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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떼제의 로제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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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9-23 ㅣ No.326

[현대의 영성] 떼제의 로제 수사 (1)

 

 

2005년 8월 16일 저녁 프랑스 동남부의 작은 마을 떼제, ‘화해의 교회’에서 저녁기도가 시작되었다. 흰 수도복을 입고 제대를 향해 앉은 형제들 맨 뒤에 90세의 로제 수사가 자리했고, 그의 주변에는 몇몇 어린이들이 앉았다. 3천 명의 젊은이들이 기도에 참석하였다.

 

성경 봉독에 이어 찬양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에 정신착란자의 칼이 로제 수사의 목을 그었고, 그는 곧 숨을 거두었다. 독일 쾰른에서 세계청년대회가 열리던 중이었다.

 

그날도, 그 뒤로도 떼제에서는 노랫소리가 멈추지 않고 있다.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멀어지고 있는 오늘날 왜 이곳에는 젊음의 물결이 끊이지 않고 있을까? 로제 수사의 삶을 말하지 않고는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1915년 5월, 스위스 뇌샤텔 주의 프로방스라는 마을에서 개혁교회 목사의 아홉 자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난 로제 슈츠는, 10대 때 누나의 죽음과 자신의 폐결핵으로 큰 시련을 겪었다.

 

그는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시편 27,8)라는 성경 구절을 접하고 새 길을 발견한다.

 

그는 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을 찾는 구도자였다. 그는 믿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 어려워하는 현대인을 이해하려 애썼다. 그에게 신앙이란 하느님에 대한 소박한 신뢰였다. 지식은, 비록 그것이 성경이나 하느님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1940년 스물다섯 살의 청년 로제는 수도 공동체를 꿈꾸며 어머니의 나라 프랑스로 들어갔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요양하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공동체 설립의 성소가 자라났고 확인되었다.

 


전쟁 난민을 보살피며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로제는 그의 외할머니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전쟁으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을 지체 없이 도와야 한다고 확신했다. 떼제는 당시 독일 점령지역에서 아주 가까웠고 전쟁 난민들을 보호하기에 좋은 위치였다.

 

로제는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을 부속건물과 함께 약간의 대출금으로 구입했다. 그는 누나 쥬느비에브에게 떼제에 와서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청한다. 그들이 맞이한 난민들 중에는 유다인도 있었다. 물자가 많이 부족했다. 수돗물도 없었기에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마셨고, 근처 정미소에서 싸게 구입한 옥수수 가루로 죽을 끓여 먹었다.

 

로제는 자신이 맞이해 숨겨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혼자서 기도했고, 자주 집에서 한참 떨어진 숲으로 가서 찬양했다. 쥬느비에브는 피난민 가운데 유다인들이나 믿지 못하는 사람들 그 누구도 불편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싶은 사람들은 자기 방에서 혼자서 조용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각자에게 설명했다.

 

로제의 부모는 막내아들과 딸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고 잘 아는 프랑스 퇴역 장군에게 그들을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1942년 가을, 그는 로제 남매의 행동이 발각되었으니 모두 즉시 떼제를 떠나야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로제는 제네바로 가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머물렀고, 거기에서 첫 형제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1944년 그들은 떼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로제는 누나의 도움으로 전쟁고아들을 맞아들여 키웠고, 형제들은 일요일이면 근처 수용소에 있던 독일 전쟁포로들을 맞이했다.

 

 

공동체 창설과 떼제의 규칙

 

차츰 다른 청년들이 합류하였고, 1949년 예수부활대축일에 일곱 명의 형제들이 평생 독신으로 아주 소박하게 공동생활을 하기로 서약했다. 1952-1953년 겨울, 긴 침묵 피정 동안 공동체 창설자인 로제 수사는 형제들을 위해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담은 “떼제의 규칙”을 썼다.

 

그는 공동생활이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굳게 믿었다. 형제들이 평생토록 날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살아가는 것이 떼제 공동체의 성소라고 로제 수사는 말하곤 했다. 그는 인자한 마음과 단순 소박함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그런 공동체를 꿈꾸었고 또 이루었다.

