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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한국의 주교좌 성당: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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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3-28 ㅣ No.845

전국의 주교좌 성당 (1)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

 

 

주교좌 명동 대성당(주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은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첫 고딕 건축물로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다. 목멱산(木覓山, 남산)에서 내려오는 구릉의 산봉우리를 깎은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어, 주위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중심적이고 우월한 모습이다. 오늘날에는 초고층 빌딩 숲에 가려 예전 같은 위용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당 첨탑(46.7m)은 여전히 삼일대로의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J. Blanc, 白圭三) 주교는 1883년부터 종현(鐘峴) 일대에 전망 좋은 대지를 매입하고, 조불수호통상조약(1886년)이 정식 비준되자 1887년부터 정지(整地)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국유지와 풍수설 등을 내세운 조선 정부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1892년 5월 8일에야 정초식을 할 수 있었다. 성당 설계와 공사 감독은 코스트(J. Coste, 高宜善) 신부가 맡았는데 1896년 2월 선종하면서 프아넬(V. Poisnel, 朴道行) 신부가 뒤를 이어 공사를 마무리 짓고, 1898년 5월 29일 제8대 대목구장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 집전으로 역사적인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명례방(明禮坊)’ 인근에 세워진 명동 대성당은 내부 공간의 고딕적 분위기에 비해서, 단순한 외관과 견고한 벽체, 분절적 구조 및 공법으로 인해 고딕보다는 로마네스크 양식에 가깝다.1) 그러나 한국 성당 건축 중에서는 고딕에 가장 근접한 양식 건축물로 평가되며, 그 역사적 ·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에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다.

 

서양사에서 1800년대는 근대 사회로의 이행이 활발한 시기였다. 하지만 같은 시기 한국에 진출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근대적 문화와 사상에 부정적이었고, 성속(聖俗)의 이분법이 명확한 경건주의와 문화적 우월주의를 견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주도했던 한국의 초기 성당 건축은 그래서 유럽에서는 전성기가 지난 고딕 양식 즉, 신학적으로는 중세적 신념이 반영된 고딕을 지향하지만 구조적으로는 벽돌조인 성당이 다수를 이루었다.2) 원래 고딕 양식은 석조에서 그 정교함을 나타내는데, 명동 대성당은 적색과 회색이 다양한 이형벽돌을 써서 장식적 디테일을 표현했던 배경이다.3)

 

병인박해 이후 전국에 설립된 모든 지역 본당 최초의 모(母)본당이 되는 명동 본당은, 1911년 남부지역을 대구교구로 분리한 후에도 수도 서울을 관할하는 주교좌 본당으로서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1940~50년대에는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교회 안팎으로 변화가 격심했던 1960년대에는 전례와 신앙생활의 쇄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70~80년대에는 민주화의 성지로, 1990년대 이후로는 시민사회의 성숙에 기여하였다. 특히 청년 사목과 문화 사목의 거점이 되고, 직장인이 밀집한 명동의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사목을 필치는 등 사회 변화와 흐름에 따라 새로운 사목을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 · 건축적 · 교계적 · 사회적으로 상징성과 대표성을 지닌 명동 대성당은 지리적 특수성에서나 규모 면에서, 또 사목에 관한 제반 여건에서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얼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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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정신, 「명동성당」, 연구소 이전 기념 한국 성당 건축사 특별 전시회 팸플릿,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12, 8쪽.

 

2) 개화기의 한국 성당 건축은 대부분 코스트, 프아넬 등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당가 신부들이 맡았다. 당시 주요 양식 성당으로는 약현 성당(1891~1892), 명동 대성당(1892~1898), 인천 답동 성당(1894~1897), 평양 관후리 성당(1900), 대구 계산동 성당(1901~1902), 안성 미리내 성당(1907), 원효로 성당(1907), 풍수원 성당(1907), 옛 진남포 성당(1908), 전주 전동 성당(1908~1914) 등이 있다(김정신,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 한국 가톨릭 문화사 대계 제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45~46쪽).

 

3) 이와 관련하여 김정신은 “명동 성당의 건립 과정과 그 건축적 특징은 완성태로서 중세 서양 교회 건축 양식의 수용이 갖는 여러 가지 특성 즉, 건축 체제의 비고딕적 성격과 고딕 지향적 건축 계획, 비고딕적 구조, 벽돌 재료의 의장적 고딕 적응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위의 책, 45쪽).

 

4) 『명동 본당사 1852-200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대성당 홈페이지(http://www.mdsd.or.kr) 참조.

 

[교회와 역사, 2022년 1월호, 이오주은 미카엘라(한국교회사연구소 미디어콘텐츠사업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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