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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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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2-15 ㅣ No.560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첨례표와 신앙인들의 시간세계


대구가톨릭대학교에 근무하는 교수들이 부러울 때가 가끔 있다. 그들이 부활절 방학을 갖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사학과 봄 정기답사가 하필이면 성주간일 때 그 생각은 더욱 짙어진다.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일상생활을 천주교식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천주교는 사실 일년을 큰 단위로 하고 한 주간을 소단위로 삼아 전례생활을 하는 종교이다. 신자들은 전례가 있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반기며 기꺼이 전례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전례를 익히는 일은 우리가 일상의 생활을 신앙화 하는 길이다. 그러나 가톨릭사회가 아닌 곳에서는 이 기본적인 일들이 매우 힘겹다. 신앙의 자유가 온 현대사회에서도 자칫하면 다른 일에 매이게 되는데 박해기는 말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박해기 신자란 그 단어 자체가 모든 생활 속에서의 자잘한 박해를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만큼, 갖은 어려움 속에서 가톨릭 전례를 생활화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이들이었다.


전통의 시간과 가톨릭의 시간

우리 전통달력은 음력을 바탕으로 했다. 또 주간 개념없이 상순, 중순, 하순이라 하며 열흘을 단위로 삼거나 24절기처럼 15일을 단위로 삼아왔다. 천주교를 접했던 초기의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용하던 양력이란 개념을 몰랐다. 예를 들면 천주교 서적을 읽은 홍유한은 양력의 ‘주간’ 개념을 우리 달력에 적용해야 했다. 그래서 1770년 그는 7일마다 주일이 온다는 천주교 기록에 따라 7일, 14일 등 7의 배수가 되는 날에 일을 쉬고 기도에 전념했다. 달력이란 시간을 다스리는 것이며, 인간의 사고를 연속적으로 파악해 내는 방법이다. 일종의 표준화 작업인데, 특히 시간의 표준화는 사람들의 모든 일상생활을 지배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시간측정법의 전개는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한국에서 햇수를 세는데 서기를 쓴 것은 5.16 이후이다. 전근대사회에서는 간지(干支)를 사용하여 60년을 하나의 주기로 삼았다. 왕권이 강했던 광개토대왕 때에는 ‘영락’과 같은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통일신라기부터는 몇몇 왕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연호를 가져다 썼다. 그리고 갑오개혁 때 태양력을 쓰면서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세웠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서면서 광무(고종황제)와 융희(순종황제)로 햇수를 표시했다. 일제 때에는 대정, 소화라는 일제의 연호가 쓰여졌고 1945년 광복이 되자 단기 4278년과 같이 단군기원이 채용되었다. 5.16이후 도량형을 정리할 때 서력기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은 이보다 200년 가량 앞서 서력기원인 ‘천주강생’을 기점으로 해를 표시하고 있었다.

햇수 외에 날수도 크게 달랐다. 우리나라는 전통시대 내내 달의 변화를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이 기준이었다. 우리가 사용했던 달력은 고대 중국에서 고안되었다. 중국은 BC 14세기경 은나라 때 이르러 365.25일의 태양력과 29.5일의 삭망주기를 확립하고, 이 둘을 조화시켜 태음태양력을 제정했다. 한편 태양력은 고대 이집트인과 멕시코인들이 사용했다. 이후 고대 그리스 천문학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었고 기원전 46년 시저는 로마제국에 양력을 도입했다. 기원전 1세기경에 7일 1주일의 개념이 등장했고, 기원후 2세기경 로마인들은 7일 일주일제를 공식적으로 택했다. 그 후 1582년 그레고리오 13세 때에 완전한 태양력이 확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조선, 부여 등에서 역법을 쓴 흔적이 있다. 부여의 12월이 은나라 정월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역법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삼국에서는 각각 중국의 서로 다른 왕조의 역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사용했다. 신라 말에 사용된 선명력은 고려를 거쳐 조선초기까지 사용되었다. 조선초기 세종대에 이르러 중국의 역법을 보완하여 한반도 실정에 맡는 ‘칠정산 내외편’을 만들었다. 이는 서울을 기준으로 한 동지와 하지 후의 해의 움직임을 계산해 낸 것이었다. 그러다가 김육(1580~1658년)의 건의에 의해 1654년부터 서양역법의 영향을 받은 태음태양력인 ‘시헌력’을 시행했다. 청국 황제는 아담 샬 신부에게 중국력의 결함을 극복한 역법을 만들라고 청했다. 이에 아담 샬은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적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한 ‘시헌력’을 고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헌력 또한 태음력이 그 근간이었다. 1896년 조선 조정은 태양력을 채택했다. 그래도 백성들은 여전히 전통시대 시헌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첨례표에서 매일축일표로

천주교를 수용한 이후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천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한 때를 새로운 삶의 기준으로 삼고자 했다. 그들은 ‘서력기원’ 또는 ‘서기’를 받아들여 ‘천주강생 후’ 몇 년이라는 새로운 시간 개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달력이었다. 당연히 모든 교회의 행사는 전례력과 연관하여 잡았다. 주문모(1752~1801년) 신부에 의해 세워진 명도회의 모임 날짜는 매 축일이었다. 즉 명도회의 집회는 여러 곳에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각각 첨례 때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포교에 힘썼다. 다블뤼(Daveluy,1818~1866년) 신부의 주교성성식은 3월 25일 ‘성모 영보 첨례’였다.