 

아름다운 전례나 정의와 평화를 위한 노력, 젊은이 사목은 그 공동체의 삶에서 우러나온 결실이다. 공동체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가 예술가이든 신학자이든 주방에서 일을 하든, 중요한 것은 그의 소임이 아니라 그가 공동생활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가난한 이들과 젊은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오늘날 떼제 공동체에는 약 30개국 출신 1백여 명의 형제들이 있다. 그들은 가톨릭과 다양한 개신교 출신이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서 갈라진 그리스도인들과 민족들 사이에 화해의 구체적 징표가 된다.

 

로제 수사는 떼제 공동체가 어떤 기부나 선물도 받지 않으며 스스로 일해서 번 것으로 생활하도록 했다. 수사들은 가족의 상속을 받게 될 경우 자신이나 공동체를 위해서 쓰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로 돌리며 이 원칙은 아직도 계속 이어진다.

 

일부 형제들은 세계의 가난한 지역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 가까이에서 평화의 증인으로서 살아간다. 수사들은 너덧 명씩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 있는 작은 공동체에서 주위 사람들과 생활을 같이하며 가난한 이들, 거리의 아이들, 재소자들, 임종자들, 애정의 단절과 인간적으로 버림받아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해를 거듭하면서 온 대륙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떼제로 와서 매주 열리는 모임에 참석했다. 방학 때에는 젊은이 모임 참석자들이 매주 수천 명에 이른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더불어 떼제는 ‘젊은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했다.

 

교회 지도자들도 끊임없이 떼제를 찾아온다. 공동체는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세 명의 캔터베리 대주교, 여러 정교회 대주교들, 스웨덴 루터교의 전체 주교단과 세계 각지의 수많은 목사들을 맞이했다. 여러 해 전부터 가톨릭과 성공회 주교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떼제의 기도에 참석하는 것을 아주 자주 보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쌓인 1962년부터 떼제의 형제들은 소리 없이 동유럽을 방문하거나 준비된 젊은이들을 파견하는 등 고립된 이들과 접촉과 나눔을 쉬지 않았다. 이런 노력은 지금도 세계의 몇몇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로제 수사의 사상과 영성

 

로제 수사의 영성적 유산은 살아서 생생하게 떼제 공동체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는 많은 글을 썼지만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끊임없이 수정하곤 했다. 공동체의 근본이 되는 규칙조차도 여러 차례 고쳐 썼다. 그는 쓰인 글이나 조직의 틀에 형제들이 연연하지 않고 언제나 성령의 숨결에 의지하도록 하려는 듯했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계신다. 로제 수사의 마음속에는 모든 인간 모든 민족이, 또 무엇보다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는 새로운 종교를 하나 창시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과의 친교를 베풀어주시려고 오셨다.”고 강조하곤 했다.

 

일치와 친교의 공동체인 교회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해서 존재한다. 젊은이들이 이 친교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것에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려고 그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로제 수사는 사람들이 겁내고 두려워하는 엄격한 심판관 같은 하느님의 이미지가 신앙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라고 간파했다. 그는 이와 정반대로 “하느님은 오직 사랑만을 주실 뿐”이라고 역설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조건 없는 사랑을 주신다. 그 무엇도 사랑의 하느님을 향한 길을 가로막지 않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했고, 특별히 젊은 세대를 위해서 그러했다. 그는 또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고 강조했다.

 

로제 수사 안에서는 얼핏 보아 충돌하고 심지어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과도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었다. 그는 수도 공동체를 창설했지만 그것이 결코 복고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오늘날 교회와 세계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중요했다.

 

최근까지 공동체는 전쟁의 비극으로 고통을 겪은 베트남, 보스니아, 르완다, 이라크, 이집트 난민을 맞이했다. 로제 수사는 일생 동안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마음을 썼다.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있지 못하고 “(고통을 덜어주려고) 우리가 무언가 해야만 해.” 하고 말하곤 했다.

 

로제 수사와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가 그렇게 가까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신한열 - 1988년 프랑스 떼제에 가서 1992년 종신서원을 했다. 떼제에 살면서 젊은이들의 국제모임을 돕고, 외국을 다니며 ‘신뢰의 순례’ 모임을 한다. [경향잡지, 2011년 9월호, 신한열]

 


[현대의 영성] 떼제의 로제 수사 (2)

 

 

로제 수사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느냐를 가지고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자신의 (개신교) 출신 배경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가톨릭 신앙의 신비와 완전히 화해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능했다.

