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54: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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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26 ㅣ No.813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54)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 ⑥


적 어린이는 신뢰 · 사랑의 길을 걷는 영혼

 

 

영적 어린이는 ‘신뢰의 길’을 걷는 이

 

지난 호에서 우리는 소화 데레사가 가르치는 영적 어린이의 길이 ‘겸손의 길’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영적 어린이의 길은 두 번째로 ‘신뢰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신뢰’, ‘의탁’의 자세는 성녀의 영적 어린이의 길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영적 어린이는 하느님 앞에 선 겸손한 인간의 모습이자 하느님을 인격적인 아빠, 아버지로 대할 줄 아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자비로운 사랑 가득한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는 그 아버지에게 갖은 신뢰를 다 두게 됩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 섭리에 자신의 현재와 미래 모든 것을 다 맡길 줄 아는 깊은 믿음의 발걸음을 걷는 사람, 그 사람이 영적인 어린이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자신의 셋째 언니인 레오니아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예화를 들어 신뢰가 무엇인지 쉽고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예컨대, 성녀는 만일 어린아이가 잘못을 하고 나서 토라지거나 두려워하며 방구석에 쪼그리고 있다면, 엄마는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 대신 그 아이가 엄마에게 달려가 뺨에 뽀뽀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가운데 미소를 지으며 “다시는 안 그럴게요”, “엄마 사랑해요” 하고 고백하면, 내칠 엄마가 어디 있겠느냐며, 그런 아이의 고백을 들은 엄마는 굉장히 기뻐하며 아이의 잘못을 금세 잊어버릴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녀는 이내 서운했던 엄마의 마음은 다 녹아버리고 아이는 잘못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며, 비록 그 아이가 같은 잘못을 저지를 걸 알면서도 엄마는 아이를 용서하며 꼬옥 안아준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어린아이의 신뢰! 이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 앞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성녀는 우리 역시 한껏 마음을 열고 엄마를 신뢰하는 아이처럼 그렇게 하느님께 달려들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소화 데레사의 바로 손위 언니인 셀리나가 리지외 수녀원에서 성녀와 함께 지내며 있었던 일들을 추억하며 쓴 「권고와 추억」에 보면, 성녀가 하느님에 대해 신뢰를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셀리나에게 해준 재미있는 일화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옛날에 어떤 임금이 사냥을 나가 하얀 토끼 한 마리를 쫓고 있었는데, 사냥개가 잡으려고 달려들자 그 작은 토끼는 이제 죽게 됐다고 생각하고는 급히 되돌아가 사냥하던 왕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왕은 그와 같은 신뢰심에 감동해서 아무도 그 토끼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손수 먹이까지 주면서 그 후로는 그 토끼를 자기에게서 떼어놓으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화 데레사는 이 일화를 전하면서 좋으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다루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개에 비유된 ‘정의’가 우리 뒤를 쫓아온다 해도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심판자이신 주님의 팔 안에서 피난처를 찾을 것이라고 성녀는 말합니다. 소화 데레사에게서 번뜩이는 영적인 영민함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영적 어린이는 ‘사랑의 길’을 걷는 이

 

세 번째로, 이러한 영적 어린이는 또한 참된 ‘사랑의 길’을 걷는 영혼이기도 합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의 첫째 서간 4장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영적 어린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기 시작한 것 자체가 하느님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먼저 우리를 사랑하고 불러주셨기에 우리는 이 땅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창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존재케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은 변함없이 충실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착하기 때문에 또는 사랑받을 만한 어떤 능력이나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어떤 조건을 따져서 당신 마음에 흡족할 때에만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부족하고 나약할 때, 죄 가운데 있을 때 더 큰 빛을 발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잘났거나 훌륭하기 때문에 또는 뭔가를 해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존재 그대로를 사랑해 주십니다. 

 

소화 데레사는 바로 여기에서 놀랍고 신비로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보았습니다. 그 자비로운 하느님 사랑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이 다름 아닌 ‘영적 어린이’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깊은 사랑과 자비를 체험할 때, 그는 비로소 기쁨에 가득 차 하느님께 사랑의 응답을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비로소 육화하신 하느님의 사랑인 예수님을 맞이하게 되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분을 충실히 따르는 제자로 살기 시작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길을 걷는 영적 어린이가 됩니다. 

 

그래서 영적 어린이는 먼저 나서서 주도권을 쥐고 하느님께 뭘 해드리는 자기편에서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바라보며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혼입니다. 그 사랑이 먼저 있었기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신문, 2016년 6월 26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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