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불편함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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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05-19 ㅣ No.746

[레지오 영성] 불편함의 영성

 

 

요즘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에 힘입어 디지털 문화를 바탕으로 빠르고 편리한 스마트한 삶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인공지능 스피커를 통해 음식을 배달시키고 집안의 전등이나 전자제품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그저 말로써 통제할 수 있다. 앞으로 세상은 우리를 더욱 편리함, 익숙함, 편안함에 길들여 놓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우리 신앙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요즘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신자 수가 예전에 비하면 상당히 줄어든 상태다. 미사에 참여하지 않는 신자들 중에 일부는 코로나로 인해 불가피하게 영상 미사로 대체하지만 그 나머지 신자들은 거의 냉담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신자들은 TV나 유튜브를 통해 영상 미사를 일시적으로 시청한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본당 주일미사 참석을 귀찮게 여겨 영상 미사에만 의존하기도 한다. 영상 미사의 편리함은 코로나와 같은 전염성 바이러스로 인해 성당이 일시적으로 폐쇄되었을 때는 장점이겠지만 올바른 신앙생활에서 멀어지게 하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공동체로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모시기 위해 성당을 찾아가는 ‘즐거운 불편함’이 이제는 잘 통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

 

신앙생활은 불편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다. 그 십자가는 불편함이고, 고통이고, 아픔이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회피하고 외면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죽음만이 아가페적 사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대속적인 아름다운 죽음은 모든 불편함의 극치이다. 그 불편함의 극치를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우리 역시 실천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남을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가?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고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는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만이 구원받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지혜로운 길임을 믿는다.

 

 

‘자발적 불편함’을 선택하고 친숙해진다면 진정한 신앙인 될 수 있어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안주하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의 욕망은 식욕, 성욕, 권력욕, 명예욕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어쩌면 예수님 당대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에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에 빠진 자들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편안하고 안전하게 지위를 누리기 위해 율법을 수단으로 여긴 것이다.

 

우리 역시 변화를 싫어하고 익숙하고 안전한 것에만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지 반성해야 한다.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을 받고 구세주의 잉태 예고를 들었을 때 자신에게 다가온 새로운 변화를 거부했다면 예수님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 인류의 어머니가 되시지 못했을 것이다. 성모님은 당신에게서 시작될 메시아의 탄생과 그분의 일생에 기꺼이 당신 인생을 맡기기 위해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루카 2,35)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신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회피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주는 달콤함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어느 날 세 악마가 저마다 인간을 유혹했다. 첫째 악마는 인간에게 실패를 맛보게 하였고, 둘째 악마는 인간에게 시련을 주었고, 세 번째 악마는 인간에게 해야 할 일을 미루도록 하게 했다. 어떤 악마가 인간을 유혹하는데 성공했을까? 실패한 인간은 그것을 딛고 성공의 길로 가는 방편이 되었고, 시련을 받은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고 더욱 단단해졌다. 그러나 할 일을 미룬 인간은 악마의 유혹에 빠져 악마가 좋아하는 편하고 쉬운 삶을 선택하였다.

 

게으르고, 편안하고, 익숙하고, 쉬운 것에 우리는 쉽게 유혹받게 된다. 그것이 당장에 좋을지는 몰라도 결국 참된 인간성을 상실하고 이기적인 인간,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그런 인간상은 자기가 고통받고, 자기를 희생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고 희생되기를 원한다. 그런 면에서, 어느 독일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안락은 악마를 만들고 고난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신 것이다. 좁은 문은 작고 들어가기 힘든 문이지만 하느님 나라로 가는 생명의 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발적 불편함’을 선택하고 그것에 친숙해진다면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 너무나 익숙해진 신앙 행위가 의존하는 ‘예측 가능한 하느님’이 아니라 매일 성찰과 회개의 과정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주시는 하느님’(루카 1,37 참조)을 체험하는 새로운 신앙 행위가 필요하다. 이것이 편안하고 안락한 신앙생활, 십자가 없는 부활을 향한 끊임없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5월호, 김민수 이냐시오 신부(서울대교구 청담동성당 주임, 강남 바다의 별 Co. 지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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