 

그는 아주 일찍부터 교회 일치를 위한 교황의 보편적 직무에 주목했다. 때로는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오해를 받으면서도 교회의 일치와 친교를 깨뜨리는 발언이나 행동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진정한 화해와 내적 일치를 향하여

 

로제 수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제도나 조직의 통합이 아니라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화해요 내적 일치였다. 그에게 그리스도인들의 화해는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였다. 복음 가르침대로 살아가고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복음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된 채로 있는 것은 무슨 명분으로든 합리화될 수 없었다.

 

프랑스 떼제 마을이나 세계 여러 곳에서 떼제 공동체가 개최하는 모임에는 언제나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 등 여러 교파에서 참가한다. 떼제 모임에서는 ‘교회일치’가 더 이상 토론 주제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떼제에서 이 다양성은 장애물이 아니라 나눔을 더 풍성하게 해주는 원천이다.

 

비록 미리 계산된 것은 아니지만 떼제의 기도와 생활에는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의 요소가 모두 스며들어 있다. 정교회의 아름다운 전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곁에 살아계신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거기서 끝없이 반복되는 찬양 방식은 떼제의 기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떼제 공동체의 모임에서는 정교회의 이콘(성화)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도와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늘 중심을 차지하고 젊은이 모임이 성경 묵상과 나눔을 위주로 하는 것은, 굳이 말하자면 개신교 전통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일치의 은사와 함께 성체성사(성찬)를 중시하는 것은 가톨릭적이다.

 

 

기도 안에서 세상 곳곳의 현실과 마주하다

 

신앙의 원천을 찾아 거기에 더욱 충실한 동시에 현대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로제 수사의 태도였다. 신앙은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이므로, 어떻게 하면 기도와 전례 그리고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과 더 깊이 내면적 친교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로제 수사의 관심사였다.

 

떼제의 기도는 전통적 수도원 기도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현대인, 특히 젊은이들이 함께 쉽게 바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단순화했다. 신앙의 핵심 내용을 담은 단순하고 짧은 노래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떼제의 노래는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로제 수사와 떼제 공동체의 성격은 관상 수도회에 가까웠지만, 기도 가운데 언제나 세상 곳곳의 현실이 자리하였다. 떼제의 젊은이 모임에서는 늘 ‘내적 생활과 인류의 연대’가 두 축이 되었다. 세상을 더 정의롭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려는 노력과 투쟁의 힘은 다름 아닌 기도에서 나오며,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웃의 아픔에 무관심할 수 없는 법이다.

 

언젠가 바오로 6세 교황이 로제 수사에게 “젊은이 사목의 열쇠(비결)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물음에 해답은 없다. 로제 수사는 자신과 떼제의 형제들이 영적 지도자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가르치기보다 인내로이 경청하다

 

가르치기에 앞서 인내로이 경청하는 것, 준비된 해답을 주기보다 그들의 질문과 의심, 아픔과 좌절, 또 그들이 간직한 열정과 희망을 들어주고 그들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도록 격려하는 것이 수사들의 역할이다.

 

로제 수사는 흔히 밤늦은 시간까지 많은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어린이나 청년을 포함해서 잠시라도 그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로제 수사의 부드러운 눈길과 따뜻한 손길을 체험했다.

 

경청하는 것은 지금도 떼제 수사들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일부다. 떼제에 와서 침묵 피정을 하는 사람들이나 장기 자원봉사자들과 함께하는 것 말고도 매일 저녁기도 후에 교회 안에서 여러 형제들이 이 ‘경청하는 봉사’를 계속한다. 누군가 “떼제의 수사들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가운데 복음을 선포한다.”고 갈파하기도 했다.

 

 

그리스도 중심, 교회 중심

 

로제 수사는 젊은이들에게 “그대가 복음에서 이해한 것이 아무리 적다 해도 그 이해한 바를 곧바로 실천에 옮기십시오.” 하고 강조하곤 했다. 하느님 체험은 즉시 자신의 삶으로 옮겨져야 하며, 삶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진다.

