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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성 베네딕도회2 - 왜관 수도원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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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7-08 ㅣ No.183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성 베네딕도회 2 - 왜관수도원 (상)


교회 건축 · 전례 발전에 새바람 일으켜

 

 

1957년 왜관수도원 전경. 오른편 언덕 위 수도원 본관이 들어서 있고 가운데는 왜관성당 모습이다. 왼편에는 마오로 기숙사가 자리하고 있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100여 년 한국 진출 역사 안에서 왜관수도원 생활은 59년을 차지한다. 그만큼 6·25 이후 한국교회 안에 보다 본격적으로 베네딕도 수도회의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시기였다 할 것이다.

 

왜관수도원의 설립은 덕원수도원의 ‘피란 수도원’ 성격으로 시작됐다. 당시 남한에 피란중이던 회원들은 38선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도, 지속적으로 남북 분단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갖지 못한 채 상황이 호전되는 대로 다시 덕원으로 돌아간다는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51년 미국을 방문 중이던 오틸리엔수도원의 크리소스또모 총아빠스는 이디모테모(비테를리) 신부에게 월남한 덕원과 연길교구 신학생들 및 수사들을 모아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토록 지시했다. 당시 남한으로 피신한 한국인 베네딕토회 회원들은 대구 주교관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이디모테오 신부는 원장신부 임명을 받고 대구교구청에서 지내던 한국인 수사들과 함께 1952년 7월 6일 대구교구로부터 위임받은 낙산성당(후에 가실성당)과 왜관성당에 정착했다. 왜관수도원의 본격적인 시작이 마련된 것이다.

 

스위스 국적이었던 이디모테오 신부는 독일인 수사들이 덕원수도원에서 체포될 때 중립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풀려났다가 미국 뉴튼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중 남한 공동체 원장 임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1964년까지 12년 정도의 시간은 왜관수도원이 기초를 세우고 설립 토대를 굳건하게 만든 시기라고 수도회측은 설명한다.

 

- 1965년 1월18일 왜관 피정의집 축복식을 마치고 대구대교구 서정길 대주교 및 주교단, 그리고 오도 하스 아빠스 공동 집전으로 미사가 봉헌되고 있는 모습.

 

 

당시 왜관수도원에 합류한 구성원들은 덕원수도원 소속 신부 수사들에서부터 50년대 이후 파견된 독일인 수도자들, 덕원 및 연길수도원 소속이었다가 이북이나 만주에서 수용소 생활을 한 독일인 수도자 등 일곱 부류로 분류될 만큼 다양했다.

 

1953년 왜관지역이 감목대리구로 설정되는 동시에 이디모테오 신부는 감목대리로 임명됐는데 이로써 왜관수도원은 ‘왜관 감목대리구’를 인적 물적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선교본부 성격을 띠었다.

 

1955년 수도원 건물이 세워진데 이어 1956년 로마로부터 정식 수도원 인가를 받은 왜관수도원은 더불어 대구교구로부터 3개 군의 사목 권한을 새롭게 위임받아 경북 서북부 지역 6개군의 본당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을 펼치게 된다.

 

당시 왜관수도원은 원활한 구호물자의 배급, 독일에서의 경제적 지원, 회원들의 열성적 노력으로 그 어느 곳보다 선교가 활성화 됐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69년 안동교구 설립 당시 관할 지역이던 문경군과 상주군을 넘겨 주었는데 1만8000명의 교구 신자 중 문경과 상주 2개 군의 신자수가 1만 명 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왜관수도원을 통한 복음화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본당과 신자수가 급속히 늘고 수도회 회원들도 크게 늘어나면서 왜관수도원은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고 1964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하게 된다. 피란수도원의 성격을 접고 명실공한 대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해 2월 17일 오 도환(O.Hass) 신부가 초대 아빠스로 선출됐고 왜관수도원은 완전한 자립 수도원이 되었다. 33세 젊은 나이로 초대 아빠스에 선출된 오 신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가는 시기에 맞춰 그에 따른 새로운 신학 특히 전례 정신을 한국교회에 보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목공소에서 수사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

 

 

