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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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나의 멘토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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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1-10-06 ㅣ No.772

[허영엽 신부의 ‘나눔’] 나의 멘토 신부님

 

 

나는 1986년 가을 나상조 신부님을 처음 만났어요. 나는 신부님을 보좌해 겨우 6개월 정도를 반포성당에서 함께 살았어요. 나 신부님을 첫 번으로 뵌 것은 반포 보좌 시절 여름에 반포성당 주임으로 발령이 나셔서 당시 주임으로 계셨던 상봉동성당으로 신학생들과 함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였어요. 주일 저녁 미사가 끝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사제관을 문을 열고 들어가자 키가 큰 노신사가 벌떡 일어나시며 말씀하셨어요. “바쁜데 여기까지 뭐하러 왔어? 며칠 있으면 볼 텐데” 첫인상이 시원시원하시고 말소리도 크신 신부님께서 악수를 청하셨어요. “바쁜데 뭐하러 왔어”하시면서도 기특한지 그래도 우리가 떠날 때 성당 밖까지 나와서 배웅해주셨어요. 신부님의 따듯한 마음이 느껴졌지요.

 

드디어 반포성당에 부임하시는 날 모든 교우들이 성당에 빙 둘러있고 차가 멈추자 박수로 환영했어요. 보좌신부인 저는 차에서 내리시는 신부님에게 다가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신부님은 차에서 내리시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더니 “허 신부! 여긴 왜 이렇게 똑똑하고 아름다운 분들이 많아?” “네?”

 

나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그때 엄청 당황해서 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 후에 함께 살다 보니 나 신부님은 사실 수줍음이 많은 분이었어요. 그래서 때로는 마음과 밖으로 나오는 말씀이 다른 경우가 많았지요. 한번은 미사를 하는데 나 신부님이 자주 목이 잠겨 기침을 하셨어요. 복음을 읽으시다 그만 줄을 잃어버려 쩔쩔매셨어요. 그러자 앞줄에 있는 자매들이 입을 손으로 막고 킥킥 웃었어요. 그러자 신부님은 안경 너머로 자매들을 보시더니 한마디 하셨어요.

 

“늙어봐, 글씨가 제대로 안 보이지!!”

 

신부님 말씀이 마이크에서 크게 나오면서 모든 신자들이 와~~!! 하고 웃었던 기억이 있어요. 신자들은 나오면서 내 평생에 이렇게 재미있는 미사는 못 드릴 거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나 신부님은 만나는 이들에게 평생의 추억을 주시는 분이에요.

한순간의 만남으로도 사람은 사람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하지요. 만남은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나는 믿어요.

 

 

하느님에게만 매여있고 세상 어디에도 매이지 않았던 ‘자유’

 

신부님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자유’예요. 나 신부님의 ‘자유’는 그분이 하느님에게만 매여있고 세상 어디에도 매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요. 대부분의 경우 함께 생활하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약점이 눈에 띄기 마련인데 나 신부님과의 만남은 그 반대였어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살면 살수록 장점과 본받을 점이 많았어요.

 

나 신부님은 가시는 본당마다 매년 수천 세대가 넘는 신자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는 열정적인 사목을 펼치셨어요. 반포성당에 와서도 모든 세대 가정을 빠짐없이 방문하셨어요. 어느 날에는 구역장님이 어느 집엔 준비가 안 되었다고 방문을 안 하셨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나 신부님은 아무 말씀 없이 그 집을 찾아서 문을 두드렸어요. 문이 열리자 신부님은 “아니, 왜 나를 오지 말라고 했어요!” 소리를 쳤어요.

 

주인인 자매님과 함께 있던 친구들이 혼비백산이 되었죠. 그러자 신부님은 낮은 소리로 “가족이 어떻게 돼요?”라고 묻자 그 자매님이 “저랑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 남편은 요즘에 주일에도 일하러 나가 성당에 못 나가요” 했어요. 나 신부님은 “남자들이 바쁘니 다 그렇죠. 너무 뭐라고 하지 마셔요. 나중엔 다 성당에 오니까”하면서 껄껄 웃으셨어요. 웃으시는 모습이 마치 할아버지가 손녀를 보는 눈빛이었어요.

 

방문은 주일만 빼고 휴일인 월요일과 토요일 오전에도 강행군을 하셨어요. 신부님의 열정 덕분에 젊은 보좌신부인 내가 먼저 탈진을 할 정도였어요. 나 신부님도 가정방문이 끝날 무렵엔 몸살을 크게 앓으셨어요. 신부님은 사목 일선에서 물러나시기 전까지도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년 신자 가정을 방문하셨다고 해요. 제가 “다음에도 또 가정방문 하시면 저는 사표 씁니다” 했더니 나 신부님이 “신부가 사표 쓰면 반포를 그만두는 거야?, 사제를 그만두는 거야?”하시면서 농담을 받아주셨어요. 사실 나 신부님은 아들뻘 되는 보좌신부였지만 같은 사제로서 항상 예의를 지키셨어요. 아마도 교회의 사제에 대한 자세가 몸이 배어있으셨던 것 같아요.

 

 

신부님은 쉴 수 있는 그늘을 주는 큰 나무, ‘아낌없이 주는 나무’

 

신부님의 엄청난 사목 열정은 신자들에게 쏟으시는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어요. 가정방문 중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드러나지 않게 도움을 주시곤 했어요. 그리고 사제의 본분인 미사 봉헌과 성무일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하셨어요. 고열로 병원에 입원 중일 때도 링거를 빼고 본당에 와서 미사를 봉헌하고 다시 병실로 돌아가 바로 정신을 잃으셨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어요.

 

무엇보다 신부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그늘을 주는 큰 나무,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지요. 생전에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높은 이상과 꿈을 심어주시고 보살펴주셨어요. 그래서 신부님의 사제관은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아지트였어요. 특히 미사를 끝낸 신부님은 겉으로는 강하고 엄격하게 보이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부드럽고 따뜻한 분이셨지요. 원로사목자 시절에는 밭농사를 지어 직접 가꾸신 채소를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곤 하셨지요. 신부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셨던 분이셨고 몇 십 년을 내다보는 선각자였어요.

 

나 신부님과 둘이 있을 때는 인생과 깨달음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인간의 삶의 허무함과 진정한 가치 등 많은 주제들이 오르내렸어요. 언젠가 신부님께 “인생의 의미를 너무 일찍 깨우치면 세상에서 사는 게 재미없지 않을까요?”라고 여쭸던 적이 있어요. 곰곰이 생각하시던 나 신부님은 “일찍 깨달으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난 더 이상 묻지 않았어요. 내게 인생에서 주제를 던져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지금도 그걸 인생의 주제로 안고 살아요.

 

나상조 신부님을 생각하면 늘 내 얼굴엔 미소가 번져요. 그리고 이내 눈물이 맺혀요. 늘 그리운 분이죠. 나도 나 신부님처럼 여유 있고, 넓고 깊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고 마음을 다잡아보죠.

 

* 사진은 반포주임시절 직원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중 찍으신 사진인데 허영엽 신부, 당시 신학생이던 고찬근 신부 조정래, 김동춘 신부가 보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0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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