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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17: 한스 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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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9-16 ㅣ No.349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17) 한스 큉 (중)
 
예수, 인간의 모든 차원과 관계에서 궁극의 척도



큉은 근대 사상의 흐름을 배경으로 하느님을 이해했다.
 

1970년대 큉의 신학적 관심은 교회론에서 그리스도론과 신론으로 옮겨진다. 큉은 1979년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헤겔의 철학을 신학에 접목하려는 시도를 담은 「하느님의 육화(肉化)」를 출간했다. 이 연구는 큉이 박사학위를 끝낸 직후 교수 자격 논문으로 시작한 것인데, 중간에 여러 사정 때문에 십여 년이 지난 다음에 마무리됐다.

큉은 두 가지 목표를 두고 헤겔 연구를 수행했다. △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의 도움으로 역동적인 신관(神觀)에 이르는 것과 △ 그리스도론 교의를 결정한 첫 번째 천년기 공의회 이래로 우리에게 전래된 정적(靜的)인 고전 그리스도론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심도 있는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큉이 새로운 그리스도론을 추구하도록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큉도 처음에는 다른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칼케돈공의회(451년)에 뿌리를 둔 전통적 그리스도론, 곧 삼위일체 교리에서 출발해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로고스와 인성이 어떻게 결합하느냐를 묻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추종했다. 또한 헤겔의 사변적 철학의 도움으로 이 그리스도론을 오늘에 맞게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튀빙겐대에서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에 몰두하면서 다른 방향의 그리스도론, 곧 역사적 예수에서 출발하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구상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이런 전환은 「하느님의 육화(肉化)」 마지막 부분에서 나타난다. "신약성경의 증언 그리고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에게는 예수와 그의 역사적인 메시지와 모습, 그의 삶과 운명, 역사적인 실재와 역사적인 영향으로부터 출발해서 이 인간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 즉 그와 아버지와의 일치를 묻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하지 않을까? 간단히 얘기해서 사변적으로 혹은 교의적으로 위에서가 아니라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다." 큉은 이런 그리스도론이 전통적 그리스도론의 핵심 내용도 충분히 담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느님의 대리자이자 인간의 대리자인 예수
 
큉은 1974년 출판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책의 축소판 「왜 그리스도인인가」는 1982년 우리말로 출판됐다, 사진)에서 현대 세계와 사상을 배경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전체적 해석을 시도하는 가운데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 큉에 따르면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계의 대(大)종교들과 '세속적' 인본주의 도전에 직면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확립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따라서 한 사람의 신앙이든, 교회이든, 신학이든 그것이 어떤 사상이나 원칙이 아니라 분명히 한 분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돼 있을 때에야 '그리스도교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전제하에 큉은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그려낸다.

예수는 당시 유다사회 내 다른 어떤 종교 집단과도 동일시되지 않는, 모든 틀을 깨뜨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수의 핵심 관심사인 하느님 나라의 이해가 그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온전히 하느님 능력으로 도래하지만, 그 나라는 인간에게 하느님 뜻에 철저히 복종하는 회개를 요구한다. 예수는 하느님 뜻은 내용상으로 인간의 포괄적 행복에 있다고 보고, 절대화된 전통과 제도를 상대화하고 모든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한다. 특이하게도 예수는 원수 사랑을 선포하고 죄인에게 용서를 베풀면서 하느님을 '잃은 자들의 아버지'로 드러낸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은 "의인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인들의 하느님"이고, 이는 "전대미문의 신관 혁명"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문에 당시 종교지도자층과 충돌이 일어났고, 그 충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끝난다. 십자가는 실패의 표지지만, 부활은 이런 판단을 뒤엎는다. 예수 부활로써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이 참된 하느님이고, 예수가 옳았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으며,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고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스도론적 고백의 핵심은 예수가 인간의 모든 차원에서, 즉 인간이 하느님과 갖는 관계, 다른 인간과 갖는 관계에 최종 척도를 이룬다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에 대해서 '하느님의 대리자'이고,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대리자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열띤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가톨릭 신약학자 야콥 크래머(J.Kremer, 1924~2010) 신부는 긍정적 평가를 했다. "한스 큉은 지난 수십 년간의 연구결과를 탁월한 방식으로 이용하면서 나자렛 예수에 관한 신약성경의 진술을 그 당시로부터 이해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서술은 성서주석학 전문가조차도 다 전망하기 어려울 만큼 충만한 성서학 연구를 훌륭하게 사용한 것을 보여준다. 그는 성서학 연구를 결코 비판 없이 수용하지 않으면서, 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그들 마음을 끌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큉이 예수 당시의 상황과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의 독특성에 관해서 서술한 부분은 근래에 나자렛 예수에 대해 저술된 것 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판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칼 라너는 큉이 전개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이 정당한 시도일 뿐 아니라 현대인에게 좀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전통적 그리스도론의 내용을 충분히 담아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삼위일체, 로고스의 선재, 육화한 로고스의 우주적 의미가 큉의 그리스도론에서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간단히 아니라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게는 절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그리스도론의 교의들을 큉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진정으로 긍정하기도 쉽지 않다. 그의 시도는 그 목표에 완전히 이르지는 못하고 그저 중간에 머물러 서 있는 듯이 보인다. 출발점은 정당하다. 그러나 나의 확신에 의하면 도달해야 하고, 도달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의 충만함에 이르지는 못했다."
 