덕원 연길에서의 출판 사업 전통을 이어서 1960년 설립된 분도출판사와 인쇄소는 기도서 전례서등을 출판하는 등 문서 선교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 했을뿐 아니라 공의회 문헌들을 번역 출간하고 신학 저서들을 교회에 보급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1964년에는 왜관 피정의 집 건립으로 한국에서 처음 피정센터 운영을 시도, 피정 시설로서 뿐만 아니라 전례와 신학을 널리 교육하는 장을 만들었다. 왜관 피정의 집은 그 자체로도 한국교회 전체에 큰 자극이 되었고 이후 많은 피정의 집이 건립되는 촉매제가 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개혁 정신의 구현을 위해 미사 전례 개혁에 착수했던 왜관수도원은 1964년 주례자용 ‘미사봉독서’를 펴내는 한편, 1964년 예수성탄대축일에 처음으로 공동집전 미사를 봉헌했다. 왜관 피정의 집에서는 전례 연수가 열렸고 왜관본당은 본당 전례 실습 모델이 되었다. 수도원 성당에서는 미사 공동 집전의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교회 건축 면에서도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기존 성당 건물들이 단순 벽돌 건물로 지어진 것이었다면, 베네딕도회는 콘크리트로 된 성당과 사제관을 현대식으로 건축함으로써 성당 건축 방향을 진일보 시켰다.

 

또 철공소 목공소 같은 작업장 건설과 현대식 농장 경영은 수도원의 자급자족에 도움을 주는 한편, 농장 경영의 현대화로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이외에 왜관 순심중고등학교를 인수, 성마오로 기숙사를 운영하면서 청소년 교육 분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초기 왜관수도원의 모습은 외형적인 새 수도원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연길 덕원수도원의 전통과 정신 인맥을 이어받아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도’라는 모토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한국교회 안에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26일, 이주연 기자]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인터뷰 - 오틸리엔수도원 슈뢰더 총아빠스


왜관수도원 희생은 신앙 증거한 큰 기쁨

 

 

독일 오틸리엔수도원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

 

 

한국의 성베네딕도회는 1909년 독일 오틸리엔(St. Ottilien) 수도원에서 2명의 신부가 파견됨으로써 시작됐다. 한국교회 역사 안에 베네딕도 수도회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왜관수도원의 모원이랄 수 있는 오틸리엔수도원은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도’(intus monachus, foris apostolus) 표어를 기치로 하는 오딜리아연합회 본부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다. 현재 오딜리아연합회는 전체 베네딕도회 연합회들 가운데 세 번째로 큰 연합회로 꼽힌다.

 

오틸리엔수도원장이자 오딜리아연합회 수장을 맡고 있는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는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왜관수도원은 연합회 내에서도 가장 활동력이 강한 수도원”이라고 의견을 전했다.

 

‘1909년 첫 선교사가 파견된 이후 많은 수도사들이 한국 땅을 밟았고 6·25 전쟁 등으로 그 중에는 희생자도 나온 상황이지만 연합회 입장에서 그들의 희생은 슬픔이라기보다 신앙을 증거한 큰 기쁨으로 여긴다’는 슈뢰더 총아빠스.

 

오틸리엔수도원을 통해 베네딕도회가 한국교회에 기여할 수 있었던 점으로는 ‘균형 잡힌 베네딕틴적 접근’ 즉 기도와 노동의 조화로 꼽는다.

 

슈뢰더 총아빠스는 “연합회가 한국교회를 꽃피울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다면, 그것이 진정 우리 선교사들이 뿌린 노력의 열매라 할 수 있는 것 같다”면서 “한국교회의 성장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딜리아 연합회의 매우 큰 자랑으로 남고 있다”고 강조했다.

 

2009년 베네딕도회 한국진출 1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것을 비롯 수차례 한국을 방문한바 있는 슈뢰더 총아빠스는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가장 큰 희망의 표시”라고 한국교회에 대한 인상을 밝혔다.

 

“한국교회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되어가는 세상 안에서 가톨릭 신앙이 의미 있고 확실한 가치라는 것을 드러내 주고 있는 듯 하다”는 부언.

 

또 “교회가 지닌 힘과 활기, 그리고 신앙에의 헌신을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 지켜 볼 수 있는 것 같다”고 들려준 슈뢰더 총아빠스는 “그러한 에너지는 쇠퇴해져 가고 있는 유럽교회에 감화를 주고 새로운 복음화의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오틸리엔수도원의 현황과 관련, “연합회의 창설 초기의 의지대로 계속적으로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선교에 지원을 하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중국 및 나진의 병원 사업 등 북한과 관련한 프로젝트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고 얘기했다.

 

덧붙여 슈뢰더 총아빠스는 “활력을 잃어가는 유럽교회가 새로운 선교 미션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라며 “그러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들을 모색하는 것도 현재 우리가 맡아야할 몫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1964년 독일 바이에른주 바트 뵈리스호펜 태생인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는 1992년에 사제품을 받고 2000년에 30대의 젊은 나이로 오딜리아연합회 제6대 총아빠스에 선출되어 10년 넘게 연합회를 이끌어오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26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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