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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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하느님 말씀과 세상에 대한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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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1 ㅣ No.307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 해설

하느님 말씀과 세상에 대한 투신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그다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우리가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에,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실망하는 것을 봅니다. 실망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스스로도 때로는 교회의 어떤 모습에 대해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투신의 근거이다

이런 판단을 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하여도, 많은 경우 그것은 복음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우리 자신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교회가 이 세상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요청을 받는 교회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에 대한 투신이라는 것은 꼭 명시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 가능한 것입니다. 정의감에서, 또는 인도주의적인 정신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지요.

그러나 우리가 순전히 그런 이유 때문에 세상을 위하여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에 투신하는 데에는 다른 어떤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살고 자신의 삶으로 말씀을 증언하기 위해서이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던 일을 역사 안에서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해 작은 행위 하나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오 복음 25장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드린 것이며 그 작은 손짓 하나가 세상 끝 날까지 가치를 보존할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투신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이 세상을 조금 더 하느님의 뜻에 맞는 곳으로 완성하려고 기울이는 우리의 겨자씨 같은 노력들이 헛된 것이 아니라고 알려줍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가치들을 추구하도록 가르치고 감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일례로 생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 보호’는 수십 년 전부터, 초등학교에서부터 많이 들어온 말이지요. 그것은 이미 인류의 생존을 위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환경 보호를 주장할 때 그 동기는 하느님께 있습니다.

세상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었기에,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으시는 듯이 살아가는 인간의 교만”(108항)이기에 교회는 “신앙의 복종에 근거를 두고” 창조의 보전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정의와 평화를, 화해를 추구하고 인권을 보호하며 약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교회는, 우리 자신은 이 세상에게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지 민감하게 알아냅니다. 그 감각은 아주 정확해서, 우리에게는 위선이나 변명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하느님 말씀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을 넘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질문들에 대하여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대답을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더욱 고유한 의미에서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행해야 할 몫입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세상에 대한 교회의 투신은 양식과 물을 주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목마름에 응답하는 것, 세상이 찾고 있는 그 말씀을 전해주는 것이 주님께서 교회에 바라시는 것이고 또한 세상이 교회에게서 바라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사회제도가 아니라 신앙의 유산을 전수받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투신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 갑니다. 예를 들어 삶의 방향을 찾고 있는 젊은이들이 말씀 안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것,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태로 그리스도교 국가로 옮겨오는 이주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사목적 배려를 베푸는 것 등은 말씀의 선포자로서 그리스도의 사명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은 교회가 이 세상 안에서 지닌 책임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들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입니다. 신체적, 정신적, 영적인 온갖 종류의 고통 속에서 심각하게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들에게 교회는 말씀을 통하여 대답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희망의 이유’(1베드 3,15)를 보여주어야 하고,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적인 형제애로써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눈에 보이게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세상의 고통에 대해서 눈을 감고 살아가면 안 될까요? 교회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교회 안에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문장을 쓰면서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할까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할까 좀 망설였습니다. 인간적인 약함과 한계들이 그 말씀을 거의 질식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하면, 말씀이 교회 안에 “살아있어야 한다.”고 말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말씀이 교회 안에 “살아있다.”는 표현을 선택합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인간의 죄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사이고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안에는 분명 하느님의 말씀이 현존하십니다. 그 말씀을 세상으로 들고 가는 것이, 말씀 안에서 생명과 구원을 발견하고 그 힘으로 살아가는 교회의 역할입니다.


“말씀”과 “교회”

계속해서 말씀과 세상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하느님 말씀과 문화의 대화(복음의 토착화와 문화의 복음화), 그리고 하느님 말씀과 종교간 대화라는 주제를 거쳐 이제는 문헌 전체의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까지 읽어온 문헌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때, 주님의 말씀」의 중심 주제는 “하느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말씀”과 “교회”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한 세대를 돌아보는 「주님의 말씀」은,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 여러 방향에서 커져가는 성경에 대한 관심들을 그 말씀의 수신자이며 선포자인 교회를 중심 축으로 하여 한데 모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헌은 “교회는 말씀으로부터 태어나고 그 말씀으로 살아간다.”(3항)는 것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 지체들의 사명을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결론에서 인용하고 있는 묵시록의 말씀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십시오.’ 하고 말하여라”(22,17). 묵시록에서 말하는 신부는 교회입니다.

신부인 교회는 성령과 함께 묵시록 21-22장에서 그려 보이는 새 예루살렘이 완성될 날을,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불완전한 지금의 모습이지만, 완성의 그날을 열망하며 자신의 사명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날의 삶은 교회에게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사귀시고 친교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세상에게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세상도 우리와 함께 그 친교에 참여하도록 하려는 것이고, 이로써 우리의 기쁨은 더욱 충만하게 됩니다(1요한 1,1-4 참조).

그 기쁨이 완성될 날을 고대하며, “하느님의 말씀이 성령의 활동으로 우리 삶의 모든 날에 우리와 함께 머무시고 사시고 말씀하시도록, 말씀을 듣고 묵상하기 위하여 침묵합시다”(124항).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것이 교회의 삶과 사명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 안소근 실비아 - 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수녀.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가톨릭대학교와 한국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성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다.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 총무이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 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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