성연순ㆍ원윤철(요한 사도) 등이 양화진에서 군문효수로 처형됐다.  

 

양화진 처형자 대부분은 서양인 침략을 도운 혐의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우포도청은 심문 과정에서 이의송이 “서양 선박이 조선에 온다는 설은 작년 12월 베르뇌 주교에게서 들었다”고 진술했고, 김진구ㆍ최수ㆍ김인길도 △ 프랑스 군함이 침입하는 시기를 미리 정확히 맞추고 △ 프랑스 배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고 있고 △ 프랑스 군함이 침입한 목적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천주교 탄압 거세질 전망

 

국내 몇몇의 천주교 신자가 병인양요 이전부터 프랑스 군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것이 밝혀짐에 따라 천주교 신자 탄압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의정부는 11월 21일 “서양 배가 먼바다를 건너와서 제멋대로 침략하는 것은 틀림없이 우리나라에 염탐하는 무리가 있어서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형조ㆍ한성부ㆍ좌우변 포도청ㆍ팔도와 사도 및 각 진영에서는 간사한 무리들과 관계되는 자들을 모두 수색 체포해 의정부에 보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의정부는 이날 고종 임금에게 ‘한 사람이 사학죄인을 20명 이상 잡을 경우 지역의 변장(邊將) 자리를 만들어 내어 줄 것’을 청했고, 고종 임금은 이를 윤허했다.

 

 

왜 양화진에서 처형했나

 

- 천주교 신자가 처형된 양화진.

 

 

왜 천주교 신자들을 양화진에서 처형했나.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신자 처형지를 양화진으로 옮기며 포고한 글에서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며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밝혔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침략에 앞서 지난 9월 18일~10월 3일 지세와 수로를 정찰하기 위해 실시한 1차 원정에서 강화도를 거쳐 양화진 서강까지 올라온 후 퇴각한 바 있다. 

 

이전까지 베르뇌 주교, 남종삼 등 천주교 신자들은 주로 국사범 처형장인 새남터,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와 달리 병인양요 이후 새남터와 서소문 밖 형장에선 천주교 신자 처형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 조정 관계자는 “처형지를 옮긴 조치에는 프랑스 함대가 정박했던 양화진에서 처형함으로써 천주교 신자들의 책임을 확실히 하고, 드러나지 않은 신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여 프랑스군과 더는 내통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병인양요로 인해 도성 내 서양인과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커져 있는 상황인 만큼 당분간 천주교 신자 처형이 양화진에서 계속될 전망이다.

 

 

양화진에서 처형된 대표 순교자

 

이의송(프란치스코, 1821~1866) - 황해도 신천 출신의 종기 의원으로 1857년 서울에 상경해 정의배 회장을 만나 천주교를 접하고,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의 처 김이쁜과 아들 이붕익도 차례로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의송은 자신의 집에 공소를 차려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고 황해도 지역 12개 이상 고을에 복음을 전해 ‘황해도의 사도’라 불렸다.

 

김한여(베드로, ?~1866) - 상의원(尙衣院) 소속 비단 장인(능라장)이었던 김한여는 기해박해(1839) 체포됐다가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해 신앙과 멀어진 신자였다. 그러던 중 베르뇌 주교를 만나 고해성사를 보고, 사람들을 입교시키는 등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이후 1866년 체포된 김한여는 “천당에 가서 천일주를 먹을 것”이라며 기쁜 얼굴로 형장에서 순교했다.

 

김진구(안드레아, 1825~1866) - 선혜청(宣惠廳) 사령으로 일해온 김진구는 정의배 회장의 권고로 1846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견진성사를 받고 꾸준히 신앙생활을 해오던 김진구는 1866년 9월 체포됐지만 “천주교는 오랫동안 믿어왔기 때문에 배교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했다.

 

박성운(바오로, 1843~1866) - 할아버지를 통해 천주교를 접하고 신자가 된 박성운은 배움이 짧아 외울 수 있는 기도문은 많지 않았지만 충실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1866년 3월 베르뇌 주교가 순교했을 때 주교 시신을 매장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같은 해 10월 체포된 그는 “천주교는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기 때문에 천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성호를 긋고 칼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평화신문, 2016년 6월 26일, 백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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