근대 무신론의 도전에 응답하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이해
 
큉은 1978년 신 문제를 다룬 「신은 존재하는가?」를 출간한다(책 전반부는 같은 제목으로 1994년 우리말로 번역됐다, 사진). 가톨릭교회는 피조물을 통해 인간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기에 비 신앙인에게도 신 인식이 가능하지만, 참된 하느님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로만 가능하다고 가르쳐 왔다. 큉의 입장도 이와 대동소이한데, 독특한 점은 그것을 근대의 사상 흐름을 배경으로 재정립했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에서 시작해 헤겔을 거쳐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와 같은 근대 무신론자들 사상을 상세히 다룬다. 큉은 근대 무신론은 인간 행복을 위해 신과 종교를 거부한 '무신론적 인본주의'라고 규정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한 '철저한 인본주의'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큉은 근대 무신론의 귀결은 니체로 대표되는 허무주의라고 주장하면서,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시도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느님을 긍정하는 길을 제시한다.

세계와 인간 모두를 포함하는 실재 전체는 근본적으로 존재와 비존재, 의미와 무의미, 행복과 불행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불확실성을 지닌 실재 앞에서 인간은 긍정적 태도든 부정적 태도든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근본적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러나 실재 자체가 양면성을 지녔기에 결단을 위한 명확성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결단은 항상 모험이고, 자신을 거는 신뢰나 불(不)신뢰의 문제다. 따라서 실재에 대한 근본 결단에는 실재에 대한 '근본 신뢰' 혹은 '근본 불신뢰'의 문제가 걸려있다.

큉은 이 둘 중에서 근본 신뢰는 인간의 본래적 성향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비존재보다는 존재를, 무의미보다는 의미를, 불행보다는 행복을 원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실재에 대한 긍정을 향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은 본성적으로 긍정으로 향해 있음에도 실재의 허무함을 고집할 수 있다. 하지만 허무주의자도 살기를 원한다면 실천에 있어서 항상 존재에 의존해야 하기에, 허무주의적 태도는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다. 따라서 근본 불신뢰는 실천에 있어 모순이 따르는 비합리적 태도다.

다음 단계로 근본 신뢰를 바탕으로 신 존재를 긍정하는 길이 제시된다. 실재는 그 자체로 인간에게 근본 신뢰를 가능하게 하지만, 실재 전체는 계속 불확실한 채로 남아있다. 바로 여기서 불확실한 실재가 존재하게 된 조건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고, 그것의 최종 근거 곧 실재를 지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신을 상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실재의 불확실성 때문에 실재의 최종 근거로서 신을 인정하려면, 근본적으로 결단이 필요하고 이는 증명이 아니라 일종의 신뢰 행동이다. 양면성을 지닌 실재의 최종 근거를 인정하는 신뢰는 넓은 의미의 "신(神) 신앙", 혹은 근본 신뢰와 연관 지어서 "신-신뢰"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근본 신뢰와 신-신뢰를 통해 인지한 실재의 최종 근거로서 신은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이에 비해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느님은 구체성과 분명함을 지닌다. "철학자들의 신 개념은 전체적으로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철학자들의 신은 이름 없이 머물러 있다. 그 신은 자신을 계시하지 않는다. 성경의 하느님 신앙은 구체적이고 명확하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하나의 이름을 지니고 결단을 요구한다. 그는 역사를 통해서 존재하는 이로, 즉 계속 존재할 것이며 인도하고 돕고 강하게 하는 이로 자신을 계시한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앙'이다.
 
[평화신문, 2013년 9월 15일,
손희송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장, 가톨릭대 교의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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