 

영적 체험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을 로제 수사는 원치 않았다. 떼제의 기도 역시 아주 적은 말로 이루어진다. 어떤 안내나 주의 사항, 공지의 말이 전혀 없다. 모두 잘 선택된 성경 구절과 짧은 기도문으로만 이루어진다. 그 대신 긴 침묵과 반복되는 찬양이 있을 뿐이다.

 

교회의 기도와 전례가 너무 많은 말로 질식되는 것보다 침묵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더 생명력 있게 다가오고 성령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한다.

 

로제 수사는 사람들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이끌었고, 떼제보다는 각자 속한 지역교회를 주시하게 했다. 떼제를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공동체에 큰 선물이지만 그는 어떤 형태로도 젊은이들을 도구화하지 않았다.

 

 

‘신뢰의 순례’

 

각자 삶의 터전에서 신앙을 살아가도록 청년들을 뒷받침하려고 떼제가 세계 각지에서 개최하는 젊은이 모임이 바로 ‘신뢰의 순례’다. 주로 지역교회와 협력해서 이루어지는 이 모임은 도시와 마을, 본당에서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나누면서 사람들이 고통 받는 현장에서 희망의 징표를 찾으려 한다.

 

30여 년 전부터 연말연시에 유럽의 대도시를 돌아가면서 개최하는 ‘신뢰의 순례’ 유럽 모임에는 해마다 수만 명이 참가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도 2년에 한 번씩 이런 젊은이 모임이 열린다. 이름부터가 어떤 ‘대회’가 아니라 순례이고 모임이다.

 

떼제의 수사들이 여러 나라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하는 작은 규모의 모임도 모두 ‘신뢰의 순례’의 일환이다. 갈라진 인류와 교회 안에서 평화와 일치의 표징이 되고 누룩이 되도록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 기도와 나눔 안에서 일치를 체험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떼제를 중심으로 한 어떤 운동도 조직도 없다.

 

 

60여 년의 원장 생활

 

로제 수사는 다른 교회 전통과 문화를 배경으로 한 형제 공동체의 원장으로 60여년을 살았다. 그는 많은 결정을 내려야 했고, 형제들을 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했지만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거나 단정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항상 형제들의 의견을 물었고 자신의 생각이 분명하더라도, 많은 경우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 하고 제시하는 편이었다. 또 형제들은 그의 직관을 신뢰했다.

 

그는 달변이나 웅변과는 거리가 멀었고 뛰어난 설교자도 아니었다. 그 누구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나 글은 흔히 아주 함축적이고 때로는 시적인 것이었다. 그는 일의 효율성보다도 공동체의 조화와 일치를 우선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만사를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머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섰다. 아무리 어떤 일이 잘 되더라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떼제의 공동 기도(전례)에서 건물이나 방 배치에 이르기까지 늘 더 아름답고 더 단순하게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바꿀 수 있었다. ‘아주 적은 것만 가지고 때로는 거의 아무것도 없이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것’이 그의 뛰어난 은사였다.

 

 

로제 수사가 남긴 유산

 

60년 이상 원장직을 수행한 로제 수사가 원장의 자격이나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해놓은 것은 별로 없다. 다만 식별력과 자비심, 한없이 인자한 마음이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사라고 말했다.

 

하느님의 종, 로제 수사가 우리 곁을 떠난 지 6년이 지났다. 로제 수사의 비극적 선종은 공동체에 큰 충격이었지만 형제들은 그 상황에서도 로제 수사가 남긴 유산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왔다.

 

어떤 이들은 카리스마적 창시자가 떠난 뒤에 식어버리는 어떤 운동이나 조직의 예를 들면서 로제 수사가 없는 떼제도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고 우려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떼제 공동체는 로제 수사가 닦아놓은 그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고,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떼제를 찾고 있다. 그가 시작하고 이루어놓은 것은 사실 인간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화도 신뢰도 화해도 용서도 일치도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다.

 

“슬픔과 기쁨, 내적 투쟁과 마음의 평화를 온 삶으로 경험하면서 맑아진 얼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로제 수사).

 

많은 사람이 로제 수사의 얼굴에서 바로 그런 모습을 보았다. 자신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는 결국 그리스도를 닮게 되고 그의 삶이 곧 그리스도의 이콘이 되는 것이 아닐까?

 

로제 수사는 그 좋은 본보기였다. [경향잡지, 2011년 10월호, 신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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