신자들은 축일로 날짜를 기억했다. 기해박해 당시 주교와 신부들의 사형집행일은 음력으로 8월 14일이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날을 양력 9월 21일 ‘성 마태오 축일’로 기억했다. 심지어는 어린이들도 축일을 기준으로 하여 날짜를 말했다. 1821년 무렵 윤 야고보라는 11세 된 소년이 예수 승천 축일 정오 때 죽으리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고 했다. 그는 건강했는데, 결국 그날 삼종 때에 삼종경을 마친 후 죽었다. 물론 교회에서도 축일로 날짜를 명시했다. 1921년 6월 대구대목구에서는 순교자에 대한 증거를 보충하고자 했다. 이때 치명자 명단을 알리고 나서 “치명자의 사건에 증인이 되는 이가 있거든 금년 성모 승천 첨례 전에 본당신부께 알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천주강생을 기준으로 한 시간은 신자들의 일상생활에 이렇게 자리를 잡아갔다. 가령 신자 농민들은 봄철 가뭄이 들 때 ‘베드로 바오로 첨례’ 날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그해 농사를 망친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축일은 바로 신자들의 삶이었다. 따라서 축일을 기억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안중근 의사가 목숨을 건 의병투쟁 중에도 축일표 등을 지니고 다녔다는 것처럼 사회가 다르면 이 축일을 기억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교회의 지도부는 「첨례표」를 보급함으로써 교회전례를 준행토록 했다. 첨례표란 교회력에 따른 주요 축일을 월·일별로 기록한 한 장짜리 표이다. 첨례표는 교회 창설 직후부터 사용되었다. 1801년 윤현의 집에서 압수한 서적 목록에는 「첨례단」(1책)이 있었다. 신자들이 개별적으로 「첨례표」를 소지했다는 사실은 첨례표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했으며 동시에 많이 만들어졌음을 드러낸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첨례표는 약현성당의 서소문 순교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을축년첨례표〉(1865년, 한광복 신부 기증)이다. 그리고 절두산 순교기념관에는 1866년의 축일표인 〈병인년첨례표〉가 소장되어 있다. 또 모리스 꾸랑의 『조선서지』에는 〈기축년첨례표〉(1889년)가 실려 있다. 1911년 대구대목구 설정 이후 첨례표는 각 교구별로 간행되었다. 1924년 경향잡지사에서 소책자로 된 〈매일첨례표〉가 간행되어 두 가지가 함께 쓰이게 되자 이때부터 한 장짜리 첨례표는 ‘큰 첨례표’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는 각 교구의 첨례표를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간행하고 이를 〈천주교회첨례표〉라 했다. 이는 교회에서 1966년 ‘첨례’라는 용어를 ‘축일’로 개정하자 1969년부터 〈천주교회 축일표〉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1973년 이후 한 장짜리의 첨례표는 간행되지 않았다.

〈을축년첨례표〉나 〈병인년첨례표〉는 가로 50cm, 세로 22cm 크기의 목판인쇄물이다. 이듬해 4월까지의 주요 축일과 기념일이 음력 날짜 밑에 표시되어 있다. 이 두 첨례표의 체제와 내용이 거의 동일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첨례표가 매년 간행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목판인쇄를 한 것으로 보아 첨례표가 당시 신자들에게 대대적으로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사진의 〈정사년첨례표〉(1917년)는 서울에서 발간한 활판 인쇄물인데 다소 차이가 있다. 그 크기가 세로로 길어져 삼단으로 접게 되었고, 위에는 작지만 양력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기간도 12월까지로 끝나고 있다. 한편 1948년 2월 20일자 대구대목구 공문에 일본에서 1948년도 축일표가 도착하지 않아 축일표 임시 보충을 위한 몇 가지 유의사항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그때에는 축일표에 4월까지의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해방직후의 극심한 용지난 때문에 일본에서 이를 인쇄했던 것 같다.

어느 경우든 첨례표에는 기호를 이용하여 각 날짜 위에 축일이 명시되어 있고, 또한 ◎대파공, ○파공들이 표시되어 있다. 또 ♡예수성심회, 성모성심회, □성의회, †매괴회, 죋전교회, ?성가회 등의 단체들이 해당 날짜에 기록되어 있다. 첨례표 좌측에는 각 기호에 대한 설명과 파공지키기 등과 같은 신앙실천에 대한 주의사항이 적혀 있다.

첨례표를 겹쳐 놓고 보면 근사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신자들의 삶이 매년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이를 교회에서는 ‘전례주년’이라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 102항에서는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한 해의 흐름을 통해 지정된 날들에 하느님의 구원 활동을 거룩한 기억으로 경축하는 것을 자기 임무라고 여기며 주간마다 주일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매년 주님의 복된 수난과 함께 이 부활축제를 가장 장엄하게 지낸다. 한 해를 주기로 하여 강생과 성탄에서부터 승천, 성령 강림 날까지 또 복된 희망을 품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펼친다고 했다.

매년을 되풀이하여 살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내년에는 좀 더 나은 일을 실천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다. 그렇게 해를 거듭하면서 깊어지는 신앙의 연륜을 쌓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나이든 사람들이 성당을 지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12월은 전례력을 놓고 일년 계획을 세워볼 때가 아닐까? 올해보다 나은 내년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을 지금 꿈꿀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도움 : 김진소 신부, 조광 교수, 서소문 순교성지, 한국교회사연구소, 『눈 먼 이에게 빛을』)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12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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